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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리포트]삼각지 미술 예찬 싸구려 행복'에 깃든 의미
이발소와 다방, 목욕탕과 예식장 등 생활 반경 어딘가에서 한 번쯤 마주친 ‘가짜 그림’을 기억하십니까? ‘진짜’가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우리의 ‘진짜 삶’을 그려내던 ‘진짜 그림들’. 삼각지 일대에서 ‘생산’되던 근현대 대중 미술 ‘이발소 그림’을 추억합니다. 그 ‘싸구려 행복’에 깃든 값진 의미를.


평양집 뒷골목에 위치한 오화실에서 화가 오재성 씨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오래된 학고방에서 하루 일과를 보낸 것도 어느덧 20년이 다 되어간다.

두꺼운 밤색 코트에 몸을 숨긴 중년 남자가 삼각지의 어느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빠르고 익숙한 걸음으로 평양집과 삼각스튜디오를 지나 은하미용실을 끼고 사라진 남자. 서둘러 그의 뒤를 밟으니 조용한 골목 안쪽으로 서너 개의 간판이 눈에 띈다. e-아틀리에, 원화실, 오화실 같은 이름이 나붙어 있다. 그가 멈춘 곳은 오화실 앞. 오래된 학고방 창문가로 풍경화와 초상화가 나와 있다. 양복을 입고 굳은 표정을 지은 우리의 아버지 얼굴. 초상화에는 ‘초상화 주문’이라고 쓰여 있다. 간판을 올려다보니 ‘그림 배우실 분’도 찾는다. 이제는 거의 다 사라지고 그 흔적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인 삼각지 미술의 현재.

(왼쪽) 오재성 씨가 그린 초상화와 풍경화.

지난 20년간 삼각지 일대에서 활동해온 화가 오재성 씨는 매일 아침 출근하듯 작업실에 나와 그림을 그린다. 삼각지 미술을 취재하다 그의 작업실을 발견하고 문을 두드렸을 때, 오재성 씨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취재를 거부했다. 그러나 단호한 거절에도 다시 찾아온 기자에게 그는 난처하다는 듯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 같은 사람을 취재해요. 아는 사람들이 보면 웃어요. 이런 그림 그리는 거 창피하죠, 뭐. 더 나은 사람 찾아가세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출 그림(이국의 풍경을 유화로 그려 수출하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지난 40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활동해온 화가 오재성 씨. 버젓한 예술가가 아닌 환쟁이로 살아온 시간에 대한 소회는 생각보다 짙었다. 하나 우리가 만나고자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삼각지 미술의 주인공이자 근현대 대중 미술의 산 증인 말이다.

(왼쪽) 오화실에서는 그림을 배울 수도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문의하시길.

용산구 삼각지 일대에서 성행하던 현대미술의 한 흐름을 우리는 ‘삼각지 미술’이라고 칭한다. 그것이 생겨난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용산 일대의 지리적 요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삼각지는 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의 중심부인 용산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 일대 100만 평은 예로부터 외국군이 서울을 점령하거나 국권을 침탈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켜온 곳이다. 1953년에는 이 중 89만 평에 미8군 사령부와 한미연합 사령부, 주한미군 사령부 등 미군 지휘부와 외국인 주거 시설, 병원과 골프장이 들어섰는데,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비교적 낙후된 서쪽의 삼각지와 기지촌으로 번화한 동쪽의 이태원은 미군이 여가를 즐기던 주요 무대였다. 특히 이태원에는 미군의 여가 활동에 필요한 유흥업소와 상점이 줄지어 들어섰고, 군에서 반출된 군수품도 넘쳐났다. 당시 실크 위에 유화로 세밀하게 그리는 한국 화공들의 초상화가 유행이었는데, 그 솜씨에 반한 미군들은 “원더풀!”을 외쳤다고.

이태원의 초상화 화랑이 성업하자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서쪽의 낙후한 삼각지 일대에는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의 작업실이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다. 1960~1978년까지는 삼각지 최고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공들은 베트남 전쟁에 따라가서 초상화를 그렸고, 이태원과 삼각지에는 그림을 수출하는 업체까지 생겨났다. 이들은 나날이 성장해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동과 일본에까지 그림을 수출했다. 당시 수출 그림은 명화 모작, 종교화, 풍경화, 정물화, 동물화 등이 주류를 이루었고, 종류에 따라 가격도 차등해 매겨졌다. 이 지역 일대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의 평균 월수입은 20만 원 정도(당시 대학교수 월급이 5만~6만원이었다).

그림이 돈벌이가 된다는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손재주가 뛰어난 화가들이 속속 삼각지로 모여들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림을 그려 수출하는 회사가 많았어요. 화가가 업체에 고용되는 거죠. 영풍, 아메리아, 대륭 같은 회사가 대표적이었어요. 아메리아 공단은 100명이 넘는 화가가 소속되어 있을 정도로 규모가 어마어마했어요. 이젤에 같은 그림을 수십 개씩 세워놓고 화가들이 한 부분씩 맡아서 그리는 거예요. 마치 공장 같은 풍경을 연출했죠. 하루에 적게는 10장, 많게는 50장까지도 그렸어요.” 오재성 씨의 말이다. 수출 그림은 빨리 그려 대량으로 납품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풍경화나 정물화처럼 간단한 그림을 제일 많이 그렸다. 철저히 수요에 의해 그리는 그림이었으므로 어떤 종류의 그림이냐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비싼 그림은 유명한 명화나 성화를 모방한 것이었고, 풍차가 돌아가는 풍경이나 바다 위 범선이 떠 있는 것처럼 평범한 이국풍 그림은 중간 가격대, 작가가 임의로 그린 그림은 낮은 가격대에 거래되었다.


1 삼각지역 13번 출구로 나오면 대구탕 먹자 골목이 나온다. 그 초입에 이토록 정겨운 모습이 남아 있다.
2 성북동의 전시 공간 ‘오래된 집’에서 열린 <삼각지 미술 예찬>전.


(왼쪽) ‘그림 배울 분’이라는 말이 마치 그림처럼 쓰여 있다.

삼각지 미술 시장이 큰 변화를 맞이한 건, 미군의 징병제가 모병제로 바뀌면서 그들의 향수가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고향이 그리워 그림을 찾던 이들이 사라지면서 미술품의 수요도 줄어든 것이다. 그 당시 수출 그림에 종사하던 수많은 화공은 붓을 꺾고 전업했으며, 그림을 배우려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어 그림 수출 회사도 문을 닫았다. 실력 없는 화공은 재능 있고 젊은 화공에 밀려 삼각지를 떠났고, 송탄이나 동두천 같은 기지촌으로 적을 옮기는 화가도 많아졌다. 이 같은 침체기를 거쳐 삼각지 미술이 다시 활기를 찾은 건 1980년대 초반. 수출 백만 달러 돌파로 나라 경제가 좋아지고 대중의 문화 소비 욕구가 강해지면서 내국인을 위한 대중 미술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주거 환경의 변화도 한몫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아파트가 우후 죽순 생겨나면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벽면을 장식할 풍경화나 정물화가 필요했다. 이때 크게 유행한 그림은 한국의 유명화가 그림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렇듯 생활공간 안에 널리 퍼진 그림을 우리는 ‘이발소 그림’이라고 부른다. 서민의 삶과 함께 호흡하며 생활 그림, 생활 공예로서 역할을 충실히 한 생활미술. 그것의 본질은 원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발소 그림’으로 석사 학위 논문을 쓰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려 3000점의 이발소 그림 자료를 수집한 박석우 씨는 그의 저서 <이발소 그림>을 통해 이렇게 전한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 이스터 섬의 인면 석상, 영국의 스톤헨지, 원시미술, 이집트의 부장품들, 그리스의 조각, 중세의 성화 그리고 우리나라의 사찰 벽화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이상을 위해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현실을 위해 존재한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위해 인간을 중심으로 모든 미적 형태와 개념들이 생겨났을 뿐이다. 물론 순수 미술이란 개념이 형성되어 예술이 형이상학 속으로 빠져 들어간 후 고상한 예술인은 대중으로부터 멀어져갔지만, ‘예술 인간’ 이전의 ‘솜씨 인간’은 꾸준히 환쟁이로서 장인 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오른쪽) ‘삼각지의 명소’ 건전이용원 내부 풍경.

‘예술 인간’의 등장으로 ‘솜씨 인간’의 위상이 낮아지면서 대중 미술을 폄하하는 다양한 용어도 생겨났다. 개화기부터 현재까지 대중 미술을 지칭하는 말로 ‘뼁끼 그림’(간판 그림) ‘이발소 그림’ ‘나이롱 그림’ ‘속화’ ‘키치’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뼁끼는 페인트의 일본식 발음에서 따온 것으로 극장을 비롯한 간판 그림을 뼁끼 그림이라고 불렀다. 기본기 없이 대충 그린 엉터리 그림이라는 의미의 ‘나이롱 그림’, 속되고 저속한 그림이라는 의미의 ‘속화’, ‘나쁜 취미’ 혹은 ‘거리의 쓰레기 같은 미술’이라는 뜻의 ‘키치 kitsch’ 또한 대중 미술을 폄하하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주류에 의해 생겨난 이 용어들은 역설적으로 ‘솜씨 인간’의 애환을 담고 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발소 그림’에 주목해야 한다. 이발소 그림은 대중의 수요에 따라 공급되는 상업적이고 키치적 산물이지만 그 안에는 시대의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한 우리의 미술 역사가 담겨 있다. 박석우 씨의 <이발소 그림>에 따르면 정권의 정당화와 각종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애국 충효 사상이 팽배하던 1960~1970년대에는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나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가 그려졌고, 새마을 운동 현장을 묘사한 그림들이 달력 속에 박혀 있었다. 가난하던 시절이 었으므로 돈과 권력을 향한 염원은 돼지나 호랑이 그림으로 표출되었고, 이발소는 물론 대중목욕탕, 다방, 식당 등에서 이런 그림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경제가 점점 나아지고 교육수준도 높아지기 시작한 1980년대에는 유명 화가의 그림을 모방해서 그린 그림이 인기 높았다. 김창렬의 물방울 그림이나 이숙자의 보리밭 그림은 계층에 상관없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산업 기술이 발달한 1990년대에는 다양한 재료로 만든 다양한 대중 미술이 소통되고,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보다는 복제화가 더 많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그림들은 원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싼값에 팔렸다. 복을 비는 기복 신앙이나 실용성이 중요시되던 ‘이발소 그림’에서 감상과 취미 생활의 한 부분이되는 미술로 그 역할이 바뀐 것이다. 그 여파는 점점 더 확대되어 이제는 화방이 아닌 인터넷에서 그림을 사고파는 시대가 되었다.

(왼쪽) 미로처럼 좁은 골목을 지나서 들어가는 원화실.

오래된 일본식 가옥과 그 너머로 초고층 아파트가 한눈에 보인다.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삼각지의 현재 모습이다.


이발소와 세탁소, 정겨운 옛 풍경이 남아 있는 삼각지의 골목길.

오재성 씨는 최근 대중 미술 시장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요즘은 인터넷 주문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제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그림을 사는 시대가 온 거죠. 물론 소장용이라기보다는 카페나 가게를 꾸미기 위해서 거는 그림이에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또 다른 시장이, 먹고살 길이 생긴 것인데요.” 주문에 따라 그림을 그리지만 그 안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표현한다는 오재성 씨는 대중 미술 시장에서도 실력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생활 그림 또한 독립된 현대미술의 한 장르라는 자명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말이다.

지난 10월, 성북동의 전시공간 ‘오래된 집’에서는 [Homage to Samgakji Art_삼각지 미술 예찬]전이 열렸다. 신인부터 중견 작가까지 삼각지 미술을 사랑하는 몇 안남은 작가들이 참여한 의미 있는 전시였다. 담당 큐레이터 황하연 씨는 “이 전시는 삼각지 미술의 미적 가치와 그 의미를 찾아보는 실험이자 삼각지 미술에 대한 집중적 연구를 위한 발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미술계에서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는, ‘키치’를 추구하는 작가의 작품을 조명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요.”

(왼쪽) 류해윤의 작품, ‘나들이’.

생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이미지와 자신만의 상상력, 추억, 기억을 조합해 합성하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류해윤 작가

(왼쪽) 최석운의 작품 , ‘돼지가 나를 본다’.

풍경을 그리고 현장의 색채와 공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민정기 작가, ‘아줌마 패션’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연속적인 무늬를 패턴화한 이준복 작가, 익살스러운 포즈를 잡고 곁눈질하는 사람이나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개 또는 웃고 있는 돼지를 즐겨 그리는 최석운 작가, 옛 병풍 속 그림인 문인화를 몽환적으로 그려내는 황지윤 작가가 선보인 작품들은 ‘현대판 민화’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소박하고 정겹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역사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하던 삼각지 미술은 후대에도 길이 전해질 것이다.

“삼각지 미술이 갖는 가치는 예술의 소통 방법에 있다. 화가의 주관적 예술 세계를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그림을 작가가 공급하는 방식. 그러므로 삼각지 미술의 예술성을 작가에게서 분석해내기보다는 삼각지 미술을 통해 근현대의 대중 정서를 이해하는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지난 10여 년간 이발소 그림을 연구해온 교사 박석우 씨의 말은 삼각지 미술이라는 ‘뜨거운 예술’에 깃든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준다.

비록 한나절이었지만 삼각지 일대를 돌아다니며 삼각지 미술은 물론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오래된 것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병풍처럼 둘러싼 공사 현장에 위협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용산 뉴타운 개발로 80만 평에 이르는 용산 기지는 2015년까지 평택으로 완전히 이전할 것이라고 한다. 그다음 수순은 삼각지역, 녹사평역, 이태원 일대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 이 지역 상권이 불가피하게 대이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코앞으로 닥쳐왔다. 역사의 뒤편에서 묵묵히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들을 외면한 채.

삼각지 일대를 둘러보고 싶다면… 이제 곧 사라져버릴 삼각지 미술의 현재가 궁금하다면 삼각지역 13번 출구 앞 평양집부터 용산우체국으로 이어지는 뒷골목을 걸어보세요. 유일하게 세 곳 남은 화가들의 작업실은 마니마니슈퍼마켓과 은하미용실이 마주 보고 있는 지점에서 우회전하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이 작업실 뒤쪽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 다 보면 오래된 세탁소와 70년이 다 되어가는 일본식 가옥, 그리고 저 멀리 초고층 아파트가 비현실적으로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각지의 오늘입니다.



디자인 최은숙 기자 도움말 박석우(서울 중산고등학교 교사), 참고 도서 <이발소 그림>(박석우 지음, 동연)

 

글 정세영 기자 사진 하성욱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