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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들어보니 로보트 태권브이 부활시킨 신씨네 신철 대표
1970~80년대 소년들의 책받침, 공책, 딱지를 수놓던 토종 캐릭터 로보트 태권브이. 요즘 어린이들 사이에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잊혀진 구닥다리 캐릭터에서 무궁무진한 문화 산업의 가능성을 찾아낸 남자가 있다. 만화영화를 정교한 실사 영화로 제작해 국내뿐 아니라 세계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영화사 신씨네 신철 대표다. 태권브이를 주 테마로 한 세계 최초의 로봇 테마파크는 언젠가 디즈니랜드의 아성을 넘어설지 모르는 일이다. 과거의 추억을 미래의 꿈으로 만든 남자, 가슴의 꿈을 현실의 문화 비즈니스로 실현시키는 남자, 신철 대표의 모험담이 시작된다.


영화사 신씨네와 캐릭터 브랜드 회사 ㈜로보트 태권브이의 신철 대표. 그를 호위하러 나온 로보트 태권브이가 경복궁에서 ‘몸 풀기’ 동작을 하고 있다. 실제로는 50cm 가량의 피규어이며, 원작의 디자인을 살려서 만들었다.

한국판 영화 <시네마 천국>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훗날 영화 감독이 되는 어린 소년 토토가 허름한 영화관에서 푹 빠져드는 작품 중에 분명 <로보트 태권브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장면 하나가 묘사될 것이다. ‘빰빠밤 빰빰빰빰’하며 <로보트 태권브이> 주제가가 흘러나오면, 영화관의 모든 소년 소녀가 일제히 일어나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 이 묘한 ‘집단 흥분 상태’를 위트 있고 정감 있게 잡아내면 한국판 <시네마 천국>의 백미가 되지 않을까.
1970~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한국인이면, 태권브이의 시그널 음악만 들어도 가슴이 찡할 테다. 천하무적일 뿐 아니라 정의롭고 평화를 사랑하는 태권브이. ‘안티 팬’ 하나 없는, 그야말로 당대를 주름잡던 ‘애니매이션계의 아이돌 스타’였다. 한때 잘나갔지만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구닥다리 촌스러운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영영 먼지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태권브이. 이때 한 남자가 고물상에서 보물을 찾듯 구식 태권브이에서 잠재력을 보았다.
영화사 신씨네 신철 대표. 잘나가는 영화 제작자가 로보트 태권브이를 부활시키겠다고 나섰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돌입하면서 3년 전에는 ㈜로보트 태권브이라는 캐릭터 브랜드 회사를 차렸다. 한물간 옛 청춘 스타의 화려한 재기가 임박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태권브이를 국제 스타로 키울 계획이다.
신철 대표는 무모할 법한 상상을 현실적인 문화 산업으로 일구고 있다. 로보트 태권브이가 첫 사례는 아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전설적인 액션 배우 이소룡(브루스 리)의 초상권을 확보하고 그를 디지털로 완벽하게 복원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기도 하다. 한참 전에는 영화 <구미호>를 통해 불가능할 줄 알았던 한국형 SFX 서막을 열었던 과감한 제작자다.
여기서 잠시 신철 대표가 제작한 영화의 ‘흥행 성적표’를 들춰본다. <결혼 이야기>(1992), <은행나무 침대>(1996), <편지> (1997), <약속>(1998), 그리고 <엽기적인 그녀>(2001)까지 서울 관객만 50만 명을 돌파한 영화가 다섯 편이나 된다. 알다시피 그 중 <엽기적인 그녀>는 전국 관객 4백88만 명이 들었고 아시아 시장을 들썩이게 했으니, 초특급 대박이었다. 남들이 평생 한 편 만들기 힘들다는 흥행 영화를 줄줄이 선보인 제작자다. 그 노하우로 하던 대로만 한다면 여생을 편안하게 살 것 같은데, 그는 왜 이 무대를 떠나 오래된 만화 캐릭터에 모든 것을 걸었을까? 조만간 로보트 태권브이 캐릭터로 디지털 기술의 총화인 실사 영화를 제작하고, 로봇 테마파크를 만들겠다며 말이다.


1 실사 영화를 위한 데모 버전인 로보트 태권브이가 태권도 품세를 하는 장면.
2 국기원에서 로보트 태권브이의 공로를 인정해 명예 4단증을 수여했다.


당신의 영웅은 어디에 있습니까?
“‘태권브이 세대’는 현재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근데 이 나이는 삶이 가장 버겁다고 느낄 때예요. 애들은 무섭도록 빨리 크지, 사회에서의 위치는 아직 불안정하지, 가족・친지・회사 선후배 등 챙겨야 할 사람들은 많지. 그렇다고 뭔가를 바꾸기엔 이미 늦었고, 그냥 살자니 서글픈 나이예요. 이들을 도닥이고 싶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외롭기 때문에 영화를 보러 간다고 덧붙인다. 오죽 쓸쓸하면 두 시간 동안 캄캄한 방에 가서 남의 이야기를 보고 있겠냐는 거다. ‘아, 삶이란 참 쓸쓸하구나. 그렇다면 영화가 잠깐의 위로가 되어준다면 좋겠다.’ 이런 생각으로 지금껏 영화를 만들어왔다.
어렸을 적 우리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부모의 사랑스러운 영웅이었다. 조금 컸을 때는 가슴속에서 영웅이 태어났다. 무술의 제왕 이소룡, 나라를 구한 이순신, 혹은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운 로보트 태권브이. 영웅은 우리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좌절을 맛보고 일상에 시달리면서 더 이상 영웅을 믿지 않게 되었다. 가슴에서 영웅을 잃으니 삶이 퍽퍽해졌다. 영웅이 부활한다면 얼마나 신날까.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우리는 이미 누군가의 영웅일지도 모르는데.
그가 태권브이의 부활을 결심한 것은 신중한 분석의 결과다. 태권브이는 33년 동안 살아남은 장수 캐릭터다. 이미 1차 테스트를 거친 셈이다. 성인의 95%, 어린이 81%가 알고 있으니 대중적 호소력도 갖췄다. “아톰은 일본인의 전후 상처를 감싸 안았고, 슈퍼맨은 미국의 대공황에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우리에겐 로보트 태권브이가 있지요.” 2007년에 만화 원본을 디지털 기술로 복원한 <로보트 태권브이>를 극장에서 상영했는데 무려 75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 또 한 번의 테스트를 통과한 셈이다.


3 ㈜로보트 태권브이 사무실은 ‘꿈과 용기의 비밀기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이곳에 로보트 태권브이에 관련된 작품 및 각종 피규어가 전시되어 있다. 앞에 보이는 나무 조각은 김석 씨의 작품.
4 로보트 태권브이의 변신 동작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스케치를 한 피규어. 토종 캐릭터를 국제적인 스타로 데뷔시키기 위한 작업이 이렇듯 한 걸음씩 진행되고 있다. 로보트 태권브이 조종자 훈이 대신 ‘철’이가 어깨에 앉았다.


토종 캐릭터가 세계를 재패하리라
로보트 태권브이 실사 영화(조종사인 소년 훈이가 중년의 박사 훈이로 나온다)에는 자그마치 1백80억 원 정도 들어간다. 한국 영화 역사상 이렇게 큰 규모의 투자는 없었다. 추가 지원을 받으면 총 3백억 원 정도 투입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 과감한 투자조차 신철 대표에겐 빙산의 일각이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큰 그림은 영화가 세계시장에 진출하고 로봇 테마파크가 조성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작한 여러 편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는데, 저를 비롯한 문화 생산자의 몫으로 남는 돈이 없었습니다. 돈을 번 것은 유통 쪽이었지요. 또 비디오, 애니메이션, 게임 등 다양한 소스로 활용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그런 구조가 체계화되지 못해 아깝게도 더 벌 수 있을 돈을 날려버렸습니다.” 가령 미국에서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개봉하면 정교한 피규어부터 게임, 각종 기념품 등 캐릭터 산업이 전방위로 확장된다. 신철 대표는 우리나라에 이런 시스템을 체계화하는 첫 사례가 바로 태권브이 프로젝트라고 힘주어 말한다. 1세대 영화 제작자로서, 캐릭터 산업의 불모지에 2조 원 규모의 로봇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토종 캐릭터를 세계화하는 도전은 당연히 자기의 몫이라고. 이 시발점을 잘 넘으면 언젠가 우리나라에도 월트 디즈니사를 능가하는 캐릭터 회사가 세워질 것이라고.
하지만 좀 염려스러운 점이 있다. 태권브이가 한국인이 공유하는 추억에 호소할 수는 있지만, 과연 세계시장에서도 주목받을 수 있을까? 부푼 꿈은 아닐는지. “저도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파트너인 미국인 프로듀서 윌리엄 타이틀러가 눈을 빛내며 세계시장에서 승산이 있겠다더군요. 처음엔 그 말을 못 믿었죠. 그가 오히려 열을 올리며 절 설득했습니다. 무술하는 로봇은 세계에서 유일하고, 게다가 전 세계에 태권도 인구가 1억 명이 넘는다는 게 이유였어요.” 그 누구도 태권브이에 이런 특별한 점이 있는지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늘 먹던 김치와 된장찌개가 우리 입에는 평범하듯 태권도가 필살기인 로봇이 해외에서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캐릭터일 줄 몰랐던 것이다. 신철 씨는 지난 10년간 태권브이와 동고동락한 끝에 성공을 확신했다. 게다가 그가 누구인가. 만화가였던 아버지(신현성 화백)에게 물려받은 섬세한 감수성, 20여 년간 성공한 제작자로서 쌓은 관록으로 무장한 사내 아닌가.

부모와 자식이 공유할 이야기가 부활한다
“최근 한 시사 프로그램을 봤더니 요즘 아이들에게서 동요가 사라지고 있답니다. 저희 때는 엄마가 불러주는 동요를 형제들이 함께 불렀는데 말이죠. 부모와 아이 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가족 문화가 실종되는 현상의 한 단면입니다.” 신철 씨는 부모와 아이 세대가 무언가를 함께 즐기려면 20~30년 정도 길게 살아남는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가령 미국의 배트맨은 1939년에 만화로 등장해 60년 동안 계속 영화화되고 있고, 따라서 부모 세대와 아이들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배트맨 같은 콘텐츠가 없다.
다른 투자자에게 넘길까 고민했을 만큼 앞날이 불투명했으면서도 신철 대표가 태권브이 프로젝트를 놓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아홉 살 난 아들 동연이를 보면, 요즘 부모와 아이들이 대화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태권브이를 필두로 부모와 아이가 함께 교감하고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콘텐츠가 봇물 터지듯 나왔으면 한다.
신철 대표는 이미 부자유친 父子有親 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요즘 매일 새벽 5시 반쯤 일어나서 혼자 스케이트 타러 가요. 아이스하키 배우거든요. 아들이 아이스하키 팀에 들어갔는데, 아빠들도 모여서 팀을 만들었어요. 아들 팀, 아빠 팀이 함께 시합을 해요. 물론 애들이 아빠 팀을 엄청 얕보지만. 아빠 팀은 장애인 팀 같다나? 하하. 근데 제가 매일 새벽바람 맞으며 연습 나가니까 은근히 견제하는 눈치예요. 엄마한테 ‘나한테 이기려고 너무 노력하시는 거 아니야?’ 하더래요. 하하. 조만간 나랑 스케이트 시합하기로 했거든요. 5천 원 내기. 크큭.” 대개 영화인들의 말투는 얼큰하고 현란한 편인데, 영화인이라 믿기 힘들도록 삼삼하고 점잖게 말하는 이 남자.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처음으로 말이 빨라졌다. 그가 이토록 애틋하게 사랑하는 아들, 그리고 아들의 친구들인 요즘 아이들의 가슴에 어서 ‘V’를 심어주었으면 좋겠다. 정직하게 정면돌파하며 얻었던 ‘승리 Victory’의 브이, 영화 제작자 1세대로서 후진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리는 ‘비전 Vision의 브이’를.

(위) 아들 동연이가 아빠의 감기가 걱정된다며 또박또박 적은 편지.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아이스하키에 도전하는 것은 이 토끼 같은 아들과 공유할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태권브이도 그 일환이다.

무술하는 로봇은 세계에서 유일하다. 게다가 전 세계 태권도 인구가 1억 명이 넘지 않는가. 한국인의 로보트 태권브이는 추억에 호소하는 낡은 캐릭터가 아닌 세계무대를 휩쓸 스타가 될 예감이 든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