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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남편 송성일 씨와 화가 아내 류준화 씨의 귀농 일기 비나리 마을에서 이룬 송화네 꿈
많은 사람이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쉽사리 하지 못하는 ‘귀농’. 자연을 벗 삼고 농사를 지으며 알콩달콩 사는 삶을 꿈꾸지만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농촌 생활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행복>은 그런 이들을 위해 선배 귀농인에게 경험담을 들어보는 귀농기를 연재한다. 첫 번째 귀농인으로 12년 전 경북 봉화군의 깊은 산골에 내려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송성일・류준화 씨 부부를 만나, 많은 이들이 막연하게 꿈꾸는 귀농 생활의 고단하지만 즐거운 속내를 들어봤다.
12년 전에도 회사원의 일과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송성일 씨는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면서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에서 시달렸고 남들과 똑같은 삶에 지쳐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좋다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에 다니던 그는 불현듯 삶에 회의를 느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먹고살 걱정까지 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게 참 벅차더군요. 가진 것을 다 놓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 속 고층 빌딩에서 일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락없는 농사꾼의 모습으로 손님을 맞은 그의 옆에는 아내 류준화 씨가 있었다. 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류준화 씨는 ‘비나리 산골 미술관’을 운영하며 산골 마을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꿈을 일구고 있다.
송화네가 귀농을 위해 준비한 것은 1997년 봉화에 내려갔을 당시 송성일 씨의 나이는 서른여섯 살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꽤 젊은 나이에 현실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기왕 시골로 내려갈 거 젊을 때 가서 부딪쳐보자고 생각했어요. 공부만 하던 사람이 어떻게 농사를 지으며 살지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모두 제가 일 년도 못 버틸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강원도에서 잠깐 자란 기억을 더듬어 강원도에서 살고 싶었는데, 땅값이 싼 곳을 찾다 보니 봉화까지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풍경은 강원도 못지않게 좋은 곳이죠. 산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농촌 마을을 보는 순간, 바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위) 부부의 뒤로 보이는 비나리 마을의 정확한 행정구역상 명칭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 풍호리이다. 비나리 마을이라는 옛 지명이 좋아서 아직도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1 인터넷을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알게 된 손님이 직접 만나고 싶어 비나리 마을까지 찾아온 적이 있는데, 그때 1개월도 안 된 진돗개 초롱이를 선물로 데려왔다.
2 류준화 씨가 그림을 그려 만든 마을 안내 표지판.


아내 류준화 씨와 딸 송화보다 1년 먼저 내려와 귀농을 위한 집과 땅을 구했다. 면 소재지에 단칸방을 얻고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농사와 집터를 위한 정보를 수집했다. 빌려 쓸 수 있는 땅에서 시험 삼아 농사도 지어봤다. 지금 살고 있는 집까지 짓고 시골에서 살 준비를 마친 뒤 아내와 딸을 데려왔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그의 귀농, 과연 아내 류준화 씨도 처음부터 동의했는지 궁금했다.
“남편이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삶을 원했듯이 저 역시 그런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죠. 저만의 작업실을 갖고 싶었고 작품 활동에 제 모든 시간을 쏟고 싶었어요. 서울이 여러모로 편하긴 했지만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오로지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택한 겁니다. 이런 생각만으로 귀농하기는 쉽지 않지만 남편이 일 년 먼저 시골에서 사는 것을 지켜보고는 마음을 정하기 쉬웠어요. 건강에 문제가 있었는데, 농사일을 하면서 몸도 좋아지고 생활 리듬도 찾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그 일 년 동안 저 역시 나름의 준비를 했습니다. 앞으로의 제 삶과 생활에 대한 계획을 차근차근 세우고 귀농에 관한 공부도 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천천히 했기 때문에 내려온 후에도 적응을 잘했어요.”
류준화 씨와 딸 송화까지 정착한 것은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아이가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시골의 작은 학교를 보여주며 아이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키워줬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송화는 안동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귀농을 결심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아이의 교육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부모가 교사 역할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교육 면에서는 어려움이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송화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봉화읍에 집을 구해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안동으로 나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
“같은 또래들과 한창 어울려 놀아야 할 나이인데 시골엔 어린애가 없잖아요. 보통은 그게 가장 큰 문제로 작용한다는데, 이 마을에는 송화 또래 친구가 두 명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만약 서울에서 키웠다면 더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하지만 제가 서울에서 학원 강사를 하면서 습관적으로 학원에 다니고,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아이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후회하지는 않아요. 앞으로는 ‘감성’이 주요 키워드라고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시골에서 자란 우리 아이가 도시 아이들보다 더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요?”


1 송성일 씨가 직접 손으로 지은 집 툇마루에서 부부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재작년 가을에 짓기 시작해 두 달 정도 걸려서 완공한 이 집은 현재 손님이 묵고 가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민과 류준화 씨의 꿈이 자라는 곳, 비나리 산골 미술관 자연에서 배울 점이 많은 건 틀림없지만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교육이 주는 자긍심도 필요한 게 사실이다. 이들이 보기에 도시의 교육 열기는 과잉 상태지만, 시골에선 아이를 거의 방치하는 수준이었다고. 그러던 중 부부가 충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몇 년 전 도시의 아이들이 농촌 체험을 위해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딸과 또래인 마을 아이가 밭에서 고추를 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도시 아이들에게 보이는 게 창피해서 고추밭에 숨는 걸 본 것이다. 순간 ‘우리 마을 아이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이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미술관을 열기로 결심했다.
“큰 기대 없이 시작했는데 지금은 매우 소중한 곳으로 바뀌었어요. 문화적으로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토요일마다 미술 수업을 했는데,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려오면서 엄마들 모임 그리고 마을의 모임으로도 발전했죠. 미술관에서 행사를 한다고 소문이 나면 김밥, 떡볶이 등 간식거리를 챙겨 들고 모여들어요.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마을 파티도 벌어지고요.”
미술관은 마을 주민과 아이들의 전시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문을 연 지는 5년, 매년 꼭 한 번은 동네 주민의 전시회가 열린다. 마을 아이들의 작품 전시, 지공예 작업을 틈틈이 해오는 주민 장정숙 씨의 작품 등을 전시했다. 가끔 자체 기획 전시회도 개최한다. 대부분 지인들에게 부탁해 이뤄진다.


2, 3, 4 부부가 키우는 고추, 고구마, 수수. 가을철을 맞아 수확을 시작했다. 최대한 자연에 가깝게 키우기 위해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정성을 다해 키운 농작물이다.

비나리 산골 미술관이 소중한 이유는 마을 문화 공간이라는 것 말고도 하나 더 있다. 류준화 씨가 화가로서 가진 꿈과 열정을 작품 활동을 통해 꽃피우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류준화 씨는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로, 10월 14일부터 11월 1일까지 18일간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서울에서 활동할 때보다 제약이 있을 법도 한데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농사는 아주 바쁜 봄가을에만 돕고 있어요. 주로 남편이 하지요. 저는 제 작업에 시간을 쏟아요. 어릴 때부터 화가의 꿈을 키워왔고 이곳에 와서도 그러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 작업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제게는 그림이라는 도구로 세상과 소통하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비나리 산골 미술관을 통해 미술가로서 지역사회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았으니 그 꿈도 이룬 셈이죠.”
그의 말을 들으니 시골에서 산다는 게 꿈을 접어야 하는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은 각오만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농사지을 땅을 구하려면
귀농을 원하는 이들이 가지는 기초적인 궁금증은 농지를 취득하는 방법이다. 농지는 원칙적으로 농업인이거나 농업인이 되고자 하는 자만 소유할 수 있다. 따라서 먼저 농지취득자격증명 신청서와 함께 자기 스스로 논밭을 갈아 농사를 짓겠다는 농업경영계획서를 작성해 읍・면사무소에 제출해야 한다. 읍・면장에게서 농지취득자격증명서를 발급받아야만 등기하고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다. 만약 취득한 농지를 농업 경영에 이용하지 않으면 농지처분명령을 내리고 이행하지 않으면 이행강제금이 부과된다. 농지소유 하한기준도 있어 농업을 영위할 목적이라면 1000㎡ 이상 사야 한다는 점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외지인도 위의 절차에 따라 농지를 취득할 수 있으나 무턱대고 많이 사면 실패할 확률이 높으므로 먼저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며 구입을 계획하는 게 좋다. 그리고 먼저 집터를 염두에 두고, 집과 붙어 있거나 가까이 있는 농토를 확보하는 것이 향후 살면서 농사짓기에 편하다.
도움말 농림수산식품부 농지과 최수아 주무관, 송성일


비나리 미술관에서 전시가 없을 때는 류준화 씨가 작업실로 사용한다. 10월 14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리는 그의 개인전을 위해 막바지 작업 중이다.
2 부부의 집에서 바라본 미술관. 미술관은 이들 집 바로 옆에 위치한다.


시골에서의 삶, 녹록지 않다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송성일 씨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농사로 소득을 올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송성일 씨도 농사를 짓기 전에는 ‘노인들도 짓는 농사, 젊은 내가 농사로 먹고살지 못할까’ 생각했지만, 현실은 생각과 다르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단다.
“농사를 지으면서 느끼는, 노동을 통한 쾌감이 있어요. 언제 다 끝내나 싶었는데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새 그 넓은 땅에 곡물을 다 심고, 그걸 보면 정말 뿌듯하죠. 하지만 그렇게 힘든 노동에 비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너무 적어요. 그래서 시골에는 가을만 되면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 부부도 귀농한 이듬해에 욕심을 내어 1만 평 정도 농사를 지었다가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 눈물을 흘리며 정성껏 키운 수박을 길에 내다 버리는 경험까지 했다. 농부들이 왜 저렇게 빚이 많을까 싶었는데, 몸으로 부딪쳐보니 실감했다고.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농사 이외의 사업으로 농촌을 살리는 길을 모색했단다. 고민 끝에 녹색 체험 교류 사업으로 눈을 돌렸고, 이 덕분에 비나리 마을은 7~8년 전부터 팜스테이 마을, 녹색 체험 마을로 지정되었다.
요즘도 그에게 귀농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일 년에 50명 정도 귀농 희망자가 찾아오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관심을 반영해 ‘귀농 레지던스’를 기획했고, 현재 진행 중에 있다고. 귀농을 결심한 사람들이 정착하기 전, 살 곳을 제공하는 것이다. 1백50평 밭이 딸린 15평 집 아홉 채를 지을 예정으로 설계와 토지 매입까지 끝났다. 그 밖에 ‘비나리 농촌 예술 학교’ 등의 사업을 기획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다른 마을에 비해 비나리 마을은 인구가 줄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송성일 씨와 류준화 씨는 귀농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농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상치 못했지만 그건 바로 이웃과의 공동체, 유대감을 형성하는 일이었다고.


3 예전에 비나리 미술관에서 전시를 한 장정숙 씨가 만든 작품.
4 미술관에서는 도자기를 굽는 체험도 가능하다. 가급적 예약을 하고 찾아가는 것이 좋다.


“비나리 마을은 50여 가구, 1백여 명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이들 중에는 아직 봉화군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외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건 당연합니다. 처음 저희가 왔을 때도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능교?’ ‘농사는 아무나 짓는 줄 아능교?’라며 거리를 뒀어요. 그래서 시골 인심이 좋다는 것도 다 옛말인가 보다 하는 생각까지 했죠. 하지만 살아보니 아직 시골만큼 정 많고 뒤끝 없는 곳도 없어요.”
여기에 더해 도시 사람이 시골에 오면 ‘얼마나 못났으면 여기까지 왔냐’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고. 그래서 귀농인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잘난 척하는 경향이 있고, 원래 살던 이는 새로 온 사람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리므로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송성일 씨 주변에도 절반 이상이 귀농을 포기하고 도시로 되돌아간다는데, 그 이유 역시 농사의 어려움보다 관계 맺기에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게 그의 말이다.
“제일 중요한 건 농촌의 삶을 이해하는 겁니다. 살아온 문화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배워나가는 게 중요해요. 예를 들면 도시에서는 남의 집에 방문하기 전에 꼭 이야기하는 걸 예의라고 생각하죠. 그렇지만 여기서는 일부러 손님을 위해 준비하는 수고를 덜도록 불쑥 찾아갑니다. 이런 차이에서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이곳 문화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희도 마을에서 잘 어울리기 위해 인사 열심히 하고 먼저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했어요. 지금도 차를 타고 동네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기면 빈 차로 그냥 나가는 법이 없어요. 볼일 있는 동네 어르신을 모시고 가죠.”
이처럼 정착하기까지 어려움도 많았고 생활하기 쉽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들은 귀농하길 잘했다고 한다.
“내 시간을 온전히 내 뜻대로 쓸 수 있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농사일이 고되긴 하지만 도시의 짜임새 있는 삶보다 훨씬 느슨하기 때문이죠. 농촌이 어려운 건 현실이기 때문에 현재 가진 욕심을 줄이고, 그 대신 자기 시간을 스스로 계획해 누리길 원한다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거예요.”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어느 날, 밭에서 추수를 하던 부부의 몸짓이 여유로워 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2000년부터 부부는 ‘비나리농장(www.greengochu.com)’이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비나리 마을에서의 송성일 씨 가족 이야기가 세세하게 담겨 있으며 홈페이지를 통해 그와 소통할 수 있다. 송성일 씨가 글을 쓰고 류준화 씨가 그림을 그린 <송화네 산골 일기>는 송화의 눈에 비친 귀농 생활을 그린 책이다. 이들이 산골 마을에서 정겹게 사는 모습을 재미난 글과 그림으로 만나고 싶다면 읽어보길 권한다.







송성일 씨가 귀농 희망자에게 전하는 체크 포인트
“귀농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확연하게 나뉩니다. 따라서 귀농을 결심하기 전이라면 이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보세요.
첫째, 주어진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귀농에 성공합니다.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취미, 즉 악기나 그림 하다못해 산책이라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 보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농촌의 겨울밤은 정말 길지요. 둘째, 육체노동에 자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육체노동을 즐기지 못하면 농촌의 고된 농사일이 마냥 버겁겠죠?
이 두 가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뒤 확신을 가지면 귀농 희망자를 위한 프로그램과 현실적인 도움을 받으세요. 도움을 주는 곳은 많습니다. 봉화군만 해도 많은 지원이 있습니다. 봉화군의 경우 2인 이상 가족이 귀농을 위해 이사할 경우 1백만 원을 지원합니다. 40세 이하가 귀농에 성공하면 저금리로 2억 원까지 대출이 가능합니다. 농촌의 빈집을 사서 이사할 경우에는 빈집 수리비로 5백만 원까지 지원하죠.
귀농 멘토 제도도 있는데, 퇴직 공무원을 중심으로 귀농을 원하는 사람을 맡아서 상담하고 안내해주는 제도입니다. 이런 프로그램과 지원을 받으면 귀농에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생길 귀농 레지던스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현정 객원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