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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얼굴 우리 시대의 열정 9단! 20人
창간 20주년을 기념하는 <행복> 특집 ‘우리 시대의 열정 10단-가장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얼굴’을 통해 20인을 만났다. 이들을 만나는 과정은 한류韓流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5천 년 역사가 배태한 길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2050년에는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에 이어 2위에 오를 것이라는 골드만삭스의 예측이 어불성설이 아님을 행복하게 전망할 수 있었다. 이번 기사는 ‘릴레이 추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행복> 편집부에서는 그 첫 번째 주자로 디자인 및 잡지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파온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대표를 디자인 부문의 얼굴로 추천했다.

1[디자인] 이영혜_디자인하우스 대표
“사람은 소비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대표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때에 디자인의 가치에 눈을 뜬 선구자다. 31년 전 디자인 전문월간지 <디자인>을 발행한 데 이어 1987년에는 디자인과 감각의 차이가 생활에서 만들어내는 큰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행복한 소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월간지 <행복이 가득한 집>을 창간했다. 맨손으로 시작한 사업체가 지금은 <디자인>을 비롯한 월간 잡지 8개, 단행본 출판, 리빙디자인페어와 디자인페스티벌, 스토리샵 DDH 등 온·오프라인에서 남다른 정보를 생산하는 콘텐츠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의 열정을 뒷받침하는 것은 디자인을 향한 외길 사랑과 세상을 향한 반짝이는 호기심.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샘솟는 아이디어와 재창조의 열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많다.

30년간 글자를 쌓아 만든 뮤지엄 어린 그는 꿈이 많았다. 작가, 외교관, 화가, 음악가, 건축가…. 그러나 그가 그 목록에 없었던 디자인을 대학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숙명이었을까. 그는 대학 선배의 손에 들려 있던 이탈리아 인테리어 잡지 <도무스Domus>를 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쭈뼛 서는 그 느낌. 내가 알고 있는 세상,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일깨우던 그 잡지는 꿈 많던 여대생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는 잡지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글자 하나와 컬러 하나를 선택하는 데도 촉각을 세우고 남다른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보낸 무수한 시간. 창립 30주년이던 지난해 그는 종이와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실험적인 ‘집’인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을 세상에 선보였다. “자잘한 일에 매달려 보낸 30년에 대한 일종의 한풀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지난 30년이 몸에 맞는 뚜껑을 찾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의 30년은 그 뚜껑을 꽉 조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소비는 채움과 비움의 순환 그는 사람은 소비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지식, 정보, 문화 교양, 의상, 가구 등 세상에서 공짜로 자신의 소유가 되는 것은 없다. 시간이건 돈이건 정성이건, 무엇이든 대가를 소비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가 한 손에는 디자인, 다른 한 손에는 잡지를 들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같은 비용을 쓰더라도 더 귀한 정보와 안목, 그리고 물건을 취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잘되는 사람은 긍정적으로 소비하고, 안 되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소비를 하지요. 뭐든지 행복하게 해석하고 행복한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세, 그것이 행복의 조건일 것입니다.”

* 이영혜 님께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 방식 가운데 하나인 흙 건축에 깊은 애정과 열정을 보여온 건축가 정기용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2[건축] 정기용_기용건축 대표
건축이란 인간과 우주가 관계를 맺는 일

정기용 기용건축 대표는 우리나라 건축 방식의 하나인 흙 건축의 대가로 유명하다. 공예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건축설계를 공부한 그가 흙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던 흙 건축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이에 관한 자료가 전무하다는 사실에 화火가 일었던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분노가 열정으로 승화되고,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충남 예산의 장용순 옹에게 담틀을 이용해 집을 짓는 기법을 전수받기에 이른다.

흙 건축의 대가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흙 건축의 대가로 알고 있지만, 그의 생각을 들으면 그를 이 범주로 묶을 수 없게 된다. 그는 건축을 인간의 존재 방식과 연결 지어 사유한다. 건축이라는 분야가 인간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건축이란 우주적인 존재다. “옛집에는 화장실이 밖에 있었습니다. 밤에 소변을 보러 가려면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가게 되어 있지요. 그때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면 어른이나 아이나 사는 것의 축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우주와 인간의 교감이 일어나는 장소가 바로 집입니다.” 해가 뜨면 집 밖으로 나가 우주 속에서 살다가, 해가 지면 인간이 지은 소우주(집)로 돌아와 몸을 비우고 가족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내적인 공간, 집이란 바로 그런 곳이라는 이야기다. 이렇듯 철학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우주적으로 사고하는 그의 건축관이 궁금해진다. “땅이 원하는 건축, 시대가 원하는 건축, 건축주가 원하는 건축입니다.” ‘정기용건축’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건축보다는 보편적 가치에 충실한 건축물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그의 정신이란다. 그는 요즘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뒤 머무를 진해 사저, 대안학교인 간디학교의 기숙사 등을 통해 그 정신을 발현하고 있다.

그의 정원은 명륜당 앞마당 그는 집 근처에 있는 성균관의 명륜당 앞마당을 자신의 정원이라고 여긴다. 조선시대 성균관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였던 이곳에는 5백 년 묵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웬만해서는 보기 힘든 흙 마당이 인상적이다. 그는 어느 봄날 아침, 이곳에서 신문을 펼치며 맛보았던 행복감을 잊지 못한다. “흙은 지구의 피부이고, 지구의 입자입니다. (흙에서 태어난) 인간이 집을 통해 지구의 피부를 덮고 자게 되는 것이니, 그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행복이 가득한 집이지요.”

* 정기용 님께서는 가수 이은미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노래가 이은미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마당에 그려진 집은 조각가 윤명순 님의 ‘하루-욕망하는 풍경’(부분, 2003)입니다.

3[음악] 이은미_가수
“나는 음악이다!”

이은미 씨는 열정이라는 단어와 일치되는 음악인이다. 몸통에서 끌어 올린 소리에서 전율이 느껴진다. 수천 명의 관객들은 힘찬 목소리와 자신감 넘치는 몸짓에 압도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맨발의 디바’ 또는 ‘라이브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그가 독집 음반을 발표한 것은 1992년이지만 다운타운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우리나라에는 오랜 경력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지만(웃음), 노래를 시작한 것은 20년 정도 되었네요.” 

초심으로 돌아간 2006년 모든 순간들이 소중하지만 그에게 2006년은 특히 소중하게 기억된다. 음악을 다시 시작한 해이기 때문이다. 활활 타오르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모두 타버렸기 때문일까? 2004년 말, 열정의 여신이 슬럼프에 빠졌다. 그러나 곧 정기를 회복하고 대중 앞으로 돌아온 그는 2005년 말 6집 앨범 <마 논 탄토ma non tanto>를 발표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돌아온 그의 열정에는 여유로움이 있다. 겸손함도 묻어난다. “저와 제 음악이 초기의 열정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았을 때 슬프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어요. 그리고 쉬는 동안 제가 중요한 걸 놓쳤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동안 이은미의 음악을 아껴주시는 소중한 분들과 교감하는 데 상대적으로 소홀하지 않았던가’ 반성했어요.” 새롭게 돌아온 그는 이제 더 이상 ‘맨발의 디바’가 아니다. 그를 자유롭게 해주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 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저를 구속하는 행위였던 거죠. 신은 공연하는 날의 기분에 따라 벗을 수도 있고, 신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는 지난 연말 미국 LA,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등 3개 도시 순회공연을 다녀왔다. 음악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미국 무대 데뷔 공연도 멋지게 치렀으니, 뜻 깊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는 바른말 잘하는 음악인으로도 유명하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독설가인 줄 알겠지만 그의 비판 이면에는 음악에 대한 진한 애정이 깔려 있다. 대중음악 시장의 변화와 왜곡이 양질의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인들이 설 자리를 좁게 만들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제 자신이에요. 가끔 ‘왜 이렇게 못생겼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밉고, 자학할 때도 있고, 그러면서도 가끔은 기특하고, 때로는 잘난 척도 하는 제 자신과 똑같아요. 그래서 더 이은미의 음악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제가 죽고 난 다음에 훌륭한 음악가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요.” 그는 예전의 ‘이은미’가 아니다.

* 이은미 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탐구와 인간미가 경지에 오른 배우 나문희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극 중 인물에 대한 나문희 님의 자중자애를 소리로 표현해보고 싶다고 합니다. 

4[드라마] 나문희_배우
가슴 뜨거운 우리 시대의 어머니


배우 나문희 씨는 본인의 이름보다 ‘어머니’라는 세 글자가 더 잘 어울린다. 많은 중견 배우들 중에서도 그의 어머니 연기는 가슴을 뜨겁게 울리는 힘이 있다. 1961년 MBC 라디오 1기 공채 성우로 출발한 그는 45년 동안 라디오, 외화 더빙,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기생활을 했다. 예전에는 많이들 그랬다지만, 겨우 스물아홉에 <멍게 엄마>라는 작품에서 동갑내기 배우 이대근 씨의 엄마 역할을 맡았으니 그에게서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의 연기는 오래 묵은 간장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색이 깊어지고 맛깔스러워진다.

역할에 대한 자중자애  그의 연기에 대한 몰입은 늘 감탄을 자아낸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과 완벽한 일치를 이룬다. “역할에 몰입하는 것도, 그리고 반대로 잊어버리는 것도 훈련이 필요해요. 난 어느 정도 타고났어요.(웃음) 평소 사람의 마음을 많이 관찰하고 생각하는데 그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는 실제로 세 딸의 어머니이다. 때문에 딸의 어머니 역할은 그렇게 힘들지 않은데 ‘나문희 어머니 3부작’이라고 불리는 <주먹이 운다> <너는 내 운명> <열혈남아>에서는 아들의 어머니 역할이라 좀 낯설었다고 한다. “딸 엄마는 쉬워요. 집에서 하는 것처럼 그냥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아들 엄마는 부담스러워요. 대범하고, 깊이 있고, 뚝뚝하게 자기 일을 잘하니 딸의 엄마와는 분명 다르지요.” 그래서 아들의 어머니 역할을 할 때는 오히려 자유롭고 과감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이북 할머니 역할로 KBS 연기대상까지 받았던 <바람은 불어도>를 꼽았는데, 너무나 즐겁게 촬영했던 작품이고 이후 희화적인 캐릭터를 많이 맡게 되었다고 한다.

연기를 실컷 하고 싶다  다양한 인생을 직접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은 연기자가 누리는 최고의 특권이다. 하지만 평생 좋아하는 연기를 하느라 가족들을 살뜰히 챙겨주지 못한 점은 늘 미안하다. 가족들이 믿고 기다려줬기에 연기를 할 수 있었다는 그. 앞으로 좋은 작가를 만나 섬세하고 깊이 있는 성격의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며 일 욕심을 접지 못한다. “내 일이 공동작업인 만큼 민폐 안 끼치고 내가 좋아하는 연기 실컷 하다가 조용히 떠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겠지요.”

* 나문희 님께서는 여자의 편에 서서 여자를 깊이 있게 표현하는 소설가 양귀자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소시민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린 <원미동 사람들>을 좋아하신다고 합니다.

5[문학] 양귀자_소설가
“쉿! 인생 법칙들을 재해석하고 있는 중”

소설가 양귀자 씨는 <원미동 사람들> <천년의 사랑>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모순> 등 소시민의 삶과 여성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는 소설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작품을 발표하며 20세기를 가장 뜨겁게 보냈던 작가 가운데 한 사람. 그러나 웬일인지 2000년대 들어서는 두문불출, 새 작품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21세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으며, 그토록 왕성했던 창작열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에게 안부를 묻는 메일을 보냈다. “남쪽 먼 바닷가로 ‘작업실’을 옮기는 ‘작업’을 하며 몇 년을 지냈습니다. 이제 그에 걸맞은 작업을 시작해야겠지요. 다소 긴 휴지기 속에 있지만 늘 소설을 꿈꾸고 있음은 진실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원미동 사람들>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작가적 행보는 퍽 흥미롭다. 지난 세기의 그는 그 어느 작가보다 자유로운 작품을 쏟아냈다. 사회의식이 담긴 작품성 빼어난 소설부터 단숨에 읽게 만드는 통속소설까지, 그처럼 ‘구분’에 구속되지 않으며 작품을 발표했던 작가는 드물다. 종횡무진 맹활약하며 두루두루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은 아마도 그의 소설에 대한 생각과 상관 있을 듯. “소설은 이야기입니다. 한 번뿐인 이 삶을, 그래서 단 한 번만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다양한 삶의 굽이굽이를 펼쳐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일회성의 삶, 그것을 넘어 또 다른 세계를 재현해보려는 의지와 욕망이 소설을 창작케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 가족이거나 우리 동네, 아니면 어디선가 만났던 친구의 이야기인 듯 친근하고 따뜻하다. “중학교 교과서에 <원미동 사람들> 중 한 편이 실려서 요즘 제게 원미동에 대해 묻는 이들은 거의 소년소녀들입니다. 즐겁지요. 소설집이 나온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중학교 학생들한테서 “우리 동네도 꼭 그래요” 하는 독후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므로 <원미동 사람들>은 198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서 우리 옆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저한테도 끝까지 소설 쓰기의 고향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분명 긴 휴지기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멋진 ‘새 천년의 작품’을 들고 컴백할 것이다. 열정에도, 질량 보존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면.

* 양귀자 님께서는 ‘가장 창의적이고 열정적인’이라는 주제에  딱 어울리는 원로 화가 변시지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6[미술] 변시지_화가
한국 정서 품은 한국화를 고집하다

변시지 화백은 평생 제주도만을 그려온 이력과 독특한 화풍으로 유명하다. 제주도가 고향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고집스럽게 제주도 풍경만을 캔버스에 담아왔다. “제주도에는 아직 원초적인 아름다움이 남아 있어요.” 그는 지금도 매일 그림을 그린다. 그의 나이 여든. 최근에는 고혈압과 어지럼증으로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하루도 붓을 놓지 않는다. 예전에 비해 작업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 에너지가 경탄스럽다. “모순된 것에 대한 정의감, 저항심이 있어야 하고 의욕이 있어야지요.”

진정한 한국화 그는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작품마다 전통 수묵화의 멋과 정감을 뿜어낸다. 제주 바다와 바람, 조랑말, 나무, 까마귀 등 제주를 상징하는 소재들을 더욱 부각시키는 먹선은 드라마틱하다. 그의 그림은 무엇을 그토록 고집스럽게 지키고 싶은 것일까. “자꾸 외국 것을 모방하다 보니 우리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우리 것에 뿌리를 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한국화이지요. 예술이란 그 나라의 풍토가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의 고유한 예술이 탄생하게 되지요.” 그는 중국의 수묵화도 유럽의 서양화도 아닌, 우리의 한국화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요즘 젊은 화가들이 순간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로잡혀 예술가의 감성을 놓치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림도 퇴색이나 변질 등에 신경 쓰지 않아 일회용 낙서와 다름없다고 일침을 가한다. 예술이란 백 년이 지나도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인생은 미완성인 그림 변 화백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이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림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사상과 철학, 삶에 대한 즐거움과 고통이 전부 녹아 있는 것. 그래서 늘 부족한 점을 느끼고 미완성인 그림과 씨름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화가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림을 그려왔다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자랑스럽다는 그는, 정부가 문화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미술이 좀 더 대중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 변시지 님께서는 독재정권 아래에서 민주화운동에 동참, 감옥에도 여러 번 들어갔다 나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활동한 영화감독 장선우 님을 존경한다며 추천하셨습니다.

7[영화] 장선우_영화감독
“내게 영화는 인생의 ‘무언가’를 찾아가는 방편”

장선우 감독은 1980년대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다 <남부군> <우묵배미의 사랑> 등을 직접 연출, 평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영화인이다. 하지만 <나쁜 영화> <거짓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 10년 사이 선보였던 실험성 강한 작품들은 논란에 휩싸였다. 감독으로서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을 터. 열정이 넘치다 보니 부딪히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만 세상이 그 열정을 몰라주는 것 같아 서운할 만도 한다. 그러나 장 감독은 오히려 반대로 답한다. “제가 부족했기 때문이지요. 실험하는 것은 무언가를 찾아가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내가 너무 찾기 어려운 것을 찾느라 휘청거리면서 관객마저 휘청거리게 한 것이지요.”

아이를 낳는 산통 그는 영화 제작을 아이 낳는 것에 비유한다. <나쁜 영화> 이후 늘 ‘이제 그만 낳아야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산통이 힘들어서이기도 하고, 이만하면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봤지 싶어서란다. “저에게 영화는 인생의 무언가를 찾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강을 건너는 뗏목과도 같지요. 저는 그 뗏목을 늘 버릴 준비를 하면서 타고 갑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흥행 실패는 본인의 교만함에 대한 벌이었고, 관객들과의 게임에서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몽골의 마두금 전설을 바탕으로 한 <천개의 고원>이 제작되다 멈춘 것은 그에게 많은 상처를 안겼다. 몽골에서 현지 아이들과 촬영 준비를 어느 정도 끝낸 상태였다. 아이들과 감독의 기대 모두 컸던 만큼 돌아설 때의 아이들의 눈물이 잊혀지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한 귀양살이 이후 그는 스스로를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제주도로 내려온 지 어느새 1년 반. 채소를 가꾸고 배도 몰아보며 평범한 촌부처럼 살아가고 있다. 제주도 귀양은 본인에게 휴식이기도 하고 지금까지의 것들을 비우고 새로운 것을 채우는 재활이기도 하다. 그는 귀양살이를 통해 변해가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절망하지 않고 죽음까지 초월하는 행복, 마약보다 더 좋은 행복, 클라이맥스보다 더 짜릿한 행복, 즉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좋은 환경에 의탁해 심신이 편안해지니, 좋은 놈(영화) 만나 연애하고 예쁜 놈 하나 더 낳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웃음)

* 장선우 님께서는 스스로의 변화를 통해 꾸준히 발전해가고 있는 만화가 양영순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8[만화] 양영순_만화가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양영순 작가는 <누들누드> <아색기가> 등 다소 ‘야한’ 작품으로 데뷔해 주목받았다. 그 때문에 ‘양영순의 작품은 야하다’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 사실. 이후 그는 장편 극화 <1001>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섹스’와 ‘엽기’ 코드의 콩트 대신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을 선보여 팬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스토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1년간 포털 사이트에 연재해 하루 30만의 방문자 수를 기록하는 등 그 인기는 대단했다. 이후 책으로 엮은 <천일야화>는 그에게 2006년 대한민국만화대상을 안겨주었다.

감성적인 만화가 좋다 많이 억눌려 있고 풀리지 않고 있는 것들에 유독 흥미를 느끼고, 그것이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양영순 작가. 정작 본인은 일부러 선정적이고 엽기적으로 그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첫 작품의 인상이 강하다 보니 고정관념이 생긴 듯하다. “억지로 피해야겠다, 변신을 해야겠다, 혹은 계속 ‘섹스’와 ‘엽기’ 코드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이야기에 필요하면 들어갈 수도 있고, 필요 없는 데 굳이 쓸 이유도 없습니다.” 그는 앞으로 감성적인 작품을 쓰고 싶어 한다. “읽고 나면 아련한 느낌이 남아 다시 보고 싶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또한 온라인상에서 직접 독자와 만나는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다. 인터넷 연재 초기, 곧바로 올라오는 독자들의 반응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만큼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독자들 반응을 보고 ‘호흡이 고르지 못했구나’ ‘설득력이 떨어졌구나’ 깨닫게 되죠. 긴장감도 더욱 유지되고요.”

저물지 않는 희망 만화라는 장르가 아직까지 정통 문화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나 그는 차차 좋아질 거라고 기대한다. 온라인 만화라는 영역이 생겨나면서 인터넷도 만화의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학의 애니메이션 관련 학과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도 좋은 신호라고 본다. 이제 훌륭한 작가들이 많이 나와서 열심히 경쟁하고 서로 북돋워준다면 한국 만화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이것이 만화가로서의 그의 희망이다.

* 양영순 님께서는 천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애쓰고 계시는 한국천문연구원 원장 박석재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그의 강연을 들으며 크게 감명받았다고 합니다.

9[과학] 박석재_한국천문연구원 원장
“별을 잊은 아이들에게 우주를 돌려주고 싶다”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원장은 천문天文의 대중화에 공을 들여온 천문학자다. 천문이란 하늘과 우주의 무늬, 우주에 존재하는 무수한 별들의 족적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무수한 별들의 빛은 수억 광년을 달려온 것들. 그러므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재의 빛은 기실 ‘과거’의 흔적이다. ‘천문학적’인 별들이 사멸하는 가운데 일부만이 우리 앞에 빛을 현현하는 것은 지구에 살다 간 ‘천문학적’인 사람 가운데 일부만이 후세에 전해지며 불을 밝혀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박 원장은 일찍부터 우리가 ‘우주 민족’임을 천명해왔다. 태극기는 전 세계 국기 가운데 우주론을 담고 있는 유일한 국기임을 늘 강조한다. 그런 그의 가슴에는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심, 자부심으로 반짝이는 카시오페아가 있다.

지구 밖에서 사유하라 “우주를 중심으로 하면 인간이 얼마나 오만한지 반성하게 됩니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는 우주의 섭리를 따르려 했던 조상의 지혜와 정신을 살펴봅니다.” 초등학생 때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며 천문학자의 꿈을 키운 그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한 사람의 생애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강연을 할 때마다 북두칠성을 향해 기도하고, 망자의 관에 칠성판七星板을 깔고, 일곱 선녀가 성화를 채취하는 것에 깃들어 있는 우주 정신을 설파하는 박석재 원장. 그는 다른 무엇보다 아이들 앞에 서는 것을 사랑한다. “아이들에게 별을 보여줄 때 희열을 느낍니다. 만약 서태지 씨가 우주에 관심이 있었다면 ‘발해를 꿈꾸며’가 아니라 ‘우주를 꿈꾸며’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우주와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우리 민족의 미래가 있습니다.”

우주를 갖고 노는 행복한 사람 초등학생 때 연필로 쓴 천문학 책을 만들었던 그는 지금껏 글, 노래, 만화책 집필 등 우주를 소재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우주를 주제로 한 그의  변주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원장 임기를 마친 뒤에는 다시 학자로 돌아가 연구를 하고, 은퇴한 다음에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열정도 우주적이다.

* 박석재 님께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과학을 소재로 회사를 차려 뚝심 있게 과학 잡지를 발행해오고 있는 동아 사이언스 대표 김두희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10[잡지] 김두희_동아 사이언스 대표
소통의 길은 항상 열려 있다


김두희 동아 사이언스 대표는 21년간 월간지 <과학동아>와 함께해온 인물이다.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과학이 학문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다른 길’을 살피던 김 대표. 어쩌면 그가 <과학동아>의 창간을 만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해 두 해 발간해감에 따라 언론을 통한 과학 교육의 효과가 눈으로 확인되자, 그의 창의적 열정은 저절로 타올랐다. “청소년이 과학 기사를 읽으면 꿈을 품게 됩니다. 자신이 그 분야를 연구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이들이 많을수록 과학 분야의 창의적 인재는 늘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과학 언론의 힘이지요.”

퓨전 과학을 지향하라  과학은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야 중 하나다. 이런 어려운 분야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매체와 시스템, 환경이 필요하다. “실험 장비와 교구, 재미있게 과학을 이해시키기 위한 다양한 영상 미디어 등의 물적 조건이 갖춰질 때 비로소 과학과 대중은 가까워집니다.” 현재 동아 사이언스가 벌이고 있는 것은 이렇듯 대중들을 위한 ‘과학 종합 미디어 기반의 교육 사업’이다. 과학과 관련된 다양한 전시와 공연을 열고, 과학 교구 또한 고급화시킨다. 얼마 전 분당에 영재 발굴 및 교육 센터인 ‘지니움’을 연 것도 본격적인 과학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좀 더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 기술을 넘어선 생활 기술’을 탄생시키는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자극하는 것 또한 저희가 하는 일입니다.” 그는 대중을 이끌 수 있는 과학계 스타 발굴의 필요성 또한 역설한다.

세대 간의 융화가 가장 큰 행복 올해로 21세를 맞는 <과학동아>를 그는 ‘이제 성인이 된’ 잡지라고 말한다. 그만큼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성숙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은 매체를 만들고 싶다는 것. 가정생활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둘째 녀석과도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면 좋겠네요. 모든 가족 구성원들 간에,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또 다른 이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소통이 이어진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자극은 없겠죠.” 이는 그가 언론의 힘을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 김두희 님께서는 최근 기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효성기술원 원장으로 있는 공학자 성창모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11[기업] 성창모_효성기술원 원장
“도전할 수 있는 야망을 가져라”

성창모 효성기술원 원장은 학자 출신 경영인이다. 매사추세츠주립대 화공학과 종신 교수로 재직하면서 첨단소재연구소장과 나노상용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던 그는 첨단 소재 분야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벤처 기업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효성의 중앙연구소와 생산기술연구소를 총괄하면서 합성섬유 분야의 기술 개발, 바이오·전자 재료 등 신소재 연구 개발을 지휘하고 있다. “저는 과학이 아니라 공학을 전공했습니다. 과학을 기반으로 돈을 잘 벌어서 사회에 기여하는 게 공학이지요. 공학자가 경영에 뛰어드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이제는 창의력 시대 “우리나라는 머리와 기술은 뛰어나지만 창의력을 권장하는 시스템과 문화가 부족합니다. 이제는 열 우물을 팔 수 있는 다양성과 유연성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입니다. 창의적인 사고를 격려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제가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 기업들이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성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선진국과 윈윈 하고 상생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또한 영어를 배우려 애쓰지 말고 문화를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원들의 재교육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 세계는 지금 총성 없는 기술 전쟁 중입니다. 새 기술은 우리가 5~10년 뒤에 먹고살 원천이고, 잘살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이 기반이 되고 문화가 함께 꽃피우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이베이 옥션’의 맥 휘트먼 회장을 이상적인 경영인으로 생각한다. 그는 발상이 독특하고 창의적이며, 테크놀로지를 존중하는 경영인. 그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세계적인 기업을 키운 그를 귀감으로 여긴다.

인류 공헌이 나의 행복 그는 개인적으로 ‘연구’할 때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경영자의 위치. 그래서 행복의 기준을 바꿨다. 사회와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믿고 있다. 오랫동안 미국에 머물면서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다는 그는 조국의 발전에 조금이라도기여하고 싶어 한다.

* 성창모 님께서는 디자인 분야에 가장 창의적이고 실용적으로 접근한 학자이면서 혁신을 통해 전주대학교를 성공적으로 이끈 전주대학교 총장 이남식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12[교육] 이남식_전주대학교 총장

가진 것들을 잘 꿰면 보석이 된다

이남식 전주대학교 총장이 전주대의 수장이 된 것은 3년 전. 지역 인구 감소로 학교 운영에 대한 위기감이 감돌던 때였다. 취임식 날, 그는 이사진과 학내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준비한 전주대의 비전vision을 영상visual 화면으로 구체화해 보여주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주시면 저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발 딛고 서 있는 곳을 보라 그는 전주대의 비전을 대학이 위치한 ‘지역’에서 찾았다. 전통문화도시 전주의 특성과 장점을 대학의 비전과 접목함으로써 새롭게 탄생시켰다. 전통과 디지털을 접목한 누리 사업으로 3백50억 원, 콘텐츠 관련 사업으로 3백50억 원 등 총 7백억 원의 정부 지원금을 받았고, 전국 유일의 대체의학대학과 문화산업대학을 설립했다. 또 사범대학의 전통을 살려 고등학생 대상의 국제영재아카데미를 개설하고 캄보디아의 기술대학 위탁 운영도 맡았다. “있는 것을 잘 꿰면 됩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장점과 강점을 잊고 남을 따라 가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장점과 강점을 효율적으로 극대화하고 이것을 디자인 예술과 접목하면 문화가 만들어집니다. 무엇이든 안 하면 어렵고 하면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비전이 뚜렷할수록 빨리 이뤄집니다.” 그가 놀라운 성공을 이룬 것은 자신의 비전을 구성원들과 공유했던 덕분. 실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줌으로써 구성원 스스로 이해하고 동참하게 이끈 것이다. 그의 성공적인 대학 경영은 대학에서 농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인간공학을 전공한 특성에서 비롯된다. 공부하고 가르치고 교육하는 것이 비록 서로 다를지라도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전주의 랜드마크, 전주대 그는 자신을 ‘CVO’라고 명명한다. ‘비전을 이끌어가는 사람Chief Visionary Officer’이라는 뜻이다. 그의 겸손한 열정이 빚은 성과들은 계속 드러난다. 3천5백 평 부지에 세워지고 있는 도서관, 전 세계의 식문화 관련 지식과 정보, 도구 등을 촘촘하게 보여주는 ‘식문화관’ 등이 대표적. 전주대가 전주의 랜드마크로 떠오를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 이남식 님께서는 열심히 활동하고 회계도 투명한 국제 어린이 양육 기구 ‘한국컴패션’ 대표 서정인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13[봉사] 서정인_한국컴패션 대표
“작은 힘이 모여 기적을 만든다”

서정인 대표는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등 24개 빈곤 국가 어린이들을 돕는 국제 어린이 양육 기구 ‘한국컴패션’을 이끌고 있다. 목사이기도 한 그는 교회를 이끌며 목회 활동을 하는 것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것보다, 오지의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막연하게 느껴온 지구촌의 가난을 실제로 체험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한 생명 한 생명의 고귀함을 더욱 간절하게 느끼게 되었고, 현실에 안주하며 편안하게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한국컴패션을 이끌면서 그는 세상을 품는 마음이 더욱 넓어졌다.

제2의 부모가 되다 컴패션의 사업은 다른 비정부 기구들이 전개하는 긴급 구호와는 좀 다르다. 후원자는 아이들과 일대일 결연을 맺고 ‘제2의 부모’가 된다.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어린이의 장기적인 양육을 통해 생활습관과 가치관을 바꾸고 나아가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는 리더로 성장하도록 도와줍니다.” 왜 한국의 어린이들은 돕지 않느냐는 물음은 서 대표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컴패션은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를 돕기 위해 생겨난 기관으로 1993년까지 41년간 한국을 도왔다. 경제 발전과 함께 성장한 한국은 더 이상 적은 돈으로 한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상황. 무엇보다 이제 한국의 문제는 삶의 질이지 생존에 있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세계의 여러 곳에서는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내 행복을 세상과 나누기 “봉사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초라도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다면 그것이 봉사입니다. 금전적으로 돕는 것도 좋지만 얼굴을 맞대는 마음의 봉사가 더 의미 있습니다.” 서 대표는 한 마음이 한 마음을 건드리고, 작은 힘들이 모여 큰 기적을 만듦을 꼭 한번 체험해보길 권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 또한 그는 개인의 행복도 주변 사람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강조한다. “개인의 넉넉함과 사랑을 바깥과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가정에서부터 사회가 변화하고, 세상이 변화하게 됩니다.”

* 서정인 님(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께서는 체질 DNA 조사 결과에 따라 영양제와 식이요법을 제안하는 창의적인 예방의학 전문의 이기문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14[봉사] 이기문_라끄리닉드 파리 원장
“마음이 편안하면 몸도 건강하다”

이기문 라끄리닉드 파리 원장은 몸의 노화를 예방하는 전문의다. 노화를 예방할 수 있다고? 그렇단다. 과거에는 노화를 현상의 하나로 간주했지만 현대의학에서는 노화를 질병으로 분류한다. 그러므로 치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창의적 열정은 웃음에서 나온다. 힘든 일도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는 이를 통해  ‘노력하면 마음이 즐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를 환자들과 나누려고 한다.

몸의 신호에 반응하라 20세기 들어서 연구가 활발해진 이 분야는 건강한 상태와 건강하지 않은 상태의 중간 상태를 점검하고 치료한다. “우리 몸은 흑백으로만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회색도 있습니다. 이 회색 부분이 흑(병)으로 드러나기 전에 치료해 다시 흰색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지요.” 노화의 원인은 여러 가지. 활성산소 부족, 호르몬 변화, 장내 염증으로 몸의 균형이 깨지는 것, 신체의 마모, 인간의 몸은 1년 동안 세포의 90%가 바뀌는데 이 기능이 퇴화하는 것 등 다양한 이론이 있다. “우리 몸은 굉장히 잘 만들어져 있어요. 몸에 이상이 있을 경우 스스로 알람 시스템을 작동해 신호를 보내는데 사람들이 이를 여러 가지 이유로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라끄리닉드 파리 병원의 DNA 분석 프로그램을 이용해 체질을 분석한 뒤 세포 기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영양제를 비롯한 식이요법을 제안한다.

좋은 일도 사명, 나쁜 일도 사명 이기문 원장의 아들 진우 군은 발달장애(자폐증)가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도 진우 군을 ‘특별한 아이’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처음 병원에서 진단받을 때에는 억울한 감정까지 일 정도였다. 하지만 진우 군이 없었다면 장차 장애아를 위한 의료시설을 만들겠다는 꿈은 꾸지 못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마음을 함께 나누면 전혀 상관없는 남도 ‘내’가 되는 것 같아요. 술 좋아하는 남편도 저고(웃음), 아이들도 저고, 저를 찾는 고객들도 저지요. 그렇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니 결과도 다 좋아지더라고요.”

* 이기문 님께서는 의정 활동에 열정적이고 자기 색깔이 분명한 한나라당 국회의원 심재철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15[정치] 심재철_한나라당 국회의원
“바른 생각에서 바른 정치가 나온다”

심재철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왔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학생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 감옥살이를 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동대문여중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다 MBC 보도국 기자가 되어 활동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해졌다. ‘젊은 피’를 찾던 한나라당에서 그에게 손짓을 해온 것은 이때였다.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제안을 받았죠. 휠체어를 타고 정치를 한 루스벨트 대통령을 떠올리며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2000년 안양시의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초선 의원이 된 그는 재선에 성공했다. 더불어 2000년부터 5년 연속으로 국감모니터단 선정 국감 최우수위원으로 선정될 정도로 의정 활동에 열심이다. 그의 얼굴은 젊은 날의 시련을 잘 이겨낸 덕분인지 아이처럼 순수해 보인다. “속이 없어서 그렇습니다.”(웃음) 꼬인 데 없고, 앞뒤 재고 득실을 따지며 계산할 줄 모른다는 2선 국회의원의 얼굴에서 바른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싸우지 않고 비방하지 않기 그는 한나라당의 대외 홍보 활동을 총괄하는 홍보기획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은 대선을 앞둔 중요한 시기. “한나라당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털어내고 진취적인 이미지를 보완하려고 합니다. 국민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생각하고 홍보를 해야겠지요.” 지난해 12월 그는 박근혜, 손학규, 이명박 씨 등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진영의 디지털 본부 책임자와 공보 특보와의 회의 자리를 마련했다. ‘서로 싸우지 말고 비방하지 말라’는 내용의 당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인지 아직까지 각 후보 캠프에서 잘 따라주고 있다는 것이 그의 평가.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정치인 스스로 초래한 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정치 분야도 발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불과 20~30년 전과 비교해도 달라진 면모가 확실히 많습니다. 이 자체가 정치가 발전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근거입니다.” 대학 시절 벌였던 ‘싸움’을 통해 그 병폐와 후유증을 알게 되었을 테니, 그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을 듯싶다.

교통사고가 선물한 이해심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경험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사고로 다쳤을 때가 아니라 병원에서 퇴원했을 무렵이라고 한다. “잘 걷는 사람들을 보니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 들었습니다. 비관하는 마음에 자살도 생각했지요. 그러다 차차 시선을 돌려 다른 일들을 하기 시작했고, 차근차근 이겨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심이 늘었습니다.” 요즘 그가 생각하는 것은 교육 문제. 자원 없는 나라에서 나라를 발전시키는 동력은 인재 교육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이력 모두가 의정 활동을 잘하게 해주는 ‘도토리’들이 되어주고 있다.

* 심재철 님께서는 사진작가 만큼 사진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한 사진 전문 갤러리 뤼미에르의 관장 최미리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16[사진] 최미리_사진 전문 갤러리 뤼미에르 관장
“순수한 아름다움은 나눌 가치가 있다”

최미리 갤러리 뤼미에르 관장은 예술의 역사적 기록성을 탐구한다. 그래서 훌륭한 사진 작품만큼 그의 창의적 열정을 도발하는 매체도 없다. 도예를 전공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사업에 크게 매료되었던 그. 결국 그의 욕구를 모두 담아내는 그릇은 ‘사진 전문 갤러리’란 이름으로 탄생되었다.

안 되면 되게 하는 프로 정신으로 살아라 그는 거듭 자신은 ‘잘 모르고 시작했다’는 말을 한다. 사진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 배움에 대한 열망이 자신을 행동하게 만들었다고. 배우는 자세로 한 작품 한 작품을 꼼꼼히 대했다. 눈을 열고 작가가 담으려 한 찰나의 감성을 짚어내려 애쓰면서 해외 유명 작가를 찾아다녔다. 거절당한 것은 셀 수도 없을 정도. “거절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요.” 그렇게 무모한 마음으로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하고 꼼꼼하게 따져서 한국에 소개한 쟁쟁한 작가들이 바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적 스터지스, 앨프레드 스티글리츠 등 사진의 역사를 작품으로 말하는 증인들이다. 가장 최근에 개최한 윌리 호니스의 전시도 마찬가지. “소장가로서의 역량을 키우고, 적극적인 투자자의 자세를 가지기 위해 작품을 직접 사들였습니다.” ‘내 작품’이라는 애착은 이를 대중과 공유하고 싶은 열망에 불쏘시개 역할을 확실히 했다. 그는 프로다운 갤러리스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재능 있는 한국 작가를 키우는 ‘뤼미에르 사진상LIPA’을 제정해 젊은 작가들의 든든한 지원군을 자처한다. 이제 대중들이 사진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깨달아가는 것 같아 그는 뿌듯하다.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다면 최미리 관장이 발견한 예술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알아봐주는 순간, 그는 가장 행복하다. “예술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파급 효과가 크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움. 그 미美를 영원히  좇고 싶습니다.”

* 최미리 님께서는 창의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빼어나고 감성 경영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진홍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17[언론] 정진홍_<중앙일보> 논설위원
“모든 일류는 감동을 판다”

정진홍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직업에 ‘신문인’으로 뜬다. 신문인 하면 신문기자를 떠올리지만 그는 기자 출신이 아니다. 영상 이론을 가르쳤던 전직 대학교수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 방송 진행자 그리고 강연자이다. 그가 신문인이 된 것은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그만둔 뒤의 일이다. <중앙일보>를 눈여겨본 이라면 그의 고정 칼럼 ‘정진홍의 소프트파워’가 남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안다. 주로 사람 이야기가 등장하는 그의 칼럼은 인간됨과 인간살이를 따뜻하게 보듬는다.

직(자리)을 추구하면 언젠가 업(일)을 잃는다 그의 모토는 ‘날마다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했던 이야기는 다시 쓰는 일이 없다’는 그의 글과 강연이 인기를 모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는 사고와 내용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낯설게 하고, 날마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무장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일류론’을 들어보자. “삼류는 제품을 팔고, 이류는 지식을 팔고, 일류는 감동을 팝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설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학을 떠난 이유는 직職과 업業의 차이에 대해 깨닫게 되면서. “직을 추구하면 언젠가 업을 잃고, 업을 추구하면 직이 따라옵니다. 직을 따르는 사람은 월급 받는 만큼 일하지만 업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숨은 가능성을 끄집어내지요.”

8년간의 ‘아버지 학교’ 그의 저서 <완벽에의 충동>(21세기북스) 권말에는 ‘미리 쓰는 유서’가 실려 있다. 그는 부친을 통해 일찍 죽음을 경험했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친은 암 판정을 받았고 8년 정도 투병 생활을 했다. 막내인 그는 아버지의 투병 기간 동안 학교를 마치면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님의 강의를 듣곤 했다. 당신의 삶과 집안의 내력, 전쟁 이야기, 피난 온 이야기 등이 강의 내용이었고, 이 학교에서 그는 삶의 자세와 태도, 지혜를 배웠다. 그리고 그 학교의 교훈은 ‘긍정과 낙관’이었다. 아마도 그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더러는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면서도 긍정과 낙관을 견지하는 것은 이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매사에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것도.

* 정진홍 님께서는 발레의 한국화 작업에 열정적이고 지속적으로 매진해온 유니버설발레단의 단장 문훈숙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18[무용] 문훈숙_유니버설발레단 단장, 유니버설문화재단 이사장
발레로 행복했던 그녀, 발레 전도사가 되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은 목에서 팔까지의 선이 너무 예뻐서 가장 아름다운 지젤로 꼽히던 발레리나였다.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재학 시절 ‘스위스 로잔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하여 명성을 얻었고, 세계 5대 발레단 중 하나인 러시아 키로프 마린스키 발레단의 <지젤> 공연에 객원 주역으로 참여, 일곱 번의 커튼콜을 받았다. 1985년 귀국한 그는 유니버설발레단의 창단 멤버로 활동했고 현재는 단장으로 있다. 2001년 발 부상을 계기로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게 되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시 무대에 설 수도 있었지만 그는 후배를 키우고 발레를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기로 마음먹었다.

대중 속의 발레 내성적인 성격의 그에게 대중 앞에 나서 이야기하고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설득해야 하는 CEO로서의 자리는 어려웠다. 그는 많은 경영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모든 면에서 전문가가 되는 대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잘 관리하는 것이 CEO의 역할임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일은 바로 발레의 대중화. “단 한 번도 발레 공연을 보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잎이 풍성한 나무라도 뿌리가 튼튼해야 오래가지요. 발레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레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그 뿌리가 대중 속에 깊이 박혀 있어야 합니다.” 길거리에서 발레 공연을 시도하고 주부를 위한 브런치 발레나 학생들을 위한 견학 프로그램 등을 선보이는 것도 사람들이 발레를 친숙하게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심청> <춘향> 등 우리 정서를 담은 창작 발레 제작에 공을 들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연습실이 더 행복했다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간들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에게는 갈채를 받던 무대보다 연습실이 더욱 행복했다. ‘저것만 가지면 행복할 거야’, ‘이것만 된다면 행복해질 텐데….’ 사람들은 행복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행복이라 믿는다. 그가 어떤 자리에서건 빛나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 문훈숙 님께서는 피아니스트에서 CEO로 변신해 클래식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예술의전당 사장 김용배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조용하고 카리스마가 있어 늘 본받고 싶어 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19[예술 경영] 김용배_예술의전당 사장
“내 귀에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

김용배 예술의전당 사장은 피아니스트 출신의 경영자다. 바쁜 지금도 더러 무대에 오른다. 고등학교 때까지 피아노를 연주했던 그는 정작 대학에서는 미학을 전공했다. 어머니의 권유 때문이었다. 미학을 공부하면서도 피아노 연주를 쉬지 않았던 그는 음대 대학원에 진학했고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2004년 예술의전당 사장에 임명되기 전까지 추계예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연주자로서의 기쁨은 연습하면서 작품의 형상을 완성해가고, 그렇게 완성한 형상을 관객들과 나누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길고 더디더라도 만들어가는 과정이 참 행복합니다. 그리고 만든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에는 진짜 행복합니다.” 그는 오선지 위의 악보를 작품으로 형상화시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해본 사람이다. 어떤 마음과 자세로 연습에 임해야 최고의 연주가 나오는지를 알고, 작품을 성공적으로 형상화시키는 비결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그가 예술의전당을 성공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술을 아는 CEO 그를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임명한 이는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이다. 이 전 장관은 자신 없어 하는 그에게 CEO가 예술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며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예술 경영도 음악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연주자가 자기 자신의 연주에 감동받아야 남들도 감동받는 것처럼 사랑이 있으면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예술에 대한 사랑, 조직에 대한 사랑으로 경영을 시작한 그는 ‘전당’의 문턱을 낮추고 문호를 개방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1시 콘서트’. 연극 관람료보다 저렴한 가격의 입장료, 문외한도 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은 주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덕분에 사람들은 ‘비싼 공연이 좋은 공연’이라는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그는 어떤 리더십을 추구할까? “작은 실수도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시스템이 잘 돌아가게 해야지요. (어떤 일을 추진할 때에는) 분명하고 신중하게 판단한 다음 사람들에게 가고자 하는 방향을 보여줍니다. 결정한 뒤에는 추진력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게 제일 좋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그가 인터뷰를 한사코 고사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무리 뛰어난 기계도 사람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20년 전 비디오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클래식 공연이 고사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웬걸, 대중들은 오히려 다양한 공연장에서 폭넓게 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기계가 뛰어나도 사람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황폐해진 사람의 심성을 어루만져주며, 모든 음악에는 각기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음악의 위대함이지요.” 만약 지금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베토벤의 ‘운명’과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2번’을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보시길. 두 작품은 김용배 사장이 추천하는 ‘절망에 빠진 영혼에게 힘을 주는 음악’이다.

* 김용배 님께서는 학문의 깊이가 깊고 대학 교육에 대한 정성과 열정이 높은 대구 계명대학교 총장 이진우 님을 추천하셨습니다. 대학을 변화시키는 자세와 실천에 감명받았다고 합니다.

20[인문] 이진우_계명대학교 총장
“넘버원보다 좋은 것이 온리 원이다”


이진우 계명대학교 총장은 인문학계에서 꽤 유명한 소장 철학자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일간지나 계간지에서 그의 글을 보기 힘들어졌다. 계명대학교 총장이 되었다고 했다. 2004년 여름이었다. 총장으로 취임한 지 2년 반. 지식 기반의 21세기 사회에서 우리나라가 살길은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계명대가 열정과 창의성이 있는 대학으로 진전하게끔 이끌고 있다.

21세기의 대학은 인터버시티Intervisity “창의적이라는 것은 다른 분야나 사람과의 접촉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대학은 그 기반을 만들고 다양성의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21세기의 대학은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유니버시티가 아니라 다양한 가치와 학문이 소통하는 인터버시티Intervisity(학문융합형 지식을 창출하고 분출하는 곳)가 되어야 합니다.” 화가가 철학책을 펴내거나 철학자가 영화평론을 하는 것처럼 한 사람 안에서 여러 분야가 융합해 새로운 지식으로 창출될 수도 있지만, 프로젝트팀처럼 여러 분야의 사람이 하나의 주제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 수 있는 21세기형 대학으로 발전하기 위해 계명대 구성원들은 최근 CCC(Campus Community Culture) 운동을 시작했다. 공간을 투명하고 개방적인 형식으로 바꾸고, 교수와 학생이 서로 경어를 사용하고, 건물 로비를 학생들의 그룹 스터디 공간으로 꾸며 학생 독회 모임을 지원하기로 했다. “다양성이 새로운 분야를 만들고, 다른 것을 보고 받아들이는 경험을 하면 낯선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개방적인 사람이 됩니다.” 영감은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포착한 무언가를 안에서 구체화하는 것. 따라서 다른 것에 관심이 없고 무딘 사람은 창의적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계명대가 추구하는 비전도 ‘넘버원이 아니라 온리 원’이라고 한다. 서열을 매기는 획일적 기준에 맞춰 경쟁하기보다는 계명대의 고유한 독자성을 찾아 ‘블루 오션’으로 나아가겠다는 것. 25년 동안 이어진 일반인 대상의 철학 강의 ‘목요철학세미나’, 2천 석 규모의 국제적인 연주 홀을 설립해 현장과 소통하는 고리로 만들 음악대학, 민화를 전문으로 수집하는 박물관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든다 인문人文은 사람의 무늬다. 무엇이 무늬일까? “인간은 자기 얼굴을 갖는 게 목적이라고 하지요. 저희 대학 본관 중앙에는 비어 있는 액자 ‘타블라 라사Tabula Rasa -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1995)가 걸려 있습니다. 그 액자에는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얼굴을 찾아서 사회로 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바삐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지금 사는 모습이 원했던 삶인지, 왜 사는지’를 자문할 때가 있다. 이진우 총장은 그렇게 문득 자신의 무늬를 살펴보게 되는 때,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레)을 읽어보라고 권유한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