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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컬렉터를 찾아서]컬렉터 테오도르 라이나흐가 세상에 남긴 빌라 케릴로스 헬레니즘의 부활을 꿈꾸며
니스와 모나코 사이에 위치한 페라 곶의 절벽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그리스식 저택, 빌라 케릴로스. 1910년 프랑스 제3공화국 당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거부였던 테오도르 라이나흐가 창조한 이 저택은 고대 그리스 시대를 되살리겠다는 그의 황홀한 꿈에서 시작되었다. 문고리 하나, 의자 다리 하나까지 그리스 시대를 완벽하게 재현한 이 황홀한 컬렉션은 페라 곶의 해풍과 세월을 덧입어 더 고즈넉해졌다.


1층에 위치한 중심 살롱. 창문 너머로 바다가 손에 닿을 듯 보이는 이 방에서 테오도르는 손님을 맞이했다. 창가의 철제 장식마저도 고대 그리스 문양을 따른 철저한 헬레니즘 양식 살롱이다.

파란 하늘과 눈부시게 투명한 바다를 배경으로 은은하게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신비로운 음률의 곡조는 지나는 이들의 발길마저 붙잡아놓을 정도로 구슬프다. 세라베자 serravezza, 일명 ‘어부의 꽃’이라고 불리는 분홍빛 대리석으로 치장한 실내에는 마치 그리스 조각상들처럼 시라미드 chyramide(전통 그리스 의상)를 걸친 남자와 여자들이 그리스식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저녁과 밤 사이의 해가 길게 주랑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바라보던 아사도라 덩컨은 천천히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사라진 그리스 음악과 그 음악을 되살려낸 테오도르 라이나흐 Théodore Reinach를 위한 춤이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지나간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시간의 빛을 눈앞에 펼쳐놓았다. 1919년 10월. 이렇게 빌라 케릴로스 Villa Kerylos에서의 저녁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훗날 이 자리에 있었던 누군가는 아주 짤막한 한 줄로 이날을 기록에 남겼다. 불가능한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노라고.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컬렉터들이 있다. 어떤 컬렉터는 유명하다 싶은 작품이라면 시대나 작가를 구분하지 않고 모으는 반면 어떤 컬렉터는 특정한 화가의 아주 특정한 시기의 작품에만 관심을 보인다. 이토록 컬렉터에 따라서 컬렉션이 천차만별인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컬렉션들이 제각기 다른 개성을 자랑하는 이유는 컬렉터들의 개성과 취향, 그리고 인생이 컬렉션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컬렉션들 사이에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컬렉션에 따라 성격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컬렉션은 누군가가 창조해놓은 작품들을 모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컬렉션은 누군가가 창조해놓은 작품들을 모아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또 다른 의미의 창조라고 볼 수도 있다.

(위) 테오도르의 초상 사진.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던 그는 당대의 댄디이기도 했으며 시와 그리스 음악을 좋아하는 낭만가이기도 했다. Roger-Viollet


땅의 신 데메테르를 주제로 꾸민 식당 벽에는 풍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가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다. 빌라의 모든 출입구는 따로 문을 달지 않고 커튼으로 자연스럽게 공간을 구분했는데 이 또한 헬레니즘 양식을 따른 것이다.


테오도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서재는 이 빌라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고문서를 보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수많은 글을 썼다.

반면 자기 스스로 작품을 창조하고 그 작품을 모아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아주 특이한 컬렉터들도 있다. 오늘의 주인공 테오도르 라이나흐의 빌라 케릴로스가 바로 그러한 예다.
유럽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프랑스 코트다쥐르 해변, 그중에서도 니스와 모나코 사이에 위치한 페라 곶(Cap Ferrat)은 백사장과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해변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펼쳐지는 천혜의 숲으로 유명한 곳이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휴양지인 니스와 칸, 전 세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모나코와는 달리 페라 곶은 19세기 중반부터 유럽 최상류층이 소리 소문 없이 찾는 조용한 해변 마을이었다. 이 마을 끄트머리, 바다와 육지가 맞닿는 절벽 위에 그리스식 빌라 한 채가 서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저택이 그대로 남아 있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고대 그리스식 가옥 구조를 따른 빌라 내부는 모든 것이 녹아내릴 만큼 고요하다. 오로지 바다, 사방으로 뚫린 통창을 통해 망막에 아로새겨지는 바다만이 이 고요함에 작은 음률을 더할 뿐이다.
이 빌라의 주인인 테오도르 라이나흐는 유난히 바다를, 그리고 고대 그리스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1910년 프랑스 제3공화국 당시 라이나흐 집안은 프랑스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부 가문이었다. 곡물 중계상이었던 조제프 자코브 라이나흐 Joseph Jacob Reinach를 시작으로 아버지인 에르만 라이나흐 Hermann Reinach는 은행업과 대부업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프랑스의 프랑코쉬르르메르에서 태어난 에르만은 돈의 흐름을 좇아 평생을 런던, 프랭크퍼트, 브뤼셀, 파리를 왕복하며 사업으로 일생을 보냈다. 사업에 신경 쓰는 것만도 여력이 없으련만 여느 유대인들처럼 그도 세 아들 조제프, 살로몽, 테오도르의 교육에 유달리 헌신적이었다. 다만 한 가지 남다른 점은 당시 유럽 상류층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그는 철저하게 유대교 율법을 따른 교육 방식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들이 마땅히 익혀야 하는 각종 교양과 지식을 도표로 만들어 차근차근 진행할 만큼 철저하게 아이들을 교육시켰는데 교리 공부와 독일어・프랑스어・영어・라틴어 교육을 위해 유명한 독선생을 집에 상주시킬 정도였다.


이 집의 벽화는 바티칸과 로마 박물관 등에 소장된 그리스 유적의 모자이크를 본떠 만든 것이다. 19세기에 그리스・로마 유적 발굴이 본격화되면서 유럽에서는 헬레니즘 문화의 광풍이 불었다.

조제프, 살로몽, 테오도르는 열 살이 채 되기 전부터 아버지에게 그림 보는 법, 매일 신문 읽는 법, 공공장소에서 품위 있는 자세를 지니는 법을 배웠다. 그 덕분인지 그의 세 자식은 세상의 모든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반짝이는 지성으로 이름 높았다. 첫째인 조제프는 프랑스의 유명 정치인인 강베타 Gambetta의 대변인을 역임했으며 알프스 남부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후에 생제르맹앙레 고전 박물관(Musee Saint Germain en Laye) 관장이 되는 둘째 살로몽은 헬레니즘 연구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동시에 석학들의 모임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고정 회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살로몽을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만 한 구태의연한 공부 벌레 타입이라고 상상하면 곤란하다. 그는 20세기 초 프랑스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이자 댄서였던 리앙 드 퓌지 Lian de Pugy의 연인이었으니 말이다. 셋째 테오도르는 큰형 조제프의 정치성과 둘째 살로몽의 고전에 대한 사랑이 적절하게 배합된 인물이었다. 법률과 고전학으로 박사 학위를 두 개나 딴 테오도르는 미술 전문지인 <가제트 데 보자르>에 칼럼을 기고하는 미술 학자로 성장했다. 그리스 시대 화폐의 역사에 대한 논문으로 미술사가로서는 작은형에 버금가는 명성을 떨쳤는데, 그는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 건립에 대한 파피루스를 발견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학자이기도 하다. 또 남달리 감수성이 풍부했던 테오도르는 오페라와 피아노를 비롯한 음악의 열렬한 후원자이자 스스로도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그의 열렬한 사랑은 음악 부문에서도 발휘되어 음악가 가브리엘 포레 Gabrielle Faure와 함께 사라진 그리스 음악을 현대 악보로 되살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팬으로서 그리스 시대를 되살리는 것은 당연히 가장 황홀하고 오래된 그의 꿈이었다. 문고리 하나, 의자 다리 하나까지 완벽한 그리스 시대를 재현한다는 프로젝트는 그와 생각을 같이한 건축가 에마뉘엘 퐁트르몰리 Emmanuel Pontremoli를 만나면서 실현되었다. 퐁트르몰리는 테오도르와는 세 살 차이로 동시대인인 동시에 비슷한 교육 환경에서 자란 인물이다. 둘 다 고전을 좋아하고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이탈리아의 유물 복원과 발굴 현장을 여러 해 동안 둘러볼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당연히 그들은 만나자마자 막역지우가 되었다.
사실 그리스 시대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열광은 20세기 전반 유럽 문화의 특징이기도 했다. 당시 상류사회에서는 그리스・로마 양식을 그대로 본떠 저택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게티 박물관 창립자 폴 게티 Paul Guetty는 말리부에 그리스 시대를 본뜬 저택을 짓기도 했다. 그렇게 지어진 저택 중에서도 빌라 케릴로스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리석으로 된 화려한 모자이크와 욕조가 자리 잡은 욕실은 언뜻 보면 그리스 유적처럼 보이나 수도 시설이 완비된 현대적인 공간이다. 이 빌라에는 이 외에도 작은 욕실과 화장실이 두 개나 더 될 정도로 위생 시설에 역점을 두었다.


바다를 바로 마주 보는 위치에 지은 빌라 케릴로스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을 떠올리게 한다. 애당초 이곳은 그리스 바닷가를 꿈꾸던 테오도르가 땅 주인이었던 독일 왕자를 설득하여 간신히 구입한 땅으로 천혜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우선 빌라 케릴로스는 그리스식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보기 위한 집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 위한 집으로 지었다. 그리스식을 완벽하게 재현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시설을 완비한 집이란 이야기다. 집 안 곳곳에 매달린 그리스식 조명등만 보더라도 그리스식 유리 제작법을 고스란히 따라 청동 장식 하나까지도 완벽한 그리스 유물을 재현해낸 작품이지만 엄연한 전기 조명 시설이다. 다만 촛불을 사용했던 그리스 시대의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일부러 불투명한 유리와 크리스털을 주재료로 썼는데 이 조명등은 모두 독일의 걸출한 조명 전문 제작 장인인 융 Yung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들이다. 아무리 고대 문화의 열렬한 팬이라고는 하지만 테오도르와 퐁트르몰리는 당대의 댄디들이자 사교계의 인물이기도 했다. 자연히 몸치장을 하는 데 까탈스러웠는데 빌라 케릴로스의 욕실이 당시의 어떤 최신식 빌라보다 더 화려한 시설을 자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빌라 크기에 비해 다소 많다 싶은 세 개나 되는 욕실에는 수도 시설과 욕조가 배치되어 있는데 대리석과 청동으로 만든 욕조와 수도꼭지는 모두 그리스 시대 유물을 본떠 만든 조각 작품으로 장식했다.
또 집 안의 장식이나 가구에서도 주인인 테오도르의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유난히 고문서를 다루는 일이 많던 그에게 서재는 무척 중요한 공간이었는데 파피루스가 습기와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집의 북쪽에 서재를 두었다. 1천6백 개에 달하는 그의 파피루스 컬렉션을 정리할 수 있도록 그리스풍 가구를 본떠 만든 파피루스 보관함에는 긴 천을 드리워 해를 가렸고, 내부에는 밤에도 파피루스를 열람할 수 있도록 세 개의 조명등까지 설치했다.
고전 연구에 몰두하지 않을 때 그는 친구들을 불러 그리스식 파티를 열었다. 사라 베르나르 Sarah Bernhardt나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창립자인 고든 베넷 Gordon Benette,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브 에펠 Gustave Eiffel 등 문화계 인물들은 특별히 그리스식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설계한 플레옐 피아노가 놓여 있는 빌라 케릴로스의 작은 살롱에 모여 그리스 음악 연주를 들었다.


20세기 초 빌라 케릴로스를 방문했던 사람들은 이 건축물을 20세기의 그리스 범선이라 불렀다. 이 표현 그대로 마치 하얀 돛을 활짝 펼친 듯한 빌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닌 양 아름답다.

빌라 케릴로스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가구, 식기, 실내 장식을 비롯한 실내의 모든 것이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조화된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과거의 것을 재현했다는 건축물을 구경하다 보면 실망하기 일쑤다.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몰두하다 보니 각 부분이 따로 논다는 인상을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빌라 케릴로스는 그 부분에서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 완벽한 조화를 자랑한다. 이것은 건축가인 퐁트르몰리가 작은 식기 디자인 하나까지 테오도르와 함께 세심하게 챙겼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유럽에서 각 부문의 전문가로 소문난 장인들을 초빙해 팀을 이뤄 작업하도록 했는데 각 단계마다 세부까지 직접 점검할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
빌라 케릴로스의 백미는 그리스 양식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 문화를 되살려냈다는 데 있다. 집주인이 각 방의 기능에 따라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름을 붙이고 신들의 상징물을 실내 장식에 적극 차용했다. 빌라의 각 방은 그리스 시대 각 방의 고유한 기능을 고스란히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각 방은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을 하나씩 상징하는데, 이를테면 부인이었던 파니 방의 수호신은 결혼의 여신인 헤라다. 그래서 파니의 방에는 헤라의 상징인 공작새 무늬 모자이크와 텍스타일이 장식되어 있다. 식당의 수호신은 땅의 신인 데메테르로, 식당 중앙에 있는 모자이크는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데메테르의 모자이크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고자 했던 남자, 그의 컬렉터로서의 꿈은 그가 간 자리에 남아 오늘도 조용한 그리스식 음률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