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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무용의 살아있는 역사, 무용가 김백봉 나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무용의 큰 지붕인 김백봉 서울시립무용단장이 지난 2월 팔순을 맞았다. 그의 춤 이력이 곧 우리 무용의 역사. 행사 때마다 볼수있는 화관무와 부채춤을 창안한 무용가가 바로 그이다. 그의 삶을 기리는 헌정공연‘한국 신무용 80년사와 김백봉의 삶’이 오는 3월29일부터 4월4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꿈이자 밥이었고, 놀이이자 노동이었으며, 기쁨이자 고통이었던, 그리하여 온 삶이 춤으로 집약된 그 여인의 생은 지금 너무도 찬란하게 빛난다.
photo01 식물이 추는 춤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아마도 그 무희는 나팔꽃이었을 것이다. 컴컴한 땅속 무대로부터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흙덩이를 밀치며 봄볕 환한 땅 위 무대로 올라온 그것은 낭창낭창한 허리를 흔들며 나긋나긋한 넝쿨손으로 허공을 어루는 것이었는데, 무희와는 사뭇 다른 인생관을 지닌듯 시종 뻣뻣한 죽은 나무꼬챙이 버팀대를 뜨겁게 휘감으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요컨대 내가 본 것은 나팔꽃이 씨앗부터 움터 자라는 모습을 촬영한 고속 필름이었다. 식물을 늘 한군데 붙박혀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정물로 생각해온 나로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그런 다음 유심히 관찰해보니, 나팔꽃만이 아니라 모든 식물, 나아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춤을 춘다는 것을 발견했다. 홍학처럼 우아하고 벌새처럼 재빠른 춤도 있지만 달팽이처럼 수줍고 늘보처럼 느린 춤도 있다는 걸 알았다. 살아 있는 것들은 발끝을 세우고 수직을 유지하려는 것이며, 죽은 것들은 모두 수평으로 스러진다. 생명의 시작은‘춤’이고, 생명의 끝은‘멈춤’이니 춤으로 와서 춤으로 간다. 삶을 짐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는데, 삶이 춤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다만 머릿속 깨달음일 뿐, 몸의 깨달음이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부지깽이나 바지랑대와 사촌인‘몸치’를벗어나지 못했으니.
봄이 오는 길목, 자타공인의 몸치가 춤꾼을 만나러 갔다. 꽁꽁 언 시냇물이풀리자 성급한 개나리들이 픽픽 노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으나 제법 꽃샘추위가 옷깃을 파고 들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립무용단장실을 찾았다. 갈색이 감도는 흰머리를 곱게 쪽찌고 붉은 영산홍빛 양장을 곱게 차려입은 이가 반갑게 맞아준다. 바로 서울시립무용단단장이자 한국 무용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백봉선생이다.
1927년평양에서 태어난 그이는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로, 김백봉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부채춤, 화관무, 장고춤, 만다라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그이는 독특한훈련법과 창작법으로 한국무용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으며, 한국예술평론가협회에서 뽑은‘20세기를 빛낸 예술인’에 선정되기도 했고, 2005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을 수장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매일매일 시계같이 이곳에 나와서 일을 하니까 건강한 편입니다. 달리 아픈데는 없는데 감기가 들어와서 오래 동행하는군요.”
“요즘 준비하고있는 공연은 어떤것인가요?”
“5월 정기 공연에 올릴 무용극 <심청전>을 준비하고 있지요. <심청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아직도 심금을 울리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잘 대해주면서도 부모한테 못하는 건 다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제가 저를 생각해도 부모님 보답을 잘 못하는 것같아요. 부모님 덕택에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죠. <심청전>은 인간의 근본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정기 공연도 공연이지만 올해 무용계에는 팔순을 맞는 선생님의 예술과 삶을 조명하는 커다란 행사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매우 바쁘실 듯 싶습니다.”
“네. 하지만 그건 후배들의 헌정공연이라 제가 크게 바쁠 건 없어요.”
‘한국 신무용 80년사와 김백봉 예술의 삶’이라는 주제로 3월29일부터 4월4일까지 김백봉의 예술세계를 집대성하는 전시회와 공연이 세종문화회관 미술관과 대극장에서 막이 오를 예정이다. 전시회에서는 김백봉 창작작품에 대한 해설과 다양하게 활동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 복식, 소품 등수백 점이 선보이며, 공연은‘부채춤’‘화관무’‘만다라’등 대표작품을 엄선하여, 김말애 감독(경희대학교 무용학부장)과 김백봉무용단 안병주단장의 재안무로 무대에 올릴 예정이란다.
 
 
photo01 “팔십 평생을 오로지 무용에만 전력을 기울여오셨는데, 혹시 무용 이외에 다른일을 해볼걸, 하고생각하신적은 없나요?”
“저는 한 번도 무용말고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있지요. 내가 하는 일은 왜 돈을 써야만 할 수 있는 일인가. 농부는 상추를 심으면 돈 들이지 않고도 따 먹는데, 내가 하는 일은 다 돈이 들어요. 나는 왜 먹고 사는 벌이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는 걸까, 하고 고민한 적이 있어 하지만 한참이 일을 하다 보니, 학교 선생도 되고, 밥도 먹게 되더군요. 다른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어요. 저는 춤도 좋아했지만, 무대의상을 만드는 바느질도 좋아했어요. 무용은 종합적인 창작물이라서 여러가지 손이 가는 일이 많지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대에서 거의 다 해봤어요. 그런데 음식 만드는 것 만큼은 솜씨가 없어요.”
“늘 무대에서 사시느라 살림에는 소홀하셨던게죠?”
“그래요.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이 다 무사히 커준 게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몰라요. 저는 무용에 미쳐서 아이들을 일일이 거두지 못했어요. 큰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직 어려서 학교에도 못가는 작은 아이를 집에서 혼자 놀게 할 수가 없어서 큰딸이 학교에 데리고 다녔대요. 하루는 비가 오니까, 큰딸이‘우리 동생이 밖에서 비 맞아요’하고 이야기를 해서, 선생님이 비를 피하게 해주었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전해주어서 알았어요. 대학에 몸담고 있을 때에도 통금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지요.”
“바깥 어른께서 다 이해해주셨나요?”
“88올림픽 때였어요. 그때도 공연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지요. 하루는 집에 들어가니 남편이‘당신은 집이필요 없으니 이 집을 팔자’고 해요. 올림픽을 치르든지 집안일을 하든지 둘 중에 선택하라고도 했죠.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내 마음을 다 이해해주던 분이었지요.”
그이의 남편 안제승 씨 역시 경희대학교 교수와 대한무용학회 회장을 역임한 학자이자 무용인이다.
“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나중에는 그만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일년 열두 달 공연 계획이 밀려와서 눈코 뜰새가 없어요. 무용이다, 뮤지컬이다, 학교 축제다 마치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제 기간에 맞추어서 공연을 올리려면 늘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매달려야 하지요. 마치 누가 방망이를 들고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죽어라 달아나는 기분으로 일을 해왔어요. 공연을 올리기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느라 바쁘고, 작품을 올려놓고 나면 관객들의 반응이 좋은지 나쁜지 공포 속에서 지켜보아야 하죠. 평이 나빠도 문제지만 평이 좋으면 다음이 더 무서웠어요. 그 높은 언덕에서 뒷걸음질 치지 않으려고 고민을 하게 되니까요. 무용을 사랑하면서도 무용으로 번뇌하면서 보낸 세월이었지요.”
“어려운 고비를 지날 때마다 힘이 되어준 것이 있다면요?”
“6.25를 겪으면서 느낀 게있습니다. 참혹한 주검도 많이 보았고, 저 자신도 이산가족이 되어 피난살이를 하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헤쳐 나왔지요. 그때는 그저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 자유지, 다른 게 자유가 아니에요. 그런데 신통한 것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빈손이었지만 살아서 움직이니 입을 옷이 생기고, 먹을 밥이 생기고 다시 살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삶의 어려운 길목에 다다를 때마다‘이건 소나기에 불과하다. 큰 비가 온 다음에는 햇볕이 더욱 더 쨍쨍하지 않더냐’하고 용기를 갖게되었습니다. 고통과 번뇌가 클수록 더 큰 행복과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이 경험은 창작활동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통과 번뇌가 클수록 그 속에서 좋은 작품이 태어난다고 믿게 된 거지요. 나는 지금도 어려운 지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저사 람이 지금 6.25를겪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지요. 교통사고나 큰 질병 같은 것들도 모두 6.25지요. 저마다의 6.25속에서도 살아갈 길을 찾아가는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봅니다.”
저이는 불가에서 이르는‘망상즉보리’를 몸으로 체득한 것처럼 보인다. 번뇌망상과 보리(수행으로 얻어지는 깨달음의 지혜)가 따로 있지 않고, 번뇌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화두로 바꾸어 깨달음을 얻어내는 것이 불교적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마치 법문을 듣는 것같네요. 혹시 어떤 종교를 갖고 계신지요?”
“제대로 공부한 건 없지만 불자입니다. 때론 스님들이 제‘만다라’춤을 보고 놀라곤 해요. 하지만 제가 불교에 대해서 스님들께 여쭈면 춤은 대단한 경지지만 불교 지식은 별로 없다고 웃곤 하셨지요.”
저이는 책보고 공부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것이 창작에는 오히려 도움이 된 측면이 있단다.
“저는 책도 잘 안 보지만, 남의 작품도 잘 안 보러 다녔어요. 남의 작품을 보면 은연중에 닮기 마련이거든요. 저는 항상 남들과 다른 방법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어요. 이를테면‘노들강변~’하면 사람들은 쉽게 하늘하늘한 버드나무를 떠올리지만, 저는 오히려 거센 폭풍에 휘날리는 버드나무를 표현하려고 했지요. 마찬가지로 무용도 우리 춤, 우리 무용을 어떻게 하면 우리식으로 표현해낼 수있는가를 고민해왔지요. 내 작품들은 그 고민의 결과물입니다.”
책을 보지 않는다 해도, 누구나 자기 생각을 길어 올리기 위한 생각의 원천이 하나쯤 있는 법이다. 그이에게 샘솟는 창작의 원천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흔히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춤은 언제부터 배우셨어요?’
하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제 작품 세계는, 엄마 등에 업혀서 겨드랑이 사이로 엄마 젖 만지면서 멀리 달래 캐는 언니들 보는 그때 시작했다고 말하곤 하지요. 몸으로 하는 것만이 무용이 아니지요. 내 몸과 정신을 만들어 준 것은 그때의 소중한 자연 체험입니다. 저는 어릴 때 별명이‘말괄량이’‘덜래발이’‘사무라이’였어요. 덜래발이는 덜렁거려서, 사무라이는 눈썹이 까맣고 일자여서 그렇게 불렸지요. 저는 전쟁놀이를 하면 남자애들도 못 당하는 왈가닥이었어요. 나무도 잘 타서 도토리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산으로, 벌판으로, 냇가로 쏘다니기를 좋아했지요. 기생잠자리를 잡고, 땅거미집을 들여다보면 마치 우주의 본면목을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죠. 그런 자연 체험들이 나의 창작 세계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훌륭하신 것은 제가 무엇을 하더라도 된다, 안된다 간섭하지 않았어요. 무엇이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도록 놓아두었죠. 인간은 말을 못하는 시절에도 자기 식으로 세상과 사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규격화해서는 안됩니다. 어릴 때는 공기를 공기인 줄 모르고 먹는 것처럼 생각도 모르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나중에 삶의 양분이 되고 자양이되지요. 아울러 예술 창조의 무한한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시절 규격화시키는 교육은 정신의 성장을 개발시키기는 커녕 중지시키는 겁니다.”
 
1. 어릴 때 최승희의 사진을 보고 무용가가 되리라 마음먹은 김백봉 선생을 빼고는 우리 무용을 이야기할 수 없다. 1943년 10월
 
photo01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이의 유년시절로 흘러갔다. 1927년 평양에서 태어난 저이는 평양사범부속국민학교와 평양 명륜실업여학교를 졸업했으며,194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최승희선생으로부터 무용공부를 하게 된다.
그이의 아버지는 평양에 있던 외국인 회사 사장의 자가용을 모는 기사였다. 그러나 요즘의 운전기사와 비교하면 곤란하다. 그 당시 평양에는 승용차가 두 대 밖에 없었는데 그 중 하나를 운전하는 아버지의 직업은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 트럭을 몇대사서 운영하기도 했고, 염료공장을 경영하기도 했단다.
“경제적으로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셨군요?”
“아주 풍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무용을 공부하고 발표회를 할 때 큰 뒷받침이 되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아버님의 인생을 내가 춤으로 말아먹은 거예요. 제자들에게 가끔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나 죽으면 나보고 절하지 말고 우리 아버지 보고 절하라고요.”
저이가 처음 무용과 인연을 맺게 된것도 아버지 때문이었단다. 저이가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였다. 잠을 자는 저이를 깨워서 몇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게 바로 무용가 최승희의 사진이었다. 아버지는‘이 무용가는 한국의 자랑’이라고 말해주었다. 어린 뇌리에‘나도 장차 자라서 무용가가되어야겠다’는 꿈이 새겨졌다.
“사람은 큰 포부를 갖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최승희 선생님처럼 열심히 무용을 해야겠다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무용가의 길을 걸어왔지요. 하지만 더 원대한 꿈은 미처 꿈꾸지 못했어요. 꿈은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만 설정하게 되는데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더 큰 꿈을 설정해야해요. 사람은 꿈을 설계하면 그리로 가게 됩니다.”
저이가 꾸고 싶었던 더 큰 꿈 가운데 한 가지는‘무용 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던 듯하다.
저이가 자라서 명륜실업여학교를 다니던 열네 살무렵 최승희가 진남포로공연을 왔다. 공연을 보고 싶다 했더니 아버지가 휴가를 내고 수업 중인 학교로 찾아왔다. 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서 특별열차를 타고 아버지와 함께 최승희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그때 그 공연 모습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최선생님이 추는 아름답고 맵시있는 보살춤에 흠뻑 빠졌지요. 최선생님이 춤을 추면서 마치 나만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객석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 공연은 내가 순수한 관객의 입장에서 본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었지요. 최선생님과 함께 있을때는 객관적으로 순수한 감상을 하기가 어려웠지요.”
공연을 본 그이는 아버지와 함께 분장실로 최승희를 만나러 갔다. 그때의 키가 지금의 키와 비슷하다니 당시로선 꽤나 큰 편이었다. 키도 클뿐만 아니라 용모도 아름다웠다 한다. 최선생은 한눈에 그이의 무용가적 자질을 알아보았다. 일본에 있는 연구소로 건너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혹시 내가 허영기로 무용을 하려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서약서를 쓰라고 했어요. 창호지에다가‘나는 끝까지 무용을 하겠다’고 두 장을 쓰고 나니까, 아버지가 그걸 기름에 절여서 한 장씩 나누어 가졌지요.”
마침내 1941년 6월 21일 불과 열 네 살의 소녀인 그이는 혈혈단신으로 스승이 있는 일본 땅을 밟게 된다.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동경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여자 아이 혼자서 찾아갔다니 저이도 저이지만 저이를 보낸 부모의 배포도 놀랍기만 하다.
“그 험한 길을부모님은 어떻게 어린 따님 혼자 보낼 생각을 하셨을까?”
“떠나기 전에 아버님이 말씀하셨어요. ‘나는 이제 너의 부모가 아니다. 선생님이 부모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해라.’저는 집에서는 무척이나 개구쟁이였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려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자식을 품에 두고 애면글면하는 여느 부모들과는 다른 점이 있던 듯하다.무사히 동경에 도착한 그이는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숙식을 하게 된다.
청소도 하고, 잔심부름도 도맡아 하며 틈틈이 무용 공부를 했다. 그이는 스승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때 최선생님 곁에서 작품 만드는 전 과정을 지켜본 것이많은 도움이되었지요. 훗날 내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그때 기초를 정확하게 잡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무언가를 배우려면 하루를 배우더라도 정말 좋은 스승한테서 배워야 합니다.”
최승희는 그이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동서이기도 하다. 최승희의 남편은 문학평론가 안막인데, 그이의 동생인 안제승 씨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안제승 씨는 형님의 권유로 일본대학 예술학부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우리는 스승과 제자로 만났어요. 내게 과외 공부를 가르쳐주었는데 이마가 넓고 눈이 쑥 들어가서 나는 좀 무서웠어요. 더러 일본에 공연 보러 오시던 아버님과 시아주버니가 상의해서 결혼시킨 거죠. 그때 남편은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이어서 제가 열여덟 되던 해에 서둘러 결혼을 시켰어요.”
항상 깔끔하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책을 가까이했던 학자 남편은 좀 어려운 사람이었단다.
“돌아가시고 나니까 비로소 얼마나 훌륭하고,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었는지 알 것 같더군요. 하늘에서 내린 내 심부름꾼처럼 보여요. 자기를 희생시키고, 나 같은 무용가를 만들어 놓고 가셨죠.”
바깥 어른은 1996년에 타계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수학을 한 그이는 17세 때 첫 공연을 하고, 최승희무용단의 단원이 되어서 일본, 만주, 중국, 동남아시아 등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최승희의 춤맥을 이어가게 된다. 1946년에는 평양에 있던 최승희무용연구소 부소장 겸 상임 안무가로 활동했고, 1949년에는 제1무용수로활약했다. 6?25 전란 중에 월남을 한 그이는 박기홍에게서 승무를, 이동안으로부터 태평무를 전수받았다. 화관무, 부채춤과 더불어 무용극 <심청전>
<물긷는 처녀> 등2백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86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축제 등을 통해 그이의 무용세계가 세계로 알려지게 된다.
“선생님은 한국적인 무용을 추구하신 분으로 알려졌는데요, 한국무용의 특징과 매력은 무엇인가요?”
“한국무용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정중동’을들수있습니다. 한국적인 것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안에서 밖으로 표출됩니다.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남방의 무용은 자기 형식에 따라서 약속이 있어요. 우리 춤은 얼쑤 얼쑤 하고 마음이 동하는 대로 춥니다. 또 무용의 소재가 아주 풍부합니다. 궁중무용, 종교무용, 민속 무용이 있고 지방마다 색깔이 다른 춤이 있지요. 재미있는 것은, 춤에 사용된 도구들을 모두 태워버리는 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탈춤의 가면도 공연이 끝나면 모두 태워버렸지요. 우리 문화의전통은 옹달샘과 같아요. 물을 푸면 없어질 것 같은데, 다시 고이곤 합니다.옛날 일본의 스승도 한국은 예술의 보물창고라고 부러워했지요. 나는 한국사람으로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1. 김백봉 선생의 춤은 예나 지금이나 신명으로 가득 차 있다. 보는 사람들도 들썩들썩 어깻짓을 하게 만든
 
photo01 그러나 저이는 서양 문화의 영향으로 점점 한국적인 것의 색채가 빛을바래는것에대해안타까움을갖는다.
“요즘에는 텔레비전을 보아도, 농촌 사람들조차 얼쑤 하고 어깨가 들썩이는 게아니라 손가락만 쳐들고 디스코를 춥니다. 한국 사람의 탈을 쓴 서양사람들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옛날에는‘바나나’라는 말이유행했어요. 겉은 누렇지만 속은 하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지요. 그런데요즘은 안팎이 하얘요. 한국적인 것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구닥다리 춤을 추자는 건 아니에요. 다만 뿌리에는 우리 감정이 있어야 하지요. 그것이 있어야 세계 제일이 될 수 있어요.”
“선생님이 부채춤을 창안할 당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던데요.”
“아, 현몽을 하고 그 춤을 구상하게 되었어요. 꿈에 명주로 길게 계단을덮은 한옥엘 갔는데 누가 부채를 건네줘요. 부채 끝에는 살풀이 수건 같은게 달려 있고 향기가 나요. 그부채를 들고 한 바퀴 빙 도니까 수건이 구름처럼 날더군요. 그때 어디선가‘부채를 펴봐라. 방방곡곡에 향기가 날 것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부처님이시다’하는 거예요. 그때 부처님 모습을 보았어요. 황송해서 고개를 제대로 못 든 탓에 부처님의 상호는 보지 못하고 다리와 손만 보았지요. 아직 이북에 있을 때였는데 무속적인 소재라 해서 발표를 못했지요. 그뒤에 이남으로 피난을 와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돈을 모았어요.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부채를 사고, 옷감을 사서 의상을 새로 짓고 해서 1954년에 처음으로‘부채춤’을 선 보이게 된 거지요.”
“무용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이 있다면요?”
“보람을 느낄 때보다 아닐 때가 더 많지요. 늘 아쉬움이 남아요. 무용은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이미지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완벽해야 합니다.”
‘무용을 지우개로 지울수없다’는 말이 신선하게 여겨졌다. 무용이야말로 재현 불가능하고, 덧없는 시간속에 완벽히 소멸하는 공연예술의 하나가 아닌가. 소멸해버리므로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해버리므로 오히려 완벽해야 한다는 역설처럼 여겨졌다. 붓다도‘삶은 허망한 것이니 열심히 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춤추는 즐거움이 있다면요?”
“춤속에 들어가서 춤과 자신이 완벽히 일치가 되는거죠. 세상의 모든 잡념을 잊어버리고, 춤을 잘 추어야겠다는 것도 잊어버린 몰아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무용의 최고 즐거움입니다.”
“무용을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다면요?”
“몸은 자꾸 움직이라고 있는 겁니다. 가만히 모셔두면 망가지지요. 무용을 하면 자꾸 신체를 움직이게 되니 저절로 건강해집니다. 춤추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과 같아요. 건강한 몸을 갖게 된다는 것도 커다란 매력이지요. 또 하나는 세상에 없던 것을 다 가져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왕이 되기도 하고 시녀가 될수도 있지요.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을 춤추는 동안에 모두 이룰 수 있습니다.”
삶을 견딜 것인가 누릴 것인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견디는 것보다는 누리는 것이 고수라고 생각했다. 좀 더 시적으로 표현하자면‘삶은 추는 것’이라고 중얼거려 보기도 했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는것’, 얼마나 아름답고 부러운 일인가. 그러나 나는 오로지 춤꾼으로 살아온 저이를 만나보면서,아무도 평생 춤만 출 수는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저이는 춤속에 일이 있고,일속에 춤이 있지, 춤 따로 일 따로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한없이 날아오르는 춤을 일처럼 잡아주고, 한없이 무거운 일을 춤처럼 들어 올릴 수있다면 그이야말로 진정한 춤꾼이 아닐까. 한 평생 쉬지않고 춤을 일삼아온 저이야말로 우리가 눈여겨보야야 할 춤꾼이자 일꾼인 것처럼 보인다. 삐뚤빼뚤 꽃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의 날갯짓이 춤이자 노동인 것처럼.
이북 사투리가 남아 있는 김백봉 선생님의 말씀이 참 정겹고 듣기에도 좋습니다. 큰할머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있는 듯 합니다. 독자님들도 후학들이 준비한 헌정공연(3월39일부터 4월4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문의 02-312-7545)에 가서 신명을 느껴보시는 게 어떨까요? 김백봉 선생님께 한방 성분으로 만들어 한국적이고 품격이 넘치는‘더 히스토리오브’공진향 세트를 선물로 드립니다.
“몸은 자꾸 움직이라고 있는 겁니다. 가만히 모셔두면 망가지지요.”십 평생을 움직이며 살았던 김백봉선생의 모습은 참 곱고 청정하다. 팔순이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1. 왼쪽 1950년대‘부채춤’을 실연하는 모습. 오른쪽 오래전의 가족 사진. 김백봉 선생께서 둘째 딸 안병주 씨(현
 
반칠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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