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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이즈 더 베스트 단순 미학味學
식도락을 빼놓고 인생의 즐거움을 논할 수 있을까.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매번 화려하고 복잡하게 조리할 필요는 없다. 최고의 제철 식재료와 그 맛을 살려주는 단순한 조리법, 단 두 가지만 있으면 충분하다. 서승호 셰프가 제안하는 궁극의 맛을 즐기는 법.

응축
“서로가 지닌 맛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모으면 예상치 못한 맛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천에서 공수해 온 토마토는 껍질을 벗겨 윗부분을 잘라내고 오븐에 넣어 저온에서 건조시키듯 서서히 구웠습니다. 토마토 속 수분이 살짝 빠져나가면서 산도가 한층 높아지지요. 남원에서 생산한 패션프루트는 산도와 당도가 높을 뿐 아니라 새콤한 향이 굉장히 강한 과일입니다. 발사믹 식초 대신 패션프루트를 활용해 드레싱을 만들어보세요. 패션프루트의 과육을 파내어 레몬과 섞으면 산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지요. 이를 토마토 위에 드레싱처럼 뿌려 먹으면 서로의 신맛이 하나로 응축됩니다. 새큼한 즙이 입안에 가득차면서 오독오독 씹히는 패션프루트의 씨앗과 아삭한 양파가 뇌에 신선한 자극을 준답니다.”


토마토 샐러드
1 방울토마토(4개)는 십자로 칼집을 내 끓는 물에 데쳐 얼음물에 식힌 뒤 껍질을 벗긴다.
2 120~140℃로 예열한 오븐에서 1시간 동안 ①의 표면을 건조시킨다.
3 ② 위에 올리브유(1큰술), 다진 양파(1작은술), 소금(약간)을 올려 간한다.
4 패션프루트(1개)는 반으로 잘라 과육을 파내어 레몬즙(약간)을 섞어 ③ 위에 뿌린다. .


균형


“가을 무렵이면 가장 먼저 먹을 수 있는 야생 버섯이 바로 싸리버섯입니다. 싸리버섯을 조리할 때는 끓는 물에 데치거나 소금물 또는 쌀뜨물에 담가 야생적인 맛 (예를 들면 독성)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해요. 싸리버섯은 향초라고도 불리는 이탤리언 파슬리와 궁합이 좋습니다. 버터를 두른 팬에 제천산 싸리버섯과 이탤리언 파슬리를 넣어 같이 볶아보세요. 이탤리언 파슬리가 싸리버섯 특유의 진한 맛을 부드럽게 잡아주어 산뜻함이 더해지면서 향을 극대화시키지요. 여기에 팬프라이로 익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육즙이 가득한 닭 다릿살을 곁들이면 완벽하게 맛의 균형을 이룹니다. 본능적으로 와인 한잔이 떠오르는 맛이랄까요.”


조화


세종시에서 생산한 우리밀로 만든 담백한 스콘과 조화를 이루는 음식은 과일 절임입니다. 당도가 오를 대로 오른 복숭아를 절임으로 만들어 보관하는 것도 제철의 맛을 풍성하게 즐기는 방법이지요. 복숭아와 아로니아를 8:2 비율로 맞춰 절임을 만들면 단맛과 신맛이 조화롭게 유지되지요. 특히 복숭아는 갈변이나 부패에 약한데 아로니아 속 타닌이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줍니다. 음식에서 향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허브가 한다면, 디저트에서는 바닐라빈이 그 역할을 해요. 복숭아&아로니아 절임에 바닐라빈을 넣는 순간 이국적인 향이 살아나면서 맛이 한층 고급스러워져요.” 


절제


“맛을 내는 데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단맛과 궁합이 좋은 돼지고기를 조리할 때는 소스나 부재료로 인해 단맛이 강해지지 않도록 절제하는 것이 핵심이죠. 항정살은 앞뒤로 노릇하게 구워 채 썬 양파와 간장을 넣어 한 번 더 구우면 달큼한 향이 나지요. 흔히 서양에서는 돼지고기 요리에 자두를 많이 사용하곤 하는데, 이번엔 보은산 대추를 구워 곁들였어요. 대추에 열을 가하면 씹는 식감이 묘하게 좋아지면서 음식의 당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역할을 하거든요. 뜨겁게 구운 항정살 사이사이에 얇게 썰어 올리브유와 소금으로 간한 세종 밤을 넣으세요. 뜨거운 열기로 밤이 부드러워지면서 항정살과 함께 차지게 씹히는 맛이 먹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증폭


“고급 레스토랑에서 경험할 법한 세련된 맛을 구현해보고 싶다면 감미료가 아닌 좋은 식재료로 음식의 산도와 농도를 조절해보세요. 김제에서 생산한 당근을 잘게 썰어 물과 약간의 소금을 넣고 푹 삶은 뒤 제주산 감귤을 짜 넣어 자작하게 조렸습니다. 당근 속 부족한 산도와 농도를 감귤즙이 채워주면서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 당근 퓌레가 완성되지요. 감귤즙의 시트러스한 향이 당근 속에 은은하게 배어들고요. 이 퓌레와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것이 관자입니다. 식감이 부드러운 관자와 퓌레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감미로운 맛이 증폭되지요.”


Interview_ 시옷&서승호 레스토랑 셰프 서승호
맛의 기쁨에 매료되다


그에게 제철의 맛이란 삶의 기쁨이요, 그가 접시에 담고자 하는 맛의 핵심이다.


“음식의 90%는 과거의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이고, 나머지 10%는 창작입니다. 창의적으로 음식을 표현하려면 뛰어난 연장은 필수인데, 셰프에게 연장이란 좋은 식재료를 알아보는 눈이지요.” 1999년 압구정에 문을 연 프렌치 퀴진 ‘라미띠에’, 2007년 디저트 카페 ‘데쎄르’, 2008년 국내 최초 원 테이블 레스토랑 ‘서승호’, 2012년 고향 세종시로 내려가 오픈한 ‘시옷&서승호 레스토랑’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미식가들이 그의 요리를 추종하는 것은 서승호 셰프만의 색다른 맛을 창작해왔기 때문 아닐까. 서승호 셰프는 1996년 파리에서 요리를 공부하며 ‘좋은 식재료가 곧 최고의 미식’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파리 시장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감자와 토마토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필요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단일 종류만 써야 하는 한국 시장 상황과는 완전히 달랐죠.”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레스토랑을 오픈하면서 현지 생산자를 직접 만나러 다녔다. 좋은 식재료를 구입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지만, 요리사도 밭에 나가 농사하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며 그 수고스러움을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부 역시 자신이 생산한 식재료가 식당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파악해야 자부심을 느끼고, 더 좋은 식재료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 서승호 셰프는 그때부터 쌓아온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재료 월력을 만들었다. “지역과 시기, 그 당시 수확한 작물, 맛에 대한 정보를 매년 기록했어요. 계절마다 어떤 식재료로 어떠한 음식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확실하게 세워지더라고요. 요즘은 먹거리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잖아요. 아주 사소한 관심만 기울이면 누구나 재료 월력을 만들 수 있어요. 믿을 수 있는 로컬 푸드 매장에서 장을 보면서 찬찬히 살펴보세요. 특정 식재료를 언제 어디서 보고 먹었는지만 기억해도 제철 식탁을 완성할 수 있어요.”

서승호 셰프가 중요시 여기는 또 하나는 ‘단순한 조리법’.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주는 조리법을 적용하면 음식 맛도 날개 단 듯 상승작용이 일어난다고. “오늘 선보인 복숭아&아로니아 절임을 예로 들어볼게요. 대부분 조리서에서 절임을 만들 때 주재료 대비 설탕을 50~60%나 넣으라고 합니다. 오래도록 먹고 저장성을 높이기 위함이죠. 그런데 제철 복숭아의 당도를 고려했을 때 설탕을 15~20%만 넣어도 충분해요. 1년 내내 복숭아절임만 먹을 이유는 없잖아요. 복숭아 철이 끝나면 사과와 배가 나오고, 그 후엔 또 다른 식재료를 맛볼 수 있지요. 제철에 맞는 맛을 즐겨야 인생이 즐겁죠!”

서승호 셰프는 몇 년 전부터 레스토랑 주변에 아스파라거스와 허브 등 종류에 관계 없이 갖가지 작물을 심어 직접 농사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제자들과 함께 재료학을 공부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외식의 흐름이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지만 현재 상태를 잘 유지하는 레스토랑으로, 손님이 오래도록 찾는 레스토랑으로 남고 싶은 마음만큼은 언제나 변함없다.

그릇 협조 권재우 작가(kwonjaewoo.kr), 비츠(e-roomy.com) 

글 김혜민 기자 사진 김규한 기자 요리 서승호(시옷&서승호 레스토랑)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