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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장진 고통의 시간 없는 성공이란 없고, 비관 없는 낙관은 없는 법이다
사람 몸의 70%는 물이라는데 장진 감독의 70%는 재치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말을 할 때마다 재기가 번득이고, 순발력은 속도를 잴 수 없을 정도다. 하교하는 여학생 무리를 보고서는 “애들, 퇴근하네” 라고, 하고 불행의 반대말에 대해서는 ‘행방불명’이라고 눙친다. 지극히 무심한 표정으로. 코드가 일반 규격과는 한참 다른 이 국면에서, 옆에 앉은 사람은 무구하게 웃을 수밖에 없다. 이른바 ‘장진 영화’가 갖고 있는 독보적인 유머가 힘(흥행)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가 양산해내는 공산 규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사람의 유머를 얄팍하게 볼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시행착오 위에서 만들어진 소산물이라는 데 있다. 천재적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자신의 경험에서 생성된 ‘장진 언어’라는 점에서, 그는 예비 거장이라 평가받아 마땅하다.

어릴 때부터 인생이 즐거웠다
장진 감독은 요즘 그의 여섯 번째 영화 〈거룩한 계보〉의 후반작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섭외를 하는 동안 여유 있게 전화 통화를 한 적이 거의 없다. 그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바빠, 빨리, 용건만’인데, 그것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새 영화 〈거룩한 계보〉에 대해 설명하면?”
“인터넷을 참조해. 차라리, 홍보물을 보내줄게. 그게 나아. 그리고 다른 질문을 해. 그걸로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다른 걸 하는 게 낫지.”
“그렇다면, 〈거룩한 계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뭔 소리? 〈거룩한 계보〉가 무슨 의미가 있냐니? 누구한테?”
“당신에게.”
“나한테야 뭐 여섯 번째 작품이고, 남자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고. 재밌자고 하는 거지.”
남자 세계의 의리와 주먹 세계를 소재로 한 〈거룩한 계보〉는 누아르 장르의 영화다. 보도 자료에 따르면 정재영 씨와 정준호 씨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이 영화는 우정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는 ‘진정성 있는 남자 드라마’이다. 전라도 조직세계를 주름잡는 전설의 칼잡이 동치성(정재영)은 조직을 위해 칼을 사용하다 감옥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죽마고우 정순탄(류승용)과 재회해 ‘거룩한 계보’를 형성한다. 그러나 그 사이 조직은 동치성에게 등을 돌리고 이를 알게 된 동치성은 보스를 만나기 위해 탈옥을 시도한다. 그러나 동치성이 보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조직 내의 절친한 친구 김주중(정준호)과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벌여야 한다. 친구 사이의 엇갈린 운명의 귀추는 어떻게 될는지…. ‘보편적으로 통속성을 싫어하는’ 그의 특질은 이 영화를 비장미와 블랙 유머가 잘 버무려진 작품으로 완성할 것이다. 예고편만 공개된 이 영화의 비장감과 유머는 보도 자료의 인용구에서 잘 드러난다. ‘비가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밀어붙여. 나는 퍼부을 테니…”
- 로버트 프루스트의 〈쓰러져 있다〉 중에서’
“인생이 재밌나?”
“응. 재밌지.”
“인생은 괴로운 것 아닌가?”
“난 괴로운 걸 별로 못 느끼겠는데?”
“어릴 때부터 인생이 즐거웠나?”
“응. 어릴 때 느낄 수 있는 쓴맛이 뭐 있다고, 안 즐겁겠어.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면 즐겁지.”
“아픔이 없는 사람인가 보다.”
“아니. 아픈 사람은 다 괴롭다고 생각하면 안 돼. 그럼, 건강한 사람은 안 괴로워? 그건 아니잖아. 그렇게 판단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뭐하기 때문에 뭐뭐 하다는 거 말야.”
흔히 사람을 분류하면서 문과적인 기질과 이과적인 기질을 가진 유형을 기준으로 삼을 때가 있다. 이 기준에 따르자면 그는 이과적인 기질의 사람이다. 딱딱 맞아떨어지고 결과가 바뀌지 않는 수학적인 공식과 같은 대화를 좋아한다. 이를테면 언제 태어나서, 무엇을 전공했으며, 직업은 무엇이고, 사는 곳은 어디인지 하는 것들 말이다. ‘저렇게 마른 사람은 암에 걸렸겠지?’ 하는 질문처럼, 물어봐서 정오正誤를 구분할 수 있는 단순명쾌한 현상들도 이에 속한다. 헤아릴 수 없는 다면성이 내포되어 있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는 것을 그는 제일 싫어한다. ‘답이 없는 질문이고, 다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집에 가다 보면 다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싫어하는 것들이 있는데, 전화 통화와아무 목적 없이 손잡고 걷는 게 그렇다.
“수학 공식처럼 정답일 수밖에 없는 질문과 답이 있잖아. ‘어디 살아? 몇 살이야?’ 그런 질문은 괜찮은데, ‘사랑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은 좀…. 이게 언어의 방종이야. 나도 말을 멋있게 하려면 진짜 멋있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조금만 지나면 그런 건 다 거짓말이 돼거든.” 이 말은 그가 인터뷰를 하면서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름으로 불려지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실상은 이름 붙일 수 없고 이름 붙이는 것은 만물의 현상’이라던 노자의 말씀과 관계되어 있다. 사람의 정신은 끊임없이 확장하고 변화하게 마련인데, 이에 따라 본질과 현상을 이해하는 폭과 넓이가 고무줄처럼 달라진다. 1분 전까지 멋있게 보였던 남자가 1분 뒤에는 더 멋있게 보이거나 덜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했던 말이 잠시 뒤에 거짓말이 된다는 것은 그의 의식 확장이 그만큼 빠르다는 이야기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그가 말이 실상과 본질을 온전히 전달해주지 못한다고 여기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영화는 일종의 쇼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진실도 담기지 않나?”“왜 자꾸 정의해서 질문을 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진실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안 진실해. 진실이란 단어는 딱히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건데 ‘진실은 참’이라고 단정 지어서 이야기하네.” 정녕 말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일까.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영화사의 이름(필름있수다)에 ‘수다’를 넣은 것일까.

〈박수칠 때 떠나라〉(2005년) 〈아는 여자〉(2004년) 〈킬러들의 수다〉(2001년) 〈간첩 리철진〉(1999년) 〈기막힌 사내들〉(1998년)의 뒤를 잇는 장진 감독의 신작 〈거룩한 계보〉는 주먹세계에 사는 남자들 사이의 의리와 배신을 소재로 한 누아르 영화다.




하고 싶은 일 가운데 최고는 가정을 갖는 것 그는 자칭 ‘너무나도 평범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기준일 뿐, 연극반이 없는 고등학교에서 연극반을 만들었던 것을 보면 그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던 듯하다. 게다가 고등학교 시절 전국청소년연극제에 나가 연기상을 받았을 정도라고 하니 몰입과 열정은 평범하지 않다. 왜 연극을 하게 되었을까? 모태신앙의 가톨릭 신자에 신부가 될 수도 있었던 그가 무엇 때문에 연극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남에 대해 나와 같을 것’이라 예측하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10대의 그에게 연극이 일종의 해방구이자 탈출구였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꼬리이기보다는 머리이지 않았나?”
“추측 좀 하지 말아. 대한민국 (영화계의) 도제 시스템에서 꼬리 안 밟고 감독 된 사람이 어디 있나? 다 꼬리였지. (감독 되는 게) 좀 빨랐을 뿐이지 다 했어. 그리고 물리적인 고통의 시간이 없으면 여하튼간에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 (물리적으로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의 양은) 거진 똑같아.”
“사회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아주 성공한 축에 속하는 편이지 않나?”
“남들이 그렇게 평가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내가 원하는 삶이 있고 바라는 바가 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으면 불행한 것 아닌가.”
“당신이 원하는 삶은 지금 이 모습이 아닌가?”
“아니지. 난 빨리 결혼하고 가정을 갖고 싶고 다른 걸 공부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그래도 불행해 보이지 않는데?”
“아이, 그럼. 일단은 그렇게 불행할 일이 별로 없으니까.”
그가 설명하는 장진이라는 사람은 절대적인 것이 없거니와 오O, 엑스X로 규정하지 않는 마음 세계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낙천주의자이고 다시 보면 염세적 낙천주의자로 보인다. 그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낙천과 염세의 차이는 한 끝밖에 되지 않는다.

“열심히 살아왔을 것 같다.”
“그것도 모르지. 그것은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니까. 누군가에게는 다섯 시간 수면이 많은 것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적은 것일 수도 있고. 다르지.”
그저 장진 방식으로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그의 가치관은 멜로영화 〈아는 여자〉에 관한 설명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사랑은 뭔가?”
“〈아는 여자〉를 봐.”
“영화를 볼 때는 사랑을 아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잘못 본 거야. 그 영화는 ‘아, 이놈도 사랑에 대해 정말 궁금해하는구나, 사랑이라는 건 결국에 뭐라고 정의내리는 게 아니구나’ 하는 걸 얘기한다고.”
“궁금한 주제를 영화로 만드나?”
“모르지. 어떻게 보면 궁금한 건 영화로 못 만들지 않나? 영화는 질문을 하려고 만드는 게 아니니까. 근데 그런 건 있어. 본의 아니게 자꾸 우월감에 서 있게 되고, 자꾸 깨달음을 주려고 해. ‘내 이론은 이렇다, 내 생각은 이렇다, 내 철학은 이렇다’ 하는 과시욕에서 창작이 나오는 거지.”
“왜 〈아는 여자〉를 만들었을까?”
“내 깨달음과 철학이 뭐냐면 ‘사랑이라는 걸 왜 자꾸 정의하려고 하고, 의미를 자꾸 사전화하려고 하느냐’ 이거야. ‘사랑은 누구도 표현할 수 없는 각자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일지 모르는데 왜 그렇게 어떤 틀에 맞춰 넣으려고 그럴까, 그리고 그 규격에 맞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려고 그러는 걸까’ 하는 거지. 물론 이것도 개인적인 오만한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고 하였는데, 결혼도 그중의 하나?”
“그중의 하나가 아니고, 그중의 최고지. 가정을 갖는다는 건.”
그가 왜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아는 여자〉의 주인공성처럼 마음을 먼저 열지 않아서일까…. 하여튼, 그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가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멋진 일 같아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자식과 할 수 있는 일, 내 아내와 할 수 있는 일들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결혼해서 가정을 만들지 않으면 못하는 일들이잖아.”
“살다 보면 사람이 바뀌지 않나?”
“버릇이 바뀔 수 있고, 취미가 바뀔 수 있지만 안 바뀌는 것도 있지. 사람이 뭐 바뀌겠어. 그런데 그런 게 궁금해? 난 별로 안 궁금하더라고.”
“그럼, 뭐가 궁금한데?”
“궁금한 건 아니고, 나는 사람들을 이렇게 (지나는 사람을 쳐다보며) 보는 걸 좋아해.”
“(웃음) 유머 능력은 어떻게 계발했나?”
“그거 다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거다.(웃음)”
“평범한 사람 모두가 당신처럼 뛰어난 유머 감각을 가진 건 아니다.”
“아주 독특하고 독창적인 놈들이 웃긴 일을 만들어내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나 소스를 정리를 하고. 이것은 되게 기능적이야. 선천적인 것은 아닌 것 같아.”
“스스로에게 천재성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당연히 없지. 왜냐하면 천재는 죽을 때까지 천재여야 하니까.”


관조하는 염세적 낙천주의자 고등학생 때 연극판에 본격 입문한 이래 그는 여러 분야에서 일했다. 지금까지 배우, 연출, 희곡작가, 방송작가, 영화감독, 방송진행자, 영화제작자, 기획사 대표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끊임없이 흘러가며 정체하지 않는 큰 강물 같다. 어떤 때에는 물이 넘쳐 고생했을 것이고, 어떤 때에는 가뭄과 기근을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의 연극반 활동부터 셈하면, 20년 경력. 이제는 어떤 땅에 이르더라도 수위 조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울 것이다.
“책을 좋아한다지?”
“좀 보는 편이지. 번역서는 잘 안 읽고 소설을 읽어. (요즘에는)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봤고, 〈카스테라〉 〈아내가 결혼했다〉도 읽었어. 촬영 중일 때에는 (영화 작업에 지장을 줄까 봐) 장편문학 대하기가 좀 겁나.”
“보통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하지 않나?”
“요즘 젊은 친구들의 문학이 아주 좋아. 재밌어. 어떤 문단들은 영화가 주는 영상의 임팩트보다 더 강렬하기도 하고. 〈달려라 아비〉의 김애란도 봐봐. 엄청 재기발랄한 문장과 단어를 사용하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엔가 묵직해지잖아. 어떻게 그 나이(김애란 씨는 스물일곱 살이다)에, 이런 화두에 미칠 수 있는지 놀라워. 반면에 영화와 연극은 잘 안 봐.”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펜을 쥐고 쓰면서도, 예측이 안 되는 게 재밌어. 전혀 가늠하지 못했던 단어나 문장이 갑자기 나와서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이 참 신기한 것 같아.”
“영화보다 글 쓰는 게 좋은가?”
“그렇지. 맘이 편해. 영화는 일단 산업 안에 있고 감독에게는 너무 많은 책임이 주어지니까. 내 창작이 자본화되어가는 과정을 거치잖아.”
그는 시나리오도 쓰도 연출도 한다.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서 〈천호동 구사거리〉가 당선되어 정식 데뷔한 중고참 작가다. 자료들을 찾아보니 대개 하루 이틀에서 열흘 정도면 시놉시스를 완성한다고 해서 ‘기막힌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료들에는 집필 기간만 나와 있고, 준비 기간은 나와 있지 않았음을 간과했다. 그의 지인에게 물어보니, 작품 구상을 진득하게 준비한다고 한다. 생각을 많이 하고, 걸러내는 작업을 반복하다가 완숙 경지에 이르면 그때 초고를 쓴다고 한다. 그러니 쾌속 출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집착하는 것은?”
“있지. 야구.”
“왜?”
“게임도 재밌고, 제복이 주는 황홀경도 있고.”
“열등감을 느끼는 건?”
“색깔. 내가 좀 심한 색약이라, 녹색과 적색 구별하는 게 어려워. 색깔 이름도 잘 몰라. 운전도 하는데, 가끔은 신호등도 순서로 알아.”
“영화 작업할 때 불편하겠다.”
“그럼. 색이나 조명 디자인할 때엔 음영이나 실루엣, 도구로 따지고 색은 테크니션들에게 맡겨. (필름의) 색보정실에는 아예 안 들어가.”
“또래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룬 것이 많다.”
“운이 많다. 그중에서 정말 운이 좋은 것은 내가 잘할 수 있는 뭔가를 직업으로 선택했고, 이렇게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신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요즘은 프로필profile. 어느 순간 프로필이 중요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는 ‘무엇 무엇 무엇을 한 놈’이 되고, 내 속에서도 ‘나는 앞으로 무엇 무엇 무엇을 하고 싶은 놈’이 되었다.”
“명예, 돈, 여자 중에서 하나만 선택한다면?”
“명예.”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뜻은 지키는 스타일?”
“그런 게 어느 정도 좀 있지. 근데 쓸데없는 아집이나 고집을 부리는 건 아냐. 큰걸 위해 소소한 걸 포기하는 타협에도 아주 익숙하고.”
“정말 낙천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지. 그런데 삶에 희망이 있고, 인생을 즐거워하는 낙천이 아냐. 떨어져 없어지는 것을 조망한다고 하잖아. 그 말처럼 내 순서를 기다린다는 면에서 낙천적인 것이지. 어차피 (사라지는 것에도 질서가 있고, 그 차례가 찾아오면) 길 가다가 낙엽에 맞아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 세상만사는 서두른다고 빨리 이루는 게 아니고 더디 간다고 못 가는 것도 아니다. 만물에는 양면이 있고 자기 속도가 있다.
“도사님 같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내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보면 그렇게 돼. 내 옆에서 멀쩡히 살아 숨쉬던 놈이 잠깐 사이에 죽었어. 그러면 얘가 10분 전에 얘기했던 고민이 얼마나 우스운 것이 되냐고. 아휴 우리나라에는 간판이 너무 많아. 언제 떨어질지 몰라. 삶이 다 그런 거야.”
‘장 도사님’의 간판 이야기 때문에 웃고 넘어가고 말았지만 그 친구 옆에서 느꼈던 속절없음, 무력함, 무상함에 대해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언젠가 죽게 되는 유한한 존재지만, 머무는 동안에는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생명체다. 친구는 간데없고, 살아 있는 그는 새로운 화법의 작품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언젠가, 그 트라우마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는 날, 그는 거장으로 거듭날 것이다.

장진 감독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증언

영화사 ‘어나더 썬데이’ 이택동 대표 두 사람의 관계 영화 때문에 알게 된 비즈니스 파트너. 나보다 나이는 적지만 같은 영화인으로서 존경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의 성공 비결 일단 아이디어가 특출하다. 영화를 돈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는다. 자기 특성을 자기가 안다. 남다른 점이 있다면 항상 연극과 영화를 생각하고 작품 구상을 오랫동안 한다. (작품을 구상할 때에는 줄거리보다 장면을 생각한다. 줄거리는 그다음에 만든다.) 작품을 쓴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수렴도 많이 한다. 스태프 회의도 많이 한다. 그의 인간적인 스타일 솔직 담백하다. 모든 걸 얘기하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의 단점 글쎄, 지금까지 본 바로는 없다. 사람들에게 예를 갖춘다. 술을 안 마시고, 주사도 없다.

극단 동숭아트센터 홍기유 대표
두 사람의 관계 대학 동기. 1989년부터 17년 동안 알고 지냈으니, 이제는 내 삶의 한 부분이다. 그의 장점 살아오는 동안 누구든 힘든 일들이 있게 마련인데도, 그는 삶 자체가 재기발랄하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대한다.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들은 그의 10대 생활 고등학생 때 연극반 만들었고, 그때 연극을 많이 봤다. 글을 쓰며 습작도 했고, 예술을 즐겼다. 들국화 공연에 무지하게 쫓아다니고, 시인과 촌장을 즐겨 들었다. 기타 연주도 잘한다. 인간적인 매력은 세심한 구석이 많은 친구다. 옛날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잘한다. 특별히 마음으로 배려를 해준다. 언어 조탁성이 뛰어나고 표현을 잘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의 성공 비결 노력. 목표를 두고 이뤄간다.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것. 비즈니스 능력도 뛰어나다. 부러운 점 창의적인 면에서 뛰어난 것. ‘장진’ 하면 떠오르는 장면 대학 다닐 때 선배들이 연극 포스터 붙이라고 해서 4호선 명동역을 다니면서 붙이러 다녔다. 진이도 붙이러 다니는데, 반질반질한 벽이 나오기에 ‘잘 붙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알고 보니 파출소 벽이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경찰한테 혼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진이다운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