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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빚는 도예가 7인, 음식을 담다 식食과 예藝사이
음식을 담는 그릇 ‘식기’는 예술과 일상 사이에서 매력을 발산한다. 일찍이 그 매력에 빠진 푸드 스타일리스트이자 한식 요리사인 노영희는 2016년 겨울 그릇 가게를 열었다. 작업 현장에서 수많은 그릇에 음식을 담아온 그는 도예가의 음식에 대한 이해도가 좀 더 높아진다면 작업 디테일이 분명 달라질 것이라 믿었고 그릇 가게를 오픈한 이후 매달 작가를 초청해 쿠킹 클래스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 칼럼은 그 결과 보고서다. 그 어느 계절보다 이야깃거리와 먹을거리가 풍성해지는 9월, 7인의 도예가가 각자의 대표 작품에 ‘나만의 추석 음식’을 담았다.

이은범 작가와 달맞이꽃 면기·국화꽃 볼


오묘하면서 풍부한 빛깔의 청자를 재해석해 아름다운 무늬와 형태의 도자기를 만드는 작가 이은범. 그가 만든 식기는 납작한 접시부터 오목한 볼, 잔과 주병까지, 일상생활에서 쓰임새가 많은 형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연물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의 다채로운 변주가 이루어진다. 특히 꽃잎을 형상화한 접시와 면기는 섬세한 표현과 물감이 번진 듯한 은은하고 신비로운 색감으로 감각적이면서 우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같은 음식이어도 어떤 식기에 담느냐에 따라 맛과 멋이 달라진다는 이은범 작가의 생각은 그가 만든 그릇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듯하다. 길고 가느다란 꽃잎이 겹겹이 포개진 그릇엔 무엇을 담아도 그윽한 향기와 품위가 느껴지니 말이다.

새알심을 넣은 밤죽


이은범 작가는 옛 추억의 시간을 살짝 빚어 넣어 만든 특별한 한 그릇을 달맞이꽃 면기에 소복이 담아냈다. 충북 음성의 시골 마을에서 자라던 시절, 가을이면 꼬맹이 조카들을 몰고 밤 따러 다니던 기억을 끄집어낸 것. 그 시간을 떠올리며 밤 가루와 쌀가루를 함께 섞어 밤죽을 끓였다. 여기에 찹쌀가루를 익반죽해 만든 새알심을 동동 띄우면 밤의 고소하면서 달콤한 풍미와 새알심의 쫄깃한 식감이 어우러져 추석날 더없이 만족스러운 별미가 된다. 무엇보다 그의 그릇에 담긴 밤죽은 담음새부터 남다르게 느껴진다. 은은한 빛깔과 어우러진 뽀얀 밤죽과 몽글몽글한 새알심의 조화가 근사한 미감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창화 작가와 원형 도마접시


백자와 붉은 빛깔의 진사, 좀 더 묵직함이 느껴지는 흑유 작업까지, 이창화 작가의 작품에는 그만이 지닌 남다른 조형미가 있다. 특히 그릇 만드는 일은 그에게 아주 각별한 작업이다. “식기는 작가의 의도만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용하는 사람의 쓰임새를 고려하는 객관적 시각이 더해져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만든 그릇은 쓰면 쓸수록 다채로운 매력이 배가된다. 이 큼직한 원형 도마접시 또한 그렇다. 언뜻 평범한 백자 접시처럼 보이지만, 음식을 담으면 작가의 남다른 섬세함이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음식 놓는 바닥 면을 가운데 부분으로 갈수록 살짝 오목해지는 곡선으로 만든 것. 마치 부드럽게 원형을 그리며 흐르다가 모이는 물결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져 어떤 음식을 담아도 모양새가 살아난다.

구절판


이창화 작가는 추석을 앞두고 신혼 시절을 떠올렸다. 밤낮없이 도자기 작업으로 바쁜 그를 위해, 젊을 적 아내는 설익은 솜씨로 고기와 각종 채소를 채 썰고 밀전병을 부쳐 구절판을 만들어주곤 했다. 그의 든든한 조력자인 아내만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이었다. 명절의 귀한 접대 음식으로도 손색없는 구절판을 그의 큼직한 백자 원형 도마접시 위에 두 줄로 가지런히 담으니 색다른 멋이 느껴진다. 흰 밀가루의 뽀얀 우윳빛, 말차를 이용한 연둣빛, 자색고구마 가루로 물들인 보랏빛의 삼색 밀전병을 예쁘게 부쳐내 더욱 특별해 보인다. 구절판 쌈 요리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소스도 아내가 해주던 비법으로 만들었다. 간장에 쇠고기 육수를 넣어 묽게 농도를 맞춘 뒤, 고추냉이를 살짝 섞어 짭짤하면서도 매콤한맛을 더한다.


문지영 작가와 백자 합


따뜻한 손맛과 감성이 느껴지는 백자 식기를 선보이는 문지영 작가. 특히 둥근 표면을 깎아 각진 면의 질감을 더하고, 뚜껑에는 작은 집 모양의 손잡이를 달아 위트마저 느낄 수 있는 백자 합은 생활 속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자기를 만드는 그의 대표 작품이다. 문지영 작가는 좋은 식기란 기능성과 예술성이 50 : 50으로 균형미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영희 선생님과 음식을 만들어보면서 그릇의 쓰임과 담음새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고민하게 되었어요. 접시의 바닥 면이 평평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힌 기능이 아니라, 약간 오목하게 만들어 국물이 자작하게 고이면 음식이 더 윤기 있고 맛있어 보일 수 있다는 점도 음식을 담아보지 않으면 몰랐을 거예요.” 좀 더 자유롭고 다채로운 발상이 담긴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갈비찜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스한 음식이, 훈훈한 정情이 담겨 있을 것 같은 백자 합. 그 안을 채운 그의 추석 음식은 오랜만에 한데 모이는 친척들을 사로잡을 갈비찜이다. 가을 재료의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밤과 무. 이 두 가지를 듬뿍 넣어 더욱 구수하면서 달큰한 맛이 깊이 우러나는 갈비찜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좋아하는 최고의 메뉴. 합에 소담하게 담은 후 대추와 은행 등을 고명으로 올리면 추석날 함께 먹는 잔치 음식으로 손색이 없다.


지훈 스타크와 아스파라거스 접시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지훈 스타크는 건축, 회화, 도자기 등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작가다. 이 세 영역은 각각 다르지 않다. 하나의 트라이앵글로 연결된 듯, 회화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표현 기법을 흙으로 빚은 그릇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하나의 캔버스가 된 접시에는 고유한 색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흙빛 위에 분청에 쓰는 화장토를 바르고, 건물과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새 드로잉을 그려 넣었다. “건축을 해서인지 기능을 먼저 생각해보곤 해요. 이 접시도 그래요. 형태와 디자인은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이안에 무얼 담을지 미리 염두에 둔 것이죠. 기다란 아스파라거스를 담기에 제격이에요!”

호박전과 아스파라거스전


어릴 적 강원도에서 사과 농장을 하시던 할머니가 부쳐주신 호박전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그는 이 접시에 담을 추석 음식으로 전을 선택했다. 호박전과 함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식자재 중 하나인 아스파라거스를 전으로 부쳐냈다.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세로로 반 갈라 밀가루와 달걀옷을 입힌 후 몇 개씩 나란히 놓고 꼬치로 고정한 뒤 부치면 아삭한 식감의 아스파라거스전 완성! 여기에 막걸리 한 잔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개인적 추억, 취향껏 차린 음식, 작가의 감성…. 그의 작은 그릇 안에 이 모든 게 오롯이 담겨 있다.


고희숙 작가와 백자 타원형 볼


고희숙 작가의 백자에서는 참 고요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유광과 무광이 결합된 곱고 은은한 자기 표면, 물레로 마무리해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선과 끝을 다듬지 않고 뜯은 거친 선의 조화가 빚어내는 백자는 그림같이 단아하고 청명하면서 세련된 미감을 전한다. 그의 ‘untitled white 타원형 볼’ 또한 이러한 작가의 감각적 디자인 묘미가 잘 살아 있다. 거친 질감으로 두른 선을 경계로 음식을 담는 안쪽에만 유약을 발라 입체적 조형미를 발산한다. 백자 그릇에는 어떤 음식을 담든 마치 화선지에 먹이 스미듯 은은하게 어우러진다.

장어튀김조림


이 기다란 백자 그릇은 가족과 친지가 한자리에 모이는 추석날의 식탁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줄 것이다. 여러 명이 먹는 특별한 메뉴를 담기에 제격이다. 그가 추석을 위해 선택한 메뉴는 영양소가 한층 풍부하게 농축된 가을 장어로 만든 요리. 장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마늘과 함께 노릇하게 튀긴 다음, 달착지근하게 만든 조림장에 버무린 것이다. 표고버섯·파프리카·양파 등의 채소도 튀겨 장어와 번갈아 담아내면 보기에도 좋고, 맛도 일품인 근사한 장어 요리가 완성된다.


이강효 작가와 분청 굽접시


여인들이 더 뽀얗게 보이려고 분을 바르듯, 도자기도 분칠을 한다. 검은 흙 위에 하얀 흙으로 화장시킨 후 유약을 발라 구워 은은한 청빛이 감도는 도자기가 바로 분청사기다. 이강효 작가의 도자기가 바로 고려시대 말 크게 성행한 분청사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 전통 옹기 만드는 기법으로 형태를 만든 후 붓으로 분칠 터치를 넣어 추상 회화 같은 미감을 자아낸다. 그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 그가 추석 음식을 담기 위해 선택한 이 굽 높은 접시 또한 요란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무심한 듯 섬세하게 넣은 붓 터치에서 감성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큼직한 형태와 높은 굽 때문에 일반 가정에선 오브제로 더 빛을 발할 것 같은 작품이지만, 특별한 날 식탁 위에 올리면 아주 멋스러운 식기가 된다.

잡채


“굽 높은 접시는 삼국시대에 널리 쓰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제례용으로 많이 사용했어요. 추석에는 주로 차례 음식을 먹으니 이 그릇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그릇 푸짐하게 담아 함께 모여 먹는 우리 식문화와도 잘 맞고요.” 그가 이 근사한 분청 그릇에 담은 추석 음식은 잡채. 지금은 그저 대중적이고 흔한 사이드 메뉴로 여기지만, 예전에는 명절이나 가족의 생일 같은 날 큰마음 먹고 만들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가고 남다른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명절과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사실 잡채는 서늘한 가을부터 먹기에 좋은 음식이기도 하다. 잡채라는 음식명도 본래 ‘여러 가지 채소’라는 의미로, 다양한 채소가 들어가 금세 쉴 수 있기 때문. 당근과 버섯, 호박, 양파 등 각종 채소와 쇠고기를 채 썰어 넣고, 달걀지단과 채 썬 배를 고명으로 올리면 고운 색감과 산뜻한 뒷맛까지 잡을 수 있다.


김종훈 작가와 찻사발


다관 만드는 도예가 김종훈. 그의 찻그릇을 보면 깊은 흙냄새가 나는 것 같다. 자연 빛깔과 질감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서이다. 그 그릇에 차 한 잔 우려 마시면 마음속까지 정화될 듯한 느낌마저 든다. 실제 차의 매력에 빠져 다양한 차 경험과 넓은 식견을 갖추게 된 김종훈 작가는 구수한 한국의 차, 초록 잎의 신선함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일본차, 자연 발효시켜 시간이 지날수록 맛과 향의 깊이가 달라지는 중국차까지, 차의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찻그릇이 다르다고 했다. “오늘 음식을 담을 이 찻그릇도 사실 말차가 어울려요. 찻그릇의 높이나 너비에 따라서도 차 맛이 달라질 수 있고요. 또 찻그릇은 쓰면 쓸수록 차의 풍미를 더하기도 해요. 그게 찻그릇의 묘미이죠.”

찻물에 말아 먹는 햅쌀밥


김종훈 작가는 그의 찻그릇에 담아낼 추석 음식으로 자신이 평소 즐겨 먹는 일본식 오차즈케에서 영감을 받은 음식을 제안했다. 전형적인 우리네 절식은 아니지만, 기름진 추석 음식을 먹은 후 깔끔하고 개운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이만한 음식이 없다고 생각한다. 햅쌀로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을 보기 좋게 담고, 취향에 따라 따뜻하게 데우거나 혹은 차갑게 식힌 차를 부은 후 시원한 오이지를 곁들여 한술 뜨면 색다른 별미가 된다. “이건 제가 선물 받은 중국 발효차인 ‘동방미인’이라는 차예요. 명절에 손님이 오면 이렇게 귀한 차와 함께 내는 것도 좋지만, 떫은맛의 녹차나 구수한 보리차, 그윽한 암차 등 어떤 차도 잘 어울려요. ‘잘 먹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건강하고 좋은 식사 마무리가 될 거예요.”

글 이정주 | 사진 박찬우 | 문의 노영희의 그릇(02-518-5177)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