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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컬렉터를 찾아서 ]베아트리스 로스차일드가 남긴 '빌라 로스차일드' 비운의 구족이 만든 연극 무대
유럽 최고의 명문가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정략 결혼한 남편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비운의 삶을 산 베아트리스 로스차일드. 그가 프랑스 남부 페라 곶에 남긴 빌라 로스차일드는 르네상스, 이탈리아, 18세기, 17세기, 일본 등 여러 세기와 문화가 혼합된 컬렉션으로 가득 차 있다. 신경증을 앓았던 명문가 자제가 마음의 공허를 달래기 위해 만든 하나의 ‘연극 무대’ ‘신전’ 같은 곳이다.


건축가를 네 번이나 갈아 치운 끝에 베아트리스의 고집대로 완성된 빌라 로스차일드의 외관. 이탈리아를 경외했던 베아트리스답게 피렌체 귀족들의 빌라를 본떠 만들었다. 코트다쥐르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분홍빛 빌라는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아 또 딸인가?” 의사의 전언을 들은 알퐁스 로스차일드 Alphonse de Rothschild 남작은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었다. 그러곤 책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루이 15세의 소장품이었던 청동상 사이로 유리 책장 속에 진열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은제품, 크리스털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역사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유럽 명문가를 대표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출발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곡물 중개업을 하는 유대인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Mayer Amschel Rothschild와 그의 여섯 아들에게서 비롯됐다. 유럽 각 도시에 지부를 두기 위해 아들들이 파리, 빈, 런던, 나폴리로 뻗어나가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알퐁스 로스차일드 남작은 파리에 자리 잡은 제임스 로스차일드 James de Rothschild의 첫째 아들로, 주식과 밀 거래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재산과 명성도 자식 문제에서만큼은 소용이 없었다. 결혼한 지 7년이 되어가도록 그는 가문의 이름을 물려줄 아들을 얻지 못했다. 사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달리 자식 복이 없는 편이었다. 자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다 해줄 수 있는 형편인데도, 어렸을 때 병으로 죽은 자손이 유달리 많았고 청소년기에 자살하거나 정신병원 신세를 지는 자손도 적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이런 불행이 로스차일드 가문 특유의 결혼 제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설명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에서는 각 유럽에 흩어져 있는 사촌들끼리의 결혼이 잦았다. 특히 남자일수록 어린 나이에 사촌과 결혼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결혼을 통해 재산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가문의 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던 터다.
알퐁스 또한 사촌 레오노르 로스차일드 Leonore de Rothschild와 결혼했다. 요즘엔 동성동본의 결혼이 유전학적으로 좋지 않다고 터부시되는 터라 놀라운 일이지만 18~19세기 상류층이나 왕족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로스차일드 가문은 가족들이 유럽에 흩어져 살고 있어 마치 다른 가문 사람과 혼인하는 것 같았을 것이다.

(위) 세상에 단 한 장 남아 있는 베아트리스의 초상 사진. 베아트리스는 당시 상류층으로는 드물게 이 한 장을 제외하고는 어떤 초상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고결하게 태어나 전설처럼 죽고자 하는 로맨티시즘의 발로였다고 한다.


비너스와 아폴론의 조각상이 나란히 놓여 있는 이 방은 베아트리스의 개인적인 응접실로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고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루이 15세와 16세 시대의 양식을 조화시켜 장식한 이 방은 베네치아풍의 벽 장식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렇듯 화려한 가운데 세브르산 자기로 만든 동물 조각상이 왠지 애잔한 느낌을 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파티오는 이 시대의 건물에는 무척 드물게 설치된 이탈리아풍 장식이다. 빌라 로스차일드의 파티오는 갤러리 역할을 해서 베아트리스 생전에는 많은 예술품을 진열해놓았다고 한다. 베로나산의 분홍빛 대리석 기둥이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이날 태어난 딸은 베아트리스 로스차일드 Beatrice de Rothschild라 이름 붙였다(<행복> 10월호의 ‘세기의 컬렉터’ 칼럼에서 소개한 컬렉터 테오도르 라이나흐와 베아트리스는 사촌지간이다). 6년 앞서 태어난 장녀 베티나 로스차일드 Bettina de Rothschild의 이름을 살짝 바꾼 성의 없는 작명이었다.
이제 막 베아트리스의 어머니가 된 레오노르는 무심히 아이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런던에서 나고 자란 레오노르는 평생을 로스차일드 가문 안에서만 보낸 유리관 속의 장미 같은 여인이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파리의 정원을 거닐다가 낙엽을 발견하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든가(로스차일드 가문에서는 낙엽이 떨어지기도 전에 정원사가 낙엽을 치웠기 때문에) 하는 식의 일화가 많다. 현실과는 유리되어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인들이 그러하듯 가녀리고 동시에 선병질적이며 히스테릭한 여자였다. 1차 대전 당시 남편인 알퐁스가 비스마르크와 회담을 벌이고, 시어머니인 제임스 남작 부인이 비상 병동을 조직해 집을 병원으로 쓰던 그 시절에도 그녀는 우아한 모자를 쓰고 런던에서 보트 레이스 경기를 관람했을 정도니 말이다.
이런 어머니, 더구나 영국식 교육을 받아 자식에게 유달리 차가웠던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바쁜 아버지 아래에서 방치되어 자라서일까? 어린 베아트리스는 남달리 ‘가장 假裝 놀이’를 좋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나 유제니 황후가 가장 놀이의 대상이었다. 어린아이의 놀이라고는 하지만 컬렉션으로 유명한 집안이다 보니 진짜 18세기 옷을 입고 노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생활 자체도 왕족과 다를 바가 없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파리 근교의 페리에 성과 런던, 도빌, 비시 같은 도시와 휴양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는데 베아트리스는 가족들과 함께 이 도시들을 오가며 생활했다. 거주하는 곳마다 옛 프랑스 왕족들이 사용하던 가구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이 즐비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환경과 예민한 감성 덕분에 자연스레 미술을 사랑하게 된 베아트리스에게 당시 문화의 본거지였던 이탈리아 여행은 미적 취향을 다지는 다시 없는 기회였다. 베아트리스는 발이 넓은 아버지 덕에 소개장을 받아 당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메디치 빌라며 팔라초 궁 등 다양한 유적지를 방문했다. 격식이 엄격하고 모임이 잦은 파리의 집과는 달리 정겨운 이탈리아의 분위기가 그녀의 예민한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사실 베아트리스는 유달리 날카로운 성정에, 본인도 제어하지 못하는 감정적인 격변으로 유명했다. 파리에서 첫손에 꼽히는 디자이너의 의상, 고급 미용사가 손질한 트레 머리 그리고 태생적인 우아함, 이러한 겉모습 뒤에는 현실과 거리가 먼 삶으로 인한 불안, 애정 결핍,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고 자란 사람의 오만과 신경질이 자리 잡고 있었다.
1883년 열아홉 살의 베아트리스는 열다섯 살 위인 모리스 에프뤼시 Maurice Ephrussi와 결혼식을 올렸다. 성대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이었지만 사랑 없는 결혼이기도 했다. 에프뤼시 가문은 우크라이나에서 곡물 사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집안으로 후손 중에는 철학자나 학자풍의 컬렉터 같은 인물이 많다. 그러나 아무리 재산가라 한들 귀족 작위까지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과는 차이가 많이 나는 집안이었다. 사람들은 알퐁스 로스차일드가 별 관심 없이 딸을 시집보낸다며 말이 많았다.
남편 모리스 에프뤼시는 음악과 미술 그리고 자연을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는 시끌벅적한 파리보다는 늘 근교의 성에 머무는 것을 택했고 자연히 이런저런 행사에 출입이 잦은 베아트리스와는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리스는 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꼭 동반해서 얼굴 도장을 찍어야 하는 행사에만 같이 나타날 뿐 나머지는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남편과는 일찌감치 재산을 깨끗이 정리해둔 상태였던 데다, 남편의 이런 성격 때문에 그녀는 과부처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성 중 하나였다.

(위) 루이 15세 시대 왕가의 장인이기도 했던 히에즈네의 작품인 이 작은 뷰로 테이블에서 베아트리스는 많은 편지를 썼다. 자신과 그리고 친구들, 가족들을 향해서.


1 이층 손님방은 프랑스에서는 드물게 베네치아풍으로 꾸몄다. 벽 가득 원숭이 문양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원숭이 방이라고도 부른다. 사진에서 보이는 가구는 모두 가짜로 겉모양만 가구일 뿐 내부는 텅 비어 있다. 바로 이런 점이 빌라 로스차일드를 더더욱 연극 무대처럼 보이게 한다.
2 고딕 양식을 본뜬 파티오의 천장 장식. 그리스풍과 아랍풍이 혼합되어 묘한 분위기를 이룬다.



3 베아트리스는 17세기 태피스트리 컬렉터이기도 했다. 이 방은 오로지 태피스트리를 진열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루이 15세 시대 화가로 유명한 부셰가 디자인한 전원 시리즈다.

원래부터 현실 도피 성향이 강했던 데다 방랑벽까지 겹쳐 그녀의 상태는 날로 이상해졌다고 한다. 하인들은 아침이면 운전기사에게 무작정 차를 타고 떠나자고 하는 베아트리스의 모습을 자주 보았는데 그날 어디로 갈 것인지는 순전히 운전기사 마음이었다. 또한 때는 바야흐로 타이태닉의 시대였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유럽의 엘리트들은 다가오는 불안을 불태우듯이 유흥과 여행에 몰두했다. 베아트리스도 혼자 배를 타고 수십 차례 대서양을 오갔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데다 항구인 니스나 칸과도 멀지 않은 페라 곶에 빌라를 짓기로 한 것도 오로지 그녀 혼자만의 결정이었다. 동시대의 여느 상류층들처럼 파리 근교에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프랑스 끝자락에 빌라를 지은 것은 아마도 떠나고 싶은 심정의 발로였을 터다.
1905년부터 시작된 빌라 에프뤼시 드 로스차일드 Villa Ephrussi de Rothschild 공사는 1912년이 되어서야 끝났는데 이것은 공사 기간 내내 건축가를 바꾸어가며 변덕을 부린 베아트리스 때문이었다. 좋은 것만 보고 살았으나 실생활이나 학식에서는 무지했던 베아트리스의 고집은 결국 르네상스,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스타일, 17세기 이탈리아풍이 가미된 묘한 건물을 만들어냈다.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르네상스식 회랑과 예술품, 티에폴로 Tieppolo풍의 천장화, 마리 앙투아네트 스타일의 장식 등을 보면 흡사 연극 무대의 세트가 떠오르지 않는가?
비현실적이기는 베아트리스가 남긴 컬렉션도 마찬가지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18세기, 17세기, 일본 등 베아트리스의 컬렉션은 동시대의 남성 컬렉션과 달리 한 시대에 천착하지 않고 여러 세기와 스타일을 마구 조합해놓았다는 인상을 풍긴다. 시대와 스타일에 대해 공부하기보다는 겉으로 보아 흥미로운 것들을 그때그때 사 모은 결과다. 그러다 보니 하나하나의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으나, 전체 컬렉션에 대해서는 연구할 가치가 거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베아트리스에게 이곳은 자신이 주인공인 연극 무대나 다름없었다. 애당초 그런 의도로 지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19세기 상류층의 빌라라 하기에는 규모가 작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이곳에 머문 기간은 일 년에 몇 주뿐이었는데 손님을 초대하기보다는 주로 혼자 기거했다.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그녀의 사회적 지위와는 걸맞지 않은 행보다. 그녀는 이곳에 자식 대신 아이들의 장난감과 의복 컬렉션, 유달리 좋아하는 세브르 Sevre산 자기 컬렉션을 옮겨놓았다. 집 안은 18세기 프랑스 왕가에서 쓰던 가구와 태피트스리로 장식했다. 정원도 일본과 고대 그리스・이탈리아, 18세기 등 자신이 좋아하는 시대와 장소를 고스란히 복원하고 공작새, 앵무새, 사슴 등 온갖 이국적인 동물을 길렀다. 그녀는 마치 여왕이 된 듯 옷자락을 펄럭이며 이층 테라스에서 정원을 내려다보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빌라는 어린 시절에 드레스를 입고 하던 가장 놀이를 본격적으로 즐기는 장소였던 것이다.


루이 15세 시대 양식으로 꾸민 살롱. 파리의 호텔 크리용에서 떼내 온 18세기의 벽 장식과 루이 14세가 루브르를 장식하기 위해 주문했던 태피스트리가 조화를 이룬다. 가구는 모두 18세기 루이 15세 시대의 오리지널 가구로 역시 모두 루이 14세 시대의 태피스트리로 마감했다.

이곳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남편도 없으며 공식적으로 치러야 하는 의식도 타인들의 눈도 없었다. 오로지 개인적인 기쁨만이 자리 잡고 있는 베아트리스만의 신전이다. 그러나 아무리 국보급에 버금가는 화려한 무대와 소품이라 해도, 주인공도 관람객도 오직 자신 한 명뿐인 쓸쓸한 연극이 빛나지는 못했으리라. 이런 베아트리스의 상태는 요즘이라면 정신과 상담을 권유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워낙 화려해서 이름마저도 ‘아름다운 시대’라고 붙인 벨 에포크 Belle Epoque,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유럽에서는 이와 유사한 상류층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데다 집안일과 육아에 매여 지내야 했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공허한 인생이 되었을까?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기쁨을 주는 인생이 무언지도 모르고 살다 간, 희로애락을 맛보지 못한 절름발이 인생이었기 때문 아닐까?
11월의 차가운 햇살에도 베아트리스가 남긴 빌라는 남국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야자나무와 장미 정원 사이를 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거닐었을 한 여인을 생각해본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울려 퍼지는 세상, 화려한 영화의 시절을 함께 누리던 친구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나고 가족마저 모두 세상을 등진 뒤에 베아트리스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나긴 슬픔과 지나간 영화에 대한 그리움만이 남은 시간을 채웠다. 베아트리스는 1934년 햇살이 가득한 봄, 다보스의 파크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으며 장례식은 극히 간소했다고 한다. 그 후 그녀가 남긴 ‘연극 무대’ 빌라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정부에 귀속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