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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극장] 고대해양탐험가 채바다 씨 뗏목 타고 삼만 리
서울에서 번듯한 직장에 다니던 채바다 씨, 나이 마흔 넘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고향 제주로 돌아가 뗏목을 탔다. 제주에서 일본까지 노 저어 갔다. 고대 한민족이 그러했듯이. 옛날 옛적 변변한 배도 없이 우리 문화가 일본에 전파된 것은 바다의 힘이었음을, 누군가의 호기심과 모험심이었음을, 채바다 씨의 표류기가 증명했다. 엉뚱한 줄 알았는데, 실은 처절하고 진지했던 한 남자의 외롭고도 의로운 탐험기.

돛대도 없는 떼배에 올라 채바다 씨가 노 저었다. 그가 어릴 적 동네에는 이런 떼배가 흔했다. 그 떼배가 고대 한국 문명을 일본에 전한 메신저였음을 알리고자 세 번의 험난한 떼배 탐사를 떠났다. 그가 탔던 떼배는 서귀포시 천지연 입구, 제주해녀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낯선 길로 접어들었을 때를 기억한다. 날은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되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할 수도 있는데, 두 바퀴는 처음 보는 세상을 향해 내달렸다. 미지의 공간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 타고난 겁쟁이 소녀의 가슴속에도 똬리를 틀고 있었나 보다.
제주도 성산포에서 태어난 채바다 씨는 자전거가 아닌 뗏목으로,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미지를 향한 호기심을 토해냈다. 호기심은 20년 넘는 지난한 모험으로, 모험은 경력으로 발전했고 결국 ‘고대해양탐험가’라는 이색적인 직업으로 이어졌다. 그는 1996년 통나무 몇 개를 엮어 만든 뗏목에 작은 돛을 단 원시 배 형태인 ‘떼배’를 타고 제주도에서 일본까지 가는 항해에 성공해 주목받았다. 너비 3.5m, 길이 6.5m의 허술한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는 그의 모습은 우주 여객선이 운항되는 요즘, 참 낯선 풍경일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표류기가 떠오르지만, 채바다 씨의 탐험기는 소설 같은 실화다.
“지금까지 세 번 떼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지. 굳이 왜 모진 방법으로 갔느냐. 그건 떼배를 통해 우리 고대 문명이 일본으로 이동한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서였어요. 이 너른 바다 물길에 자랑스러운 한국 역사가 숨 쉬고 있어요.” 채바다 씨는 빠른 말씨로 세 번의 탐사 여정을 들려주었다. 1996년 5월, 대원 다섯 명과 함께 제주 성산포에서 6일 밤낮 떠내려가 일본 고토 열도에 도착했다. 1997년 10월에는 11일에 걸쳐 성산포에서 출발, 고토 열도를 거쳐 나가사키까지 탐험했다. 2001년 2월에는 백제 왕인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 10권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간 길을 따라 떠났다. 전남 영암군 대불항에서 출발해 진도 울돌목, 완도, 거문도를 거쳐 일본 사가 현에 이르는 경로였다. “영국인들이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게 16세기(1513년)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미 일본 열도에 한반도의 고대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이를 증명하고 한국과 일본에 그 역사를 알리고자 떼배 항해를 재현한 거죠.” 어느 한국인이 조그만 뗏목을 타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향하는 모습은 <요미우리> <아사히> 등 일본 주요 일간지와 TV 뉴스를 통해 일본 전역에 알려졌다. 그는 열 번만 가면 일본인 대다수가 한국이 그들의 조상 나라임을 알게 될 것이라 했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그의 시가 떠올랐다. “나의 뱃길은/ 표류해서 가지만// 역사는 결코/ 표류해서는/ 안 된다.” (시 ‘표류’)
하지만 너무 위험한 일 아닌가. “목숨을 담보로 한 뱃길이었습니다.” 그의 입술이 굳어졌다. 거센 폭풍을 만나 살아난 게 기적이라며, 그는 먼 바다로 눈을 돌렸다. “파도가 6m쯤 되었지. 일본 현해탄에 들어섰을 때 해상보안청에서는 내가 조난당한 줄 알았답디다. 최신 기술로 만든 배도 현해탄을 건널 때 헐떡거리는데, 하물며 누추한 떼배라니. 그런데 말이오, 날 삼킬 듯 덤벼들던 파도가 글쎄 배 앞에서 넙죽 엎드려요.” 모든 존재를 가차 없이 할퀴고 침몰시키던 바다가 그에게 길을 내줬다. 그 순간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달변인 그가 또다시 말을 잃었다.
망망대해에 놓인 떼배 한 척. 모터도 없이, 바람이 등 떠밀어주는 대로, 해류가 이끄는 대로 채바다 씨의 떼배는 흘러갔다. 다가가도, 또 다가가도 수평선은 저 멀리 도망가는데…. “그나마 낮에는 괜찮지. 밤이 되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더라고. 내 앞에 솟은 하얀 파도가 꼭 상어 이빨 같더이다.”

수평선에 어머니를 묻고, 불효자는 울고 “나를 삼키려는 파도 앞에 서면 절로 기도가 새어 나왔지. 그 기도가 바로 시였어요.” 바다는 해양탐험가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시의 씨앗인 기도는 종교에서 나왔다. 어머니라는 종교. “어머니를 그만 바다에 묻었어요. 내가 막내인데, 막내가 이런 몹쓸 짓 하는 게 어머니 마음에 걸린 거야. 어머니가 그랬어요. ‘네 아비 곁에, 산에 묻지 말고 바다에 묻으라. 넌 말려도 안 들을 애다. 내가 네 곁에 있으마’라고.” 어머니는 그의 첫 항해 직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예정된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어머니 유골을 성산포 바다에 뿌렸다.집채만 한 파도와 서슬 퍼런 물빛을 보면서 그는 기도했다. “저 수평선이 나를 지켜준다. 바다가 나를 죽여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로 썼다. “수평선에 묻히신 어머니/ 내가 수평선 따라/ 노 저어 갈 때마다/ 따라 오신다// 아들아 뱃길 조심하거라.”(시 ‘어머니의 수평선’ 중)
15년 전, 마흔 넘은 나이에 채바다 씨가 홀연 제주도로 귀향한 것은 바다와 어머니 때문이었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심지어 아내와 두 자녀와도 헤어져 제주로 왔다. “바다에 단단히 미쳐 있었지. 더 나이 들기 전에 바다를 위해 뭔가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아, 어머니…. 그때 어머니 나이가 아흔이었어요. 많이 사셔도 5년, 요행을 바라도 고작 10년 더 사실 텐데, 어머니는 40년 넘게 나를 위해 기도하며 살아오셨는데, 고작 5년 동안 어머니를 위해 살지 못한다면 내가 자식이 아니다….” 어머니는 마흔두 살에 막둥이인 그를 낳았다. 위로 형제도 많고, 너나없이 살기 어려웠던 그 시절, 어머니는 뜻하지 않게 그를 임신한 뒤 채마밭 돌담 위에서 여러 번 몸을 내던졌다. 용케 살아서 세상 빛을 본 아이는 어깨가 유난히 굵었다. 남한테 지기 싫어 늦게까지 공부하고, 반장도 도맡아 했다. “자다가 눈을 뜨면 촛불 켜놓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작은 등이 보였어요.”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를 본 아들은 결심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돈 벌어 잘사는 사람 말고 훌륭한 사람. 어릴 적 동네에서 타고 놀던 떼배가 고대부터 있었던 문명의 메신저였다니, 오호라 내 할 일이 그 흔적을 찾아내는 탐험이구나. 그걸 하면 훌륭한 사람의 그림자라도 밟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남편이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 해양 탐험을 한다면 어느 아내가 가만있겠는가. “뜻있는 일을 하고자 했지만, 가족과 아이들을 돌보지는 못했지. 그 이야기만 나오면 내가 정말 할 말이 없어요.” 커다랗던 바다 사내가 갑자기 어깨를 움츠리고 소리 내어 운다. 그의 두 자녀는 돈 잘 벌던 아빠가 홀연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것을 지금도 원망할 것이다. 아내의 마음은 차마 들여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내는 강했나 보다. 채바다 씨가 첫 항해를 떠날 때, 아내는 그의 누님과 함께 그를 배웅하러 먼발치에 서 있었다.

(위) 20년 넘게 써서 해진 가죽 모자는 그가 모진 해풍에 맞서며 감행한 탐사를 기억한다.


채바다 씨가 성산포에 만든 바다박물관. 원시의 배, 어업 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활어 같은 시어를 낚아 시집에 담았다. 시심은 그에게 자유로운 감성을 열어줬다.

사랑한다면, 천 번 기도하라 아버지가 지어준 채길웅이란 이름을 버리고 채바다로 개명할 정도로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를 작업실 삼아 떠다니고, 심지어 바다로 시를 읊는 남자라고 했을 때, 사실 반짝이는 비취 빛 바다를 떠올렸다. 도시인에게 바다는 낭만이고 환상이니까. 그러나 채바다 씨가 노 저어 길을 낸 바다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억척스럽고 살벌한 현실이었다. 미지를 향한 호기심이 아무리 크고 멋진들 살아남아야 저 건너편에 꿈을 하역할 수 있을 테니까. 살아서 역사를 쓰거나, 죽어서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다. 중간은 없다.
그가 시를 공부한 것은 이런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감수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탐험의 시초는 상상력과 감성이에요. 그래서 시심 詩心은 제 탐험의 비타민과 같지요.” <그래도 그대는 행복하다> 등 시집 다섯 권을 낸 채바다 씨. 마르지 않는 감성 덕분에 그는 조선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사랑하게 되어 한국하멜기념회를 조직했고, 그가 모은 바다의 기록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바다박물관을 만들었다. 시인, 한국하멜기념회 회장, 바다박물관 관장 등 많은 직함 중 그가 대표로 꼽는 것은 고대해양탐험가다. “명함에 ‘고대해양탐험가’라고 적힌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나밖에 없어서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나밖에 없어서 마음이 아파. 열 명, 스무 명쯤 있어야 든든한데. 탁상 연구가 아닌 나처럼 바다를 직접 탐사하는 젊은 해양탐험가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간의 희귀한 탐험과 연구로 그는 장보고상(국토해양부장관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상은 상일 뿐, 그는 가난하다. 우리나라엔 채바다 씨처럼 어느 학파나 연구소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해양탐험가를 지원하는 제도가 없다. 그를 알아보는 이들을 위해 강연을 하고, 글을 써서 근근이 살아가는 배고픈 탐험가다. 내일의 끼니도 어찌 될지 모르면서 그는 2년 뒤 고조선 시대 고인돌 흔적을 추적하는 서해안 탐사를 계획하고 있다. 예순여섯의 나이에 그는 청년보다 더 펄떡이는 심장을 지녔다. 그 심장으로 바다를 사랑한다. 사랑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의 자작시가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가?// 사랑/ 한다면// 천 번/ 고백하고// 천 번/ 기도하라.”( 시 ‘천생연분’)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