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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원장의 사랑 일기 모두의 인생은 반짝이는 기적입니다
50년 동안 입양아와 고아의 주치의로 헌신한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원장. 그의 충실한 삶을 들여다보면 진짜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가 써 내려간 의료 일기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에는 입양 부모와 입양아들이 만들어낸 기적이 담겨 있다.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햇살이 대지 위에 연약한 팔을 드리우는 11월 오후, 나뭇잎이 하나둘 땅으로 내려앉습니다. 저렇게 시들고 바스러지는 소멸의 모습이 가을의 축복이고 아름다움이라는 걸, 나이 먹어서야 알았습니다. 문득 낙하하는 잎사귀에 묻고 싶습니다. 사랑은 왜 늘 낮은 곳에 있는지를.
그는 낙엽 쌓인 공원 벤치에 앉아 양지받이 중입니다. 동네 꼬마 녀석이 낙엽 뿌리는 장난에 빠져 공원 뜰을 낙서처럼 뛰어다닙니다. 꼬마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수줍게 웃음이 물립니다. 이 사람, 지난 50년간 서울시립아동병원과 홀트아동병원에서 입양아들의 주치의로 산 조병국 선생입니다. 그 낮은 목숨들이 죄다 그의 딸, 아들, 손자였던 사람. 50년 의료 인생을 마감하면서 그 흔한 자서전(업적을 과시하는) 대신, 자신이 만난 아름다운 입양 부모와 입양아 이야길 써 내려갔습니다. 그저 자신의 길에서 열심히 살아온 것뿐이라며 자꾸 손사래를 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일대기입니다. 그가 보낸 스물두 가지 이야기는 심장의 물기가 말라가던 우리를 일깨우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선교사들 도움으로 연희전문학교를 나와 교직에 몸담은 아버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어머니, 그 사이에서 태어난 1남 6녀 중 장녀가 그입니다. 그의 나이 네 살 때 혈액 질환으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은 바로 밑 여동생, 6년 뒤 홍역에 폐렴까지 더해져 세상을 떠난 둘째 여동생, 왕진 다녀가시는 의사 선생님 배웅하려고 동생을 안고 방문 밖에 나갔다가 병세가 심해진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린 열 살짜리 꼬마, 의사 선생님을 성스러운 천사처럼 경외하던 꼬마. 그리고 여고생 때 겪은 한국전쟁. 파편에 맞아 죽은 엄마 등에 업혀 우는 아이, 팔이 잘린 채 기찻길에 방치된 아이… 수많은 고아들을 보며 ‘부모가 안 계셔도 동생들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으로 결심한 의대 진학. ‘한국이 어려운 처지에 처한 것은 여성들 책임이 크다. 여성들도 공부해서 가정을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가정학과에 가라’며 의대 입학원서를 갈가리 찢은 아버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 자격 취득, 실습하러 나간 서울시립아동병원과의 인연, 그리고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의 50년 세월. 일흔여섯 해의 삶은 이렇게 갈피마다 충실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얼마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에 갓 태어난 제 살붙이를 내버려야만 했을까. 아이를 가진 걸 원망하고 후회했을 어미의 자궁에서 열 달을 지내다가 내쫓기듯 태어나 버려진 아이가 감당했을 충격과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 그래도 버려진 아이라고 손가락질하기엔 아직 이르다. 고아로 자랐어도 당당하게 삶을 만들어가는 이들, 그들이 바로 낮은 곳에서 피어난 희망이고 기적이다.”_<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중

사람들이 사적 체험에 실족해 있을 때 그는 좀 다른 빛깔의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가 만난 기적 같은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 중반, 이혼 후 두 살배기 아들과 기찻길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한 엄마가 있었습니다. 엄마의 시신 옆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두 살배기는 열두 시간의 대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에 맡겨진 아이는 성장 속도에 맞춰 의족을 바꿔줘야 하는 상황으로 입양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보스턴에서 의족이나 의수 같은 장애인 보조 기구를 처방하는 직업을 가진 부부가 이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생모와 함께 데려가지 않고 신이 아이를 살려놓은 이유, 이토록 가여운 모습으로 살려 놓은 이유가 분명 있었습니다. 행복해질 기회,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기회가 아이의 앞날에 준비되어 있었던 겁니다.”

(오른쪽) 후임자를 찾지 못해 15년 동안 ‘전 원장’이라는 직함으로 진료를 계속한 조병국 선생은 작년 10월, 드디어 자연인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사진 제공 삼성출판사

입양 간 아이는 다정한 양부모와 새 다리,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쯤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의 사진이 그에게 전달됐습니다. “이 아이의 이야기처럼 희망이란 삶의 어느 모퉁이에선가 예고도 없이 튀어나옵니다. 삶이 준비한 깜짝 선물을 보지 못하고 생을 포기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니 부디 살아내세요. 살아서 인생이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온수처럼 천천히 마음에 흐릅니다.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마음에 응고돼 있을 것 같습니다.
강한 엄마 도숙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자식 둘을 낳으면서도 자신이 ‘숨겨놓은 여자’라는 걸 모르고 속아 살았던 도숙 씨는 결국 두 아이를 남자의 본처에게 맡기고 집을 나왔습니다. 얼마 후 남자가 죽고 본처가 두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낸 걸 TV를 통해 알았습니다. 방송국에, 입양 기관에 통사정을 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지요. 20년 후 둘째 아들이 백혈병 진단을 받아 골수 기증자를 찾으면서 도숙 씨는 아들과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골수는 아들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 옛날 아들을 속절없이 보냈던 자신이, 또다시 아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 어미가 됐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도숙 씨처럼 자식을 떠나보낸 엄마들도 자식들 연사에 어깃장도 놓으며, 연애 걸듯 알콩달콩 슬퍼하고 사랑하는 엄마로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창의 삶을 사느라 자식 떠나보내고 그렇게 시난고난 평생을 견딘 엄마들입니다. 그러다 자식을 만나게 되면 죄스러움에, 기쁨에 딱 150cm의 길이로 울고 웃는 엄마들입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생모의 미스매칭 골수라도 이식해보자는 연락이 왔고, 미국으로 건너가 치른 골수 이식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골수가 맞지 않는데도 이식이 성공할 수 있었던 기적, 이 기적을 만든 사람이 도숙 씨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간절함과 애끓는 모정이 아들을 살려낸 것입니다. 골수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도숙 씨가 자살하러 여인숙에 들어갔지만, 결국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 나온 데는 이런 기적을 만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 이야길 듣자니, 황사 바람도 안 부는데 눈이 자꾸 아려옵니다.
“‘버려진 아이’와 ‘발견된 아이’, 그 차이는 엄청나다. ‘버려진 아이’는 슬프지만 ‘발견된 아이’는 희망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양 서류에 ‘OO에 버려졌음’이라 쓰지 않고 ‘OO에서 발견되었음’이라 쓴다.”_<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중

1970년대 병원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를 다투는 아이들이 실려 오곤 했다. 50년 동안 그는 6만 명의 어린이 환자를 도왔다. 아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네 아이를 길러낸 지니.

영수의 이야기에서 또 하나의 기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뇌성마비 환자인 영수가 미국에 입양되어 재활의학 전문의가 된 것이 첫 번째 기적입니다. 결혼 후 불임 진단을 받고 같은 처지의 한국 아이를 입양한 그는 기적처럼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됐습니다. 영수에게 생긴 두 번째 기적입니다(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입양했다가 기적적으로 임신한 경우가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어떤 의학 교과서에서도 속 시원한 설명을 찾기 어렵기에 그냥 기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요. 어디서 온 기적이든 상관없습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 버려지고 아픈 아이들이 모인 이곳에 이왕이면 기적이라는 게 더 자주, 오래 머물기를 바랄 뿐이었지요.” 조병국 선생은 이 기적의 일들을 책에 써놓았습니다. 우리 가슴에 아픈 자국 남기고 이역만리로 떠난 아이들, 그 뜨거운 물집은 그렇게 기적 같은 반짝임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그렇게 입양 간 아이들은,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트윈키 케이크처럼 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고, 수잔 브링크(<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처럼 양부모의 학대를 받아 불행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장애아라며 버린 아이를 입양해 제 살을 찢고 나온 자식보다 더 정성스레 키우는 부모들, 품어주고 가정을 선물한 천사들이 훨씬 많습니다. “여자가 엄마가 되는 데 꼭 출산의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아이를 품에 안고 눈을 맞추고 똥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모성애는 시작됩니다. 이게 바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입양아를 위해 엄마가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둔기처럼 가슴을 치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보다 높은 그들의 사랑에 머리를 숙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모에게 버림을 당하는 아이, 학대받는 아이, 그래서 세상이 미운 아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아이들을 거두어 사랑해주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다.”_<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중

‘조병국 원장’이 아닌 아무개의 할머니로 돌아온 그. 아빠와 함께 동네 공원에 산책 나온 동네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기쁨으로 가득 차있다.

50년 동안 ‘고아들의 의사’로, 6만 명이 넘는 입양아들의 주치의로 사느라 정작 자신의 세 아이에게 ‘4분의 1밖에 안 되는 엄마’로 살았다는 그. 딸들이 제 자식 키우는 걸 보면 ‘엄마들은 저렇게 해야 하는데 내가 저걸 못해줬구나’ 하는 아쉬움도 생긴답니다. 하지만 그는 귀가 아파 더는 청진기를 대지 못할 정도로 많은 환자를 돌보고, 아들딸 숙제 한 번 봐주지 못하면서도 아픈 고아들 곁에 있다는 걸 늘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과로로 오른팔에 마비가 와 일을 쉴 때도, 서울시립아동병원의 의사를 모셔오려고 동분서주하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고아들의 의사’가 된 걸 후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병원에 다니는 의사 친구들의 몇 할도 되지 않는 월급(의사 생활 30년 차였던 1980년대까지 그의 월급은 1백만 원을 넘지 않았다. 홀트부속의원 원장 시절에도 3백만 원 남짓이었다)으로 빠듯하게 살면서도 그 일을 감사해했습니다. “병원 급식에서 어쩌다 국물에 멸치 하나라도 걸리면 아이들은 그걸 손에 숨겨뒀다가 밤에 이불 뒤집어쓰고 한 올 한 올 뜯어 먹어요. 내 새끼들은 그래도 밥에 계란 비벼서 먹이고, 잘 안 먹으면 골목까지도 따라다니면서 먹이는데 싶어서, 월급 타면 계란 1백 개씩은 꼭 사주곤 했어요. 당시에 4년 차 레지던트인 내 월급이 4만 원인데, 한 달 우리 세 아이들 우유 값이 4만 원 들던 때였어요.” 그의 이야기에서 엄마 밥 냄새가 납니다. 아아 이 냄새, 마음을 위로하는 이 따스한 냄새.
침상이 80개 있는 병원에 기아로 들어온 아이들만 2천3백 명이 넘을 정도로 힘들었던 1970년대. 그는 노르웨이, 독일, 미국 등에서 아이들의 수술과 치료에 필요한 의료 기부를 받아내느라 ‘국제 거지’란 별명도 얻었습니다. 그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엔 나라의 위상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압력을 받기도 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엔 언론이 ‘아동 수출국 1위’라며 해외 입양을 거세게 비난했고 그는 잠시 좌절했습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내가 한 짓이 고작 ‘고아 수출’에 불과했나, 내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이후 해외 입양 전면 금지령을 내린 정부는 국내 입양 수요가 적어 문제가 되자 다시 철회하는 해프닝을 보여줬지요. “홀트 재단 설립자인 해리 홀트가 ‘세상 모든 아이는 영원한 집이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입양이 필요 없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버려진 아이가 있는 한 아이들에게 새롭고도 영원한 집을 선물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기서 입양에 관한 이야기 하나를 보탤까 합니다. 우리보다, 미국보다 월등히 못사는 루마니아, 캄보디아는 국가 차원에서 해외 입양을 금지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1988년의 우리나라처럼 대책 없는 금지가 아니라 친척, 확대 가족, 지역사회, 국가, 재외 시민권자, 재외 동포라는 ‘관계의 확장 서클’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서클의 중심으로부터 가능한 한 가까이에서 아이를 양육하게 된답니다. 이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입양이란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단어가 아니다. 한 아이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고, 체념에 빛을 잃은 눈동자를 다시 빛나게 하고,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를 찾아줄 마법 같은 힘. 당신을 보라. 당신에게도 이미 그런 힘이 있지 않은가.”_<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중
하루에도 수십 명의 아이를 들어 올리고 눕히느라 어깨 통증에 시달리던 그는 15년 전 정년을 맞아 은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박봉에 강행군의 연속인 이 자리에 후임자가 나서지 않아 15년 동안 ‘전 원장’이라는 직함으로 진료를 계속했습니다. 작년 10월, 후임이 나타나 완전히 퇴임했지만 아직도 홀트 부속의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고 있습니다.
“옛날 어른들 말씀에 ‘내려다보고 살라’는 말이 있어요. 내려다보고 살다 보면 나보다 못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나도 그 말씀대로 그냥 50년을 산 것 같습니다. 은퇴하고 난 요즘엔 책을 더 가가까이하게 됐어요. 또 국내 입양에 대한 공부, 가정과 부모의 형성, 삶의 과정에 대한 공부도 하려고요. 이제 나도 자립해서 죽음까지 가야 할 나이니까, 독거노인에 대해서도 공부할 생각이에요. 아직도 모르는 분야가 많으니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 거지요.” 한국 나이 일흔여섯 살의 이 할머니는 어디로 더 흘러가고 싶은 걸까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오래 남는 자는 오래 남을수록 죄가 많다는데, 다음 생에서 갚을 일이 큰일이라는데, 성탄의 선물처럼 세상을 밝히는 그만큼은 세상에 오래 남아도 좋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를 만나고 오는 길, 사랑은 왜 늘 낮은 곳에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낙하하는 낙엽을 뒤로하고, 자꾸 내 목구멍이 컥컥해집니다. 아, 돌아가서 그 따뜻한 손을 잡고 싶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눈을 맞추고, 볼을 부비는 순간 아이를 위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본능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법이나 규칙 따위로는 막을 수 없는 부모의 사명이다.”_<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중

(왼쪽) 1996년 즈음, 미국의 베다니 칠드런스 서비스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가 보내준 입양아들의 앨범. 그가 치료하고 서류를 만들어 입양 보낸 아이들의 성장사가 빼곡히 담겨 있는, 그만의 보물이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