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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is power 알레산드로 멘디니, 디자인은 스토리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십 여년 전부터 한국과의 인연을 맺고 냉장고, 바닥재, 도자기, 전시 그리고 최근에는 건축까지, 제품 디자이너는 물론 예술가이자 건축가의 면모를 십분 발휘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제품뿐만 아니라, 3차원 공간을 통해 이 거장의 인간적인 감성을 만날 수 있다. 억압된 인간의 감성을 해방하기 위해 멘디니가 주창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디자인’ 속에서 보고, 느끼고, 걸으며 보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1 1994년, 멘디니가 디자인한 네덜란드 그로닝겐 미술관 외관. 멘디니 특유의 색점(도트 패턴) 디자인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2 네덜란드 그로닝겐 미술관 실내.

“잘 왔어요. 제가 알레산드로예요.” 손녀를 대하듯 따뜻하고 겸손한 환대. 그의 성품은 밀라노에서 익히 알려진 그대로였다. 아틀리에에서 직원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직접 요리도 해서 나눠 먹는다는 겸손하고 인간적인 마에스트로. 그때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가 알레산드로 멘디니 Alessandro Mendini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에 담긴 따뜻한 휴머니즘이 단순히 유희적인 뉘앙스가 아닌 진실한 태도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간을 위한 디자인
“제가 하는 모든 문화적, 지적 활동은 철저히 개인적인 제 삶과 감성적인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가 자서전에서 기술했듯, 그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감성을 중요시하는 디자이너다. 1981년 이탈리아의 디자인 그룹 멤피스 Memphis가 한 세기 반의 근현대 디자인 역사에서 세계의 주도권을 이탈리아로 가져오기 전까지, 세계 디자인계는 독일의 기능주의에 속해 있었다. ‘건축과 디자인은 무엇보다 그 기능을 우선으로 한다’는 기능주의 정신은 전후 사회를 복구하는 데는 효율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획일성이 사용자의 감성을 억압했다. 이에 1960년대부터 이탈리아의 선구적인 건축가들은 기능주의의 한계에 반대하는 디자인 운동을 시작했는데, 바로 그 중심에 선 인물 중 하나가 알레산드로 멘디니다. 밀라노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잡지 도무스 Domus의 편집장, 교수 등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1976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대표적인 디자이너들을 병합해 알키미아 Alchimia라는 디자인 그룹을 만들었다. 멤버들의 디자인 성향 차이로 알키미아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이후 세계적인 거장이 된 에토레 소사스, 안드레아 브란지 등이 함께 모여 작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훗날 알카미아에 속해 있던 디자이너들이 멤피스를 조직하기도 했다). 철저한 기능주의 중시로 인해 인간성을 상실한 디자인에 대한 반발로, 멘디니는 기능보다 심미성과 감성에 중점을 둔 ‘회화적인 디자인’을 창안해냈다. 이 시기에 멘디니가 만든 대표적인 작품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프로스트 Proust’다. 1978년에 디자인한 이 의자는 획일적인 직선의 단색 가구에 익숙해진 소비자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반기능주의 정신을 표방한 멘디니는 앞선 18세기 고전적인 이탈리아 의자에 신인상주의 화가 폴 시냑 Paul Signac을 연상시키는 모자이크식 점묘화를 결합시켰다. 기능을 떠나서 색상과 디자인을 통한 심미적인 감성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달하기 위한 시도였다. 점묘법으로 시작한 그의 회화적인 디자인은 제품 분야를 넘어 예술, 건축 분야로 확대되어나갔다. 우리가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스와치 Swatch의 컬러풀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는 멘디니의 아트 디렉팅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인간의 감성을 통한 이탈리아 디자인은 그가 예견한 대로, 이후 독일의 기능주의를 대체했다. 멘디니의 디자인 이론은 상업성과는 별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간적인 디자인 소통은 소비자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메이드 인 이탈리아 Made In Italy’ 붐의 진정한 선도 주자다.

3 여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정적이고 에너지 충만한 알레산드로 멘디니.




4, 5 알레시 ‘알레산드로 멘디니 엠’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스케치와 2008년 버전.

스토리텔링 디자인 알레시 Alessi사의 와인 따개 안나 지 Anna G.와 알레산드로 엠 Alessandro M.은 그만의 인간적인 디자인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1994년 멘디니가 디자인한 이 제품들은 기존의 와인 따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와인따개는 발레리나 그의 부인 안나 질리와 디자인을 사랑하는 본인 자신으로 환생했다. 발레리나인 Anna G.는 소비자가 와인을 따는 동안, 우아하게 손을 올리며 앙오(En Haut: 양옆으로 늘어뜨린 두 손이 머리 위까지 올라와 큰 동그라미를 만드는 발레 동작)를 하고, 소비자가 이 손을 내려주는 순간 와인의 뚜껑이 빠지며 그녀는 다시 새로운 공연을 하기 위한 처음 상태로 돌아간다. 와인을 따는 동안 소비자는 더 이상 험악해 보이는 뾰족한 와인 따개와 씨름할 필요 없이, 우아한 발레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와 짝을 이루는 Alessandro M.은 디자인계에서 보기 드문 디자이너의 ‘자화상’ 작품이다. 이는 패션을 즐기는 자신을 형성화한 것으로 슈퍼맨 복장, 연미복, 휴양지 룩 등 다양한 변화를 선보이며 매년 다른 의상의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1 한국과 이탈리아의 합작품, 밀라노디자인시티에 ‘트리엔날레 인천’ 전시관 전경.


2 커다란 조명, 컬러풀한 가구 등이 놓인 ‘트리엔날레 인천’ 내부.

멘디니의 스토리텔링 디자인은 이후 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멘디니의 스토리텔링 디자인에 감동한 알레시의 사장 알베르토 알레시는 그를 디자인 디렉터로 선임해, 현재의 기업 아이덴티티인 ‘꿈의 공장 La Fabbrica dei Sogni’을 형성했다. 멘디니의 디렉팅 아래 참신한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등 이후 알레시는 동화적인 휴머니즘에 입각한 다양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여 마침내 국제적인 디자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또 1995년 멘디니는 밀라노 근교 크루시날로에 위치한 알레시 본사 사옥과 물류 창고를 설계했다. 절제되었으나 유쾌한 형태에 하늘색과 파란색을 주조색으로 강렬한 빨강, 금색을 매치한 이 건물은 기존의 삭막한 공장 이미지를 불식시킨다. 물류 창고와 아웃렛, 조립 공장, 본사를 포함한 5층 건물과 인공 폭포는 멘디니의 연출을 통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신기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을 자아내 방문객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유발한다. 이탈리아의 관광 명소인 마조레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위치한 이 공장은 멘디니 특유의 유머 감각과 알레시의 동화적인 기업 이념을 담은 포스트모던한 꿈의 공장, 그 자체다.

3 멘디니가 아트 디렉팅한 밀라노 ‘스와치’ 매장.


4 멘디니가 디자인한 바닥재 ‘Z:IN floor design by Mendini’ 중 플라멩코 패턴 시공 이미지. 멘디니 바닥재는 5가지 모티프와 44가지 컬러를 조합해 1만 3천여 가지 패턴을 창조할 수 있다.


5 1989년 아틀리에 멘디니를 함께 오픈한 동생 프란체스코 멘디니.
6 1978년 멘디니가 디자인한 카펠리니사의 ‘프로스트’ 2009년 버전.


한국과의 활발한 작업 1990년대 말 한샘에서 주방 기기 디자인을 의뢰하면서 멘디니는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지난 약 10년간 한샘을 비롯해 LG, 광주시, 각종 디자인 단체 등과도 다양한 협업을 해왔다. 현재는 이천 도자기 축제, 인천 밀라노 디자인 시티(ICITY) 등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동북아의 대표적 국제 디자인 도시 구축을 목표로 한 이 프로젝트는 인천시와 밀라노 국제 박람회가 주관한다. 총면적 80만 평방미터, 전시 면적 30만 평방미터 규모의 인천 밀라노 디자인 시티는 2013년 완공을 목표로 국내에서는 ‘아키반 건축 도시 연구소’가, 이탈리아를 대표해서는 멘디니의 디자인 사무실인 ‘아틀리에 멘디니’가 맡았다. 먼저 올 9월에 개장한 트리엔날레 인천은 디자인 미술관으로, 강렬한 색상이 독특하게 배열된 파사드, 거대한 알파벳을 늘어놓은 듯한 파티션, 거인국에 온 듯 과장된 스케일과 그 안에 놓인 조명, 가구가 인상적이다.
꿈꾸는 소년의 창작 비결은 호기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놀라운 창작 비결은 ‘아이와 같은 왕성한 호기심’에 있다고 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분석이 멘디니에게도 통한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어떤 젊은 디자이너보다도 놀라운 정보력과 기억력을 갖고 있다. 언젠가 알레산드로 멘디니에게 아틀리에를 상징하는 뱀 모양의 로고가 무슨 의미인지를 물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비밀이라며 몇 차례 대답을 거절하더니, 드디어 속내를 털어놓았다. “뱀은 유일하게 온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동물이다. 나는 그 동물의 열정과 노력을 배우고 싶다.” 자타가 공인하는 디자인적 재능으로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이끌어간 거장의 입에서 나온 ‘열정과 노력’이라는 단어, 그리고 미물에서도 배움을 찾는 겸허한 태도에 잠시 숙연해진 기억이 난다. 이것이 오늘날 멘디니를 거장으로 만든, 그리고 우리가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건축가 겸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밀라노 폴라테크니코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으며, 1982년 산업디자인 분야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황금콤파소상을 수상했다. 20여 년 전 동생 프란체스코 멘디니와 함께 디자인 회사 ‘아틀리에 멘디니(www.ateliermendini.it)’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글 여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