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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기획 바티칸, 비밀의 문을 열다


약속과 믿음과 우연이 이삿짐처럼 사라진 2009년 12월, 서울에도 성탄이 찾아왔다.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은 겸손하게 우러러볼 무언가를 찾아 성당으로 향한다. 그곳에 앉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나날을 위로받는 시간. 그 치유의 장소에는 어머니가 계신다. 저 이슬의 세상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못난 자식들을 보듬는 어머니. 그래서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성당을 영혼의 요람, 안식처로 여긴다.
이 겨울, 또 하나의 정신적 요람이 우리를 찾아왔다. 2천 년 동안 공개되지 않은 나라, 10억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인 고향 바티칸이 그 비밀의 문을 열었다. 교황청 고고학연구소 소속 마이클 콜린스 신부의 오랜 열망 끝에 2008년 교황청이 그에게 취재와 촬영을 허락한 것이다. 6년 동안 성베드로 대성전의 가이드로 일하면서 바티칸이라는 종교적 근원지의 비밀스러운 모습에 매혹된 그는 사제 서품 후 교황청 고고학연구소에서 바티칸의 역사와 생활상을 공부해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처음 공개된 바티칸의 사생활은 진귀하고 보배롭다. 성베드로 광장이나 미술관 등을 제외하고는 일반에 한 번도 공개도, 취재도, 사진 촬영도 허락되지 않은 비밀의 땅. 그 안에는 베드로의 순교에서 시작된 바티칸의 역사, 장대한 건축, 그 성벽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교황의 일상, 값을 매길 수 없는 전례 보물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통조림 속에 봉인된 시간처럼 거룩하고 경건한 곳이다가도, 슈퍼마켓과 은행과 현금 지급기가 있는 일상의 공간, 바티칸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1 경비를 서고 있는 스위스 근위대.
2 주교들이 교황청 신문을 읽고 있다.



3 모자이크 복원 작업 중인 전문가.
4 시스티나 성당의 소년 성가대.


바티칸의 일상 바티칸은 면적이 0.44㎢(13만 3천1백 평)밖에 되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다. 그러나 바티칸 국적의 시민이 있고 치안 조직, 재정 체계, 우편망, 미디어를 갖춘 명실상부한 독립 국가다. 전기나 수도, 가스 등의 공공 설비는 이탈리아 정부에 많이 의존하지만, 재정 면에서는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고 있다. 시국 안의 귀중한 예술품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관광 수입, 예술품 복제품 판매, 박물관 입장료, 그리고 세계 각지 교구들의 기부로 충당한다. 4백50여 명의 바티칸 국민(바티칸에서 상주하며 일하는 사람은 8백여 명이다)이 주로 하는 일은 예술품을 관리하고, 교황청을 청소하고, 정원을 돌보고, 교황의 알현 행사에 쓸 의복을 만들거나 요리하는 것이다. 하루 일이 끝나면 이들은 물건을 구입하고 요리를 하고 놀고 쉰다. 일하고 쉰다는 것에서 우리의 일상과 별다를 바가 없다. 바티칸 국적은 각자 직책의 필요에 따라 주는 것으로, 사직하거나 은퇴하면 반납해야 한다. 따라서 대부분은 이중 국적으로, 바티칸 국적과 본래 모국의 국적을 갖는다.

교황의 경호와 의전은 스위스 근위대가 맡는데, 르네상스 시대의 줄무늬 옷을 입고 행진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그림 같다. 국경 보호, 범죄 수사, 교통 통제를 포함한 시국의 치안은 바티칸 시국 경비단이 맡는다.
워낙 면적이 작은 나라여서 교통수단으로 자전거 이상은 거의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걸어 다닌다. 2003년에 바티칸 지하에 새 주차장을 지었는데, 흙을 파내는 작업 도중에 지하 묘지에서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문화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교황이 바티칸을 떠날 때 사용하는 헬리콥터 착륙장이 바티칸 정원 북쪽 끝에 있다. 기차역은 1933년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는데, 지금은 바티칸 안으로 중화물을 들여올 때만 쓰인다. ‘아논나’라는 슈퍼마켓이 하나 있어, 기초 생필품, 고기, 생선, 채소부터 술과 담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판매한다. 이곳에서는 거주 증명서나 노동 허가증을 제시해야 물건을 살 수 있고 술과 담배는 한 달 동안 살 수 있는 총액이 제한되어 있다. 나라 전체가 면세 지역이라 물건을 싸게 사서 바티칸 밖에서 되파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탈리아의 일반 약국에서는 살 수도 없는 귀한 약들을 바티칸의 의약국에서 바티칸의 고용인과 거주자들에게 분배한다. 교황청 고용인을 위한 은행도, 현금 지급기도 있는데, 이 은행의 카드와 수표는 바티칸 밖에서는 쓸 수 없다. 전화 시설은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한 수녀들이 맡고 있다. 바티칸 안에는 상업용 식당이나 바가 하나도 없고, 직원들을 위한 몇 군데 간이식당이 있는데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다.

5 미사 집전 중인 교황 베네딕토 16세.


1 성베드로 대성전의 상징인 ‘미켈란젤로의 돔’.
2 성베드로 대성전의 정면 모습. 8개의 코린트식 기둥과 4개의 벽기둥이 있다.


바티칸의 건축 이 작은 나라 안에는 2천 년에 걸친 인류 건축의 역사가 다 들어 있다. 바티칸의 건물들은 여러 시대에 여러 교황들이 후원하여 지었기 때문에 동일한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없다. 고대 로마의 소박한 교회에서부터 찬란한 바로크 시대 건축물까지 서양 건축사가 압축되어 있다.
성베드로 대성전 황제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년)가 베드로 무덤 위에 대성전을 지은 것이 성베드로 대성전의 시작이다. 그 후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년)가 낡은 성전을 허물고 도나토 브라만테에게 새 대성전 건축을 맡겼다. 브라만테가 그리스식 십자가 모양(가로세로 길이가 같은)으로 대성전을 짓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후 건축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잔 로렌초 베르니니 같은 건축가들의 손에 맡겨졌고, 1626년 완성되었다.
바티칸 박물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세기 중엽 폼페이가 발굴된 직후 클레멘스 14세와 비오 6세가 수장한 폼페이 유적,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년)가 이집트, 토스카나, 움브리아에서 발굴한 유물까지 그야말로 찬란한 유산들이다. 박물관에 수장된 유물도 그렇거니와 박물관 건물들 자체가 르네상스 예술의 걸작이다. 이 중 시스티나 성당과 보르히아 아파트, 라파엘로의 방 등 교황궁의 일부는 대중에게 공개돼 있다.


3 촛대 전시실.
4 이탈리아식 정원.


시스티나 성당 새 교황이 선출되는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1508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이 성당 천장에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그가 창세기의 아홉 장면을 구성해 그린 ‘천지창조’는 역사에 남을 걸작이 되었다. 1535년에 미켈란젤로는 다시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불려가 교황 제대 위 벽을 장식하게 된다. 창문 두 개를 메우고, 기존의 프레스코화들은 모두 지워야 했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라는 지시를 받고, 천국에 막 올라가는 이들과 지옥으로 떨어지는 악인들을 시계 방향으로 배치해 그렸다.
바티칸 정원 바티칸 서쪽, 성베드로 대성전 언덕 위에 여러 정원이 있는데, 총 16만㎡의 넓이다. 정형식 정원도 있고 좀 더 전원풍의 수풀이 있는 곳도 있다. 97개의 분수가 있고, 물은 로마 북쪽으로 37km 떨어진 브라차노 호수에서 끌어온다. 또 여러 개의 성당 건물과 하나의 기차역, 수녀원이 정원 안에 들어서 있다. 특히 이탈리아식 정원이 아름다운데, 16세기 이탈리아 정원 설계의 전형적인 모습인 회양목 울타리 무늬로 돼 있다. 정원 양쪽에는 원형 분수가 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주교관을 모아놓은 진열장.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는다.

바티칸의 보물들 시스티나 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을 보는 이들 가운데, 그 그림의 뒤쪽 방(교황 제의실)에 보물이 수없이 쌓여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황 제의실에는 진귀한 보석이 박힌 교황의 삼층관부터 교황이 미사를 집전할 때 쓰는 모자, 신발, 장갑, 금과 루비가 박힌 십자가와 촛대 등 인간이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대부분 가톨릭 신자들이 기증한 것이고, 왕이나 다른 국가 원수가 선물한 것도 더러 있다.
주교관 주교라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는 표시로, 오직 전례 중에만 쓴다. 보통 비단 천으로 덮은 두 장의 얇은 판을 앞뒤로 덧대 만든다. 뒤에는 두 줄의 천을 다는데, 주교의 주교 문장을 수놓은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주교관을 보석으로 장식하거나 정교한 도안을 수놓는 경우가 많았지만 오늘날에는 많이 간소해졌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에 교황 삼층관 대신 자신의 문장을 장식한 주교관을 썼다.
미사 전례복 313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종교 관용을 선포하자,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한 것과 함께 전례복을 화려하게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성체 성사 때 주교와 사제는 제의(소매 없는 긴 옷)를 입고, 부제는 달마티카(소매 없는 튜닉)라는 부제복을 입는다. 교황의 전례복은 제의실 안에, 직물이 손상되지 않도록 전시실용 옷걸이에 걸어서 특별 제작한 옷장 속에 보관한다.


1 주교 십자가.
2 1882년에 출판된 교황 레오 13세의 미사 전례서.
3 미사 전례복 위에 걸치는 영대.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를 만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4 전례의 진행을 알리는 도구인 종.


주교 십자가 보통의 십자가와 달리 주교 십자가는 주교, 대주교, 추기경 또는 교황만이 걸 수 있어 고위 성직자의 표지가 된다. 긴 사슬에 매달린 십자가가 심장 밑부분에 오기 때문에 가슴 십자가라고도 부른다. 교황의 역할은 예수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이 십자가를 건다. 역사적으로 교황의 주교 십자가는 보석으로 호화롭게 장식했다.
미사 전례서 미사 전례서에는 정식화된 기도문뿐만 아니라 미사 중에 낭독하거나 노래로 부르는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 초기의 미사 전례서는 양피지 같은, 동물 가죽에 내용을 써서 무두질한 가죽 표지로 제본했다. 일부는 보석으로 표지를 덮기도 했다. 15세기 중엽에 인쇄술이 발견되면서 미사 전례서를 더 싸게 대량으로 만들 수 있게 됐다. 오늘날의 미사 전례서는 세계의 수많은 언어와 방언으로 출판되고 있다.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하던 중세의 전례 참석자들에게 종은 유용한 도구였다. 로마 제국의 세력이 강성했을 때 그 통치를 받던 유럽인들의 언어가 라틴어로 통일되어 라틴어로 전례를 집전했다. 그 후 유럽 각지에서 각각의 현지어가 발달했음에도 1969년까지 교회의 전례는 라틴어로만 집전했다. 종은 미사 중에 여러 단계에서 울려, 참석자들에게 제대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준다. 무릎을 꿇어야 할 때와 일어설 때, 사제가 축성의 말(“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을 할 때, 사제가 성체와 포도주가 담긴 성작을 들어 올려 모두가 보고 공경하게 할 때 등에 사용한다. 교회가 작으면 작은 종 하나로 충분하지만 큰 교회에서는 장엄한 소리를 내는 차임벨을 두기도 한다

공개되지 않아 더 비밀스러운 바티칸의 일상은 <바티칸_영혼의 수도, 매혹의 나라>(마이클 콜린스, 디자인하우스)에 담겨 있다. 바티칸의 이면을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담은 책이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