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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정신대 대책 위원회 서옥자 고문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고참 정치인 레인 에반스 미연방 하원 의원과 늦깎이 신학도 서옥자 교수.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위안부 문제를 계기로 만나 뜻을 나누다 사랑에 빠졌다. 지난 2014년 에반스 의원이 세상을 떠났지만, 서 교수는 소외된 이를 위해 살았던 그의 목소리가 되기로 다짐했다.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故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 ‘못다 핀 꽃’ 앞에 선 서옥자 교수.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 널리 소개되어 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알린 아름다운 작품이다.
“옥자, 미국 대통령은 왜 모두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모르겠네. 조심해야겠어.”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고 백악관 연말 파티에 참석한 서옥자 교수에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레인 에반스 의원이 농담을 섞어 질투하듯 말했다. 워싱턴 정신대 대책 위원회(이하 정대위) 고문이자 컬럼비아 칼리지 교수인 서옥자 씨는 2000년대 초반 미국 연방 하원 의원 레인 에반스와 매년 12월 백악관에서 열리는 연말 파티에 동행하곤 했다. 그들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동지였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만나 서로를 보살피던 둘의 동반자적 관계는 그리 길지 않았다. 서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 에반스 의원은 이미 파킨슨병에 걸려 있었다. 상태가 악화된 에반스 의원이 2007년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그의 가족과 법정 후견인의 반대로 둘은 서로의 의사와 상관없이 떨어져 있어야 했다. 서옥자 교수는 2007년 당시 워싱턴 정대위 회장으로 미 연방 하원에서 위안부 강제 동원을 규탄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의 만장일치 통과를 이끌어냈다. 에반스 의원이 2000년부터 6년간 매년 발의했지만 안타깝게 매번 좌절된 법안이었다. 바라던 일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함께하지 못하던 그들. 결국 에반스 의원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2014년 세상을 떠났다. 에반스 의원의 서거 이후 서 교수는 자전적 에세이<그대의 목소리가 되어>를 펴냈다. ‘서옥자, 레인 에반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통해 서 교수는 에반스 의원을 대신해 소외된 약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을 전한다.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01년 백악관 연말 파티에 참석해 조지 W. 부시 대통령 내외와 함께 포즈를 취한 서옥자 교수와 레인 에반스 연방 하원 의원.곱게 차려입은 한복이 파티 내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할머니, 우리 내년에도 꼭 만나요
이른바 마른장마, 무더운 8월 초 서옥자 교수와 함께 경기도 퇴촌에 자리한 나눔의집을 찾았다. 바쁜 일정에도 그는 매년 여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이곳을 빼놓지 않고 들른다. 2006년엔 국회 초청으로 방한한 에반스 의원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고, 작년 7월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 출판 기념회 역시 이곳에서 했다. 갈 때마다 “옥자야!” 소리치며 반갑게 맞아주는 할머니들이 정겨웠지만 올해는 좀 달랐다. 대부분 1920년대 중반에 태어나 아흔 살 고령의 할머니들은 서옥자 교수의 방문에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작년만 해도 정정하시던 분들이 왜 이렇게 기력이 쇠약해졌는지 마음이 아파요. 치매 증세인지 제가 누군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분도 계셨어요.” 1년 만의 방문, 할머니들의 변화에 서 교수는 적이 놀라고 안타깝다. “내년에도 만나야죠. 우리 꼭 만나요. 응?” 거듭 다짐받듯 되묻는 서옥자 교수에게 할머니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웃음 지었다. 따라 웃는 서 교수의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나눔의집에 세운 강덕경 할머니 1주기 추모비.
김군자 할머니와 함께.
나눔의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외부에 설치된 임옥상 작가의 청동 부조 ‘누가 이들에게’. 
워싱턴 정대위에서 일을 시작한 지난 1998년부터 서옥자 교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관계를 이어왔다. 그는 미국 각지의 대학과 의회에서 위안부 시절 겪은 일을 증언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할머니들을 자신의 집에서 보살폈다. “돌아가신 황금주 할머니가 기억에 남아요. 할머니는 미국 정치인 앞에서도 당당하셨지요. 어찌나 말씀을 잘하시던지 교장 선생님이 되어 훈시했으면 정말 잘하셨을거라 말씀드리곤 했어요. 밥도 함께 해 먹으면서 정이 많이 들었지요.”

서옥자 교수는 워싱턴 바이블 컬리지에서 공부하던 1998년 5월, 미국 의회 의사당 라툰다홀에서 열린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접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생각을 정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성격인 그는 워싱턴 정대위를 찾아가 열정적으로 일했고, 이듬해 12월에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서 교수가 사무총장이 된 바로 그날, 정대위 정기총회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이가 바로 연방 하원 의원 레인 에반스였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의회 회의록에 기록을 남긴 하원 의원이었다. 행사 뒷정리를 마친 서 교수가 코트를 찾으러 소지품 보관소에 갔더니 그곳에 에반스 의원이 있었다. 서 교수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사무총장이 된 그를 알아본 에반스 의원이 반갑게 인사했다. 그들의 첫 만남. 연락을 주고받던 그들은 곧 ‘레인’과 ‘옥자’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연인이 되었다. “온몸의 세포들이 행복에 겨워 날갯짓하며 일어나 춤을 추고, 온 세계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서옥자 교수는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에 에반스 의원과 함께 보낸 2000년의 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미 파킨슨병이 발병한 후였지만, 에반스 의원은 정력적으로 의정 활동을 이어갔다. 새벽마다 조깅하던 그의 모습이 워싱턴 포스트 1면에 실리기도 했다. 그는 파킨슨병에 도전하는 의지의 표상이었다. 서 교수와 함께 뛸 땐 앞장서 뛰다가 돌멩이나 파인 곳이 있으면 뒤돌아서서 조심하라고 일러준 뒤 다시 뛰곤 했다.


고참 정치인과 늦깎이 신학도
레인 에반스는 1951년 일리노이 중서부의 도시 록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해병대를 제대한 뒤 조지타운 법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고향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법률 서비스를 제공했다. 1982년 미연방 하원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2년 임기의 연방 하원 의원으로 열 번 이상 재선되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고엽제 후유증 등을 겪는 참전 용사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노동조합, 환경문제 등에 목소리를 내며 의회에서 정의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가 파킨슨병 발병 사실을 안 것은 1997년의 일이었다. 근육이 경직되고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는 파킨슨병은 서서히 진행되며 다양한 합병증을 일으켜 환자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심각한 장애에 이르는 난치병이다.

서옥자 교수는 서울 영등포에서 2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영어에 관심이 많고, 신앙 생활에 열심이던 그의 첫 직업은 스튜어디스였다. 1970년대 스튜어디스는 흔한 직업이 아니었다. 캐세이패시픽 항공사에서 가슴에 태극기 배지를 달고 일하던 서 교수는 홍콩에서 생활하던 중, 친분이 있던 경영진의 제안으로 서울 하얏트 호텔 창립 멤버가 되어 귀국했다. 판촉 부장으로 각국 외교관, 국내외 기업이 주최하는 국내 행사를 유치했는데,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서 교수의 성격에 잘 맞는 일이었고, 다양한 매체에서 그를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상징으로 다루기도 했다. 사소한 일이 문제가 되어 8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그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고, 신학을 공부했다. 화려한 생활을 뒤로하고 늦은 나이에 학생이 된 그는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나의 기도’를 읊조리곤 했다. “He must increase and I must decrease(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에반스 의원은 지나칠 정도로 청렴한 공복公僕이었다. 연방 의원도 일반 시민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지론으로 은퇴 연금을 거절했고, 세금을 떼면 그리많지 않은 연봉 대부분을 주변 사람을 위해 썼다. 서옥자 교수는 지금도 2001년 록아일랜드에 있는 에반스 의원의 집을 처음 방문한 날을 잊지 못한다. “연방 의원을 20년 가까이 지낸 그에겐 너무나 초라한 집이었어요. 레인의 방은 더욱 놀라웠죠.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그가 쓰는 방은 사람 몸 하나 두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좁은 지하실이었습니다. 침대조차 없었지요.” 아픈 사람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내느냐고 화를 내는 서 교수에게 에반스 의원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중학생 때 어머니가 내게 이 방을 주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서 교수는 지금도 에반스 의원의 그 행복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소외된 사람을 위해 일하던 인권 변호사 출신 에반스 의원은 동료 의원의 영향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권 탄압에 국경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이권과 관계없이 멀리 떨어진 한국인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2001년 정대위 회장으로 선출된 서 교수는 본격적으로 에반스 의원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뛰는 동지 사이가 되었다. 에반스 의원은 2000년부터 정계를 은퇴한 2006년까지 매년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상정했고, 서 교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미 전역 40여 개 대학을 순회하며 사진 전시회와 세미나, 강연을 열었다.


그가 없는 곳에서의 영광
2006년 1월엔 국회 초청으로 에반스 의원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열네 시간의 비행을 견디기엔 에반스 의원의 몸은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그는 판문점과 나눔의집을 방문하는 등 공식 일정을 가까스로 소화했지만,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서 교수는 에반스 의원의 주치의에게 그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라는 말을 들었다. 요양원 대신 자신의 집에서 에반스 의원을 돌보며 회복을 도왔지만, 결국 그는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결의안은 캘리포니아 출신의 일본인 3세 연방 하원 의원 마이크 혼다가 이어 받았다. 그는 일본계였지만,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이 아시아 지역 국제 관계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2007년 1월 31일 결의안을 발의한 혼다 의원을 찾아가 청문회 개최를 부탁했어요. 법안 통과를 위해 꼭 필요한 절차였지요. 비밀 작전처럼 속전속결로 일을 진행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일본 정부가 고용한 로비스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거든요.” 청문회는 2월 15일 열렸다.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와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박해받은 네덜란드인 얀 오헤른 할머니, 서옥자 교수가 무사히 증언을 마쳤다. 서 교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미연방 의회 회의록에 처음으로 기록을 남긴 에반스 의원의 역사적 연설을 인용하며 증언을 마무리했다. “사람들은 적의 말보다 친구의 침묵을기억할 것입니다.”

2007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서옥자 교수.
청문회가 끝난 후 결의안 통과를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에반스 의원과 함께 어울리며 그의 동료 정치가들과 격의 없이 지내던 서옥자 교수는 ‘레인 친구 옥자’라는 소개로 전화로만 하루에 하원 의원 서너 명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에선 법안이 통과되려면 의원 한 명 서명을 받기 위해 수십 번씩 사무실에 찾아가고, 기금 후원회를 주관하는 등 온갖 공을 들여야 해요. 제 경우엔 큰 어려움 없이 36명의 연방 의원을 공동 발의자로 참여시킬 수 있었죠. 모두 레인 덕분이었어요.” 2007년 7월 30일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121호가 만장 일치로 통과되었다. 연설하던 의원들은 하나같이 에반스 의원에게 영예를 돌렸다. 서옥자 교수는 샴페인을 터뜨리며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에반스 의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를 집필하던 서옥자 교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법적 분쟁 가능성이었다. 에반스 의원의 가족과 법정 후견인 때문에 그가 은퇴한 이 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소상히 쓸 수 없었다. 많이 줄이고 덜어냈다지만, 그 내용만으로 서 교수의 오랜 마음고생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2006년 여름, 레인의 가족이 법정 후견인 자격을 갖추고 있을 때 그가 제게 프러포즈 했어요. 종교인으로서 기도하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한국에 두 달 다녀왔는데, 그사이에 돌이킬 수 없도록 일이 잘못되었지요. 전엔 더없이 자연스러웠던 일이 모두 불가능해졌습니다. 파킨슨병이 많이 진행되어 뇌 손상으로 정상적인 의사 소통이 어려워진 그에게 예전엔 부하 직원이던 법정 후견인이 버럭 화를 내는데, 아무 말 못 하고 뒷걸음질 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서러웠지요.” 서 교수는 에반스 의원과 결혼할 결심을 굳혔지만 그의 가족과 법정 후견인은 모두 강경하게 반대했다. 어디에나 동행하던 그들의 만남을 제지했고, 고향에 돌아간 후엔 전화 연락조차 끊겼다. “2007년엔 그를 치료하기 위해 한방 의료진이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지만, 오기로 약속한 레인이 법정 후견인의 반대로 못 오게 되었지요. 보름에서 3주에 한 번 오던 전화가 끊긴 게 그즈음이었습니다. 2008년 레인은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 훈장 광화장을 받기 위해 한국을 다시 찾았는데, ‘옥자’라는 이름을 그 앞에서 언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어요.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했는지….” 2012년 요양원에서 30분간 얼굴만 그저 바라보던 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2014년 에반스 의원이 세상을 떠난 후 서옥자 교수는 슬픔과 상실감에 빠지는 대신, 약자를 위해 헌신한 그를 대신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일을 계속하려 한다. 그 다짐을 담은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를 쓰는 일이 그 시작이었다.


에반스 의원이 건강하던 시절,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봄을 그와 함께 만끽하던 서옥자 교수.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되어
2014년 에반스 의원이 세상을 떠난 후 서 교수는 슬픔과 상실감에 빠지는 대신, 약자를 위해 헌신한 그를 대신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일을 계속하려 한다. 그 다짐을 담은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를 쓰는 일이 그 시작이었다. “레인 에반스 재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에반스 의원을 미국과 한국 간 친선의 상징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예요.” 서 교수에게 작년 말 성사된 한일 위안부 합의안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위안부 할머니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그는 뜻밖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홀로코스트를 거듭 사과하는 독일은 ‘사과에는 유예기간이 없다’고 말하지요. ‘최종적, 불가역적인’ 사과가 어디 있습니까? 이건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언제까지나 싸워야 할 일인가라는 의문도 듭니다. 최근 미국 의회와 국무부 쪽 분위기가 과거와 많이 바뀌었습니다. 법안 통과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의원들이 ‘한국 사람 피곤하다’는 말을 서슴지않고 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다는 기조입니다.”

작년 아베 총리의 워싱턴 연설 이후 전에 없이 가까워진 미일 관계의 반작용으로 워싱턴 정계엔 한국 피로증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한국에 대한 일본과 미국 사회의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한류 드라마와 K팝 등으로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람들은 공격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시위도 그런 이미지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문화의 힘에 기대 좀 더 부드럽게 접근하면 어떨까요? 일본을 규탄하는 서사로 무얼 할 수 있는 때는 지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위안부 시설 안에서도 틀림없이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라면 한국은 물론 일본, 미국을 모두 감동시킬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겠지요. 많은 사람이 감동하면 일본도 서서히 바뀔 겁니다.”


글 정규영 기자 사진 이경옥, 이창화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