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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광주요도자문화원 조상권 이사장 이제부터 도자기를 시작합니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광주요도자문화원은 요즘 그릇 좋아하는 이들에게 입소문난 공간. 그곳의 조상권 이사장은 일흔이 넘은 지금 두 번째 시작을 야심 차게 준비 중이다. 그가 이루지 못한 첫 번째 꿈과 이루고 싶은 두 번째 꿈 이야기.

(왼쪽) 전시장 한쪽 벽에 전시한 다기 세트. 철 따라 변하는 창밖의 자연 풍경이 한폭의 그림이다.
(오른쪽) 재단이 개발한 생활식기와 재단 소속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상설 전시관. 조상권 이사장은 이 도자기에 두 번째 인생을 걸었다.


점심때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조상권 이사장이 손수 러시아 수프를 끓여놓고 아이처럼 맑은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합니다. 그리 멀리서 온 손님도 아닌데 아침부터 혼자 분주했을 이 어르신을 생각하니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따뜻한 러시아 수프 맛이 궁금해집니다. 국거리용 쇠고기에 비트, 셀러리, 양파, 적양배추, 당근, 감자를 썰어 넣고 푹 끓였으니, 잠시 후 휘핑크림만 넣으면 된다고 합니다. 아, 점심시간이 기다려집니다. 그러고 보니 3년 전 센스쟁이 노신사, 광주요도자문화원의 조상권 이사장을 알게 된 것도 음식 때문이었습니다. 이천에 사는 사진작가 문순우 씨의 요리를 취재하면서 누군가의 코멘트가 필요했고, 간단한 전화 인터뷰였지만 성심성의껏 답해주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외국에서 50년 이상 살아서 김치 없이 밥을 잘 먹는다고, 한국에 들어와서 친구들과 한식당에 가면 친구들은 이 된장이 맛있네, 저 김치가 맛없네 하는데 자신은 도무지 감이 없다고, 하지만 서양 요리에 관해서는 무척 까다롭고 정확한 입맛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음성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버터 냄새 풍기는 잘난 척이 아니었습니다. 대체 무슨 사연인지 오늘에야 듣게 됐습니다.

1 조상권 이사장이 만든 와인 쿨러. 오는 10월 전시에 선보일 작품이다.


2 서재 코너에 놓인 옛 사진. 막내동생 조태권 회장 돌 때 찍은 형제 사진이다.
3 2층 침실은 어머니가 쓰시던 앤티크 가구로 심플하게 꾸몄다.


순수했던 유학생에게 씌워진 빨간 모자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해방이 되던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 두 동생(막내동생이 광주요의 조태권 회장이다)과 함께 부산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부산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을 보내고 중학교 1학년이 되자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장남만은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며 중학교 2학년인 어린 그를 사촌과 먼 친척과 함께 밀항선에 태워 다시 일본으로 보내고 맙니다.
“난 참 유별난 데가 있었어요. 일본을 참 싫어했어요. 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어서 일본 사람들의 가식적인 것, 형식적인 것, 틀에 박혀 사는 것이 나와 맞지 않았어요. 일본에 살면서도 항상 이방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살았지요.”
그가 어려서부터 정작 가고 싶었던 곳, 꿈꾸던 곳은 일본이 아닌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부친에게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지만 허락해주시지 않아 얼마나 실의에 찬 청춘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공부를 꽤 잘하는 장남이었기에 아버지는 기왕이면 당신의 사업을 이어나가길 바라셨지만 사업에는 관심도 소질도 없다고 생각한 그는 오히려 반발해 그림을 그리러 가거나 조각하러 다니며 환쟁이 되려고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한데 어떤 운명 때문이었는지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던 허정 씨(4・19 직후 임시대통령을 지낸)의 설득으로 열혈청춘의 그는 꿈에 그리던 정치, 문화, 예술의 중심지 파리로 가게 됩니다. 그림을 무척 좋아하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일류 화가가 될 재능은 없다는 걸 파악하고 있었던 그는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넘치는 열정으로 파리에 도착해 사립 건축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지 6개월 되던 때, 선생은 자살을 결심합니다. 파리에서 탄탄하게 교육받은 학생들과 실력 차이가 너무 컸을 뿐 아니라 낙제점을 받고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던 겁니다. 아마 그때 먼저 그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국인 유학생 몇 명이 없었더라면, 자기들 역시 그랬었다는 솔직한 고백과 따뜻한 위로가 없었더라면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을 게 분명합니다. 위로와 격려는 그에게 자신감을 주어 1년 뒤에는 성적이 톱까지 올라갔고, 내친김에 입학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파리국립미술대학 건축과에 당당하게 합격해 승승장구했지요. 건축과 예과를 마치고 본과로 넘어갈 때의 졸업생 전시회는 파리에서도 아주 이름 높습니다. 얼마나 똑똑하고 실력이 좋았는지, 그해에 최고점 18점을 맞은 세 명 중 한 명이 바로 선생이었답니다. 전시회에서 만나게 된 <르몽드> 주필의 도움으로 그는 프랑스 정부 장학생이 되는 행운도 얻었습니다. 장차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빛낼 세계적인 한국인 건축가가 탄생될 수 있는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지요. 하지만 꿈 많은 유학생에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4 판성형으로 형태를 만들고 추상적인 채색으로 완성한 계영배.


5 조상권 이사장의 전망 좋은 침실. 서양 앤티크 소파와 어머니가 쓰시던 동양 앤티크 가구가 색다른 조화를 이룬다.
6 오래된 사진들 속에서 그의 과거를 읽는다. 부부의 약혼식・ 결혼식 사진과 자녀의 사진들.


프랑스 정부 장학생이 된 그에게 대한민국 영사관에서는 고급 위스키 두 병을 선물했고, 어떻게 알았는지 북한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축전이 날아든 것입니다. 그것이 선생의 운명을 묘하게 뒤집어놓고 말았습니다. 1967년에 이른바 동백림 사건의 주모자로 간주되면서 그때부터 선생은 떠돌이 생활을 시작합니다. 공산주의에 관심도 없던 그의 삶이 한순간에 뒤죽박죽돼버린 것입니다. 자그마치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미의 여러 나라를 돌며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살았습니다. 발각될까 두려워 본명을 쓰지 못하니 가짜 여권, 가짜 증명서 만들어 국적이 몇 개나 되었는지 모른다며 백발의 그가 씁쓸하게 웃습니다. 파리 유학 중에 만나 결혼한 선생의 부인은 개성 거상의 딸이었죠. 오랜 떠돌이 생활로 아내를 너무 많이 고생시켰다며, 지금도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주제가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는 선생의 눈가가 이미 서러움으로 촉촉이 젖어들었습니다. 그러다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들면서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이제는 자신의 살길을 찾아야겠다 생각하고 조용히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수소문해 찾기 시작했고, 10년 전 드디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10대 초반에 5년, 그리고 최근 10년, 선생이 한국에서 산 기간은 전부 합쳐야 고작 15년입니다. 만약 선생이 파리국립미술대학 건축과로 옮겨 가지 않고 사립 건축대학에 계속 다녔다면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소용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1 현관 코너에 세워놓는 우산 꽂이. 뚜껑을 덮으면 멋스러운 오브제가 된다.


2 조상권 이사장 뒤로 보이는 것은 전통 장작 가마인 ‘등요’. 오래된 기와로 멋스럽게 지붕을 이었다. 이곳에서는 1년에 2회 가마에 장작불을 피워 오름불 행사를 치른다.
3 밑그림도 없이 붓을 들어 와인 쿨러에 채색을 하는 조상권 이사장. 청화, 철사, 진사를 이용한다.


이제부터 도자기 시작합니다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산자락에 엄마 품처럼 아늑하게 자리 잡은 광주요도자문화원이 선생의 집입니다. 선친인 조소수 선생의 뜻을 기려 지은 공간으로 그릇과 차에 관심 많은 이들이 아지트처럼 찾아가는 곳입니다. 선생은 도자기 체험하러 오는 젊은이들도 만나고, 한국의 도자 문화에 대한 강의도 하고, 직접 작업도 하고, 오름불 행사 같은 만남의 장을 마련해 사람들 간의 소통을 돕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신고식을 하나 치른답니다. 청와대에서 국빈급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식기를 디자인해 이미 실력을 인정받은 선생이 새삼스레 신고식이라니요? 운명의 지나친 장난으로 건축에서 꿈을 이루지 못했기에 이제 도자기로 꿈을 실현하려고 한답니다. 그 꿈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인 셈입니다. 오는 10월 14일부터 20일까지, 선생이 직접 디자인하고 성형하고 그린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저 이제부터 도자기 합니다’ 하며 도자가로서 제대로 신고할 예정입니다. 향이 폭포처럼 내려오는 형상을 감상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침향로를 비롯해 의자, 촛대, 와인 쿨러, 우산 꽂이, 계영배 등 주로 식탁과 연관된 작품을 선보입니다. 요즘 작업실에서는 전시 준비가 한창입니다.
“후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새로운 문화가 이곳에서 창조될 수 있도록 기틀을 잡아주고 죽는 게 내 소망이에요. 나는 그것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고려 초기의 귀족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그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문화의 미 美의 가치가 바로 그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빨리 포착해야 하고, 그래야 우리의 근본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귀족 문화라는 게 민중에 반대되는, 특수한 계층이 누리는 특별한 문화가 아니라 고려시대의 귀족이 그랬던 것처럼 차분하고 깊이 있고 지속성 있는, 그리고 짜임새 있는 문화여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에요.”

4 왼쪽의 사각형 부조는 호랑이, 봉황, 용 등이 등장하는 옛날 민화를 보고 그대로 그려 구운 것. 오른쪽은 판성형으로 모던하게 형태를 만든 후 초벌구이해서 나온 티 잔과 티 포트 그리고 계영배.

나는 행운아입니다 선생은 지금이 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이제는 두뇌전이고, 따라서 우리의 5천 년 역사 속에 담겨 있는 핵심을 찾아내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 문화, 내 나라를 사랑하는 게 첫 번째입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주변에 이런 얘기를 많이 했더니 민족주의자 늙은이 취급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이야기 잘 안 합니다. 이제는 실력을 키우라고 얘기하지요. 실력이 있는 사람은 남의 것을 표절하지 않고 자기의 독특한 것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화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속에 우리를 키워주고 살지게 하는 양분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놀랍게도 선생은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문화 유적 답사를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1년에 한 번씩은 반드시 부여, 경주에 다녀옵니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곳은 백제 정림사지입니다. 저녁노을 질 때 역광에서 탑을 약간 옆으로 보면 실루엣이 매끈하게 보이는데, 그때 보면 영락없는 일본 탑 모습 그대로랍니다. 일본에서 우리 것을 그대로 카피했다는 게 의심의 여지 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지요. 우리가 가진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남의 것만 좋다고 좇고 있던 제가 슬며시 부끄러워집니다.

1 파리국립미술대학 건축과 전시에서 최고점 18점을 받은 바로 그 도면. 아래쪽에 18이라는 손글씨가 선명하다.


2 사진과 책, 그림 등 조상권 이사장의 흔적으로 가득 찬 서재.


3 어떤 부인이 조 이사장에게 말했단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셨는데 얼굴에서 그런 느낌이 하나도 안 보인다고. 인자하게 웃음 띤 얼굴은 정말 그랬다.
4 산 밑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본채에 은은하게 어둠이 깔렸다. 1층은 서재와 거실, 주방이 있고 2층에는 침실과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인 테라스가 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헤어져 57년 동안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가며 떠돌이 생활을 해왔습니다. 해외에 오래 살면 애국하는 마음이 강해진다고 합니다. 내 나라, 내 역사, 내 문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남달리 강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국에 돌아온 지 이제 10년이 넘었습니다. 그 후 나는 단 한 번도 해외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한 번쯤 나갔다 오지 않겠느냐고 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마다 이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상대가 이해했을까 하고 반문해봅니다” _ <어머니 그리고 엄마> 중
억울하게 평생을 떠돌이처럼 살았다는 선생이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우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자고 목소리를 높일까요?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나라인데 무엇 때문에 후대를 위해 나침반 역할을 하려고 할까요? 어렵고 곤경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천만다행하게도 그는 천성이 낙천적입니다. 자신은 행운아이고, 지금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전시장 앞마당에는 기다랗게 테이블이 차려지고 연구소를 찾은 몇몇 손님과 선생이 둘러앉아 즐겁게 저녁 식사를 시작합니다. 레드 와인의 알코올 기운이 살짝 오를 때쯤 손님 한 분이 우아한 목소리로 가곡을 선물합니다. 다음은 자연스레 집주인 순서로 이어집니다. 점심에는 러시아 수프로 감동을 준 낭만파 신사가 이번에는 지그시 눈을 감고 멋들어지게 ‘베사메무초’를 불러 화답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가을 저녁입니다.

광주요도자문화원 주소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진가리 279-4 문의 031-632-8041
* 조상권 이사장의 개인전은 10월 14~20일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에서 열립니다. 전시 문의 02-3210-0071

구선숙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