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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고, 게스트하우스이며, 갤러리인 삼성동 주택 건축주와 건축가의 화학작용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부부는 이따금씩 한국에서 머무를 집을 마련하기 위해 10년간 인연을 이어온 건축가 리빙엑시스 최시영 대표를 찾았다.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을 가장 잘 이해하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가족 같은 케미스트리를 한껏 발산한 집이다.

홀에서 게스트 침실로 연결되는 중간 참에는 이승희 작가의 달항아리 작품을 걸고, 하지훈 작가의 테이블과 방석을 두어 자그마한 다실을 마련했다.

낮은 침상을 둔 침실 아래층에는 화장실이 자리한다. 여백의 미를 살린 단아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뒷모습까지 보는 건축가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신만 못 보는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 뒷덜미의 잔잔한 물결털 같은, 귀 뒤에 숨겨진 까만 점 같은, 많은 것을 용서하고 돌아서는 뒷모습 같은.” 시인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속 시구다. 그렇다면 내가 보지 못하는 나의 아름다운 구석은 누가 알아봐줄 것인가? 비단 연인이나 가족에게만 요구되는 역할은 아니다. 스스로가 미처 알아차릴 수 없는 내 삶의 뒷모습까지 발견하고, 이를 내가 머무는 공간으로 구현해주는 사람. 다름 아닌 건축가다. 그만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대상을 살펴야 하니 건축가와 건축주의 관계는 꽤 중요한 변수라 할 수 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을 알고 지낸 리빙엑시스 최시영 대표와 허호영·박보은 씨 부부가 끝없는 대화로 만들어간 집 역시 남다를 수밖에. 최시영 대표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부부의 집에 가족과 함께 머무르기도 했고, 캐멀에 지을 집도 현재 설계 중일 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분의 삶을 직접 보고 온 것이 설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건축가는 대화 중에 나오는 사소한 말에도 자극을 받아요. 이 집의 모든 요소에 그러한 사연이 다 녹아 있지요.”

박공 형태 원목 지붕으로 오두막처럼 꾸민 부부의 침실. 정원과 바로 연결되어 눈을 뜨자마자 자연을 마주한다.

2층의 라운지. 계단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확보한 여유 공간에 화분을 두었다.

집의 하이라이트인 거실은 단을 낮추고 성큰으로 아늑하게 조성했다. 돌담과 정원 뷰가 핵심.

성큰과 거실 맞은편에는 서재 공간을 마련했다.
1년의 반만 생활하는 집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지만, 한국에서도 1년의 반 정도를 지낸다. 박보은 씨는 한국에 올 때마다 호텔에서 머무르는 것이 점차 불편해질 무렵, 부부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자 야심 차게 주택을 구매했다. “보통 건축가에게 땅을 보여주고 승낙을 받은 다음 땅을 사고 설계를 맡기는데, 저는 거꾸로 땅부터 사고 대표님께 설계해달라고 했지요.” 지은 지 35년 된 1백 평 규모의 주택이었다. “땅을 먼저 보여줬으면 아마 안 했을 거야.(웃음) 이전에 집주인이 이리저리 공간을 찢어서 임대를 주었고, 신축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더군다나 부부가 요구하는 사항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반 가정집은 아니지만 부부가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어야 하고, 외국 손님이 묵을 수 있는 게스트룸이 있어야 하며, 미팅을 할 수 있는 비즈니스룸 이어야 하는 동시에 아트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이기도 해야 했던 것. 이 모든 조건을 1백 평 공간으로 충족시켜야 한다니…. 40여 년간 타워팰리스를 비롯해 시그니엘, 조선호텔 스위트 등 굵직한 고급 주거 프로젝트를 맡은 그에게도 여간 머리 아픈 작업이 아니었다.

주택은 크게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나뉜다. 공적 공간으로 계획한 1층은 리셉션 역할을 하는 홀과 다이닝 공간, 미팅 공간인 거실부터 게스트 침실, 그리고 정원까지 한 평면을 다층적으로 풀어냈다. “오른쪽 공간은 막힌 벽을 뚫어봤더니, 지금의 침실까지 격차가 심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계단을 설치해 두 공간을 연결했지요.” 다실과 계단으로 연결된 공간은 층고가 낮은 점을 살려 침상을 둔 게스트 침실로 꾸몄다. 아늑한 동양적 분위기의 공간이 완성된 것.

최시영 대표(왼쪽)와 부부는 캘리포니아주 캐멀의 새로운 집을 또 구상 중이다.

하나의 정원으로 조성한 입구와 맞닿은 다이닝 공간. 중앙의 기둥은 철거할 수 없어 목재로 감싸 내추럴한 느낌을 연출했다.

지하에는 게임과 영화를 즐길 수 있는 홈 시어터 공간을 마련했다.
자연과 맞닿은 도심 속 주택
다이닝룸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최시영 대표의 야심작, 거실이 나온다. 우선 한쪽 벽면에 나란히 걸린 이강소 작가의 2백 호 크기 작품 두 점에 한 번 놀라고, 대지를 파내 움푹 들어간 성큰sunken 공간에 두 번 놀란다. 그리고 성큰에 들어가 소파에 앉았을 때 펼쳐지는 정원 풍경에 세 번째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원래 안방이었는데, 제가 거실로 만들겠다고 했어요. 여기에 저의 시그너처라 할 수 있는 성큰 공간을 적용했지요. 다행히 건축법을 살펴보니 건폐율상 딱 네 평 남아 있더라고요. 전화위복을 넘어 정말 축복이었죠.” 거실 외부는 유리로 마감해 개방감을 더하는 동시에 정면에는 돌담을 쌓아 안정감을 확보했다. “거실에서 정원을 바라보는 시야가 훤히 트여야 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집의 재료와 잘 어울리는 나무를 골라야 했어요. 고민 끝에 자작나무 한 수종으로만 심겠다고 말했지요.” 이 계획을 들은 허호영 씨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가 어려서 뉴욕으로 갔을 때 처음 이사한 빌딩 이름이 버치우드 타워였어요. 그때부터 화가인 어머니께서 모국을 생각하면서 그린 것이 자작나무였고요. 우리 가족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지요.” 건축가와 건축주 부부의 짜릿한 케미스트리가 다시 한번 느껴지는 순간! 기막힌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다.

사적 공간이 있는 2층은 부부의 침실과 게스트룸, 라운지로 구성했다. 1층의 성큰 공간을 만들면서 2층에는 자연스럽게 옥상정원이 생겼다. 침실 밖을 나가지 않더라도, 침대에 누워 바로 자연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저는 아침에 눈떴을 때 살아 있는 생명을 마주할 수 있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생각해요. 이 집으로 두 분을 위로해주고 싶었지요.” 최시영 대표가 위로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자연이었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집이지만, 모든 공간에서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저녁이 되면 부드러운 조명이 주택 외관을 감싼다. 프라이버시 보호와 안정감을 위해 헛벽을 설치하면서도,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일부는 시야를 틔웠다.

2층 침실에서 한 발짝만 걸어 나와도 마치 교외에 나온 듯 푸른 정원이 반긴다. 최시영 대표가 부부에게 가장 선물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집 속의 싱그러운 자연이었다.
한국적 미감으로 완성하다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의 풍경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비록 부부의 주 거주지는 미국이지만, 한국의 정서를 집 안에 녹여내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컬렉터이자 한국의 미에 푹 빠진 박보은 씨가 갤러리로서 역할을 원한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거실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이강소 작가의 작품은 전적으로 박보은 씨의 선택이었다. 붓질의 힘찬 획이 여백을 가르는, 고요하나 강렬한 그림이었다. “저 벽면에 2백 호그림을 두 점 건다는데, 나는 말도 안 된다고 했어요. 속으로 ‘미쳤어, 미쳤어’ 하고 외쳤지요.” 최시영 대표의 반대에도 박보은 씨는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과감히 벽에 걸었다. 그러나 웬걸! 벽면을 가득 채우는 작품의 압도적 크기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붓질은 공간을 너그럽게 품어주었다. 퍼즐이 딱 들어맞는 느낌이랄까. “작품을 건 후에야 어울리는구나를 알았지요.” 최시영 대표 역시 박보은 씨의 용감한 한 수를 인정했다. 이렇게 치밀하게 계획한 공간에 작품과 더불어 가구와 소품이 하나둘 채워지면서 비로소 집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건축가와 건축주의 놀라운 케미스트리는 끈끈한 유대감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으리라.

글 이승민 기자 | 사진 박찬우 | 설계 및 디자인 리빙엑시스(02-794-7924)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