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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경북 영양 조지훈 생가와 문학관까지 가을은 時가 되고
가을, 가슴에 시가 스미는 계절이다. 시집 몇 권 손에 쥐고 훌쩍 떠나봐야겠다. ‘우리 시대 마지막 선비’이자 탁월한 심미주의자인 시인 조지훈의 흔적을 밟아본다. 유년 시절의 생가와, 시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기록된 문학관이 있는 경북 영양의 주실마을. 이곳에서 조지훈 시인의 시와 함께 가을의 감촉을 느꼈다.


1 경북 영양 주실마을의 가장 좋은 터에 호은종택이 자리한다. 이곳에서 조지훈 시인이 태어나 17세까지
살았다. 개화기 형식의 한옥으로, 심미주의적인 그의 시와 닮은 단아하고 예스러운 집이다.


주실마을 어귀에 들어섰지만 풍경이 설어 잠시 멈춰 서 있을 때였다. ‘착, 착, 착, 차착.’ 멀리서, 언젠가 들어본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설 속 한 장면처럼 그 소리는 객을 이끌었다. 고른 운율에 맞춰 걸음을 옮기니 낮은 담벼락이 에두른 작은 한옥이 보인다. 반쯤 열린 대문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깨 터는 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넣으며 문턱을 넘었다. 깨 터는 손을 멈춘 이, 그는 주실마을 토박이 조석걸 씨다. 이 마을의 입향 시조 入鄕 始祖(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인 호은공의 증손자 옥천공의 후손으로 공무원을 하다 정년퇴직하고 이곳의 문화재를 돌보며 문화 해설자로 마을을 안내한다. 현지에서 나고 자란 이의 설명은 가마솥 누룽지처럼 구수했다. 무엇보다 오래 묵은 한옥 정자 ‘학파정’에 깨를 넉넉히 말려둔 풍경을 만난 건 뜻밖의 수확이었다. 조지훈의 시구절을 꺼내본다.
“마당 가장귀에/ 얇은 햇살이 내려앉을 때/ 장독대 위에/ 마른 바람이 맴돌 때// 부엌 바닥에/ 북어 한 마리// 마루 끝에/ 마시다 둔 술 한 잔/ 뜰에 내려 영영 營營히/ 일하는 개미를 보다가// 돌아와 먼지 앉은/ 고서를 읽다가.” (‘추일단장 秋日斷章’ 중)
마을을 둘러보다가 좀 놀랐다. 예술인의 생가 주변은 관광지로 개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조지훈 시인의 생가는 지금까지 영속하는 오래된 마을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가게는 작은 슈퍼가 전부이고, 마을에 음식점 하나 없다. 시인의 자취는 민가 사이에 묻혀 함께 늙어가고 있다. 그러하니 시심을 보려면 그의 생가만 둘러볼 것이 아니다. 소년 조지훈이 연을 날리고 쓸쓸히 내려왔을 언덕이며 밥물 끓는 냄새를 쫓아 걸어가던 어둑해진 논두렁에서도 시인의 가슴을 그려볼 수 있다.
주실마을은 1629년에 시작된 한양 조씨의 집성촌이다. 60여 가구, 주민 2백 명 정도 사는 아담한 부락이다. 마을 입구의 학파정을 비롯해 한옥이 여전히 고고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예사 마을은 아닐 듯싶다. 조석걸 씨의 뿌듯한 설명이다. “영남 지역에서 가장 먼저 개화를 시작한 마을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채재공, 이가환, 정약용 등과 교류하면서 개혁의 불길이 지펴졌습니다. 학자들도 많이 배출했고요. 특히 마을 전체가 일본의 창씨개명을 거부해 성과 이름을 지켜온 경우는 주실마을이 유일할 겁니다.” 조지훈 시인이 적은 ‘지조론’이 떠오른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는 날 선 외침. 그를 일컫는 ‘우리 시대 마지막 선비’라는 호칭과, 일제의 만행에 통분하다 피를 토하고, 독재 정권을 비판하여 늘 사직서를 품고 다녔다는 그의 일화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대목이다.

2 지훈문학관 입구에 있는 조지훈 시인의 흉상.


1 주실마을 입구의 정자 학파정에서 조석걸 씨가 깨를 털고 있다.
2 지훈문학관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자필 원고.


3, 8 지훈문학관으로 향하는 길과, 그 길에서 만난 조지훈의 시 한 구절. 
4  개화기 무렵 지은 한옥인 호은종택은 유리창이 특히 멋스럽다.


호은종택에서 월록서당, 지훈문학관까지 조지훈 시인은 이 꼿꼿한 마을에서도 종갓집인 ‘호은종택’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일곱 살때까지 살며 유년기를 보낸 이곳은 전형적인 ㅁ자형 구조의 일곱 칸 한옥이다. 고즈넉한 한옥 둘레를 돌아봤다. 창호지 대신 유리창을 단 개화기 한옥인데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롭고, 예스러우면서 신선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심미주의 시인의 대표로 꼽히는 그의 탁월한 심미안은 집안 내력인 듯싶다. 함치르르한 마루에 누워 하늘을 보다가 이런 시가 떠오른 것일까.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직이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별리 別離’ 중)
뒤뜰에는 잎을 다 떨어뜨린 커다란 감나무가 허허롭게 시인의 시를 왼다. “젊은 날의 안타까운/ 사랑과// 소낙비처럼/ 스쳐 간// 격정 激情의 세월을/ 잊어버리자.// 가지 끝에 매달린/ 붉은 감 하나// 성숙의 보람에는/ 눈발이 묻어 온다.// 팔짱 끼고/ 귀 기울이는/ 개울/ 물소리.” (‘추일단장 秋日斷章’ 중)


5 지훈문학관 전경.


6 지훈문학관에서 조금 걸으면 조지훈 시비가 나온다.
7 호은종택 입구에 걸린 태극기.


생가 근처에 있는 ‘월록서당’은 조지훈 시인이 어린 시절 공부한 곳이다. 1765년에 한양 조씨, 양성 정씨, 함양 오씨 등 세 가문이 주실마을의 후학들을 위해 세운 서당이다. 조석걸 씨가 안내를 도와주었다. “산전을 일궈 농사짓고, 밥 먹을 것을 죽 먹으며 자식 교육을 최우선으로 삼던 마을의 전통이 묻어나는 서당이지요. 그 당시 유학을 새롭게 익히던 곳이자 명현석학을 배출한 곳입니다.” 조지훈 시인은 이곳에서 한학뿐 아니라 조선어, 역사 등 다양한 학문을 두루 공부했다.
지훈문학관을 향해 걸었다. 시 ‘가을의 감촉’이 수채화처럼 펼쳐진 길이다. ‘셀룰로이드 구기는 소리가 난다’는 가을바람, ‘두드리면 목탁처럼 맑게 울릴 듯 새파란’ 하늘, ‘온 여름내 태양을 빨아들여 안으로 성숙한’ 과일을 느끼노라니 걸음이 자꾸 느슨해졌다. 지훈문학관에 도착하자 그의 대표작 ‘승무’가 먼저 관람객을 맞이했다. 마을 초입에 들어설 때부터 뇌리에서 맴맴 돌아 나오는 것을 꾹 눌러 아껴두었던 작품…. 시인의 아내 늘빛 김난희 여사의 손글씨로 만나 감동이 더 크다.
내부 전시실에는 시인의 육필 원고, 초판본 시집을 비롯해 그가 생전에 쓰던 멋스러운 안경테, 담배 파이프, 중절모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으로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의 맵시를 짐작해보았다. 고은, 박두진, 최순우 선생과 주고받은 편지는 찬찬히 읽을수록 무미한 가운데 달큼한 맛이 난다.


노을이 내리기까지 서석지에 앉아보라 한없는 여운을 어찌할 수 없어, 문학관을 나서면서부터 계속 걸었다. 10분쯤 걷자 지난해 ‘전국 아름다운 숲’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숲이 나왔다. 키다리 나무가 서정적으로 뻗어 있는 숲. 한쪽에는 조지훈 시비가 서 있었다. 그 숲에 잠시 앉았다. 노을을 기다리고 싶었다. 노을을 보지 않는다면 이곳의 가을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없으니까.
한데 노을이 내리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차로 15분 정도 달려서 ‘서석지 瑞石池 ’에 가보았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상서로운 돌로 만든 연못이라는 뜻이다. 서석지는 조선시대 민가의 연못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명소다. 보길도의 부용원,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손꼽힌다.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승무’ 중)이나 ‘하늘로 날 듯이 길게 뽑은 부연’(처마 끝이 보기 좋게 들리도록 모양을 낸 서까래)(‘고풍의상’ 중)이 떠오르는, 조지훈의 시와 아주 닮은 정원이다.
가지런히 조성한 화초도 예쁘지만, 돌 틈 야생초나 담벼락에 앞에서 흔들리는 코스모스도 일품이다. “코스모스는 그대로 한 떨기 우주 宇宙 무슨 꿈으로 태어났는가 이 작은 태양계 한 줌 흙에// (중략) 코스모스는 하염없는 꽃, 부질없는 사랑. 코스모스가 피어난 저녁에 별을 본다. 내가 코스모스처럼 피어 있을 어느 하늘을 찾아 억조광년의 한없는 령 零을 헤아려본다. 코스모스는 이 하얀 종잇장 위에 한 줄의 시가 쓰여지지 않음을 모른다.” (‘코스모스’ 중)
차를 돌려 서울로 향하는 국도 쪽으로 나갔다. 층층의 바위 절벽이 일품인 청량산이며, 마을을 감싸며 지나가는 강줄기 위로 노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감탄사는 너무 심심하니 시를 읊자. “바쁜 계절을 보내고/ 이제는 돌아와/ 창 앞에 앉고 싶어라// 앉아서 조용히/ 옛날을 회상하고픈// 가을은 낙엽이/ 뿌리를 덮는 계절// 하늘은 자꾸만 높아가는데/ 마음은 이렇게 가라앉아// 새하얀 바람 속에/ 옥양목 옷 향기가 정다웁다.” (‘가을의 감촉’ 중)


1 주실마을과 서석지뿐 아니라 서울로 향하는 국도변의 모든 풍경이 아름답다. 특히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하늘, 산, 강이 한데 어우러져 진풍경을 연출한다.
2 조선시대 민가의 정원을 볼 수 있는 서석지. 서석지는 개인 생활을 위해 조성한 내원과 주위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 외원으로 구분된다. 상운석, 와룡암, 선유석 등 고유의 이름을 지닌 90여 개의 서석 瑞石 도 놓치지 말 것.


호은종택, 월록서당, 조지훈 시비 등이 모인 주실마을(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문의 영양군청 문화관광과 054-680-6067)에서 특별한 추억을 쌓고 싶다면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해 문화관광 해설사로 활동하는 조석걸 씨(011-541-9584)를 만나보자. 마을의 역사와 전설 등을 실감나게 소개해준다. 무료 봉사이며 방문 전 예약해야 한다. 지훈문학관(054-682-7763)과 서석지(문의 영양군청 문화관광과 054-680-6067) 역시 입장료 무료.


가을에 더 운치 있는 문학관 두 곳
미당 서정주 시인을 찾아 고창으로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의 인기도에 비하면 그의 생가는 너무 오랫동안 무관심하게 버려져 있었다. 1942년 시인의 아버지가 작고하자 친척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했고, 1970년 이후에는 빈집으로 방치되었다. 그러다 원래의 모습을 되살려 생가를 복원한 때가 2001년이다. 그 후로 이 일대는 빠른 속도로 풍요로워졌다. 우선 폐교가 된 선운분교를 개조해 미당시문학관을 지었다. 시인이 쓰던 테이블과 의자, 육필 원고, 시집 등 총 1만 5천 점이 전시되어 우리나라 문학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서정주 시인의 문학적 토양이었던 질마재(말이 짐을 지고 넘어 다니던 고개라는 뜻)는 또 어떠한가. 요즘 가을만 되면 질마재 산허리가 온통 노란 국화로 뒤덮인다. 하늘은 노란 국화에 대비되어 더없이 푸르다. 그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다면, 그리운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해봐도 좋겠다.
특히 시인이 <질마재 신화>라는 작품을 통해서도 깊이 있게 다룬 이 질마재 마을을 꼭 들러볼 것. 너른 농촌 마을인데, 이곳을 거닐면 마음이 한없이 둥글둥글해진다. 시인이 먼저 간파했듯이 이곳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씨 때문일 것이다. “침향이란 아름다운 향기의 향을 말하는데/ 질마재 사람들은 아득한 후손을 위해 침향을 만드는 것이다/ 몇백 년 후의 사람들을 위해 오늘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아름다운 마음씨/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마음이다.”(‘침향’ 중) 그리고 질마재 들녘에 서서 가을을 노래한다. “머리 위를 떠가는 뭉게구름이/ 바람에 불리어 이리저리 들풀처럼 흩어져가는 날/ 하늘 멀리 떠나갔던 그 사람이/ 빈 촛대마다 초롱꽃 가득 켜 들고/ 가을 들녘으로/ 돌아오고 있다/ 일생 동안 몇 번인가 사람에게는/ 남 모르게 기적이 일어난다고 했던가/ 눈을 감아도 황금빛만 너울너울/ 노들길을 따라 피어 오르고 있다.”(‘가을 들녘에서’ 중)주소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마을 입구 문의 063-560-2760

청마 유치환 시인을 찾아 통영으로
대로변에서 청마문학관까지, 청마문학관에서 시인의 생가까지 긴 돌계단이 관람객을 이끈다. 긴 돌계단을 거쳐 잠시 멍해진 찰나, 바닷바람이라도 휘잉 불어오면 머리가 깃발처럼 날린다. ‘소리 없는 아우성’(문학 시간에 공감각적 표현법의 대표 사례로 늘 언급되던!)을 몸으로 느껴보는 순간이다. 청마문학관은 풍성한 통영 바람이 관람객을 맞이하는, 바람의 문학관이다. 시인의 유품 1백여 점과 자료 3백50여 점으로 충실하게 꾸몄다.
문학관을 나서 돌계단을 따라 좀 더 올라가면 유치환 시인의 생가가 있다. 원래의 생가(통영시 태평동 552) 자리에 길이 나면서 복원하기 어려워져 이곳으로 옮겨 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수려한 경관을 끼고 선 자리다. 안채와 사랑채 두 동으로 나누어진다. 약사인 아버지가 운영하던 ‘유약국’도 함께 복원되어 있다.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약국/ 행이불언 行而不言하시는 아버지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귀고 歸故’ 중)
깃발을 빌려서 바람을 그리고자 했던 시인, 시인이 읊은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가을을 느낀다. 돌계단을 다시 내려오는 그 길에서 문득 떠올랐다. 늙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사랑하였으므로, 살아갔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주소 경남 통영시 정량동 망일1길 48 문의 055-650-4591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