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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배병우 빛으로 그린 진경산수
사진작가 배병우가 전남 순천에 창작 레지던시를 마련했다. 모나지 않고 둥글어 마치 마을 어귀에 놓인 큼지막한 바위처럼 보이는 건물은 막혀 있던 골목 아래위를 연결한다. 레지던시 근처엔 2층 양옥을 고쳐 아늑한 게스트 하우스도 한 채 만들었다. 소나무 사진으로 온 세계를 누비는 배병우 작가가 남도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연유가 궁금했다. 그는 겸재의 산수와 윤두서의 초상화를 이야기했다.

배병우 창작 레지던시의 선큰 구조 지층과 지상 1층에 걸쳐 자리한 갤러리. 도로변 1층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갤러리가 나오고, 반대편 문을 통해 아래쪽 골목으로 나갈 수 있다. 창을 통해 밖에서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평소 일반에 개방할 계획이다.
30여 년 전 일이다. 간송미술관 한쪽에서 뚫어져라 산수화를 바라보던 한 사내가 다짜고짜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찍이 조선의 화성畵聖이라 불리던 이가 문방사우를 품고 걸어갔던 길이다. 평생 팔도의 명승을 무른 메주밟듯 다니면서 중화와 사대의 관념을 벗어던지고 조선 산천의 진경을 화폭에 담은 그 길을 3백 년 뒤에 한 사나이가 따라 들어간 것. 갓과 도포를 벗어던지고, 단발에 양복 차림인 그가 화구 대신 카메라를 들고, 안개 낀 새벽 숲에 스몄다가 자욱한 저녁 이내에 젖도록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겸재가 화폭에 담은 우리 땅의 진경이 다시금 절박해진 사연이 있는 것일까?


식사는 물론 간단한 회의도 할 수 있는 창작 레지던시 2층 주방. 요리를 즐기는 미식가 배병우 작가는 주방 공간을 늘 중요하게 여긴다. 창밖으로 색색의 지붕이 보인다. 건축가 김찬중은 이 건물이 근처 동네와 골목을 활성화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숲의 암실에서 빠져나온 사내가 인화한 것은 수묵화를 닮은 소나무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우리의 산과 들에 널려 있고, 못생기고, 쓸모없어 무시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재투성이 신데렐라가 유리 구두를 신는 순간 눈부신 공주로 변하듯, 화폭에 담긴 그것은 어떤 미인송보다도 눈길을 끌었다. 구불구불 신산한 세월을 견뎌온 나무들은 수천 가닥 냇물 같기도 하고, 여신의 머리카락 같기도 하고, 승천을 앞둔 이무기들처럼도 보였다. 봉인이 풀린 그 영험한 것들은 사내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3층 복도. 건축가는 콘크리트에 송판을 찍어 만든 질감과 엇갈리는 창의 배치를 통한 빛의 농담濃淡으로 배병우 작가의 작업과 연관성을 의도했다.

주제에 몰두하는 힘
사내의 이름은 사진작가 배병우. 1950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 여수에서 자랐다. 홍대 미대 시절 독학으로 사진을 배우고, 1981년 서울예술대학 사진학과 창설 멤버로 강단에 섰다. 1993년 예술의전당에서 <소나무展>을 전시하면서 ‘소나무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국 가수 엘턴 존을 비롯한 세계적 미술품 수집가들이 작품을 구입하고, 크리스티 경매를 비롯해 국제 미술 시장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스페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활발하게 전시회를 열고 있는 그이를 만나러 간다. 국내에선 지난 12월 순천 창작 예술촌에서 배병우 창작 스튜디오 개관식이 열렸다. 순천시는 구도심인 향동, 중앙동 일원의 빈집을 사들여서 예술촌을 조성했다. 예술가와 지역이 상생할 수 있는 문화 예술 공간으로 순천만 등 자연경관과 함께 관광자원이 되기를 꿈꾸며 그를 제1호 작가로 영입했다.

순천으로 가는 차편엔 편집 기자와 사진팀이 함께했는데, 촬영을 맡은 이는 배병우 선생의 대학 제자이자 무명 시절 1년 남짓 조수 생활을 했다는 작가 박찬우였다. “선생님은 사진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월급을 가불하여 다 털어 넣고, 그것도 부족해 이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기고, 저 카메라를 찾아 촬영을 다니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수인 그에게 견문을 넓히려면 유학을 가야 한다며 학비를 대주겠다고 했단다. 형편을 뻔히 아는 터라 수락하지 못했다지만, 스승이 훗날 이렇게 잘 팔리는 작가가 될 줄 알았다면 흔쾌히 떠나지 않았을까? “1980년대 유학파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색다른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들 그리로 쓸려 들어갈 때 선생님은 조금 소외된 듯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꿋꿋이 자기 길을 파고들었지요. 휩쓸리지 않고 한가지 주제에 몰두하니 사진에 힘이 생겼습니다. 결국 그게 통했습니다.”

배병우 창작 레지던시 외관. 면적 83㎡ 대지에 들어선 아담한 건물은 둥글둥글한 생김새가 붙임성 좋은 인상이다. 
“한번은 방송국 사람들과 다큐를 찍을 때였습니다. 새벽 두세 시까지 술을 마시고도 일출을 찍어야 한다며 꼭두새벽에 일어나셨습니다. 잠에 곯아떨어진 사람들을 보며 프로 정신이 없다고 혀를 차기도 했습니다.” “그건 프로 정신보다 주량과 체력의 문제가 아닐까요?” 반문하자, 아닌 게 아니라 열 명과 대작해도 끄떡없는 두주불사의 주량과 웬만한 팔씨름 상대가 없는 강인한 체력을 떠올린다. 무명 시절을 함께했지만, 박 작가는 해외 촬영을 갔을 때 화장품 브랜드 시슬리 회장을 비롯해 명사들이 소장한 소나무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무척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인터뷰이를 만나기도 전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득이 될까 실이 될까 마음속으로 견주었지만 무척 흥미로웠다. 선생을 만날 것도 없이 차를 돌려도 될 것 같았다. 칼럼명을 ‘제자 박찬우 작가가 본 배병우’로 바꿀 수 있다면 말이다. 동행한 편집 기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당신은 한국을 찍어야지!”
남도의 볕은 12월에도 따뜻했다. 예술촌 어귀의 주차장 옆에는 동백 한 그루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나타났다. 짧은 머리, 카키색 계열의 항공 점퍼, 붉은색과 노란색이 강렬한 원색 가방 프라이탁Freitag, 그리고 빨간 운동화가 인상적이었는데, 그것이 그를 평범한 사람이 아닌 예술가로 증언해주는 징표처럼 보였다. 단단한 남방계 무사형 체구에 석굴암 불상 같은 호남형 얼굴이다. 선이 굵고 둥글다. 선큰 구조의 지층과 지상 3층으로 이루어진 창작 스튜디오는 건축가 김찬중의 작품이다. 공사 중 7백여 년 전 성곽과 골목이 발견되었는데 그걸 그대로 보존하도록 조언한 것도 그의 안목. 어둡고 긴 회랑이 신비로운 세월을 감추고 있었다. 작고 아담한 직육면체 건물은 마치 화선지에 꾹 눌러 찍는 낙관落款처럼 보였다. 지층에서 지상 1층까지 천장이 트인 갤러리 공간에는 예의 소나무 사진이 웅장하게 걸려 있었는데 콘크리트 건물 내부를 솔숲으로 바꾸어 놓아 마치 피톤치드가 뿜어 나오는 듯했다. 2층에는 뜻밖에도 한가운데 주방 테이블이 있고, 가장자리에 회의실이 있었다. 남도 출신 미식가에 요리에도 조예가 깊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설계라 한다. ‘맛’과 ‘멋’을 함께 추구하는 예인을 위한 공간은 설렘으로 부풀어 있었다.

3층에는 작가가 머물 아담한 숙소가 마련되었다. 그는 공적 건물에서 사사로운 손님을 맞이하는 게 싫어서 마을에 따로 집 한 채를 구입해 건축가 박경식에게 내부 수리를 맡겼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절에 건축했음 직한 오래된 슬래브 이층집에 출입문과 창문을 웅장한 유리문으로 바꾸고, 마당가에 장독대를 이고 서 있던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고친 그 건물은 고무신에 양복을 걸쳐 입은 촌부처럼 보였으나, 그래서 더 정겨운 맛이 있다. 그 집 역시 널찍한 주방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다. 4 주방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하자 그이는 사진 암실 작업도 ‘쿠킹cooking’이라 부른다고 말한다.

배병우 창작 스튜디오의 활용 방안은 이렇다. “한국의 고인돌을 오래 찍어온 벨기에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Sebastian Schutyser를 초청해서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열 생각입니다. 또 주변의 철학자, 경영인, 공연 예술인 등을 불러서 다양한 강좌와 공연을 진행하려 합니다. 지역의 젊은 주부를 대상으로 신선한 현지 재료를 이용한 요리 강좌도 해볼 셈이고요. 디자인하우스의 이영혜 대표를 모셔다 잡지에 대한 강의를 들어도 좋겠죠.” 이영혜 대표는 홍대 동문 후배다. 마당발로 알려진 그는 다양한 인맥을 활용할 계획이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고 적임자들이 주변에 있어요. 저는 길게 보려고 합니다. 문화 예술은 향기가 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죠.” ‘긴 시간’은 오늘날 그이를 만든 중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다. 그이가 처음 소나무와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1984년 낙산사에서였다. 지금은 불에 타버려 사라졌지만 그 소나무를 보는 순간 ‘아, 저것이다. 저게 한국이구나!’ 느꼈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그이 세대는 한국적인 것보다 서구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고리타분한 소나무며 한국의 자연을 좇는 것에 대한 주변의 우려는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지요. 소나무 찍느라 돌아다니면 마누라도 왜 이 시대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다들 실험 사진 한다고 난리였지만 나는 남의 것 흉내 내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예술대학교 유덕형 총장은 때때로 그를 격려해주었다. “뉴욕에서 공연 예술을 통해 명성을 얻어 국제적 감각과 해박한 식견이 있는 분입니다. 내 소나무 사진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소나무로 우주의 비밀을 풀어봅시다’ 라고도 했지요. 한번은 내가 피렌체 사진으로 포스터를 만들었더니 ‘멋있어도 이런 건 피렌체 아이들에게 맡깁시다. 당신은 한국을 찍어야지’ 하셨어요.”

30대 후반 빌레펠트 대학 초청으로 독일에 갔을 때 지중해 여행을 하면서 서구 문명의 발상지를 돌아본 것도 자신의 작업에 확신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그곳 사람들 작품을 보니 다 자기 동네를 찍습디다. 나도 남의 동네가 아니라 내 땅, 내 하늘,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습니다.” 밖으로 나갔으나 외물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자기 것을 돌아보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실천하기 힘든 일이다. 수중의 보물을 남루로 여기고 남의 것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한국적인 작업을 하지만 국제적 감각을 중요시한다. 제자들에게 항상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상기시킨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자는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한 자이고, 어디든 고향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 상당히 성숙한 자이다. 세계를 고향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완벽한 인간이다.”

배병우는 자신을 ‘나무장수’라 칭한다. 소나무를 찍어서 세계에 팔고 있으니 그렇다는 것. 그러고 보니 소나무를 ‘찍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도끼로 찍는 사람과 카메라로 찍는 사람. 전자는 숲에 피해를 입히지만 후자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해외로 내다 팔아도 생태를 교란하지 않는다.

게스트하우스 창밖에서 바라본 주방. 외부로 창틀을 크게 내어 안에서는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바깥이 그대로 보인다. 

산업화 시대의 실향민
그는 어떻게 한국적인 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까? “어린 시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집에서 자랐습니다. 섬이 밥상처럼 떠 있는 그 바다는 나의 놀이터였습니다. 물고기며 해초들이 넘쳐났지요. 여수는 우리나라 어장 중 두 번째로 큰 곳이었어요. 1970년대까지 6천여 명이 어시장에서 먹고살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쥐치를 잡으면 밭에 거름으로 썼습니다. 요즘 차승원이 TV 프로그램에서 요리하던 거북손 같은 것은 식재료 축에도 끼지 않았지요.” 사람은 자연을 닮고, 자연은 사람을 닮는다. 행복한 유년의 원체험은 그이 작품 세계의 바탕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감수성의 뿌리가 섬과 바다라고 말하는 그이는 유년의 유토피아를 잃어버렸다. 간척을 하면서 집터와 갯벌이 사라졌다. 광양제철과 여수화학단지가 들어서면서 물이 오염되었고, 산란지를 잃은 물고기들이 씨가 말라갔다.

그는 산업화 시대의 실향민이다. “산업화 덕분에 잘살게 됐다지만, 환경은 파괴되고 모두 돈과 연결된 삶을 살면서 삭막해지고 말았습니다.” 그이의 자연과 생태에 관한 관심은 뿌리가 깊다. 창작 스튜디오 옥상에 올라갔을 때도 예술촌 근처의 산세와 냇물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고, 도심 공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뒤영벌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독일의 생물학자 베른트 하인리히의 저서 <홀로 숲으로 가다> 를 이야기하면서 소로우 같은 그의 행적을 부러워하고, 페터 볼레벤이 쓴 <나무수업>에서 베인 너도밤나무 그루터기가 이웃 나무들과 뿌리와 근균을 통해 양분을 얻으며 생명을 이어가는 대목을 말하면서 함께 손뼉을 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인간만 민주주의 하면 뭐 하나” 운을 떼자 “생명의 민주주의를 해야지”라고 화답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오래된 숲에 들어서면 경건해집니다. 7천2백 살 된 일본의 조몬삼나무, 2천살이 훌쩍 넘는 요세미티의 세쿼이아, 도버해협의 백악기 플랑크톤이 뭉쳐서 만들어진 바위 등은 예사로 보이지 않습니다. 숲이 깊은 일본 사람들의 애니미즘을 저는 이해해요. 애니미즘은 대자연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지요.” 서구 종교에서 미신으로 배척하는 애니미즘을 문명 회복에 필요한 대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애니미즘이라는 희망>이라는 책을 펴낸 일본의 철학자 야마오 산세이가 그 예다.

린 화이트 주니어와 아널드 토인비 역시 서구 기독교의 애니미즘 소멸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의 추방이 지구 문명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나무장수’라 칭한다. 소나무를 찍어서 세계에 팔고 있으니 그렇다는 것. 그러고 보니 소나무를 ‘찍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도끼로 찍는 사람과 카메라로 찍는 사람. 전자는 숲에 피해를 입히지만 후자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해외로 내다 팔아도 생태를 교란하지 않는다. “한번은 화장품 브랜드 이브 로쉐의 회장이 이렇게 묻더군요. 당신은 나무를 팔아서 먹고사는데 나무를 위해 무얼 하느냐고 말이죠.” 그는 말뿐인 생태주의자가 아니라 실천주의자이기도 했다. 고건 총리 시절 북한 나무 심기 운동에도 참여했다.

순천 창작 레지던시 옥상. 뒤로 야트막한 남산이 보인다.
자연으로 사람을 드러내다
소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30대 접어들 무렵 우리나라의 상징은 무얼까 생각했어요. 일본에 후지 산과 우키요예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금강산과 산수화가 있더군요. 그때 겸재의 산수화를 만났어요. 겸재는 아마 전 세계 작가 중 소나무를 가장 많이 그린 작가일 겁니다. 작품 1백 점 중 아흔아홉 점에 소나무가 나옵니다. 나는 산수화를 통해서 소나무를 다시 만났지요.” 산수화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단숨에 시간을 거슬러 내 귀를 잡고 송나라로 데려간다. 산수화의 기원부터 남종화와 북종화의 분화, 한국과 일본의 흐름 등 즉석에서 동양 미술사 개론을 펼친다. 그에게서는 인터뷰 내내 양의 동과 서를 넘나드는 박람강기와 문자향서권기가 느껴졌다. 시간과 공간은 때론 쥘부채처럼, 때론 누에 주름처럼 펼쳐졌다 줄어들곤 했다.

박찬우 작가가 그이가 소장한 방대한 장서와 독서량을 귀띔해준 기억이 났다. “소나무는 한ㆍ중ㆍ일에 모두 있고 문인화의 소재이지만, 중국도 일본도 어느 때부턴가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나라에선 소나무가 국민 선호도 1위입니다. 한국인은 소나무와 더불어 살고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나무 집에 나서, 음식으로 송편과 다식과 송이버섯을 먹고, 땔감으로 쓰고, 그림으로 그리고, 죽어서 소나무 관을 타고 소나무 도래솔이 둘러싸고 있는 무덤에 묻힙니다. 소나무에는 인격이 부여되기도 합니다. 정이품송과 정경부인송처럼 벼슬을 한 소나무도 있고,석송령처럼 재산을 가진 나무도 있지요. 나는 중국의 상징인 태극기보다 솔방울을 디자인한 국기를 사용하면 어떨까, 시리아 원산의 무궁화보다 소나무를 국화로 지정하면 어떨까도 생각합니다.”

겸재의 산수화 속 소나무에 푹 빠진 그는 이후 전국의 소나무란 소나무는 다 찍어보았다고 한다. 소나무를 찾아 1년에 10만km를 답사한 적도 있고 신문이며, 잡지며 소나무 기사가 나오면 스크랩을 해왔다. 겸재가 전국을 주유하며 발로 산수화를 그렸듯이 그의 사진 또한 발로 찍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겸재가 쓰고 버린 붓이 무덤을 이뤘다면, 그가 찍고 버린 필름 또한 어딘가에서 무덤을 이루었을 것이다.

외관은 그대로 둔 채 창호와 문, 내부를 손본 게스트 하우스. 앞마당을 1층 실내의 바닥과 동일한 타일로 깔아,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길게 탁자를 놓으면 안과 밖이 연결된다. 모임을 위한 공간.
소나무를 찾다가 마침내 만난 것이 경주 소나무다. 경주 왕릉 주변의 소나무는 금강송처럼 꼿꼿하지 않고, 바닷가 해송처럼 억세지 않으며, 구불구불하고 못생겼다. 안강 소나무로 분류하는 그 소나무는 사실 우리 숲의 천덕꾸러기였다. 학자들은 안강 소나무가 뱀처럼 구불구불 자라는 것은 곧고 좋은 나무를 베어 쓰고 화목으로밖에 쓰지 못할 열성 유전자를 지닌 소나무가 대물림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법칙이 적용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비운의 소나무는 배병우를 만나면서 화려한 스타로 거듭났다. 세상 모든 것은 낮으면 높아지고, 높으면 낮아진다. 구불구불한 그의 작품 속 소나무를 본 외국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산수화 같다. 요정이 나올 것 같다. 너는 평생 소나무를 찍어왔으니 마에스트로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아무도 그 나무의 슬픈 내력과 궁기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리 충족일까? 소나무의 화려한 신분 상승에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진다.

사진을 일컬어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말한다. “사진을 뜻하는 포토그래프Photograph의 어원을 보면 그리스어 빛(phos)과 그리다(graphos)의 합성어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빛 그림이라는 뜻이죠. 카메라의 발명가도 화가입니다. 현실 세계를 빨리, 능률적으로 그리고 싶어서 만든 도구의 하나죠.” 따라서 카메라는 단지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서 붓이자 연필이라는 것이다. 사진을 ‘찍다’가 ‘재현’에 방점이 있다면, ‘그리다’에는 ‘너머’의 의미가 있다. 그는 ‘너머’를 추구하는 작가다.

“객관 세계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작품입니다.” 그의 사진에는 사람이 없다. 처음 연 개인전을 제외하고 그의 작품에는 철저히 인물이 배제되어 있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일까? 나는 그이의 작품을 들여다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의 자연은 인격화된 자연이다. 사람이 등장하면 중복이 되고, 중복은 미적 군더더기다. 그는 자연을 통해 문명과 사람을 비추어주고 싶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일종의 홍운탁월법이라 하겠다. 홍운탁월烘雲拓月이란 수묵화에서 검은 먹으로 흰 달을 그려야 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구름을 그려서 달을 드러내는 기법이다.

지인과 함께 라이딩하기 위해 가지고 온 자전거. 근처 옥천 길을 따라가면 순천만까지 갈 수 있다고. 게스트 하우스 실내는 온통 흰색이지만 차가워 보이지 않는다. 건축가 박경식은 ‘내부에 사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공간’을 의도했다. 
숲에서 마을로
근래 그의 인기는 지난 3년의 절반을 프랑스에서 보냈다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2016년엔 한불 수교 1백30주년 기념 샹보르성 국립재단에서 개인전 <숲속에서>를, 깐느의 시립 바다미술관에서 생 마르그리트 섬을 촬영한 작품들을 전시한 개인전 <숲과 섬>을 개최했다. 홍콩 악셀 베르보르트 갤러리에서도 개인전 를 개최하는 등 동서양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평생 카메라를 만져온 그에게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묻자 “눈으로는 알 수 있지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고 답한다.

사진작가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세계를 눈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창조해내는 자라는 뜻이었을까. 앞으로의 작업 계획을 묻자 뜻밖의 대답을 한다. “인물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숲을 등지고 인간을 찍을 차례라는 것. “우리나라에는 겸재의 산수화도 있지만, 윤두서의 초상화도 있습니다. 단연 세계적 걸작입니다. 인물 사진도 결국은 빛의 문제인데 그것을 해결했습니다. 각도와 명과 암의 비례 등. 우리나라 초상화를 찍고 싶습니다.”

30여 년 전 숲으로 갔던 ‘소나무 작가’는 이제 ‘사람의 얼굴’을 찍으러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다. 소나무 사진에 사람의 모습이 비쳐 있듯, 그의 초상화에는 자연의 모습이 일렁거릴지도 모른다. 모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지는 않지만, 어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인지를 보여준 산증인인 그다. 그의 다음 화제인 ‘빛으로 그린 초상화’가 자못 궁금해진다.

글 반칠환(시인) 사진 박찬우 담당 정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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