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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만든 밥상 정관 스님과 함께한 사찰의 봄
백양사 천진암 주지 정관 스님은 매년 음력 3월 3일, 삼짇날에 장을 담근다. 사찰에 쿰쿰한 메주 냄새가 퍼지고 장독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헤아려본다. 이곳에 봄이 찾아왔다는 것을.

전라남도 장성군에 위치한 백양산 내 암자인 천진암 전경. 이곳 암주인 정관 스님이 나물이 한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산을 활보한다.

오늘은 장 담그는 날입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세계적 명사가 된 정관 스님을 만나기란 여간 녹록지 않았다. 세 달 전부터 삼고초려하는 마음으로 문안 인사를 드린 끝에 어렵사리 촬영 날짜를 받았다. 4월 7일. “그래, 그날 한번 오시오.” 그 호탕한 일언을 가슴에 고이 안고 동이 트기도 전에 전남 장성군 백암산에 위치한 백양사로 향했다. 서울에서 네 시간쯤 달려 도착한 백양사에서 450m쯤 더 오르면 수수한 암자가 나온다. 정관 스님이 암주로 계시는 천진암이다. 봄의 기세가 나지막이 오르고 있음을 산등성이에 드문드문 피어난 꽃을 보고 알아차렸다. 암자에 다다라 두리번거리다 마주친 스님은 장독을 하나씩 살피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나!”

삼짇날(음력 3월 3일)이었다. 삼월삼질이라고도 부르는 삼짇날은 오늘날 그 명맥이 끊긴 오랜 명절 중 하나다. 고구려에서는 이날 수렵을 하고 신라에서는 불계를 행하고 고려 때는 답청을, 조선시대에는 퇴임한 선비가 모임을 했다고 한다. 비록 이러한 민속 양식은 모두 사라졌지만 백양사에서 삼짇날은 장 담그는 날이다. 예부터 된장 담그는 날은 대개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부터 삼짇날(음력 3월 3일) 사이로 정했는데, 이날을 잘 고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번 담근 된장은 기본적으로 1년 동안 먹어야 하는 부식입니다. 장을 잘못 담그면 1년 양식을 잃는 것과 같지요.” 마침 촬영일이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라니, 기막힌 행운이 아닌가. 덕분에 천진암은 템플 스테이를 지내러 방문한 외지인 스무여 명 외에도 일손을 도우러 온 객들로 무척 북적였다. (서울에서 잘나간다는 셰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조수 일을 하러 내려와 있었다!) “원래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함께 장을 담그나요?”라는 질문에 스님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장 담그는 일은 사람의 지혜와 노동이 모여야 이룰 수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김장 문화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도 이웃 간 나누는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을 높이 샀기 때문이죠. 장 문화 자체가 소중한 유산이에요.” 소금을 거르는 사람, 메주를 씻는 사람, 소금물을 붓는 사람, 대나무 베는 사람, 장독을 소독하는 사람, 새참 겸 점심을 준비하는 사람… 어쩐지 마을 잔칫날 분위기였다. 처마에 가지를 드리우는 저 매화나무도 사람의 온기를 마시고 꽃봉오리를 터뜨린 것 아닐까.

아삭한 식감의 연근무침은 사찰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 메뉴다.

그릇에 소담하게 담은 쑥절편.

크고 작은 장독이 줄지어 있는 천진암의 삼짇날 풍경.

차곡차곡 넣은 메주 위에 고추와 대추, 참숯을 넣고 메주가 떠오르지 않도록 대나무 가지를 걸쳐둔 항아리.

천진암 부엌에는 불을 지펴 밥을 해 먹는 옛날 아궁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솥에 쌀과 함께 굵게 채 썬 고구마를 넣고 지은 고구마밥.
오로지 자연이 만든다
된장과 간장은 한식의 근간이 되는 음식이다. 장맛을 보면 그 집안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장 담그는 일은 쉽게 말해 소금물에 메주를 띄우는 일이지만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소금은 최소한 한 해 이상 묵혀 미리 간수를 빼놓는다. 장 담글 메주 쑤기는 10월에서 12월 사이, 입동 무렵에 한다. 하루 전에는 장독을 소독해둔다. 장독에 메주는 차곡차곡 넣고 메주가 뜨지 않도록 대나무를 걸쳐놓는다. 마른 고추와 대추를 한 움큼 집어넣고, 참숯도 넣는다. 마지막에 붓는 소금물은 농도가 중요하다. “소금의 양은 기온에 따라 달라집니다. 더울수록 더 많이 넣어요.” 정관 스님은 소금물에 달걀을 넣어 떠오르는 정도를 보고 적정한 염도를 확인했다. 달걀이 1백 원짜리 동전만큼 물 위로 뜨면 딱 알맞다.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생생한 생활의 지혜다. 소금물은 메주 위로 찰랑찰랑할 정도로 붓는다. 그런 다음 뚜껑을 덮어 푹 재운 뒤, 해가 나면 열어주고 저녁에는 닫는 정성이 40여 일이 필요하다.

한두 달이 지나면 장을 가른다. 메주와 장물(메주가 우러난 소금물)을 따로 분리하는 것이다. 메주는 된장이 되고 메주가 우러난 소금물은 조선장이 된다. 된장이 잘 숙성되는가는 이제 하늘에 달렸다. 기온, 바람, 습도, 일조량 등 여러 자연 조건이 복합적으로 된장 맛을 완성한다. “된장은 오로지 자연의 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의 역할이란 이를 잘 돌보는 것뿐이지요.” 낮에는 장독 뚜껑을 열어 햇빛을 보게 하고 밤이 되면 뚜껑을 닫아 이슬 끼는 것을 막는다. 장물이 졸아들면 소금물을 부어주고 골마지가 끼면 수저로 걷어낸다. 자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된장은 자연의 기운과 사람의 정성으로 익는 것이다.

호미 한 자루 쥐고 천진암 뒷산에 올라 정성스레 머위를 캐는 정관 스님.

미나리를 감자 반죽에 골고루 버무려 노릇하게 부친 뒤 노란 민들레로 장식한 미나리전은 화사한 봄꽃 같다.

산에서 채취한 표고버섯과 봄나물은 스님에게 단순한 채소가 아니라 수행의 에너지를 쌓아주는 수양식이다.

선반에 작은 단지와 화병, 소박한 그릇이 조르르 놓여 있는 암자의 부엌.
깨달음으로 가는 밥상
사찰 음식의 대가로 명성 높은 정관 스님에게 음식을 배우지 않고 떠날 수는 없었다. 스님은 이날 뒷산에 올라 비자나무에 붙어 자란 표고버섯을 뚝 떼다가 바구니에 담았다. 나무에서 바로 채취한 향긋한 표고버섯은 밑동을 자르고 집간장과 들기름을 넣고 들들 볶다가 참기름을 넣고 버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박한 버섯조림이 상에 올랐다. 스님에게 일정한 레시피란 없다. 같은 식재료라 할지라도 조리법은 매일매일이 다르다. “수확한 지 일주일 된 오이와 보름 된 오이는 맛이 달라요. 당연히 양념도 다를 수밖에 없지요.” 오이가 야물어지게 왕성할 적에는 그 자체로 맛이 좋다. 보름이 지나 늙어가면 점차 신맛이 난다. 그럼 양념에 넣는 식초 양을 줄인다. “오이가 언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지 쉼 없이 관찰하고 맛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죠.” 들과 밭, 산에서 자라는 자연물을 열과 성을 다해 살피고, 재배하고 손질해 음식을 만들고 섭취하는 모든 과정이 곧 수행이다. “정신과 육체 에너지가 원활하게 돌아가 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음식입니다.” 그릇을 깨끗이 다 비워내고 이내 속 시끄럽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제야 스님의 뜻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먹는 것을 닮게 됩니다.”


독자 여행
<행복> 독자들과 함께 백양사에 방문하고 사찰 음식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일정과 세부 내용이 확정되면 추후 지면을 통해 안내하겠습니다.

글 이승민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