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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테이블 웨어 디자이너 엘라 도란 동심으로 찍은 꽃 한 송이가 세상을 화사하게 물들이다
수년 동안 디자이너, 특히 패션과 관련된 디자이너를 취재할 때마다 직업병처럼 느끼는 스트레스가 있다. 세계적인 구두 디자이너를 만나러 갈 때는 신고 갈 만한 변변한 구두 한 켤레도 없다는 생각에, 에스모드의 패션 디자이너를 인터뷰할 땐 몇 시간 동안 옷장을 뒤적여도 입을 만한 옷이 없다는 생각에 푸념을 하기 일쑤다. 그러나 지금은 테이블 웨어 디자이너를 만나러 갈 차례. 딱히 외모에 신경 쓸 일이 없어서 홀가분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주방에 쌓여 있는 그릇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흔히 그릇을 보면 그 주인의 센스를 알 수 있다 했건만 지금 눈앞에 쌓여 있는, 도무지 짝이 맞지 않는 정체불명의 그릇이 발길을 무겁게 만들 줄이야! 영국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지가 선정한 ‘영국 테이블 웨어의 여왕’과 ‘감히’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가 싶어 스스로 위로해보지만, 이번 만남 역시 여느 디자이너를 마주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솔직한 자연이 세계적인 디자인이다
테이블 웨어를 예술 작품으로 승격시켰다는 찬사를 듣고 있는 30대 중반의 디자이너 엘라 도란Ella Doran. 최근 인테리어 월간지 <엘르 데커레이션> 영국판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100인의 디자이너’로 선정된 바 있는 그는 전통적인 영국 도자기에 디지털 사진을 접목한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일약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주로 정원과 꽃 사진 작업을 해온 엘라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색상의 디지털 실사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개인 브랜드와 숍을 운영하면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도 활동하며, 현재 다양한 브랜드와 합작을 통해 작품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엘라 도란이 유명세를 얻기 사작한 것은 바로 꽃과 식물 등을 정교하게 그려 넣는 전통적인 핸드페인팅 세라믹의 대명사 ‘포트메리온Portmeirion’사에서 그의 디지털 플라워 시리즈를 채택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면서부터다. 고전적인 보타닉 가든의 꽃과 나뭇잎 그림을 고수하던 포트메리온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엘라 도란이 촬영한 장미, 물망초 사진을 프린팅한 세라믹을 선보였고, 이는 전 세계적으로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자연, 특히 꽃은 제아무리 뛰어난 화가가 최고의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절대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빛깔을 지니고 있지요. 굳이 페인팅으로 표현할 필요 없이 그 아름다운 빛깔을 그대로 식탁까지 가져오고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림은 실제 햇빛 아래에서 받았던 감흥을 그대로 전하질 못할 것 같았거든요.”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화원에 가득 피어 있는 꽃에 절로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국내에서보지 못했던 신비롭고 화려한 빛깔의 탐스러운 꽃들은 이곳 디자이너들에게 무한한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정원 문화가 발달한 영국에서는 꽃을 모티프로 작업하는 디자이너들이 그 어느 나라보다 많으며, 특히 최근 들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엘라 또한 물망초 사진 디자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세계 유수의 브랜드와 함께 일을 해왔다. 포트메리온 외에도 인테리어 브랜드로 덴마크의 도무스Domus, 영국의 힐스Heals와 해롯Harrods, 스웨덴의 이케아IKEA, 뉴욕 패션 브랜드 DKNY, 큐 가든Kew Gardens 등등 그녀의 이름을 빌리는 브랜드들이 늘어가고 있다. 덕분에 젊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좋은 디자인은 곧 좋은 비지니스’라는 공식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주자로도 손꼽히고 있다. 
“제 주변에도 좋은 작품을 디자인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걸 비즈니스로 연결하긴 쉽지 않죠. 좋은 디자인을 상업화하기 위해선 우선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제 디자인이 요즘의 디지털 트렌드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운 좋게 포트메리온과 일하게 되면서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던 겁니다.”

1 엘라 도란의 플라워 사진을 프린팅한 포트메리온의 티포트.
2 엘라 도란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꽃이다. 꽃을 클로즈업한 사진을 방석과 블라인드, 그릇에 접사한 엘라의 작품들은 영국 핸드 페인팅의 전통과는 또 다른 모던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집안에서도 그녀의 방석과 작품에 나온 꽃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사소한 것도 특별하게 보는 심미안

엘라 도란은 ‘운이 좋아’ 유명해졌다지만 알고 보면 그 누구보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실력을 쌓아온 ‘노력파’다. 대학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텍스타일 도안을 하면서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브랜드를 꿈꾸게 되었단다. 남들처럼 사진학교를 졸업했거나, 화려한 스튜디오나 사진 장비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35mm 니콘 필름 카메라 한 대로 시작, 지금도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연광을 조명 삼아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꽃은 런던 시市의 화원에서 특별히 공급받고 있어요. 비록 제가 직접 키운 꽃은 아니지만 그 모습만은 제가 직접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무실은 어둡기 때문에 채광 조건이 좋은 집에서 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사진 작품을 하는데 왜 조명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아름다운 꽃을 돋보이게 하는 최고의 조명은 태양, 자연광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엘라 도란은 솔직하다. 굳이 꾸미려고 하지도 않고,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인터뷰 장소도 격식을 차린 사무실보다는 편안한 자신의 집을 택했고, 사람 사는 모습은 똑같다며 기꺼이 침실 문까지 열어주었다. 화려한 브랜드로 외모를 치장하지도 않았고, 값비싼 소품으로 집안을 꾸미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처럼 소박한 멋이 그를 남다른 모습으로 더욱 빛나게 하고, 그가 사는 집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넘쳐 흐른다. 이른 아침 아이들을 챙겨 보낸 엄마의 분주함과 오후가 되면 넓은 거실과 주방을 오가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숨소리가 공존하는 따뜻한 공간.
“다섯 살, 일곱 살 된 아들들이 있어요. 여느 엄마들처럼 하루가 정신 없이 고단하게 돌아간답니다. 하지만 제 디자인의 원천은 바로 이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이 그린 추상적인 동물과 꽃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어요. 아이들 눈만큼 순수한 디자인은 없습니다. 두 아들 덕분에 테이트 갤러리와 함께 아이들을 위한 알파벳 책과 소품들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그의 부엌, 냉장고 옆에 걸려 있는 알록달록한 빛깔의 알파벳 모티프의 아이들 앞치마도 바로 엘라의 작품이다. 개구쟁이 아들과 함께 요리하고 그림도 그리는 행복한 일상을 꿈꾸는 디자이너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앞치마. 꽃과 식물 등 자연을 주제로 하는 그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연의 화사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디자인은 그리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입니다. 그 모티프 또한 우리 주변에서 시작되고, 사용되는 곳 또한 우리의 일상이지요. 그래서 저는 일상을 보는 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작업실 책상에서 디자인을 찾진 않죠. 그냥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아니면 여행을 하다가 카메라에 잡힌 장면을 바로 디자인화하고 있어요.”

1, 2 대도시에서는 정원이 없는 탓에 창문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엿보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엘라 도란의 꽃과 나뭇잎 블라인드를 설치하면 마치 나뭇가지가 창가에 드리워진 듯한 편안한 느낌은 물론 답답한 커튼을 드리우지 않아 채광 걱정도 없는 게 장점이다.
3, 4 엘라는 특별히 꽃을 사랑한다. 집안 곳곳에 꽂혀 있는 꽃들은 자연을 쉽게 접하기 힘든 아이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다. 덕분에 ‘ 어머니의 날 ’ 에는 아이들이 직접 종이 꽃과 화분을 만들어 엘라에게 선물을 했다고 한다.
5 디자이너인 엄마와 뮤지션인 아빠를 닮아서인지 두 아들 모두 예술에 소질을 보인다. 큰아들이 학교에서 만들었다는 들소인형은 엘라가 아끼 는 ‘ 소장 품 ’이다.
6 엘라는 주로 집에서 사진 작업을 한다. 주방으로 이어지는 거실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자신의 작업실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놀이에서 영감을 얻어 테이트 미술관 지원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알파벳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순수한 동심이 최고의 자연

엘라 도란은 디자인을 할 때 지나치게 오래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너무 오래 고민하다 보면 군더더기가 많아지고 처음에 생각했던 주제에서 벗어나기 쉽다는 것이 15년 베테랑 디자이너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 생각한 디자인을 내일까지 고민하지 않는단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다시 고치는 법이 없지요. 그저 그림을 그리고 나면 새 종이를 찾지, 이미 그린 그림에 집착하지 않아요. 처음엔 저도 한 가지 디자인을 두고 몇 달을 고민하곤 했어요. 하지만 이제 이거다 싶으면 사흘 이상 붙들고 있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포착하는 디지털 사진 작업이기에 그렇겠지만, 가능한 한 이것저것 덧붙이지 않죠. 자연에 더 이상 무슨 치장이 필요하겠어요.”
자연과 동심에 대한 그녀의 배려는 플라스틱 테이블 웨어에 잘 나타나 있다. 5세 미만의 아이들을 키우는 주부들이라면 한 번쯤 사용해봤을 만한 플라스틱 식기. 깨지지 않고 가벼워 아이들이 사용하기에 좋다 싶지만 조악한 디자인과 화학 원료 때문에 꺼림칙한 것이 바로 플라스틱 용기다. 하지만 엘라는 아이들의 즐거운 식사를 위해 정원의 들꽃 사진을 플라스틱 접시 위에 코팅, 세련된 그릇으로 승격시켰고 딱히 이렇다 할 유아용 식기를 찾지 못했던 주부들로부터 이 디자인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물론 인체에 무해한 코팅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것을 밝혀둔다. 플라스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엘라 도란이 눈길을 돌린 곳은 ‘요요 세라믹’으로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플라스틱 재질과 흡사한 느낌의 도자기다. 마치 플라스틱 같은 세라믹은 ‘이것이 플라스틱이야? Is this plastic?’이라는 재미 있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는데 엘라 도란은 여기에 자연스러운 꽃 사진을 접목해 한층 고급스러운 플라스틱의 느낌을 연출한 것이다.
“플라스틱은 매우 실용적인 소재예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주방에서 안주인 대접을 받지 못하죠. 그래서 플라스틱을 닮은 도자기 제품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플라스틱처럼 생긴 도자기, 도자기처럼 생긴 세련된 플라스틱 식기. 재미있는 생각이죠?”
엘라 도란의 작품을 접해본 적이 없다면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주인공의 집에 놓인 세련된 소품들에 주목해보길 바란다. 세계적인 인테리어 브랜드 이케아IKEA의 카탈로그를 눈여겨보는 것도 좋은 방법. 그의 사진과 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꽃 사진을 전사한 블라인드는 이케아의 베스트 셀링 아이템 중 하나다. 멋진 그림 작품을 걸지 않아도 실내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꿀 수 있는 센스 있는 아이템으로, 이제 막 인테리어에 입문한 초보 주부나 싱글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물망초, 장미, 양귀비꽃, 조개껍데기…. 이런 것들을 찍은 사진을 작품으로 걸어놓기란 사실 망설여지게 마련이죠. 예쁘지만 장식하기엔 왠지 유치하게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블라인드에 접목하면 펼치고 말아 올리면서 마음대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답니다. 제 디자인의 특징은 편안함이에요. 언제 어디서든 자연처럼 편안한 디자인 말이죠!” 편안한 자연을 사물에 옮겨놓기 위해 그는 틈만 나면 여행을 간다. 2년 동안의 일본 여행, 6개월 동안의 아프리카 여행…. 낯선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자연의 색감, 거기서 얻는 아름다운 한 컷의 사진은 곧장 ‘엘라 도란’표 디자인으로 변신한다.
집안에 널린 빨래들에서 사무실의 쇼룸까지, 그의 일상을 훔쳐보는 재미는 마치 옆집 아줌마와 떠는 수다만큼이나 편안하고 즐거웠다. 집으로 돌아와 정원에 핀 들꽃들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한 사진들을 작은 액자에 넣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말처럼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연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작은 들꽃, 작은 액자가 소박한 집안에 커다란 기쁨으로 울려퍼지는 순간, 비로소 엘라 도란 디자인의 참 묘미를 깨닫는다.

1 엘라의 집에는 세 남자들의 금지구역인 그녀만의 작은 공간이 있다. 작지만 혼자서 휴식을 취하기엔 그만이라고.
2 두 아이들이 함께 쓰는 방에는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과 작품들이 걸려 있다. 엘라는 특히 아이들의 추상적인 그림들에서 작품의 영감을 받는다고 한다.
3 부부 침실 한 벽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선반에는 뮤지션인 남편의 음악 CD와 책, 액자들이 즐비하다. 이 붙박이 선반 또한 엘라가 직접 만들었다.
4 다양한 꽃의 이미지가 쿠션과 블라인드 등 다양한 아이템에 자리하면서 다시 한 공간에 어우러진 모습, 이는 엘라 도란만의 확실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5 냉장고 앞에 걸려 있는 알파벳 앞치마는 엘라가 디자인하고 테이트 미술관에서 판매하고 있다.
6 , 7 ‘ 엘라 도 란 ’ 매장 외관. 런던 체셔cheshire 스트리트에 있는 엘라의 매장에는 주로 그녀의 작품을 자신의 숍과 브랜드를 통해 소개하려는 사람들이 들르는 곳이다. 그의 작업실이 자리한 길가에는 멋진 앤티크 매장과 유명 장인들의 작은 매장들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홈페이지( www.eladoran.uk )를 방문하면 된다.


김미영(nouvim@naver.com)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