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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당신이 신이라면 인간을 위해 무얼 하겠습니까?
한국에서만 5백만 부의 책이 팔린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신> 1백만 부 돌파를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행복>은 나흘 동안 그의 사인회, 강연회, TV 녹화 현장에 동행했고, 하늘에 제사 지내던 장소인 원구단 앞에서 그와 짧지만 깊숙한 대화를 나눴다. 알려진 것처럼 베르베르는 냉소적인 천재도, 실험실에 갇힌 소설가도 아니었다. 그런 낡은 수식보다는 다른 게 필요해 보였다.
서울은 지쳐 보입니다. 도시 전체가 돌아오지 못하는 지점에 이른 것 같습니다. 천지에 중한 건 ‘성공’ ‘성공’이라고 외치는 세상 속에서 숨 넘어가게 내달리는 사람들의 도시. 그 한복판, 원구단(고려시대 하늘과 땅에 제사 드리기 위하여 쌓은 단) 앞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도나텔로의 조각상처럼 감정을 가득 채워 빚어진 베르베르의 얼굴. 기운을 아끼려는 듯 그의 목소리는 작았습니다.
촬영 준비로 짬이 생기자 그는 태극권을 수련하기 시작합니다. 한옥 처마 뒤로 풍경이 담기는 원구단 앞뜰에서 푸른 눈의 작가가 수련하는 태극권이라니. 20년 넘게 수련 중이라는 태극권 품새가 가히 고고하고 여여합니다. 빗소리처럼 카메라 셔터 소리가 작렬하는데도 그의 고요한 수련은 계속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개미> <뇌> <나무> <파피용> <신>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1천5백만 부, 한국에서만 5백만 부가 판매된 작가. 톨스토이, 헤밍웨이에 이어 ‘우리나라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 3위에 오른 인물(국민독서실태 조사 결과). 첫 소설 <개미>가 한국에서 먼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프랑스에서 자신을 재평가하게 되자“한국은 나를 발견해준 나라”라는 말로 보답한 작가. 한국에만 70만 명의 팬클럽 회원이 있다는 작가….
어쩌면 인생은 사는 것보다 설명하는 게 더 힘듭니다. 이 사람의 충만한 삶의 목록을 원고지 몇 장으로, 그 위에 끼적이는 프로필만으로 섭렵하는 건 무모한 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도 신과 우주와 인간 존재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이 작가 앞에선 더더욱.

(왼쪽) TV 프로그램 녹화 때 인사동 한복판에서 만난 베르나르 베르베르. 철학자와 과학자, 탐험가의 면모를 모두 갖춘 얼굴이다.

불안은 영혼을 일깨운다 엿새 동안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갈 짐을 꾸리다 왔다는 그는 어딘지 불안해 보였습니다. “나는 예민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세상을 관찰한다는 것이 내게 굉장한 두려움을 주는데, 그 불안을 글쓰기로 해소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해받지 못할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할까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데, 그럴 때마다 글을 쓰면 기분이 좋아졌어요. 글쓰기가 치료제였던 거죠.”
운동도 못하고 고독한 아이였던 시절, 그는 이야기를 지어 친구들을 즐겁게 하는 일에 빠져들었고, 일곱 살 때 벼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벼룩의 모험>을 썼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는 열여섯 살부터 매일 아침 8시부터 12시 30분까지 시간을 정하고 쓰는 습관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만들어냈습니다. 인터뷰 하루 전 그가 고려대학교에서 강연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개인적인 신념으로 삼는 문장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확인된 모든 약점이 내 모든 예술의 근원이 된다.’ 아직도 나의 불안감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낳습니다. ‘불안을 잘 느끼는 병’의 유일한 이점이 이것이죠.” 그 순간에도 그의 눈에 조심스러움과 한기가 스쳐 갔습니다.

(오른쪽) 원구단에서 태극권 수련 중인 베르나르 베르베르. 사람이 개미를 관찰하듯이 신의 눈으로 인류를 지켜본다는 <신>의 설정과,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기 위해 쌓은 이 장소는 묘하게 어우러진다.

프랑스 파리 15구의 아파트에서 동양 사람처럼 원목 마루에 신발 벗고 사는 그. 거실에는 커다란 개미 모형과 부처상이, 초현실적인 유화들과 직접 그린 그림이, 복도에는 아인슈타인의 사진이 자리한 그의 집. 매일 아침 네 시간 반씩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철학자나 과학자와 하는 식사를 빼먹지 않고, 회사 하나가 쓰고도 남을 기억 용량의 대형 IBM 컴퓨터 두 대로 소설을 쓰는 작가. 주말엔 영화 작가나 연극 작가들 열댓 명과 모여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데, 서스펜스가 있는 시나리오를 만드는 재미에 하루 종일 빠져 지내는 소설가.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놔뒀던 관대한 부모님, 그가 법대 시험에 떨어졌을 때도 “우리는 너를 믿는다”고 했던 그들. 그리고 그가 감독한 영화 <우리 친구 지구인>에 출연했다는 열다섯 살짜리 아들, 부인과의 이혼, 함께 사는 얼룩 고양이. 여기까지가 그에 대해 밝혀진 개인사의 전부입니다. 작가 베르베르의 날들은 밀폐돼 있는 듯 보입니다.
4일간의 동행 취재 중 새롭게 전해 들은 그의 개인사는 이것입니다.“아들을 위한 내 교육법은 ‘웃는 법 가르치기’가 전부입니다. 행복하게 살 무기로 ‘유머’를 갖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아들 녀석에게 세상은 재미있는 세상과 재미없는(웃음이 안 나오는) 세상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아요. 반응이 늘 ‘여긴 재미있어, 여긴 재미없어’ 이런 식이죠.”수류탄 핀처럼 불안해 보이던 그가 아들 이야기에서 갑자기 작열하듯 웃어 보입니다. 작가의 어깨 위에, 아이 하나가 딸린 가장의 어깨가 겹쳐지는 순간입니다.

실험실에서 소설 쓰기 문학과 혈투 같은 열애를 택한 그의 일대기는 이러합니다.‘별들의 전쟁’ 세대인 그는 만화와 시나리오를 탐닉해 고등학교 때 <유포리 Euphorie>라는 만화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대학(툴루즈 대학에서 법학, 툴루즈 범죄연구소에서 범죄학, 국립언론학교에서 저널리즘 전공) 졸업 후엔 <르 누벨 옵세르 바퇴르>라는 신문의 과학 기자로 7년을 보냈습니다. 기자 시절에도 오후에 기사를 쓰고, 오전엔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글을 썼습니다. 전업 작가가 된 후 열여섯 살 때부터 1백20번이나 고쳐 쓴 <개미>를 1991년(16년 만에!)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성층권의 작가 반열에 올라서기까지 그가 보낸 고초의 시간은 깁니다. 프랑스에서 아무도 그의 책을 출판하려 하지 않아 출판사를 찾는 데 6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 후로 멈추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끊임없이 저작물을 만들어내는 그. 매년 10월 초에 책을 내겠다고 선언한 후 치열하게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과 좀 다른 길을 걷습니다. 대중적인 소설에서 보이기 마련인 꼽꼽한 물기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건 스스로를 ‘과학을 실험실과 연구실에서 해방해 대중에게 전파하는 사람’이라 규정한 그의 성향과 통하는 듯합니다. 그는 <개미>에선 개미들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파헤치고, <뇌>에선 인류의 마지막 미정복지인 뇌의 세계를 탐험하며, <파피용>에선 태양 범선을 탄 인류의 우주 여행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책을 쓰기 전에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나 실제로 증명된 과학에서 이야기를 끌고 옵니다. <뇌>에서는 전자 칩으로 뇌에 자극을 일으켜 만족이란 감정을 얻어내는 이야기가 나오죠. 최근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성적 활동을 개선하는 전자 칩을 뇌에 이식하는 방법을 개발 중이라는 뉴스를 봤습니다. 이렇게 과학적 진보가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예견하고, 그 실현을 보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는 실험실에 자신을 가둔 과학자 같습니다.

(왼쪽) KBS 1 TV 프로그램 <책 읽는 밤>의 녹화를 위해 인사동을 찾은 베르베르.
한글 간판 사이를 흐뭇하게 거니는 푸른 눈의 작가다.

한국, 베르베르를 발견해준 나라
과학 소설도, 판타지 소설도 아닌 ‘오묘한 지점’에 서 있는 그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우리나라 독자들은 성지 순례를 하듯 가슴 졸이며 경배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팔린 1천5백만 부 중 5백만 부가 한국에서 팔렸다는 사실이 그걸 뒷받침합니다. 또 그의 첫 소설 <개미> 출간 후 열린 사인회에는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고, 이번 방한 때(벌써 네 번째 방문인데도!) 강연회, 사인회에 몰린 내장 같은 행렬은 그 인기를 가늠케 합니다(흥미로운 건 일본에서는 <개미>가 참패했다는 것이다. 개미처럼 사는 일본인들이 제목에서 모욕을 느껴서라는 재미난 해석도 있다). 그는 이런 한국 독자에 대한 애정을 책 속에 드러내곤 합니다. <개미>의 지웅(그의 책을 출간하는 ‘열린책들’의 홍지웅 대표 이름을 따옴), <신>의 은비(그를 인터뷰한 한국 기자의 아이 이름), 차기작 <카산드라의 거울>의 예빈(홍지웅 대표의 아들 이름)까지 소설 속 주역의 이름만 봐도 그 애정을 짐작할 수 있지요. 자신의 작품이 특히 한국 독자에게 인기 있는 이유에 대해 그는 “질곡의 역사를 지나온 한국은 과거를 잊기 위해선지 세계에서 가장 미래 지향적인 나라가 되었고, 그래서 나의 미래적인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동양적 세계관도 한국 독자를 끌어들이는 강한 자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전생과 현세, 내생의 이야기가 반복되는데, <타나토노트>에서 인간이었던 미카엘 팽송이 <천사들의 제국>에서는 수호 천사가 되고, 다시 <신>에서는 환생해 신 후보생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1백10번 환생했고, 그중 11번의 삶은 끝내줬다는 점쟁이의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11번의 전생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져 작가로서의 삶을 이뤄낸 것이라고요. 현각 스님이 그와 만나 나눈 이야기도 기억납니다.‘베르베르는 전생에 승려였고, 현세에서도 컴퓨터로 사유하는 스님’이라는.
그의 작품 대다수를 번역한 번역가 이세욱 씨도 한국에서 그의 인기를 드높인 공로자입니다. 베르베르는 <개미> 속 개미들의 전투 장면을 ‘se mélange, se derange, se range’라고 은율 규칙에 맞춰 썼는데, 이세욱 씨는 이를 ‘모두 한데 뒤섞여서, 어지러이 흩어졌다 가지런히 정렬하고, 치달리고, 돌아가고, 달아나고, 덤벼들고, 쑤석거려 시비걸고…’라고 4・4조로 은율을 주어 번역했습니다. ‘바닷물의 밀고 써는 소리’ 같은 표현도 이세욱 씨 같은 탁월한 번역가가 아니고선 만들어낼 수 없는 언어 유희입니다. <개미>를 번역할 때 그는 개미 관련 전문 서적, NHK의 곤충 다큐멘터리까지 섭렵하고,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 읽었던 자료들도 구해 읽었다고 합니다. 이런 노고가 한국 독자와 프랑스 작가의 거리를 좁혀준 겁니다.

우리는 모두 신이다 베르베르가 9년을 들여 완성한 <신> 시리즈는 프랑스와 한국에서 모두 1백만 부 이상 팔려나갔습니다. 신들의 도시 올림피아에 모인 1백44명의 신 후보생들이 신이 되기 위한 경쟁을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신 후보생들은 각자 씨족을 관장하고 문명을 일구는 ‘Y 게임’을 하는데, 자신이 관장하는 씨족이 경쟁에 밀리면 게임에서 탈락해 괴물이 됩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반목과 협력, 전쟁을 벌이며 경쟁합니다. 각 문명은 로마, 중국, 유대, 이집트와 닮아 있습니다. 살인을 일삼는 부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부족을 이기는 ‘도덕적 배반’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데 신 후보생들이 게임을 치르는 ‘연습용 행성’ 18호 지구라는 발상, 참 대단한 상상력 아닙니까? 곤충학자가 개미를 관찰하듯이 신의 눈으로 인류를 지켜본다니!
베르베르는 이 소설을 통해 과학이라는 물음표와 철학이라는 느낌표를 함께 잣는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신의 눈으로 인간의 문명을 바라보며 “세상은 과연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왜 선은 가끔 악을 이기지 못하는가, 인류는 어디쯤 와 있나”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지요. 무엇보다 “당신이 신이라면 인류를 위해 어떻게 하겠는가”란 화두 앞에선 오소소 소름이 돋을 것만 같습니다. “<신>을 쓰는 동안에는 내가 인간이라는 걸 잊으려고 애썼습니다. 나에게 스스로 ‘당신이 신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란 질문을 수없이 던졌지요. 내가 내린 답은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것, 폭력이 없는 인간 세상을 만드는 것, 인간과 자연 간에 평화 협정을 맺어 하모니를 이루는 것.” 이 이야기를 하는 그는 탐험가와 구도자의 얼굴 모두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 고상한 한기.
결국 그가 이 소설에서 말하려는 건 ‘희망’이라는 메시지일 겁니다. “우리 안에 스스로도 모르는 신적인 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저평가해서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로 생각하면 현재의 괴로움도 줄어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부의 다이아몬드를 스스로 빛나게 하십시오.”이 이야기를 건넬 때 그의 눈빛! 석가모니가 말씀하셨던 ‘안시’(호의를 담은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눈으로 베푸는 것)가 그에게 있습니다.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젊은 독자들에게 그가 보내던 눈빛도 그러했습니다. 인류애적 시선을 가진 휴머니스트의 그것.

신들은 영웅이 되지 못하지만 인간은… 촬영과 인터뷰로 주어진 시간은 마하의 속도로 지나갔고 그는 망설임 없이 떠나갔습니다. 그 날렵한 실루엣은 공기를 미세하게 흩뜨려놓았습니다. 신의 제단, 원구단에 남겨진 나는 어느새 베르베르식의 기묘한 생각을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숨 넘어가게 내달리는 보통 사람들의 도시 서울, 내가 신이라면 이곳의 씨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신>의 한 구절에 밑줄을 눌러 긋습니다. “‘스승 신들이 인간에게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죽음일 것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인간의 삶에는 결말이 있죠. 반면에 불사의 존재들에게는 끝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영웅이 되지 못합니다. 영웅적인 행위는 마지막 장면에서 생겨나는 법이죠.’ 나는 그 말을 곱씹는다. 신들의 신은 무한하고 전능하다. (중략)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가 가지지 못한 장점이 있다. 우리는 실패를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공이라는 것이 있다.”(<신> 중)
오후 1시의 해가 원구단 앞뜰에 내려앉자, 그만큼의 평화가 조금씩 세상에 차오릅니다.

(오른쪽) 이번 여름 한국에서도 6권이 모두 출간된 <신>.

Bernard Werber
베르나르 베르베르 동행 취재기

그는 부지런하고 위트 있고 자유로웠다 
베르베르의 네 번째 한국 방문 일정도 숨가빴다. <행복>은 그의 사인회(9월 5일 광화문 교보문고), 방송 녹화 현장(9월 6일 인사동), 강연회(9월 7일 고려대학교) 등 사흘간 그를 동행 취재하며 다양한 얼굴의 베르베르를 스케치했다.
사인회 현장은 ‘교복의 행진’이었다. 5백 명도 넘는 인파의 40%쯤은 교복 입은 중・고등학생. 여기에 초등생, 대학생을 합해 학생이 60%가량 되었다. 교보문고 관계자가 말하길 “사인회 인기 수준으로 보면 최상급에 속하는 작가, 특히 학생 팬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작가로는 유일하다”고 한다. 영업이 마비될 만큼 인파가 몰려 베르베르는 애초에 계획한 3백50명을 넘어 4백 명에게 사인을 해주고 손목이 시큰거리는지 눈을 찡긋거렸다. 한 소년은 테이블 위에 털썩 엎드렸다. 티셔츠 등면에 사인을 받겠다는 것이다. 베르베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느라 함께 한국을 찾은 스테판 씨의 카메라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베르베르는 위트 있는 남자다. 한 아가씨가 책에 “Will you marry me?(저와 결혼해주시겠어요?)”라고 적어서 내밀자, 그는 “Oh, not today(아, 오늘은 안 돼요)”라며 미소 짓는다. 그는 한국 문화를 잘 아는 남자이기도 하다. 방송 녹화 도중 사진 찍자며 핸드폰을 꺼내 든 소녀를 위해 핸드폰을 들고 고개를 45도로 돌려(얼짱 각도로!) 함께 ‘셀카’를 찍었다.
휴식 시간에 짬을 내어 건강 비법을 물었다. 태극권과 채식, 그리고 여덟 시간 정도의 긴 숙면이라고 한다. 잠 이야기를 하다 그는 꿈에 관한 독특한 습관이 있다며 눈을 반짝였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간밤에 꾼 꿈을 메모한다고 한다. “꿈은 제 무의식이에요. 꿈속에서는 윤리적 제약도 받지 않고 타인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꿈을 기록한다는 것은 벌거벗은 내면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일입니다. 제 소설 창작의 큰 원천이고요.”
그는 구태의연한 격식을 싫어하는 남자다. 고려대학교 강연회에서 진행자가 ‘베르베르는 여러분이 강의를 자유롭게 경청하기를 바란다’고 하자마자, 계단이며 창틀에까지 끼어 앉았던 학생들이 우르르 단상 위로 올라갔다. 30~40명의 학생들이 쾌재를 부르며 베르베르 옆에 흩어져 앉았고, 좌석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강연회는 ‘창의력과 글쓰기’란 주제로 한 시간 반 정도 진행되었다. 수백 명의 청중이 딴청 하지 않고 한몸처럼 집중하는 걸 보면 베르베르의 강연법 자체도 ‘베스트셀러’감인 듯싶다. 몇 가지 감동적인 내용이 뇌리에 남는다. 그는 열여섯 살 때부터 하루 네 시간 반씩 글을 써왔다며, 상상력이란 습관을 통해 훈련하는 것이라 말한다. 마라톤의 이치다. 처음에는 호흡을 제대로 하기가 고되지만, 자기에게 맞는 숨 고르기 방법을 찾고 나면 편안해지는 원리. 화가, 작가, 음악가 모두 되고 싶지만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고충을 털어놓은 학생에게는 이렇게 조언한다. “Just do it! 자신의 창작 활동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그냥 하세요. 꿀벌이 꿀을 만들 때, 이 꿀이 좋은 꿀인가 나쁜 꿀인가 고민하지 않잖아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여러분은 이미 스스로 창작의 능력, 즉 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이 지나치게 겸손하다는 겁니다. 스스로를 믿고 사랑하세요. ”


그는 사인에 돌고래를 함께 그려주기도 한다. <신>의 주인공 미카엘 팽송이 관장하는 씨족이 바로 돌고래족인데, 평화와 자유를 모두 아는 이상적인 인간의 상징이다. 오른쪽 사진은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강연회 광경.

최혜경,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