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개인전을 선보이는 박여숙화랑의 전시장에서.
30년 만에 전업 예술가로 돌아온 최정화 작가(그간 해외 미술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국내에서 개인전은 근 20여 년 만에 처음 열었다. 전업 작가라는 말에는 이 아이러니에 대한 반어적 속내가 담겨 있다). 종로4가에 있는 작업실과 개인전이 열리는 청담동 박여숙화랑에서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기발한 사자성어를 즐겨 쓰는데, 사무실에 돌아와 긴 녹취를 다시 들으니 무지몽매無知蒙昧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실 그는 이 단어를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느끼는 방법에 대한 무지몽매가 그를 절망케 했다”라는 변주한 문장이 생각났다. 예술 작품 홍수 시대를 살아가면서 마음으로 마실 작품 한 점을 품지 못하는 건, 머리를 쓰지 않고 그저 ‘느껴지는 대로 느끼는’ 우리의 원시적 본능이 메말랐기 때문 아닐까.
1 ‘꽃의 매일’,서울, 2014 2 ‘KABBALA’, 대구, 2013
예술이 거리로 나가도 될까?
최정화 작가의 아버지는 군인이면서 유명 스님의 비서실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국 각지로 여덟 번 학교를 옮겨 다녔고, 종교의 참된 면과 속세의 호된 면을 남보다 격하게 경험하면서 자랐다. 그러니 어린 나이부터 만사가 다 무의미하다고 느껴져 좋아하는 국어와 한문에서만 좋은 점수를 받았고, 고3이 되어서야 선생님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출가해 화실에서 살다시피 한 덕분인지 다행히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중앙미술대전에 입상하면 유럽 여행을 보내준다는 공고를 보고 작품을 응모했다. 그해에도 다음 해에도 연거푸 수상, 유럽의 유명 미술관을 다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유럽에서 본 미술관은 이상하게 답답했고 졸렸다. 사람 사는 곳과 분리된 가상의 공간 같았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를 차렸다. 사람 사는 것과 가까운 일이 가장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1980년대 초반, 당시 사람 사는 모습이 원시인보다 못한 것 같아서 원시 문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예술도 정답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시장과 골목은 아카데믹한 기준을 없애는 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이었죠. 고대에는 예술가가 주술사고, 제사장이며, 연금술사였어요. 지금도 시장에 가면 그 모습이 살아 있죠. 시장 아줌마들은 필요에 따라 쌓기의 달인이 되고 트랜스포밍의 달인이 되어 갖가지 희한한 물건을 만들어내니까요.”
전국의 시장과 골목, 쓰레기장과 폐허촌을 어마어마하게 찾아다니길 30년, 인터뷰하는 날에도 그는 동대문시장에서 어느 아줌마가 만든, 머리 장식도 되고 옷깃 장식도 되는, 입이 떡 벌어지게 큰 깃털 장식을 사왔다.
3 키예프 비엔날레 2012 4 ‘Beautiful, Beautiful Life!’, 프라하, 2012 5 ‘천개의 문’, 서울, 2009
과연 이런 것도 예술일까?
“이걸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려요?” 지난 9월 4일부터 10월 19일까지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최정화 작가의 <총천연색> 전시는 무려 4만 명이 넘는 관람객 방문이라는 보기 드문 기록을 세웠다. 그중 한 관람객이 건축 폐자재 위에 샹들리에가 걸린 설치 작품을 전시한 방 앞에서 작가에게 물었다. 작가는 짧게 사실만 답했다. “평생요.” “제가 모은 물건은 지금 근대사 박물관에도 못 들어가는 하찮은 것들이죠. 하지만 미래에는 이런 것이 유산이 될 겁니다.” 장사할 때 냉기가 들지 않도록 담요로 방석을 돌돌 묶은 시장 아줌마의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 망치와 문짝, 밥상 같은 것이 종로의 작업실에 한가득, 일산의 예술 공장에 가득가득이다. 30년 전, 8년 전, 어제 발견한 것이 오늘이라는 하나의 시공時空에 다 모였다. 최근에는 조선시대에 여인들이 부엌에서 남이 먹다 버린 생선 뼈로 꽃도 만들고 새도 만들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어 잘 아는 일식집에 생선 뼈를 모아달라고 부탁해놓았다. 이렇게 평생 모은 민속, 무속, 비술이 담긴 일상의 물건은 연금술처럼 작가의 머릿속에서 탑으로 기둥으로 변신해 국내는 물론 전세계의 주요 미술관과 광장으로 옮겨가 박수를 받는다.
“작품을 끝내자마자 그 작품은 작가의 것이 아니에요. ‘이래도 돼? 이거 예술 맞아?’라고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답을 하는 건 관람객이죠. 제가 원하는 건 수천, 수만 개의 답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단 하나의 답만 가르칩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 대신 시장에서, 난지도에서 예술을 배웁니다.” 하지만 작가가 이렇게 설명해도 반드시 또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이 작품은 무슨 뜻인가요?” 마치 박완서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우는 방법에 무지몽매한 사람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이 스스로 느끼는 방법에 무지몽매해 설명 없는 감상에 대한 불안 증후군을 앓는다. 그런데도 문화인이 되어야 하기에 미술관에서 가서 작품 대신 설명서를 들여다보느라 시간을 보내고 온다.
“그런 질문에는 ‘고귀한 울림과 떨림’이 작품의 뜻이라고 말해요. 전시를 할 공간을 보면 이런저런 작품을 놓고 싶다는 느낌이 옵니다. 마치 천상과 지상이 만날 때 미세한 진동이 이는 것처럼 우연히 느끼는 울림과 떨림이죠. 관객도 작품 앞에 섰을 때 우연히 울림과 떨림을 느낄 때가 있죠. 그때 물 흐르듯이 감정이 흐르게 내버려두면 그게 예술 감상이에요.”
예술은 미술관에 있을까?
최정화 작가는 법法 자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제약과 한계의 단어로 인식된 법 자는 알고 보면 물 수水 변에 갈 거去로 이루어져 있다.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살라는 게 법이요 그렇게 느끼라는 게 예술인 것이다. 그런데 흐르는 걸 막고 자꾸 다른 걸 들여다보니 관객은 감성이 가물고, 작가는 자신감이 떨어져 팔릴 수 있는 정답 같은 작품만 만들어낸다. 반면, 흐르는 물에는 반드시 발원지가 있는 법이니 최정화 작가에게는 ‘원시바로크’가 작품의 발원지다. “나 자신을 원시 바로크라고 불러요. 물고기를 많이 잡고 싶으면 하늘에 제사 지내고 주술을 하던 게 원시시대였어요. 바로크 시대로 오면서 천상과 지상을 이으려는 이 문화가 극장으로 넘어갔죠. 그리고 지금은 그 극장이 갤러리가 되었고요.”
그는 지난하고 깊숙하게 원시시대를 탐구했다. 종로 한가운데 아직도 이런 집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오래된 단독주택에 온갖 시장 물건을 다 모아놓은 작업실에서 물건만큼이나 많은 게 그가 읽은 민속, 무속, 원시에 관련한 서적이다. 아래층과 위층의 방 두 개가 가득 찰 만큼 책이 많다. 우리나라는 물론 인도, 티베트, 몽골, 시베리아, 칠레, 브라질 할 것 없이 원시와 민속에 관한 책은 다 사서 보고 연구하며 예술적 영감을 축적한 덕분에 기존 작품을 갖고 와달라는 외국 미술관에 그 지역의 풍습에 따른 새 작품을 제안해 놀라게 만들곤한다. 예를 들면, 내년에 태국 최대 쇼핑몰에서 꽃 작품으로 전시를 열자고 요청을 받았는데, 꽃 대신 코끼리 작품을 가져갈 것이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1990년대 초, 최정화 작가는 ‘미술관 안이 아니라 세상, 즉 길바닥에서 살아남아야 그것이 예술이다’라는 자신만의 명제를 세웠다. 이를 줄여서 “예술은 미끼요 삐끼다”라고 표현했는데, 이 명제에 대한 지속적인 시도와 실천이 그가 해외에서 작가로서 명성을 얻은 토대다. 의외의 장소에서 그의 작품을 만난 대중이 울림과 떨림을 느껴 미술관이나 비엔날레 전시장으로 찾아오니, 그의 작품은 실제로 미끼가 된다. 그리하여 예술계와 사회의 거리가 좁혀지면 누구나 물 흐르듯 예술을 감상하고 즐기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공 미술의 이로움이며, 전 세계 미술계가 그를 초대하는 이유다.
종로 4가의 작업실에서. 최정화 작가의 개인전 이 12월 12일까지 박여숙화랑에서 열린다. 내년에는 온양민속박물관, 중국, 태국, 호주에서 전시를 이어간다. 또 이탈리아 로마의 맥시 21세기 국립미술관에서 내년 12월부터 6개월간 그의 전시가 열리고, 미국의 유명 현대미술관인 워커아트센터에서 전시와 더불어 갈라 파티 연출을 선보일 예정이다.
공간 연출도 예술일까? 색색의 플라스틱 소쿠리가 거대한 탑이 되고, 우아한 중세 저택을 통째로 색 보자기로 감싸고, 공항 활주로에서 초대형 연꽃이 피고 지고, 헌 문짝 1천 개가 빌딩에 달라붙은 기발한 작업. 최정화 작가의 작업을 보고 전 세계 관람객은 보통 색다름, 발상의 전환, 끌림, 유머 등의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오래된 물건, 하찮은 물건, 지구 어느 지역의 원시적 풍습과 민속의 가치가 주는 알 수 없는 울림과 떨림도 중첩된다. 이런 울림과 떨림의 매개체는 바로 작품을 놓은 공간. 그는 <반야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처럼, 형체는 헛된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형태는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전시 공간을 보고 그곳에 어떤 울림과 떨림의 인연을 만들어주느냐가 작가의 결정적 역할이다. 이러한 공간 경영의 미감과 조형미는 그가 어릴 때부터 많이 본 서예 작품에서 배웠다고 한다.
“서예의 근간은 글씨를 잘 쓰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잘 경영하는 것이죠. 글을 잘 쓰는 사람은 힘 조절을 잘하고, 붓끝이 발끝이 되며, 천지인이 종이 한 장에 다 적용됩니다. 그들은 획 하나를 그을 때도 어디에 놓을지 미리 알죠.”
전 세계의 문자 책을 닥치는 대로 모은 게 또 30년, 특히 금성문과 갑골문 등의 고대 문자에 관심이 많다. 자연스레 한자 실력이 늘었고, 1980년 말에는 궁체와 갑골상형문자만 사용해 월간 <문학 정신>을 직접 디자인했다. 지금 그 잡지를 펼쳐보니 그리드, 텍스트, 이미지, 종이 질감, 글씨체의 사용까지 30년이 지난 요즘 디자인 트렌드와 딱 맞아떨어진다. 그러니 당시 사회에는 꽤 충격이었으리라. 비슷한 시기에 그가 인테리어 작업을 한 공간도 마찬가지다. 건물주가 시안을 갖고 오면 단번에 거절해서 고집불통 디자이너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인사동의 쌈지길, 인사미술공간 등의 문화 공간과 에스콰이아, 소르젠떼, 보티첼리 등의 패션 매장 그리고 종로의 오존, 홍대의 올로올로, 대학로의 살빠 같은 술집을 그가 디자인했다. 감각적으로 신나게 한판 노는 데 제약이 없던 술집 디자인이 그의 주종목으로, 특히 종로의 오존은 그의 인생이 변하는 씨를 뿌리고 거둔 곳이라 할 수 있다.
“오존이 문을 열자 예술가, 음악가, 잘 노는 사람이 많이 찾아왔는데 그중 후쿠오카 트리엔날레의 참여 작가를 찾으러 한국에 온 일본의 미술 관계자도 있었어요. 제 작품을 궁금해해서 보여주었더니 트리엔날레에 참여해달라고 했고, 전시가 끝나자 작품을 구입해 미술관에 소장했습니다.”
그것이 1993년, 이후 일본의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 요청이 속속 이어졌고 일본 미술계를 주목하는 전 세계 미술관의 초청으로 확대되었다. 작업 영역도 계속해서 넓어져서 몇 년 전에는 월트디즈니사의 갈라 파티를 연출했다. 파티의 테이블 세팅, 조형물, 손님에게 주는 선물까지 L.A.에서 가까운 멕시코의 시장에서 사온 물건으로 마음껏 꾸몄더니 호평이 이어졌다. 다음 해에는 L.A. 전역의 99센트 숍에서 사온 물건으로 꾸몄는데, 파티가 끝난 후에 테이블을 통째로 옮겨 미술관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내년 9월 미국의 워커아트센터가 미술관 기금을 모으려고 여는 갈라 파티 연출도 이미 확정되었다. 그가 꾸민 테이블을 작품으로 판매해 그 비용을 미술관 운영에 사용하는 파티로, 폐허 위에 샹들리에 다섯 개가 떠 있는 공간을 연출할 계획이다.
작업실 내부와 마당, 옥상은 그가 모은 재료와 작품을 놓은 또 하나의 전시 공간이다.
예술이 공공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을까?
해외 전시는 최소 1년 전에 요청을 받는다. 이미 내후년 전시까지 확정했고 지금은 내년 봄의 전시 준비를 시작했다. 전시 요청이 오면 그는 지역의 특징과 미술관 공간부터 연구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작업 재료를 공수할지 현지의 시장과 골목을 돌아다니며 작업 재료를 구할지 결정하는데, 규모가 큰 해외 전시는 그 지역에서 재료를 얻는 경우가 많다. 본격적인 전시 준비에 들어가면 그 지역 사람들을 미술관에서 제공한 장소에 불러 모아 다 같이 신나게 작업을 한다. 오래된 물건을 잇고, 꿰고, 붙이고 쌓는 작업이다 보니 이러한 ‘동참’은 작품 완성의 핵심 과정이자 가치다. 30여 년 전 술집 오존에서 만나 그의 인생 경영자가 된 아내가 비행기를 타고 와서 색색의 소쿠리를 꿰기도 하고 벌써 스물여섯, 주목받는 인디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그의 아들은 청소년기에 10년이 넘도록 아버지를 따라 해외 미술관에 다니며 작업에 참여했다. 이처럼 지역 사람들이 한데 모여 완성하니 그의 작품은 어디에 가든 화제가 된다. 또 머리가 아닌 가슴의 울림과 떨림으로 맺은 인연은 동아줄처럼 단단해서 그와 함께 작업하는 세계의 미술관계자는 대부분 20년 이상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올리브 생산지로 유명한 일본의 마을에서는 그 지역 학생 1백1명의 소망을 새긴 잎으로 올리브 왕관을 세웠습니다. 그 작품이 그곳에 있는 한 그들의 소망이 손주와 그 손주에게까지 이어지겠죠. 학생이 이파리를 받아 자신의 소망을 쓰던 순간부터 작품이 그의 것이 되고 그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부천의 공단에서는 공장 종사자들이 각 공장의 폐철을 갖고 오면 그것으로 꽃을 만들어준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제목도 ‘당신은 꽃입니다’로 붙였다. 정동 서울시립미술관 앞에는 말린 육포로 새빨간 장미를 만들어 지금은 아름답고 한적해진 그 거리에 지난날 아픈 가시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역사가 있었음을 외쳤다. 이처럼 그의 대형 설치 작품은 지역 특성을 이용해 지역 사람과 어울려 작업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올 한 해 국내 미술계에서 가장 화제가 된 문화역서울284의 ‘꽃의 매일’이라는 작품도 서울역 주변의 노숙자들이 참여해 완성했다.
“’꽃의 매일’은 노숙자들이 한 달간 만든 그들의 기념비입니다. 시장에서 산 플라스틱 소쿠리를 꿰고 쌓는 것을 그들이 다 했어요. 그 과정이 작품이고 다 같이 만든 놀이이기도 하죠.” 싸구려 플라스틱 소쿠리를 꿰라고 하니 별짓을 다 한다며 구시렁거리던 노숙자들이 한번 해보더니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자진해서 찾아왔다.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와서 소쿠리를 꿰어주고 가는 이도 있었다. 만날 보는 하찮은 것을 그저 꿰고 쌓는 것뿐인데, 이를 매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제단을 쌓듯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고 고백해서 작가와 미술관 관계자를 놀라게 하는 이도 있었다.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면서 그 하찮은 것이 쌓이고 높아져 밤에 불을 밝히면 멀리서도 다들 올려다보는 아름다운 총천연색 탑이 되었다. 하찮아 보이는 인생도 매일 꿰고 쌓아 올리면 이토록 빛나는 탑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울림과 떨림이 서울역 노숙자에게, 서울역 광장을 지나는 시민에게 물 흐르듯 흘러가 ‘꽃의 매일’은 전시가 끝난 이후에도 거리의 예술이 되어 여전히 서울역 광장에 남아 있다.
작업실 2층에서, 잎을 깨끗이 닦은 식물을 마치 설치 작품처럼 배치했다.
예술가일까 크리에이터일까?
종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은 날은 때 마침 이른 한파가 들이닥친 날이었다. 추위를 피해 집 안으로 들인 초록색 활엽수가 주방 한가운데, 화장실 한가운데, 2층 거실 가득 들어차 있어 보일러를 따끈하게 돌린 집 안에서 마치 브라질의 어느 숲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새빨간 레자 소파, 누군가 쓰다 버린 나무 밥상, 총천연색 빗자루로 꽃꽂이를 한 항아리, 물끄러미 계단을 내려다보는 얼룩송아지 조각상, 이 집 저 집 폐가에서 떼어온 갖가지 거울이 장식된 낡은 단독주택의 또 다른 요상한 점은 이 많은 것이 들어차 있는데도 말이 안 되게 깨끗하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좋은 인테리어는 청소를 잘하는 겁니다. 오늘 저는 두 시간 동안 이파리만 닦았어요. 안 보이는 곳까지 닦는다고 표가 날까 싶지만, 멀리서 보면 기운부터 다릅니다.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껍데기보다 속 청소가 중요하죠. 청소를 왜 해야 하냐면 찬성의 반대말은 반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찬’하는 성찰, 하나는 ‘반’하는 성찰, 어차피 둘 다 성찰의 일종이죠. 성찰은 찬성과 반성이 돌고 도는 것, 천상과 지상도 돌고 도는 것, 울림과 떨림도 돌고 도는 것이니 청소하고 반성만큼 중요한 게 없죠.”
최정화 작가는 그 흔한 휴대폰이 없고 구식 수첩에다 아이디어와 약속 날짜를 쓰면서 지낸다. 국내에 있을 때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다음 전시를 구상하고 아침 식사와 점심 식사 후에 짧은 오침을 잔다. 오후에는 광장시장, 동대문시장, 모래내시장에 가서 두세 시간씩 걸어 다니며 아줌마들에게 예술 수업을 받고, 일어와 영어에 능통하며 요즘은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저녁이 되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낸 청년들을 그의 작업실에 불러 밥을 사고 술을 마신다. 본능적으로 ‘1인분 이상의 기운으로 태어나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지만 그 기준이 바른’ 사람과 코드가 맞다. 찾아오는 사람은 19세부터 75세까지, 대학생부터 문화 예술 명사까지 다양하지만 그는 어떤 손님이 와도 자정이 넘으면 털고 일어나 집에 가서 잠을 잔다. 그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산에 있는 예술 공장에 가서 작품의 제작 상황을 살피니 그야말로 인생 자체가 ‘풀타임’ 작가다. 아내가 최소 가구만 놓아 여백처럼 비운 집에서 책을 읽거나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게 유일한 쉼이니 그의 전시 ‘생생활활生生活活’처럼 그는 예술과 생활이 합일을 이룬 생활의 달인이다.
“물이 범람하면 정작 마실 물이 없어요. 그래서 맑은 물이 가장 필요한 게 홍수때인데, 크리에이터가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특별한 게 아니라 다들 하던 생각을 끄집어내고 건드리는 것, 그건 원시시대부터 생활의 달인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죠. 그래서 생활의 달인이 곧 크리에이터입니다.”
생활의 달인, 즉 크리에이터들의 공통점은 장황한 작품 설명서나 작가 노트가 없다는 것. 대신 그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언가를 만들어 세상을 재미있게 해준다. 그들은 그저 느끼고 생각나는 대로 뚝딱뚝딱 삶의 연금술을 부려 생생활활 자신과 주변의 삶을 활기차게 이끌어간다.
시장 아줌마가 만든 노란 플라스틱 의자가 예술인지 아닌지, 답은 당신에게 있다. 노숙자가 서울역 광장에 쌓아 올린 총천연색 소쿠리 탑이 예술인지 아닌지, 그 답도 당신에게 있다. 당신의 마음이 유일무이한 답이고, 최고의 예술비평이다. 그러니 그 답을 끄집어내려 크리에이터는 또 다른 탑을 쌓는다. 울림과 끌림이 돌고 도는 세상, 궁극의 예술은 바로 이런 세상이다.
- 최정화 작가 당신 마음이 유일무이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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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우는 방법에 대한 천생의 무지몽매가 그를 절망케 했다.” 박완서 작가의 장편 소설 <오만과 몽상>의 한 구절이다. 최정화 작가의 작품, 그 속에 담긴 유머가 침이 되어 예술에 대한 우리의 오만과 몽상을 찌른다. 그저 느껴지는 대로 느끼는 방법에 대해 무지몽매하던 사람, 그가 혹시 당신이냐고 총천연색 소쿠리 탑이 익살스럽고도 따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