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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과 부인 최혜경 여사 부부는 상대를 위한 거울 당신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것
‘미스터 스마일’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웃는 얼굴이 해맑은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과 그의 미소를 닮은 부인 최혜경 여사를 만났다. “너무 바빠서 싸울 시간이 없다(웃음)”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도 어느덧 30년. 그러나 이 부부의 대화에는 3년 차 신혼 부부의 그것처럼 알콩달콩한 맛이 있다.

각자 일에 충실해서 행복한 부부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의 집은 한강과 밤섬,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나란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열린우리당 당의장으로 활동하던 때 집과 국회의사당의 거리가 멀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어느 날 서강대교를 건너던 정 장관에게 ‘빈집 있음’이라 씌어 있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이사한 지 2년이 채 못 되었다. 그는 이 아파트가 대단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만나자마자 집 이야기부터 꺼낸다.

“(여의도를 가리키며) 저 건너가 지금은 빌딩 숲으로 보이지만 여름이 되면 연둣빛이 확 살아난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 앞으로 밤섬이 보이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지요.” 정 장관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아파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집이다. 남부러울 데 없는 아파트다.

아파트 거실에는 1년 전쯤 찍었다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단란한 4인 가족의 모습이다. 큰딸 유선 씨는 연세대 영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역사학 박사 과정을 이수하는 중이다. 역시 같은 대학 전산과를 졸업한 둘째 준원 씨는 현재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는 중이다. 새해 1월에는 복무를 마친다.

정 장관이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은 2005년 2월이었다. 공무를 수행하는 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도 역시 바빴지만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갈수록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좋아하는 골프도 거의 치지 않는다. 2006년 정 장관의 생일 케이크 위에 켜진 촛불을 아들 준원 씨와 부인 최혜경 여사가 껐을 정도로 시간이 부족하다.
“잠깐 들어와서 촛불이라도 끄고 가세요.”
“바쁘니까 둘이서 해.”

정 장관이 워낙 성실하게 일을 하는 스타일이고 최혜경 여사 또한 그의 강행군 일정을 알고 있기에 부부 사이에 문제가 된 적은 없다. ‘너무 피곤하고 힘드니까’ 하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최혜경 여사가 정 장관에게 ‘항의’를 표했다.
“나,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몰라요.”
“왜?”
“요새 신경질이 많이 나고 짜증이 나서.”
“(웃으며) 다녀올게.”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웃으며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어찌 화를 낼까.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최혜경 여사의 얼굴 또한 웃는 표정. 이제 막 결혼 생활을 한 새내기 신부가 남편 흉을 보는 것만큼이나 사랑스럽다. 바쁜 남편에 대해 흉을 보는 듯하지만 정작 행간에서 느껴지는 것은 남편에 대한 신뢰감이다.
원고의 들머리에서, 다짜고짜로 정 장관이 너무 바빠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은 이런 풍경이 그의 이야기만은 아닐 듯해서다. 특히 결혼 생활의 연차가 높아지고, 자녀가 성장할수록 가족끼리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는 일이 점차 행사처럼 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비슷한데 어떤 가족은 돈독하고 어떤 가족은 그렇지 않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신뢰와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가족끼리 신뢰하고 각자의 바쁜 상황을 이해해주는 가정에는 윤기가 흐른다. 서로가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상대의 모습을 신뢰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면 그 뒤에는 분란이 오게 마련이고, 집안에는 자연 까칠한 기운이 감돌게 된다. 정 장관 부부의 단란함을 배운다면 까칠한 기운도 윤택함으로 바뀌게 되지 않을까 싶어진다.

둥글둥글한 전라도 청년과 무뚝뚝한 경상도 아가씨 정 장관과 부인 최혜경 여사는 정 장관이 대학교 3학년 때 만났다. 1973년 정 장관이 묵던 기숙사 친구들과 최혜경 여사가 다니던 학과 재학생들의 미팅에서 만나 짝이 되었다. 그리고 1978년에 진짜 짝을 이루었다.

“집사람은 아주 착하고 조용하고 그런 스타일이었죠.”
“의젓해 보이는 인상이었어요. 군대 가면서 ‘기다려라, 갔다 오마’ 하는 말도 없이 그냥 입대했어요. 그러고는 나중에 군대로 면회를 오라고 하니 제가 좀 난감했지요. 그때에는 제 친정어머니께서 남편을 참 좋아해서 다리를 열심히 놓으셨어요. 사람 성실하고, 똑똑해 보이니까 그러셨겠죠. 지나고 보니 부부 인연은 부부 인연인 것 같아요.”

청혼을 할 때도 이벤트랄 게 별달리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 장관을 수줍은 표정으로 말한다. “이심전심으로 결혼했지요. 옛날에는 그랬으니까요.” 어린 시절을 전라북도 진안군의 외진 마을에서 자란 정 장관은 애정 표현에 서툴다. 속에 담아둔 아내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최혜경 여사가 아이들 잘 키우고 알뜰하게 살림하는 것으로 남편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듯, 정 장관도 자신의 일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하는 것으로 우묵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두 사람도 초기에는 많이 다투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서로에 대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남편은 전라도 출신이고 저는 경상도 출신이에요. 그런데 제가 경상도 사람치고는 좀 무뚝뚝한 편이거든요. 사근사근한 편이 못 돼요. (결혼 전에는) 제 언성이 높고 억양이 좀 강해도 친정 식구들한테 흉잡힐 일은 별로 없었지요. 친정 식구들은 이해를 하고 넘어갔으니까요. 하지만 남편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남편은 제가 경상도식 억양을 섞어 이야기를 하면 제 기분이 나쁜 상태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별것 아닌 일도 제가 기분이 나빠서 뭐라 뭐라 이야기하는 것으로 느껴 다투게 되었지요. 결혼 초기에는 이렇듯 소소한 걸로 많이 부딪쳤어요.”

“(결혼을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는) 몇 년 걸렸어요.(웃음) 집사람과 저는 자란 배경은 물론 서로 다른 점도 많아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고 조율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가정의 분위기를 화목하게 가꾸는 데는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체류했던 미국 생활이 도움이 되었다. 당시 쌍용종합무역상사에 근무하던 정 장관이 미국 LA지사로 인사 발령을 받게 되자 가족 모두 LA로 이주했다. 첫째 유선 씨가 네 살이던 때였다.

“LA에 있을 때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집사람이 매일같이 아이들을 동네 도서관에 데리고 다니면서 책 읽는 습관을 만들어줬어요. 저희는 아이들에게 ‘공부해라’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저희들이 알아서 한 거지요. (그렇게 되기까지) 저는 바빠서 신경을 많이 못 썼는데, 집사람이 그렇게 되게끔 키워주었지요.”
“저도 미국에 갈 때에는 공부를 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우선 아이들이 어렸고, 아이 아빠도 공부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나중에라도 영어를 잊지 않도록 잘 익혀가는 게 내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너무 잘못한 거예요.(웃음) 그렇다고 그때로 다시 되돌아가 공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요…. 그래도 아이들이 잘 자라줘서 보람이 있습니다. 남편도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있으니, 지금 생각하면 제 일이 제일 허망해요.(웃음)”

“미국에 있을 때도 회사 일이 바쁘긴 했지만 가족과 지내는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미국은 퇴근하면 바로 집에 가는 문화인 데다 주 5일 근무였거든요. 여름휴가와 3일짜리 긴 연휴가 되면 가족여행을 다녔어요.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과 스킨십을 나눌 기회가 많아졌고, 관계도 굉장히 좋아졌지요. 지금도 아이들과 저 사이에는 격이 없는데, 그 시절의 시킨십 덕분이지요.”
당시나 지금이나 정 장관은 일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스타일. 지금이야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지만 당시에는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은 상태였다. 모든 부분에서 절약해야 했는데 오히려 그런 상황이 가족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스킨십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이 함께 지내며 즐거운 일과 어려운 일을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희가 미국에 있을 때, 유럽으로 휴가를 간 적이 있습니다. 1989년이나 1990년이었을 텐데 당시 유럽 물가가 미국보다 2배쯤 비싸던 때여서 하루에 두 끼만 먹었어요. 로마에도 들렀는데, 거기서는 설렁탕 한 그릇에 25달러나 해요. 그래서 두 그릇을 시켜서 두 명씩 나눠서 먹었죠.(웃음) 그렇게 공감하는 것이 (친밀하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하거든요.”

정 장관의 근검절약 정신은 어린 시절 시작되었다. 첩첩산중 산골, 가난한 농부의 셋째아들이었던 그는 초등학교 때는 왕복 8km, 중학교 때는 16km의 산길을 걸어 통학했다. 어린 나이에 그는 자연스럽게 근검을 배우게 되었고, 검소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1995년 장인어른이 선물한 영국제 면바지를 최근까지 입었는데, 어느 날 그 바지를 입고 출근했다가 엉덩이 부분이 찢어지는 일이 있었다. 이런 그를 두고 최혜경 여사는 “바지가 찢어질 때까지 입는 사람”이라고 우스개로 말한다.


잘 참고 견디고 양보하는 삶의 미덕 정 장관 부부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91년. 최대 현안은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유선 씨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준원 씨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두 자녀 모두 한국어 실력이 미숙했던 상태. 주변에서는 강남으로 가라고 권유했지만 ‘돈도 별로 없고, 아이들도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을 것 같아’ 광진구 자양동에 정착했다.

“다시 귀국하였을 때에는 저도 잘 몰랐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원에 보냈지요. 그런데 둘째 준원이는 학원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학원에 가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요. 그래서 저는 아이에게 일주일만 학원에 가보라고 설득했는데도 끝내 싫다고 하더군요. 반면 유선이는 학원에 다니고 싶어해서 보냈고요. (부모가 바라는 대로 아이들이 하도록 시키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끔 하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미국에 가서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도록,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도록 애쓴 최혜경 여사의 헌신과 내조가 없었다면 정 장관의 화목한 가정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은 말해 무엇하리. 정 장관이 바깥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집안일을 단도리하고 아이들 교육을 뒷바라지해온 최혜경 여사는 정 장관 가정의 연출자인 셈이다. 대학 시절에도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오곤 했던 준원 씨는 지금도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려고 한다.

“아이들 아빠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좋아하지만 준원이는 생채소를 좋아해요. 옛날에는 식사를 준비하며 이것저것 만들어서 먹었는데요, 요새는 그렇지 않아요. 국 하나와 생선구이 하나 정도 준비하죠. (단촐한 차림이라도) 준원이에게 밥을 챙겨주려고 하는 것은 준원이 나이가 스물여섯 살이니까 결혼해서 분가하면 엄마한테 밥 얻어먹을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예요.” 그는 오늘도 아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저녁은 어떻게 하니?’하고 말이다.

“자녀를 위해 부모가 할 일은 자녀의 취미가 무엇인지, 무엇을 하면서 행복해하는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 길을 잘 찾아가도록 안내해주고, 도움을 요청할 때에는 돕는 것입니다. 성장기 가족이 친하게 지내면 나중에 아이들을 걱정할 일이 없어요. 요새 저는 준원이의 도움을 많이 받아요. 영화 하나 보는 것부터 해외 출장지의 날씨 정보까지, 준원이가 다 알려줍니다.”

정 장관은 어린 시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에 도전했다. 그는 고등학교만 무주안성고등학교, 전주공고, 전주신흥고등학교 등 세 곳을 다녔다. 마지막 학교인 전주신흥고등학교로 전학 갔을 때에도 가정 형편이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그는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니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해달라”며 도움을 요청했단다. 이후 정 장관은 매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등록금을 마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교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무엇이든 선택하면 꾸준히 집중적으로 하는 편. “원래 뭐 하나를 선택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매사 선택을 할 때에는 신중하다. 첫째 유선 씨가 전공 바꾸기를 원할 때에도 그는 영문학 공부를 계속 하는 것을 권유했다.

“저는 항상 최선을 다했어요. 주어진 여건 아래서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나한테 도움이 되건 도움이 되지 않건 간에 최선을 다해서 성심성의껏 노력을 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은 아예 맡지 않든가, 하기로 마음먹으면 호오好惡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했죠.”
정치에 입문하던 1996년 조선일보 선정 ‘동료의원 평가 재경위 종합 1위’를 필두로, 겸손하고 성실한 국정 활동으로 높은 점수를 받아온 정 장관은 샐러리맨 생활 18년, 정치인 생활 10년의 비결로 성실함과 책임감을 꼽는다. 그렇다면 그는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왔을까?

“좋은 남편이기 이전에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게 먼저지요. 그런 면에서 여성들과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괜찮은 사람이 되면 낙제는 면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집사람에게 작은 감동은 주지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만들지 않고 평온하게 사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도 건강을 유지하는 정 장관의 비결은 숙면. 잠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든다. 별도로 보양식을 먹는 일은 없다. 다만 비타민 C는 꼬박꼬박 챙긴다.

최혜경 여사는 남들 앞에서 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래도 정 장관과 함께 참석해야 하는 행사나 정 장관 대신 가야 할 곳이 있다면 기꺼이 함께한다. 취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크리스털 소품을 구입하는 정도. 가끔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이 돌아오면 평소 갖고 싶던 크리스털 제품을 구입하는 정도로 즐긴다. 최혜경 여사가 요즘 즐기는 최고의 호사는 혼자서 영화관에 가는 것. 2006년 본 영화 가운데 제일 좋았던 작품으로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오만과 편견>을 꼽는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볼 때에는 가슴이 두근거려 혼났다고 한다.

“(결혼하기로 마음먹을 때에는) ‘잘 참고 양보하고 견디자’고 생각했는데 잘했는지 모르겠어요.(웃음) 결혼 여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저는 결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젊은 시절에야 혼자 사는 게 괜찮을 수 있지만 늙으면 말동무가 있어야 하잖아요. 혼자 사는 재미보다는 가족과 더불어 사는 재미가 더 좋을 것 같아요. 조금씩만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는 것에 행복이 있지 않겠어요?” 정 장관 가족의 행복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진솔함, 자율과 책임을 네 바퀴로 하고 굴러가는 전천후 4륜구동 자동차 같다. 언제 어디에서라도 막힘 없이, 두려움 없이 잘 굴러갈 수 있는.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