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조선 도공의 혼을 잇는 15대 심수관
일본 3대 도자기의 하나로 꼽히는 사쓰마야키薩摩燒(가고시마현의 옛 이름인 사쓰마지역의 도자기)의 산실로 꼽히는 ‘심수관 가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어이지는 꼬리표가 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점이 그것이다. 4백여 년 전 낯선 땅에 도착해 일본의 생활양식을 익힌 조선 도공의 예술 혼은 여전히 건재하다. 추측하건대 그때보다 더 치열하게 갈고 닦을 것이다. 심수관가의 1대조인 심당길深當吉은 필요 때문에 끌려간 조선 사람이었지만 지금 심수관요를 이끄는 15대 심수관 씨는 조선 핏줄을 가진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이 지문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지울 수도 없고 흐려져도 시간이 지나면 모양을 회복한다.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같이 갖고 있습니다. 소중한 것은 국가나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개인입니다.” 지극히 진지하고 겸손하고 자유롭고 깊은 사유는 그의 뿌리가 두 나라에 기반하고 있기에 현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photo01 한국 도자기는 부정과 창조의 문화, 일본 도자기는 보존과 활용의 문화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규슈九州의 최남단 가고시마현鹿兒島縣의 도자기 마을 미야마美山.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인데도 사람은커녕 차조차 지나가지 않는 조용한 곳이다. ‘14代 沈壽官’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는 대문 앞에서 태극기와 일장기가 나란히 휘날리는 광경을 보고 서 있기를 몇 분여, 드디어 사람이 나타났다. 따뜻해 보이는 수염이 있는 자상한 얼굴의 할아버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문패에 씌인 이름의 주인이다. 다가가 알은 체를 하니 손짓을 하며 따라오라 한다. 그리고 마당과 기념품 가게를 돌아보고는 아들 15대 심수관 씨를 소개해 준다.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여덟 살인 15대 심수관 씨는 1999년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14대까지는 부친의 사후에 이름을 받을 수 있었으나 15대 심수관 씨는 부친의 의지에 따라 살아 있는 동안 이름을 잇게 되었다. 14대는 아들에게 이름을 넘기면서 두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하나는 일본에 온 지 4백 년이 되는 것을 기리는 행사의 일환으로, 다른 하나는 아들도 자신이 습명襲名(이름을 계승하는 것)하던 나이(39세)에 맞춰 대표 도공이 되기를 원해서였다.
아버지가 도회적이고 까다로운 인상을 주는 반면 아들은 ‘전원일기’풍의 편안한 느낌이다. ‘조선의 핏줄’을 강조했던 아버지는 살지도 않은 고향 이야기(남원)를 듣노라면 눈시울을 붉히고 아들은 ‘인간, 예술, 자유’에 천착한다. 닮지 않은 듯 보이는데도 나란히 서자니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photo01 “일본의 전통 예술계에서는 자기가 존경하고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기는 풍습이 있습니다. 저희도 12대 할아버지 때부터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저의 대표직 임명은 갑자기 이뤄졌습니다. 한편으로 두려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의 공부를 바탕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내고자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기점이 되었습니다.”
12대 심수관 씨가 활동하던 때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메이지 유신 시대가 시작되면서 나라 역할을 하며 조선 도공을 보호해주던 번藩이 몰락하자 심수관가는 거리로 내몰릴 처지까지 이르렀다. 이때 도요를 운영하던 이가 12대 심수관 씨였는데 그는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전기를 마련했다. 12대는 먼저 심수관요의 독보적인 비기로 평가받는 투조透彫기법(도자기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굽는 방식)을 개발했다. 지금도 이 기법으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심수관요뿐일 정도로 고난도 기법이다. 그리고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빼어난 수준의 대大화병을 출품해 극찬받았다. 이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해외 교역을 늘렸고 가고시마를 대표하는 사쓰마야키의 브랜드화에도 힘을 쏟는 등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다.
 
 
photo01 “한국에서는 고려청자와 이조백자라고 하지요. 그런데 왜 고려시대에는 청자고 조선시대에는 백자일까요? 중앙집권체제였던 한국은 시대와 역사에 따라 도자기의 문화도 변했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의 중심이었던 청색은 조선시대부터 만들면 안 되는 색깔이 됩니다. 도자기를 통해 본다면 한국은 부정과 창조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다릅니다. 시대가 아니라 지역별로 차이가 납니다. 지역마다 도자기의 선이 다릅니다. 예전의 일본은 번주藩主가 통치하는 번藩이라고 하는 작은 소국들의 연합이었습니다. 일본은 시대가 바뀌어도 번주가 유지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과거를 부정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도자기는 보존과 활용에 맞춰진 것입니다. 즉, 채색彩色 기법이나 기술을 버리지 않고 보존 관리하며 다시 써먹을 수 있도록 감추어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비록 이 물건을 사용할 수 없더라도 언제 다시 써야 될지도 모르므로 보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본 문화는 부정하거나 비교·분석·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거꾸로 부정만 하면 단순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한국 도자기에서는 여러 가지를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문화를 합치시켜 하나로 만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웃음).”
그의 짧은 말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를 쉽게 설명해준다. 어떤 분야든 빠른 속도로 정복해가는 한국인의 기질과 뭘 하더라도 깊게 파들어가는 일본인의 기질을 이해하게 된다. 거대한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 땅에 살았던 한국인의 선조는 외부의 환경 변화에 민감했고 일본인의 선조는 섬 밖으로 나가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깊이 파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디자인은 디자인을 만들지 못하고, 모양은 모양을 만들지 못한다 15대 심수관 씨가 도공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가마에 불 지피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의 손과 목에는 거뭇한 피부들이 듬성듬성 보이는데, 이 모두가 불에 덴 흔적이라고 한다. 몸에 새겨진 흔적에 대해 훈장도 상처도 아닌 듯 몸에 난 점에 대해 설명하듯 말한다. 와세다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그는 가업을 잇기 위해 교토 도공 고등기술전문학교와 이탈리아 국립미술도예학교로 유학을 다녀왔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토스트 접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접시 만드는 것을 아주 쉽게 여겼습니다. 제량껏 여러 가지 색깔을 넣어 디자인을 하고, 또 어떤 혼을 넣을지 고민하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접시는 선조들의 기법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여러 다양한 선조들의 기법을 조금씩 모방해서 토스트 접시를 만들었던 것이다.
“나만이 추구하는 선과 색을 창조하라는 어머님의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토스트 접시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숭고한 의미가 담긴 어머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가 과연 우리 집안의 도자기팀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요?”
 
photo01 그는 갈림길에 섰다. 선조들의 방식을 답습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독창성을 키울 것인가? 자신이 추구하는 선과 혼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갈등하던 끝에 그는 이탈리아 유학을 선택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순간 너무 부담되고 무서워서 도망갔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도 오십보백보 답보 상태일 뿐이었다. 그곳에서도 그는 모방에 다름없는 스케치를 과제로 제출했고 담당 교수는 계속 퇴짜를 놓았다. 퇴짜와 퇴짜가 반복되자 그는 소심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짐을 싸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로 떠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흰 종이에 빠졌습니다. 하얀 종이를 들고 창가에 서 있으니 창문 틈새로 들어온 빛이 종이에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림자를 따라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아! 이거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디자인은 디자인을 만들지 못하고, 모양은 모양을 만들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모양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에 감동받는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나무 이파리든, 흘러가는 물이든 괜찮습니다. 그걸 먼저 마음에 반영합니다. 그다음에는 그 무늬를 자신의 감정과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펼쳐보는 거죠. 펴보고 구부려보고 휘어보고…. 이것이야말로 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까지 기술만 배웠던 것입니다. 기술을 성취한 다음에는 기술에다 감성과 의지를 접목시켜야 하는 건데 말이죠.”
 
1. 심수관요 정원과 작업실 주변에 놓여 있는 장독들. 그는 한국의 장독을 보고 첫눈에 반해 여주의 도요에서 1년간 작업을 배웠다. 군더더기 없는 좌우상하 대칭의 장독에서 그는 한국인의 형태와 모습을 보았다. 심수관요에 있는 장독들은 서울에서 옮겨온 것.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 만든 장독들은 모두 매진되었다.
2. 12대조가 창안한 투조기법으로 만든 만든 3중 향로. 그가 만든 작품들에는 학이 그려져 있다. 향로 같은 경우 만드는 데 한 달 반 정도 걸린다. 심수관요의 연간 매출은 약 2억4천만 엔(한화 21억 원) 정도라고 한다.
 
photo01 자신이 추구하는 선과 색을 발견하는 방법을 터득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최고의 토스트 접시를 만들 자신감도 생겼지만 어머니는 이미 작고하고 난 다음. 오랜 시간을 방황했지만 얻은 것에 비하면 길지 않다. 그 사이 그는 기술자에서 장인으로 거듭났으니 말이다. 질적인 발전에 필요한 것은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아는 것, 모방하려고 하면 모방밖에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심수관 씨 말고 해준 이가 또 있던가? 아마 ‘모방과 재창조’라는 말로 설명되는 일본 사람들의 기질도 이것과 상관있을 것이다.
2년 뒤 그는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의 눈에 가장 아름답게 비친 도자기는 장독대의 장독. 상하좌우가 똑같은 대칭 구조와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장독에서 한국인의 모습과 형태를 보았다. 일본에서도 항아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대학원에 입학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좌절했다. 대학원 측에서 일본 이름으로 된 서류를 한국 이름으로 바꿔 다시 제출하라고 지적했던 모양이다. 우리 입장에서야 가능한 요구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 굉장히 힘들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저에게는 그 말씀이 4백 년 동안 일본의 자국이 묻은 몸의 때를 지우라는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제 선조에 대한 생각을 하니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일본에서 모든 고통과 역경을 견디며 대를 이어온 선조들을 생각하면 ‘알겠습니다. 이름을 바꿔 원서를 제출하겠습니다’라고 쉽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다. 대신 전국에 현존하는 도요지 답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 있는 오부자옹기를 발견했다. 오부자옹기는 그가 답사한 도요지 중에서 ‘장인의 혼’을 느끼게 해준 유일한 곳이었다고 한다. 첫 몇 개월간은 새벽 2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했다. 샤워 시설도 마땅치 않은 그곳에서 그는 한국의 도자기와 가마에 대해 마음껏 향유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가고시마에서 장독을 제작한다.
“그때 저는 내 고향, 우리 심씨의 고향에 대한 생각을 깊이 했습니다. 우리 선조가 일본으로 건너올 때에는 남북이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나라가 갈라져 있는지, 그렇다면 또 우리 선조의 고향은 어디인지, 그 모습이 아직 남아 있을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요? 변할까요? 변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저는 바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진정한 고향은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photo01 지금은 이름을 보고 사는 게 아니라 직접 물건을 보고 구입하는 시대, 만드는 자세가 중요하다 심수관요에는 오랫동안 지켜져 온 규칙들이 있다. 도공을 25명 이상으로 늘리지 않는 것, 그리고 ‘노보리가마登窯’라고 하는 계단식 가마(이 발음은 일본과 한국이 놀랍도록 똑같다)에서 도자기를 굽는 것이다. 인원을 25명 이상으로 늘리지 않는 것은 도자기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는 것은 자신의 혼이 담긴 채색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도자기는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도자기를 만들기 전에,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2년 동안 배운다고 해서 기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회사에 들어왔다고 해도 실력이 부족해 하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손님들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는 사람만 남게 됩니다. 기계를 사용하면 도자기를 많이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손님들이 물건 하나를 볼 때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지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이름(브랜드)이 통용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손님들은 물건을 직접 보고 구입하기 때문에 심각하게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최고의 물건을 만들 때 명성은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말인즉, 고등학생이건 대학교수건 어느 누가 보더라도 순식간에 혼이 느껴지는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것. 작은 찻잔 하나부터 투조 기법으로 만든 향로까지, 만드는 데 쉽고 어려운 것은 없다는 대쪽 정신은 계단 형식의 노보리가마를 고수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1. 아버지 심수관 씨와 아들 심수관 씨. 아들은 대학에 들어간 뒤 친구들과 솔Soul 밴드를 결성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역시 조선의 핏줄”이라며 아주 흡족해했다고 한다. 그가 흡족해했던 이유는 솔밴드를 서울Seoul밴드로 알아들었기 때문. 두 사람의 관계는 모녀지간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2. ‘심수관요’임을 알려주주는 나무 기둥. 기둥 머리에 씌운 갓이 인상적이다.
 
photo01 평지가 아니라 13도 경사진 곳에 비스듬히 세워진 노보리가마에 불을 때면 온도는 시간당 100℃씩 올라간다. 그러니 9시간 동안 불을 때면 초벌구이의 온도인 900℃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관건은 다음. 중벌구이를 하는 1300℃까지 올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게다가 흙은 건조되는 과정에서 크기가 16%가량 줄어들기 때문에 어느 지점이 되면 불을 빼야 할지, 조금 더 올려야 될지를 판단해야 되는 때가 온다. 말 그대로 순간의 선택이 완성도를 좌우하게 되는 것.
그는 그래프를 그린 다음 일정하게 위로 올라가다 불꽃처럼 가물거리며 이어지는 선을 그린다. “계단식 가마에 불을 지피면 산화와 환원이 계속되기 때문에 온도가 지그재그 형태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나 기계식인 가스 가마는 온도가 고르게 쭉 올라갑니다. 그래서 가스 가마에서는 100%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단식 가마에서 작품을 구워 원하는 결과를 얻을 확률은 70% 정도입니다. (완성률은 낮지만) 정말 제 혼이 담긴 채색을 내려면 계단식 가마를 이용해야 합니다.”
“우리 심씨는 두 나라 모두를 버릴 수 없습니다”심수관 씨의 가문은 줄곧 한 명의 아들을 두었고 그 아들들은 한국계 여성과 결혼을 했기에 가업을 잇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15대 심수관 씨의 아들은 둘. 중학교 3학년과 중학교 1학년인 두 아들도 초등학생 때부터 가마에 불 지피는 법을 배웠다. 그는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듯 여겨지는 두 아들 가운데 도공의 일을 하고자 하는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줄 생각이다.

“저는 두 아들에게 아주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할 때마다 일이 힘들고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다면 아이들은 ‘아빠가 저렇게 힘들고 어려워하는데 나는 안 해야 되겠다’고 느낄 것입니다. 저 또한 아버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이 일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제 아들들은 모두 공부보다 가마 일 돕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둘 다 가업을 하고 싶어 한다면 같이 하게 할 겁니다.”
때는 늦은 봄, 앞뜰에 심어놓은 동백나무에 마침 붉은 꽃 몇 송이가 피어 있다. 그 꽃을 보자니 4백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 수십 명의 심수관가 사람들은 봄마다 붉은 동백꽃을 보며 전라도 남원 땅을 그렸을 것 같아 울컥해진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고향 땅을 밟을 수 없는 서러움과 뼈마디 사무치는 향수를.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고향 땅에 대한 원망과 복받쳐 오르는 서러움, 그러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솟구치는 그리움을. 조선 도공들의 일본살이도 필시 그러했을 것이다. 조선 땅의 흙도, 선조부터 내려오던 불도 없는 열악한 화산지대에 불시착해 그래도 혼불만은 놓지 않았던 한민족의 저력. 그럼에도 ‘뿌리’를 준 한국과 ‘존재’의 터전이 되어준 일본, 두 나라 모두 따뜻하게 품으려 했던 겸손한 자세가 없었다면 지금의 심수관요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화산 폭발 때 분출된 용암이 응고된 것이 돌입니다. 그러면 지구는 그 돌을 아주 오랜 시간을 거치며 다시 흙으로 돌려놓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흙을 이용해서 다시 돌을 만듭니다. 도공의 일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흙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후 4시 45분. 인터뷰가 예정보다 길어지자 “다른 일이 늦어졌다”며 끝내기를 재촉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간다. 그리고 마당을 쓸고 있는 직원들 사이로 들어가 낙엽을 쓸기 시작한다. 자신이 빌려 쓰는 지구의 자원을 귀하게 여기고 마당 쓰는 일 하나까지도 소중하게 여기는 그의 모습에서 조선 도공의 혼을 본다.

* <15대 심수관展> 심수관요의 작업실 벽에 걸려 있는 액자의 글씨 ‘한 손 한 손一手一手’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물어보니 ‘한 손 한 손, 마음을 담아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심수관요의 철학인가봅니다. 15대 심수관 씨가 한 손 한 손 정성들여 작업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개인전이 5월 25일부터 31일까지 고치현高知縣 다이마루백화점大丸百貨店에서 열립니다. 이 전시에는 다완, 차의 통, 향로, 화병 등 차도구들이 전시됩니다. 문의 (81)099-274-2358
 

photo01

취재 후기
15대 심수관 씨의 인터뷰와 심수관요 탐방은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공부하는 한양대 최고 엔터테인먼트 과정(원장 손대현, the eep)의 협조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KTF 김연학 전무, 패션디자이너 박윤수, 변재용 한솔교육 대표이사, 윤재승 대웅제약 대표이사, 정성모 인평 상무이사, 가수 진미령 씨 등 10기 원생 30여 명이 참가하는 해외선진학습 체험 프로그램이 가고시마 현지에서 열렸습니다. the eep는 엔터테인먼트, 영화, 애니메이션, 디자인, 패션, 공연, 미디어, 한류, 식문화, 도서 저자와의 대화 등 문화예술 전반에 관한 실용적인 지식과 정보를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함께 머물다 보니 원생들의 자유롭고 열려 있는 마인드가 최강점인 듯싶었습니다. “우리는 樂과 함께 움직이며 樂은 우리와 함께 움직인다”는 모토를 원생 한 명 한 명에게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배움과 나눔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역시 학이시습 불역열호學而時習 不亦說乎입니다.
“심수관 씨의 ‘품격이 바로 혼’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과연 이분들이 한국에 계셨다면, 조선시대 도자기의 맥을 4백여 년 이어오며 전통을 만들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손대현 원장)
 
 
1. 15대 심수관 씨가 인터뷰를 마치고 달려간 곳은 정원. 떨어진 낙엽을 쓸며 말했다. “저와 직원들은 아침이 아니라 퇴근 무렵에 청소를 합니다.” 자연이 기지개를 켜는 아침 나절부터 무언가를 쓸고 닦는 것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오랜만에 듣는 빗자루 소리가 반갑다. 그의 보통 아침 8시부터 6~7시까지 작업을 한다고 한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