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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걷기 여행 소박한 풍경에게 말 걸기
산산한 바람이 불고 낙엽이 발아래 바스락거리는 가을만큼 걷기 좋은 계절이 있을까. 하나 길을 나서도 누구나 품어줄 넉넉한 여유를 가진 길을 찾기는 어렵다. <행복>은 은혼식을 치른 부부도, 이제 같이 나이 들어가는 모녀도, 결혼 후 소원해진 친구와도 함께 걷기 좋은 지리산 둘레길을 소개한다. 친구와 둘레길을 걸으며 산을 느끼는 법을 새로 배운 이혜영 씨가 그 담백한 여행지를 <행복> 독자에게 안내한다. 지리산 속살을 걸으며 주변을 살갑게, 그리고 찬찬히 돌아보는 도보 여행은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입체족’인 나, ‘평면족’인 친구
오랫동안 나는 산행을 좋아했다. 정확히10년 전부터다. 선배 산꾼들을 따라 겨울 지리산에 처음 올랐다가, 눈발이 은빛 가루처럼 휘날리는 설산에 흠뻑 취해버렸다.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아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나는 점점 산을 자주 찾았다. 육수를 뽑듯이 땀을 쭉쭉 흘리며 정상에 올라가 맞는 환희의 순간이 좋았고, 산에서 내려다보는 땅의 생김새가 좋았다. 높이가 머리 꼭대기에까지 이르는 큰 배낭을 메고 씩씩하게 올라가자면, 스스로도 내가 멋지게 느껴졌다. 등산복은 대부분 검은색이었는데, 그런 복장까지 완벽하게 갖추면 내가 전문 산꾼이나 전사가 된 듯했다. 나는 최대한 씩씩하게, 최대한 폼 나게 산꼭대기에 올랐다. 그동안 나의 산행은 ‘수직적’이었다.
내 친구는 걷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와 산행 동무가 된 적은 없었다. 친구에겐 퇴행성 관절염이 있었다. 급경사를 조금만 내려오면 무릎에 통증이 온다니, 친구는 자연히 등산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다 보니 그 친구는 평지 위주로 도보 여행을 즐긴다. 한데 사실 우리나라에서 평지 걷기라면 아스팔트 도로를 피할 수가 없다. 갓길도 별로 없는 국도를 자동차를 피해 아슬아슬하게 걷는 일. 잠깐이면 괜찮겠지만 긴 여행 기간 내내 그래야 한다면 그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생각보다 우리나라의 도보 여행은 낭만적이기 어렵다.
우리 땅에서 차를 피해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길이라면 사실 등산로뿐인데, 친구에게 그 많은 등산로는 그림의 떡이었다. 등산로 아니면 아스팔트 도로, 이 두 개를 놓고 울며 겨자 먹기처럼 양자 선택을 해야 하느냐고, 친구는 내게 가끔 볼멘소리를 하곤 했다. 걷기를 좋아하지만 등산은 싫어하는 그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평면족’, 등산을 좋아해 꼭대기로 허겁지겁 치닫는 나는 ‘입체족’이었다.

1 섬진강과 지리산이 힘을 합쳐 만들어놓은 전남 구례 들판. 이 들판을 굽어보며 걷는 둘레길이 조성되고 있다.

두 친구가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나다
살다 보니 우리가 서로 나란히 걷는 날을 맞았다. 견우와 직녀처럼. 그 징검다리를 놓아준 고마운 까치가 바로 지리산 둘레길이었다. 그때가 지난해 봄이었다. 지리산을 ‘오르지 않고’ 산 둘레를 한 바퀴 ‘빙 돌아서’ 걷는 길을 닦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람. 산을 오르지 않는다면서 이름은 웬 지리산길(지리산 둘레길의 이름)?’ 평소 지리산에 오르길 좋아하던 나는 궁금증이 일었다. 냉큼 찾아가봤다. 그리고 곧바로 홀리고 말았다.
산허리 길을 따라가니 어디가 꼭대기고, 어디가 초입인지 구분이 안 됐다. 고개를 넘다가 마을길을 걸었다. 아래서 올려다보고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봉우리는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천왕봉, 중봉, 제석봉…. 만날 저 산 정수리에 발 도장 찍느라 정신없었는데, 그 봉우리들을 둘레길에서 보니 다른 산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것들, 멀리서 바라보아야 더 잘 보이느니” 하던 시구절처럼.
무엇보다 친구 생각이 절실했다. 산을 좋아하지만 등산은 부담스러워 하던 친구가 이 둘레길이라면 반할 것 같았다. 무릎도 아프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지리산 둘레길에도 오르막과 내리막길은 있지만, 이른바‘정통 등산로’와는 퍽 달랐다. 사실 지리산이 워낙 큰 산이다 보니, 아무리 산허리 길이라고 해도 오르락내리락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조금 지칠 만하면 금세 정겨운 마을길이나 논둑길이 나타났다. 숲에 충분히 취했다 싶으면 어느새 시원한 강둑길이 등장했다.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그 풍경이, 어쩌면 신선한 산나물과 잘 말린 묵나물을 조물조물 무쳐낸 산채비빔밥 같았다.
“죽을 둥 살 둥 산에 오르지 않아도 돼. 너 하던 대로 걷기만 해. 그러고도 실컷 산에 취하게 해줄 테니까. 무릎 걱정 붙들어매고, 나랑 같이 지리산 둘레길 가자!”
맛보기로 먼저 다녀오고 나서, 나는 씩씩하게 친구에게 권했다.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 둘레길이 언뜻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친구답게 곧 흔쾌히 맞장구를 쳤다. 예상대로 우리는 그 길에 흠뻑 취했다. 친구는 산을 느낄 수 있었고, 나는 그간 은연중 사로잡혀 있던 ‘정상 정복’의 족쇄에서 풀려났다. 풀려난 그 마음, 참 시원했다.

2 지리산을 누리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텐데 나는 그간 꼭대기로 치닫는 방법만 고수해왔다. 지리산 둘레길은 그런 내 고정관념에 대한 새로운 말걸기였다.


1, 2 몇 년 전 이뤄진 공공 미술 프로젝트로 발랄한 벽화가 있는 매동마을. 민박집 화장실의 낙서가 웃음을 자아낸다.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푸른 숲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간이역처럼 마을이 나온다. 그곳에서 의외의 웃음과 여유를 발견하고 한결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3 산꼭대기에서 바라본 광활한 지리산. 이 산을 빙 돌아 걷는 지리산 둘레길의 풍광도 빼어나다.

도시내기인 우리가 흠뻑 취한 둘레길의 소박한 풍경 여기까지 말하니, 마치 지리산 둘레길이 대단한 비경을 품은 길처럼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지리산 둘레길의 풍경은 특별히 새로운 게 아니다.
남한 내륙에서 가장 키 크고 덩치 큰 봉우리들을 품고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그러다 보니 그 큰 산자락마다 마을, 절, 계단식 논, 비탈밭, 고개, 호수, 실개천 등등 온갖 풍경들이 가득 차 있다. 지리산 둘레길은 그런 풍경을 차별 없이 매만지며 걷는 길이다.
그런 평범한 풍경을 줄줄이 엮어 비범한 발견으로 바꾸어놓은 주인공이 바로 ‘둘레길’이다. 산자락의 둘레길은 자연스럽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었다.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산마을들이 간이역처럼 다가오고, 수풀을 헤치고 올라서면 거대한 다랑논둑에 내가 서 있었다.
봉우리를 목표 삼아 땀을 뻘뻘 흘리며 고행하던 내 산행 방식은 바뀌었다. 고만고만 야트막한 산길들을 수평으로 걸어 나가니, 자연스럽게 주변 풍경에 시선이 갔다. 여기저기 주인공 아닌 것이 없었다. 밥상에 올라올 채소도 이 길 위에선 ‘반찬’ 이름표를 떼고 아름다운 야생화처럼 나풀거렸다. “가지 꽃이 이렇게 예쁜 색깔인지 몰랐네.” “나 가지나물 참 좋아하는데.” “이게 뭘까. 줄기랑 이파리만 보면 수박 같은데 열매는 꼭 호박 같아.” “호박? 뭔 호박이 이렇게 생겼대?” 둘 다 도시내기인 친구와 내가 어설픈 추리에 빠져 밭둑에 웅크리고 앉아 있자니, 마을 할머니가 지나가다 타박을 주셨다. “뭣이 신기하다고 뚫어져라 쳐다본당가. 돼지호박이여, 돼지호박.” 그런 식이었다. 반찬이라고 열심히 먹을 줄만 알았지, 느릿느릿 걸으며 이렇게 꼼꼼히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 주변을 살갑게, 그리고 찬찬히 돌아보기. 지리산 둘레길 걷기가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4 키다리나무가 멋스러운 등구개 고갯길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다. 
5 지리산 맑은 햇살을 받아 감들이 홍시로 다시 태어난다.



6 마을을 지나가다 만난 ‘변견’들이 기어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7 길을 걷다 마주친 반가운 정자. 가을이 솔솔 익어간다.


2011년, 원형의 길 위에 다시 서자는 친구와의 약속 오랜만에 머리 꼭대기까지 오는 큰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서본다. 신발끈도 고쳐 맨다. 등산을 위한 차림은 아니다. 나는 이제 남원 인월에서 시작해 경남 함양을 거쳐, 산청 찍고, 하동으로 입성해, 구례 지나 다시 남원으로 되돌아오려고 한다. 지리산 둘레길을 한 바퀴 빙 돌아 걷는 여정이다. 한 달 안팎이 걸릴 것 같은데,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남원에선 지리산 주능선이 병풍처럼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함양으로 가면 스케일 큰 엄천강을 옆에 끼고 걸을 수 있다. 산청으로 들어가면 ‘정말이지 이래서 지리산이구나’ 싶을 정도로 산들의 파노라마가 거대하게 물결친다. 아무리 둘레길이라고 해도 산청 구간에선 등산화 끈을 단단히 매야 한다. 하동으로 내려가니 푸른 녹차밭 사이로 걷는 길이 앙증맞다.
구례로 건너가다가 그 넉넉한 섬진강을 만난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명당을 끼고 있는 오미리 들판도 넓고, 산도 크다. 그러고 보니 옛날부터 구례는 ‘세 가지가 큰 땅’이라고 했다. 큰 산, 큰 물, 큰 들의 어울림이다. 사실 이렇게 한 달쯤 산자락을 에둘러 걷다 보면, 굳이 스케일 큰 산이 아니라도 마음자리가 넉넉해질 것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여정은 상상 속의 일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완성된 길이 아니라, 해마다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놓인 길이 남원, 함양, 산청까지 70km. 계획대로라면 둘레길은 2011년 이후 원형의 길로 이어진다.
그때가 되면 시작도 끝도 없는 길, 아니 내가 섞여드는 그 어디라도 시작이고 끝인 길을 맛볼 수 있다. 친구와 약속도 했다. 훗날 친구와 내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꽃비 날리는 어느 봄날 그 원형의 길 위에 서기로 했다.

8 꽃섬들이 둥둥 떠 있는 듯한 바래봉 철쭉은 오늘날 남원시 운봉을 대표하는 풍광이 되었다.

지리산 둘레길 접근은 남원이나 산청에서
지리산 둘레길(줄여서 지리산길이라고 부름)은 (사)숲길과 산림청, 지리산을 둘러싼 다섯 개 시·군에서 협력하여 길을 내고 있다. 새 길을 뚫는 것이 아니라 기존 마을길, 옛길 등을 잇는 소박한 방식이다. 지금까지 닦은 길은 모두 70km. 현재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보려면 전북 남원(주천면, 운봉읍, 인월면)이나 경남 산청(금서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다. 구간은 모두 다섯 개로 나뉘어 있다. 구간별로 하루씩 찬찬히 걸어도 좋고, 3일 정도 시간을 내어 70km를 한꺼번에 걸어도 좋다.

길 찾기는 마음 놓고, 숙식 준비는 꼼꼼하게
지리산 둘레길에선 길을 잃을 염려가 거의 없다. (사)숲길에서 길마다 노란 말뚝으로 방향 표시를 꼼꼼히 해둬 화살표만 잘 보면 길 찾기는 아주 간단하다. 대신 둘레길 주변은 기존 관광지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서 숙소, 식당 같은 편의시설이 많지 않다. 사전에 편의시설 정보를 꼼꼼히 챙겨 동선을 짜야 한다. 지리산 둘레길 정보는 (사)숲길 홈페이지 www.trail.or.kr에서 챙긴다. ・관련 도서_<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 <지리산 둘레길&언저리길 걷기여행>







김현정 객원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