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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근배 씨의 조선 벼루 붓이 머물다 간 상상의 세계
옛 선비들은 벼루에 먹을 갈며 자신의 마음 밭을 갈았으리라. 20년 동안 수백 년 된 벼루 8백여 점을 모아온 시인 이근배 씨가 좇아온 것도 비단 눈 앞의 멋진 벼루 한 점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만히 귀 귀울이면 벼루에게서 ‘돌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시인의 수집 기행을 따라가보자.

1 이근배 시인이 자신의 수집품 중 최고라 여기는 조선 벼루. 송죽매松竹梅 조각을 기본 구도로 하고 곳곳에 조선시대 풍속도를 촘촘이 새겨 넣었다. 돌을 깎았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장인의 칼끝은 예리하고도 자유로웠다 .
2 물가에서 유유자적하는 남자의 모습을 새긴 송나라 시대 벼루.
3 돌 자체의 아름다운 색상을 살려 조각한 조선 벼루.

골동품을 쭉 관찰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만일 어떤 물건 하나가 사라진다면, 그 기물이 차지하는 물리적인 존재감뿐 아니라 그것을 상용하던 일상까지도 자취를 감추게 되는 구나’라고 말이다. 가령 호롱불을 켜던 시대가 가니 등잔에 동백 기름을 넣은 뒤 심지를 돋워 불을 밝히는 시간이 사라졌고, 참빗으로 단정히 가르마를 탄 긴 머리채를 틀어 올리는 시간은 아녀자들의 비녀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필기구는 또 어떠한가? 뚜껑을 열자마자 잉크가 술술 나오는 펜이 흔한 이 시대에는 한 구절의 시를 적기 위해 벼루에 먹을 갈아 붓을 적셔야 했던 조선시대의 일상이 낯설 따름이다. 이처럼 벼루의 시대가 가버린 지금, 한 시인은 화석에나 묻혔을 법한 그 시간에게 순정을 내주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조시인 이근배 씨는 20년 넘게 고古벼루를 수집하고 있다. 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작품들로, 총 8백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천 년을 가는 문방사우 이근배 시인은 옛 시절 문인들의 여러 애장품 중 왜 벼루를 모으게 되었을까. “문방사우 중 소모품인 지필묵紙筆墨과 달리, 벼루는 선비의 오랜 벗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시절, 문방사우 중 벼루의 의미는 확실히 남달랐다. 중국 북송北宋의 시인인 당경唐庚(1070~1120년)도 <가장고연명家藏古硯銘>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벼루와 붓과 먹은 한 부류의 것들이다. 이들은 출처나 쓰임새가 비슷하다. 그러나 수명은 서로 다르다. 붓의 수명은 일수로 헤아리고, 먹의 수명은 월수로 헤아리는데, 벼루의 수명은 몇 대代로 헤아린다. 硯與筆墨 蓋氣類也 出處相近 任用寵遇相近也 獨壽夭不相近也 筆之壽以日計 墨之壽以月計 硯之壽以世計’ 벼루는 오래 두고 쓰는 기물인 만큼 이를 제작하는 장인들 역시 기능성만큼이나 조형미를 끌어올리는 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예로부터 우리에게는 문방구를 숭상하는 정신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문인에게는 자신의 품격에 맞는 문방구를 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지요. 그래서 문방구의 예술적인 완성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근배 시인은 고려청자는 현재 10억 원 넘는 작품이 없는데 반해 청자 연적은 10억 원 넘는 작품이 있다고 말한다. 억대를 호가하는 골동품 중에는 연적뿐 아니라 필통 등 문방구의 비율이 높다. 그래서 이근배 시인은 “미술사는 벼루를 중심으로 다시 써야 할 정도”라며 벼루의 예술적인 완성도를 강조한다.

이근배 시인이 벼루를 수집하게 된 계기는 어릴 적 기억과도 닿아 있다. 그 기억의 중심에는 고향인 충남 당진이 내세우는 유림이었던 할아버지가 있다. “일제 강점기 말미에 태어난 저는 그 시절 나라 찾기에 뛰어든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 품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다른 식구들은 모른 체하셨지만 똥오줌도 못 가리는 너덧 살의 저만은 데려다가 직접 품속에 앉혀 글을 읽히고 붓을 쥐어주셨습니다.” 시인은 지금도 먹물이 마르지 않은 채 사랑방 문갑 위에 놓여 있던 할아버지의 남포석 벼루와 조선백자 산수문 연적이 눈에 선하다. 어릴 적 할아버지 문방의 풍경과 먹냄새가 불현듯 다시 올라온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먹고 살 길이 궁해 출판사에 다니던 그는 어느 날 붓글씨를 독학하려고 문방사우를 샀다. 30분 넘도록 먹을 가는데, 좀체 먹물이 진해지지 않았다. 명필가이기도 한 삼촌에게 물으니 ‘단계’라는 돌로 만든 벼루를 구해서 먹을 갈아보라고 이르더란다. 단계석은 손으로 만져보면 매끈하지만 표면을 확대해보면 미세하게 줄칼과 비슷한 홈이 파여 있어서 먹이 잘 갈린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단계석 벼루를 잘 아는 이가 흔치 않았다. 이즈음 창덕궁에서 각 대학 박물관과 개인 소장가들이 모여 <명연전名硯展>을 열었다. “중국과 한국의 명품 벼루 2백65점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 전시회의 도록에 올릴 만한 좋은 벼루 딱 한 점만 사야지’라는 꿈을 품었습니다.” 얼마 뒤 1백만 원짜리 벼루를 흥정도 하지 않고 샀다. 돈을 빌려준 친구는 ‘간이 크다’며 혀를 내둘렀다. 1973년 당시에는 집 한 채가 2백50만 원 하던 때였으니, 손바닥만 한 벼루 한 점 사겠다고 거금 1백만 원을 쓰는 일에 누구도 수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벼루 단 한 점만’에서 시작한 것이 20년 넘게 동안 이어졌다.

상상력이 펼쳐진 화폭, 우리 벼루 “한· 중· 일벼루 중 우리나라 벼루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이근배 시인은 특히 압록강변에서 나는 위원화초석渭原花草石으로 만든 조선시대 벼루의 조각 양식을 으뜸으로 친다. 그는 이 점을 고려해서 손님들에게 벼루를 보여주는 나름의 순서를 정해두었다. 우선 중국의 대표적인 벼루들을 선보인다. 네모반듯한 벼루가 전부일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대나무, 종, 원형 등 다양한 모양으로 조각한 귀족풍 중국 벼루에 넋이 나간다. 이 즈음 그는 슬며시 우리나라 벼루를 꺼내 보인다. 우선 색깔이 오묘하다. 검은색이 아닌 푸른빛을 띤 돌을 화폭 삼아 자유분방하게 스케치를 한 듯 조각한 우리나라 벼루를 본 이들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일정한 틀을 유지하는 중국의 정형적인 벼루를 보여주며 당시의 지체 높은 문인들의 미감을 상상하게 한 뒤, 자유롭고 생동감 있는 우리나라 벼루를 꺼냄으로써 벼루에 대한 전형적인 미학을 일순 깨버리는 것이다.

1 이근배 시인의 집필실 한쪽은 수많은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그가 직접 주문 제작한 커다란 장식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저작시에서 벼루 수집을 ‘헛일’이라 이르기도 하였지만, 실제로 만나본 그는 자신의 콜렉션을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마치 부모가 장성한 아들 보듯 말이다.
2 옥으로 만든 필세. 필세는 붓의 결을 가다듬는 도구다. 그는 벼루 외에도 귀족들이 사용하던 문방구 몇 점을 함께 모았다. 
3 와당 모양의 중국 벼루.
4 조선시대의 백자 연적.

벼루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금방 마음이 동할 만큼 조선 벼루는 매력적이라는 것이 이근배 시인의 결론이다. 잎새나 포도 넝쿨, 나뭇가지의 결, 메뚜기의 다리, 원숭이의 표정 등을 말랑한 지점토를 주물러 만든 듯 하나하나 새겨 넣은 솜씨에 머리를 숙이고 만다. 손님의 감성에 반전이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한 시인은 빙긋이 웃으며 우리나라 벼루의 곳곳을 짚어가며 상세히 설명해준다. “한겵?일 삼국의 옷이 다르듯, 벼루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미학이 있기 때문에 비교하기가 사실 어렵지만…. 한국의 미는 소박하고 볼수록 정감 있습니다. 생활상의 면면이 녹아 있기 때문이지요. 한편 질박하지만 ‘제도’하거나 자로 잰 것 같은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저는 늘 탄복하고 맙니다.” 백자를 빚던 조선의 도공처럼 이름 없는 장인들의 솜씨는 후대에 와서 묻힐 뻔했다가 이근배 씨의 시에서 부활했다.



1나무를 소재로 만든 벼루. 옛 선비들이 길을 떠날 때 행장에 넣어가는 벼루로 사용되었다. 뚜껑의 자개 장식이 돋보인다.  
2 소나무 껍질처럼 생긴 돌의 표면을 살려서 조각한 벼루.
3 계곡에서 건져낸 듯 원석의 형태 그대로를 살린 벼루.
4 흡사 개울물이 흐르는 모습을 닮은 돌의 무늬를 살려 조각한 벼루.

‘우리나라의 벼루들은 압록강 기슭의 위원渭原에서 나오는 화초석花草石이 으뜸인데요, 녹두색과 팥색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층을 이뤄서 마치 풀과 꽃이 어우러지는 것 같대서 이름도 화초석인데요, 거기 먹을 가는 돌에다 우리네 사는 모습이며 우주만물을 모두 새겨놓았는데요, 그 조각들은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 귀신의 짓거리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요, 내가 가진 그것들 중의 하나에는 열한 명의 아이들이 냇가에서 벌거숭이로 모여서 놀고 있었는데요, 삼백 년쯤 전에도 이중섭李仲燮이 살았던 것인지? 고추 뻗치고 오줌 싸는 놈, 발버둥치고 앉아서 우는 놈, 개헤엄치고 물장구치는 놈, 씨름 한판 붙자고 덤벼드는 놈, 고 녀석들 얼굴 표정이며 손발의 놀림이 살아서 팔딱거리는데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린 날 동네 아이들과 냇가에서 멱감던 내가 그 속에 있는 것인데요, 물가에는 가지 말거라. 외동아들 행여 명이 짧을까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는데요, 어머니 세상 뜨신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말씀 안 듣고 세상의 깊은 물속에서 개헤엄으로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것인데요’
―‘하동河童―벼루 읽기’ 전문

먹으로 마음 밭을 갈다 추사 김정희는 생전에 “벼루 10개에 먹을 갈아 바닥내고, 1천 개의 붓을 몽당 붓으로 만들었어도 아직 글자 한 자를 못 익혔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이근배 시인이 지금껏 벼루 곁을 맴도는 이유 중 하나는 옛 문인들의 치열한 학구열과 작품에 채 담지 못한 시심詩心을 느껴보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추사가 벼루에 구멍을 내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돌을 닳게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어쨌건 움푹 팬 벼루를 볼 때가 왕왕 있습니다. 닳은 벼루는 가격이나 소장가치가 떨어지지만, 온기가 느껴질 듯하여 가만히 만져보곤 합니다.”

이근배 시인은 선비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벼루를 오랫동안 모으면서 종종 옛 선비들을 떠올리곤 한다. “먹을 가는 시간은 자신의 마음 밭을 가는 시간과도 같기에, 그 순간은 각별한 의미가 있지요. 훌륭한 벼루일수록 높은 당직에 오른 사람들의 책상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그 벼루에서 시심과 사상이 솟아났으니, 벼루야말로 선비의 정신적인 유산이었지요. 멋진 벼루 한 점을 두고두고 완상玩賞하는 선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모든 흔적에 벼루와의 인연을 새겨 넣는다. 그가 쓰는 두인頭印(좋은 문구를 넣어 붓글씨의 앞머리에 찍는 도장)에도 벼루 이야기가 나온다. ‘아생무전파연我生無田破硯’이라는 문구를 쓰는데, 뜻인즉 ‘내가 밭이 없이 태어나니, 벼루를 쪼개 먹고 산다’이다. 평생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시작詩作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벼루에 빗대 표현한 말이다.

돌의 울음소리 좋은 벼루를 찾기 위해 1989년부터 중국 골동품 시장을 둘러보러 다녔다. 벼루에 대한 심미안과 식견을 갖춘 그가 중국 베이징의 골동품 시장인 해왕촌에 나타날 때면 그곳 상인들이 그를 끌어가기 위해 난리가 날 정도였다. 요즘도 틈틈이 중국 골동품 시장을 뒤지곤 하지만 예전만큼 값진 벼루를 찾기는 어렵다고 한다. 중국과의 왕래가 허용되기 이전에는 주말마다 고속버스를 타고 전국 곳곳의 골동품점을 뒤져 벼루를 모을 정도로 열성이었다. 이런 이근배 시인을 보고 소설가 김승옥 씨가 대뜸 “벼루를 왜 사느냐?”고 묻더란다.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낚시꾼에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아서 시장에 팔거나 집에다 저장해놓고 끓여 먹지 않습니다. 그저 건져 올리는 재미가 전부입니다. 나의 벼루 수집벽의 즐거움도 여기에 있습니다. ‘또 어떤 멋진 벼루가 나와서 임자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무척 설렙니다.”

시인은 훌륭한 벼루는 보기만 해도 황홀하다고 말한다. “이럴 때는 ‘안복眼福을 누렸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실상 반드시 벼루를 구입해야 하는 것은 아닌데,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과 제게 황홀함을 안겨준 것에 대한 비용을 치르는 셈으로 사고 마는 것이지요.”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화를 예로 들었다. “야스나리는 골동품점을 산책하는 것이 매일 아침의 일과 중 하나였습니다. 작품을 사지 못하더라도 걸작들을 만나고 싶어 했을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골동품을 자꾸 접하면 심미안이 길러지고, 심미안이야말로 영감의 원천이 되거든요.”시인 역시 때 묻은 벼루 하나를 보며 순정이 스며 나오면 시가 고와진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때때로 벼루의 ‘속울음’을 듣기도 한다. ‘사랑 앞에서는 돌도 운다 ― 벼루 읽기’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헛것들 많은 세상에서/ 헛것 아닌 것이 있을까마는/ 헛것에 눈이 씌워/ 어렵사리 손에 잡은 벼루를 들고 와서/ 물소리를 흘려 먹때를 벗기다 보면/ 검은 물소리에 섞여 풀려나오는/ 소리가 손끝에 만져질 때가 있다/ 돌의 울음소리?/ 아무렴 숱한 낮과 밤을/ 생각으로 갈고 사랑으로 닦으면서/ 저렇듯 살이 파이기까지/ 닿았던 손길들을 돌인들 어찌 무심할 수 있으랴/ 사실은 들을 줄 아는 귀도 없으면서/ 벼루를 만나서는 눈을 반짝 뜨던/ 속울음을 듣는 척도 해보는.’

시인이 표현한 벼루의 속울음에는 더 이상 이런 벼루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안타까움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이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모방할 수도 없다, 이근배 시인은 이러한 아쉬움과 앞으로 진행되어야 할 벼루사의 발전을 위해 언젠가 ‘한국의 벼루’에 관한 책을 내겠다고 말한다. “세계적으로도 저만큼 벼루를 모은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저는 한국의 벼루에 대해 제대로 정리해 보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인정받지 못한 한국 벼루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벼루를 모으는 이라면 한국 벼루를 수집해야만 ‘반쪽 컬렉터’ 신세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하고 싶고요.”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