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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침대를 타고 달렸어> 펴낸 신현림 시인 내가 대신 울어줄게요, 시로 대신 울어줄게요
젖은 목소리로 누군가 부르고 싶게 만드는 시를 써 내려가던 시인 신현림. 그가 시집을 들고 돌아온 게 딱 6년 만이다. 이번엔 ‘큰 품’으로 우릴 안아주는 시편들이다. 그리고 절망 끝에서 찾아낸 희망을 슬며시 전한다. 이런 변화는 엄마의 “너도 사랑을 누려라”라는 유언 덕분이었다.

감국 꽃이 피었다. 다정하고 나른한 노란색. 손에 닿으면 내 몸도 따뜻해질 것 같은 다정한 꽃. 그 꽃 앞에 앉아 마음을 쉬고 싶은 날 그를 만났다. 감국 향기 가득한 종로구 체부동의 낡은 골목길이 시인의 눈매를 짙게 만들었다.
시인 신현림. 매양 허탕을 밟고 가는 것 같던 내 20대, 그의 시를 읽고 나면 명치 끝이 달아오르곤 했다. 어퍼컷을 가하는 듯 솔직하고 거침없는 그의 시는 녹처럼 내 마음에 달라붙었다. 그 후 시인 신현림이라는 레테르는 몇 가지 표제어로 내 기억에 남았다. <세기말 블루스>(1997년 10만 부 가까이 팔린 베스트셀러 시집)를 펴낸 이후로 ‘성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는 30대 시인’이라는 불도장이 찍힌 작가, “씩씩 우먼으로 가자, 헝그리 정신으로”를 외치며 자신의 싱글맘 스토리를 책으로 엮은 작가. 소설가 김형경은 그를 두고 ‘정공법으로 생과 맞장 뜨는 시인’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를 관대한 본능을 잃어버린, 스파르타적인 여자라고 생각한 걸까. 그가 내 손을 잡는데, 그 온기가 낯설었다. 날 그러쥔 그 손은 오랫동안 풀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맵싸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의 눈매와 손의 온기 사이에서 난 당황하고 있었다. 정수리로 노곤한 햇살이 쏟아지던 10월의 오후였다.
“이 남자 저 남자 아니어도/ 착한 목동의 손을 가진 남자와 지냈으면/ 그가 내 낭군이면 그를 만났으면 좋겠어/ 호롱불의 무드를 살려놓고/ 서로의 누드를 더듬고 핥고/ 회오리바람처럼 엉키고/ 그게 엉켜봤자라는 걸 알고 싶고/ 섹스보다도 섹스 후의/ 갓 빤 빨래 같은 잠이 준비하는 새날”(<세기말 블루스> 중 ‘꿈꾸는 누드’)

(위) 북촌의 골목길에서 “석류처럼 빨간 해를 보며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그의 시 ‘붉은 가방이 날아간다’ 중) 신현림 시인.

시인의 시간도 우리의 그것처럼 속절없이 잘도 흘러가는 법이다. <세기말 블루스>로 전국적인 대박을 터뜨린 30대 시인은 이제 문단의 중견 시인이 되었다. 13쇄를 찍은 <세기말 블루스> 덕으로, 그가 번역한 <블루 데이 북>의 대히트로 그의 삶이 좀 양명해졌으리라 기대했는데, 그는 여전히 체부동의 낡은 빌라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그의 고집과 재능을 상속받은 딸 서윤과 정독도서관 자습실에서 함께 책을 읽고, 도서관 앞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는 시인. 흡혈하러 덤벼드는 도서관의 모기 떼를 참아내느라 종아리에 흔적이 낭자한 마흔여덟 살의 시인.
그동안 세상에 단둘인 가족, 자신과 딸 서윤의 밥벌이를 위해 밤새워 자판을 두드려야 했다. 사보나 잡지에 실릴 산문을 써 밥벌이에 보탰다. 그사이 시집, 사진 에세이, 미술 에세이, 기행문, 번역서 등 20여 권의 책을 쉼 없이 세상에 냈다. 초등학생 대상 글짓기 과외도 했다. 그렇게 글로 밥을 얻으려 한 나날들. 그리고…. “내가 경제적으로 그렇게 풍족하게 산 사람은 아니지만, 뭐 옷 입을 거 많고, 밥 먹는 것도 충분하고. 우리 뭘 그리 많이 먹지 않잖아? 집이 좁다는 게 좀 그런데, 뭐 옛날에 유명한 작가들 중엔 욕조에서 글 쓴 사람도 있고, 하루키는 부엌에서 글 쓰기도 했고. 그런 거 보면 공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 내가 지금 19평에 살고 있는데, 가끔 그런 생각은 한다! 자고 일어나면 바로 작업할 수 있는, 더 창의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다, 뭐 그런.” 사촌언니처럼 친숙한 반말 그리고 허클베리 핀처럼 웃는 얼굴. 어느새 내 마음은 풀어헤쳐진다.
“우울하게도 내 몸은 코끼리다/ 사랑을 잃고 모든 기운도 잃은 채/ 밥벌이에, 해내야 할 일로 무겁디무겁다/ (중략) / 홀로 어딘가로 떠나지만/ 어떤 곳으로도 가지 않는 건 아닐까/ 제자리에서 방향도 목적도 없이 길을 잃고 사는 게”(<침대를 타고 달렸어> 중 ‘코끼리 열쇠’)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한 그는 두 번의 전시회를 연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 사이사이에 그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 사진이 담겨 있다.

그의 시에는, 에세이에는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 드러난다. 군부 독재 시절 민주 투사였던 아버지, 약국을 경영하며 집안 경제를 짊어졌던 어머니, 여섯 번에 걸친 아버지의 국회의원 선거 출마와 낙선, 엄마의 자살 기도, “단돈 몇 푼에 시민의 양심이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몸져누우셔서 저희 4남매는 맨손으로 뛰고 있습니다”라고 ‘딸 현림이’가 쓴 홍보물 덕분인지, 청렴결백 때문이었는지 4수 끝에 당선한 아버지, 그리고 다시 두 번의 낙선. 시인 신현림의 과거는 왠지 인상적인 단편소설 같다.
그가 보여주는 삶의 밀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원하던 미대 낙방, 4수 끝에 들어간 대학에서 유급, 자학과 절망과 불면증의 20대, 스물여덟 실업자 시절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며 자신을 일으킨 날들, 서른 살에 어머니가 준 1천만 원으로 집을 탈출한 후 영양 부족으로 이가 썩는 줄도 모른 채 실업자로 지낸 시절, 서른네 살에 펴낸 첫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짧은 결혼 생활과 이혼, 그리고 8년 만에 낸 세 번째 시집 <해 질 녘에 아픈 사람>.
그는 자신의 과거를, 깊이 숨은 상처를 꺼내어 글로 세상에 내보였다. 가만히 햇볕에 내어 말리는 마음으로. 그걸 읽는 독자들은 누군가 자신을 뜨거운 눈물로 어루만져주는 것 같아 그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신현림의 이야기는 곧 당신들의 이야기지. 동시대인의 고뇌와 열망, 희로애락을 나도 겪고 있으니까. 그래서 솔직하게, 아주 솔직하게 내 아픔이나 갈망들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우리 안의 가장 내밀한 신음을 나지막하게 들려주는 그의 시, 우릴 위해 대신 울어주는 그의 시에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
“내가 대학 네 번 떨어졌을 때 아버지가 방에 불을 지펴주시면서 ‘원망스러운 사람이 없냐’고 해. ‘내가 잘못했는데 누굴 원망하겠느냐’ 했더니, ‘그럼 됐다’ 이러시대. 그 깨우침이 지금도 남아 있어. 결국은 남 탓하지 말라고, 네 탓으로 돌리면 된 거라고, 그 말씀이잖아.” 고초의 세월 끝에 인생을 깨달은 아버지는 딸이 삶의 통각을 스스로 다스리길 바란 것이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시인은 술보다 독한 인생을 글로 다스려갔다. 절망과 희망의 시소 타기를 계속하면서.
“가혹한 세월에 축배/ 잊어도 기억나도 서글픈 옛 시절에 축배/ 지루하고 위험한 별거 생활에 건배/ 지치게 하는 것과 끊지 못하는/ 어정쩡한 자신이 몹시 싫은 날// 할 수 있는 건 갈 데까지 가보는 거/ 피 토하듯 붉게 울어보는 거/ 또 다른 삶을 그리워하다/ 거미처럼 새까맣게 타서 죽어가는 거”(<해 질 녘에 아픈 사람> 중 ‘어디에도 없는 사람’)


그의 시가 마음을 건드리는 건 우리가 겪는 희로애락을 그도 치열하게 겪고 있고, 그 싸움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성층권 위를 유유자적하는 도량이 아니라, 이 사진처럼 저잣거리에서 헤매는‘또 다른 나’다.

올가을 그가 6년 만에 네 번째 시집 <침대를 타고 달렸어>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이번에도 피 토하듯, 달거리를 폭죽처럼 터뜨리듯 시를 썼다. 점 하나, 쉼표 하나 찍는 것에도 고심을 거듭하며 썼다. ‘나를 잡아, 나를 놔’라는 시는 완성에 13년이 걸렸고, 6년 전에 제목을 지은 ‘애무 한 벌’은 꼭 6년 만에 끝맺었다. 3년 전 문자를 보내면서 썼던 대목 ‘슬픔도 7분만 씹고 버려’도 한 편의 시가 되어 돌아왔다. 공양하는 마음, 보시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오래 묵힌 그의 시. 이번에도 상처를 고백하지만, 그 상처의 치유까지도 이야기한다. “슬픔도 괴로움도 7분만 씹고 버려/ 이 썩고 속 썩으니 7분만 앓고 버려/ (중략) /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어/ 마음이 안전벨트가 되어야지/ (중략) / 나는 회의주의자지만 삶은 아름다워/ 슬프고 가난할수록 꿈의 트럼펫을 불며 가야지/ (중략) / 앓다 쓰러질 시간도 7분만/ 7분도 7년처럼.”(<침대를 타고 달렸어> 중 ‘슬픔도 7분만 씹고 버려’ 일부)
“이렇게 큰 성찰을 준 게 바로 엄마의 죽음이야. 오래 앓던 엄마가 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도 사랑을 누려라’였어. 그건 바로 ‘누구든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사랑을 누려라, 일만 하지 말고 열애의 심장을 가져라, 사랑 안에서 고양이 같은 민감한 지혜를 배우고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을 내려놓는 법을 익히고 즐거워하라, 웃음 샴페인을 터뜨리고 인생 신비의 동굴을 찾고, 눈・비・빛과 바람… 셀 수 없이 많은 축복을 누려라, 혼자 살 수 없는 우리는 사랑으로 특별한 사람이 된다, 다시 못 만날 때를 생각하며 사랑해라’ 그런 이야기지. 그래서 나 지금 희망을 알게 됐어.” 그렇다. 사랑의 시작은 비명이고 사랑의 끝은 화농일지라도 그래도 사랑 앞으로 돌진해야 하는 게 인생이다. 엄마의 유언은 그에게 이걸 가르친 거다.


그를 인터뷰하면서 계절은 성큼 달라졌다. 우린 두 번 만나 사진을 찍고 따뜻한 손을 부여잡았다.

딸과 함께한 4년의 여행에서도 삶에 숨은 기쁨과 깨달음을 얻었다. 캄보디아로, 터키로, 실크로드로, 포르투갈로, 카자흐스탄으로, 인도로, 티베트로 떠돌았다. 그 여행길에서 그는 매일 먹는 밥이 여름처럼 뜨겁고, 들이켜는 물이 겨울처럼 차갑다는 사실에 눈물이 솟았다. 그렇게 생을 첫 마음으로 들여다보게 됐다. “캄보디아 빈민들은/ 스스로 불행하다 여기지 않더라/ 머리 위에 포탄이 떨어지지 않고 총소리도 없고/ 전쟁이 없는 것만으로 그들은 행복하더라// 가난으로 삶의 꽃을 피울 수 있음을 보았다/ 눈물이 큰 바다를 만들고/ 고통을 금빛 꿀로 넘치는 에너지라 느끼고/ 욕심 없는 마음이 감사의 포도밭을 일구는 걸 배웠다”(<침대를 타고 달렸어> 중 ‘캄보디아에서 운 가슴’ 일부)
그리고 또 하나의 희망 꽃, 딸 서윤. 엄마와 마트에 가면 “여보, 같이 가!”라고 외쳐 사람들을 웃게 만든 그 딸, 아빠 없이 둘만 살았는데, 어디서 여보란 말을 배웠는지 신기하던 그 딸이 벌써 초등학생이 되었다. 서윤이가 쓴 일기 “엄마, 화나고 슬프고 외로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내가 웃겨줄게. 내가 얼마나 웃기는데”를 읽고 그는 이런 시를 썼다. “너를 안으면 다시 인생을 사는 느낌이다// 네 눈빛 어두운 내 안의 우물을 비추고/ 네 손길 스치는 것마다 향기로운 구절초를 드리우고/ 네 입술 내 뺨에 닿으면 와인 마시듯 조용히 취해간다”(‘슬프고 외로우면 말해, 내가 웃겨 줄게’ 중) 아이가 말한 문장 하나에 영감을 받아 쓴 ‘초코파이 자전거’는 국정교과서에 실리는 영광도 얻었다.
시인 김경미 씨의 표현처럼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 언제나 맹활약 중’이다. “세상에 보탬 되고픈 손가락 하나 플래시가 되어”(‘비밀스런 길 하나를 따라간다’ 중) 사진도 열심히 찍고 있다. 보도에 비어져 나온 잡풀, 벽의 낙서, 텅 빈 철도역, 죽은 물고기를 품은 어항처럼 삶의 작은 흔적들을 찍은 작품으로 두 번의 개인전도 열었다. 곧 동시집과 치유 에세이 출간도 준비하고 있다.
“결핍이라는 거 꼭 나쁜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예를 들어 난 내 결혼을 실패가 아니라 실수라고 얘기해. 단지 잘못 선택한 실수.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결핍. 그 결핍을 통해서 얻는 깨달음이 남보다 더 진하면 좋은 거잖아. 그러고 보면 행복은 행복하리라 믿는 일 아닐까. 정성스러운 내 손길이 닿는 곳마다 백 개의 태양이 숨 쉰다 믿는 일, 그런 거 아닐까?”
보리싹 같은 그의 미소가 골목길에 남았다. 햇볕 아래 몸을 옹크린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시처럼 그에게도 어서 사랑이 오기를, 그리하여 ‘제일 먼저 달고나 집, 붕어빵 집도 가고, 길표 카페에서 척 베리 노래도 듣고, 걷다가 넘어져도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길’ 빌었다. 감국 향기 가득한 종로구 체부동의 골목길이었다.
“누구나 꿈속에서 살다 가는 게 아닐까/ 누구나 자기 꿈속에서 앓다 가는 거/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누에가 고치를 잣듯/ 포기 못할 꿈으로 아름다움을 얻는 거// 슬프고, 아프지 않고//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찌 회오리 같은 인생을 알며/ 어찌 사랑의 비단을 얻고 사라질까”(‘침대를 타고 달렸어’중)

(위) 그가 6년 만에 출간한 시집 <침대를 타고 달렸어>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