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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ERD 이민주 대표 오직 아름다운 것만이 흔적을 남긴다
남다른 심미안으로 갤러리ERD와 하우스 오브 핀율을 운영하는 이민주 대표는 그저 아름다운 것, 그것만으로 제 쓸모를 다하는 것을 찾는다. 그가 아끼는 것으로 채우고 덜어낸 집에는 공허한 관조가 아닌, 오랜 경험의 미덕이 깔려 있다.

거실과 주방을 연결하는 슬라이딩 도어가 독특한 프레임을 만든다. 거실의 가장 큰 벽면을 할애한 길버트&조지의 작품은 하나처럼 보이지만 사실 열두 개의 피스로 구성되어 이동이나 설치하기도 쉽다. 결혼하면서 장만한 플렉스폼 소파와 데이베드, 소파 테이블은 가족 모두가 오랫동안 쓰면서 자연스레 빛이 바랬는데, 오히려 공간에 길들여져 더욱 포근한 느낌을 자아낸다.

집에 대해 그리는 상像은 저마다 다르다. 고로 집과 사람은 필연적으로 닮을 수밖에 없다. “집은 집주인을 따라간다”는 이 문장은 사실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같은 말도 발화자에 따라 다르게 들리듯이, 이 진부한 명제가 생명력을 지니도록 만드는 집도 분명 있다. 그런 공간이야말로 ‘살아 있다’고 느낀다. 갤러리ERD 이민주 대표가 남편, 두 아이와 함께 사는 한남동 집에서는 그에게서 느껴지던 유연하고 여유로운 기운이 감돈다. 결코 과시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작품, 오랜 시간 살과 맞닿으며 그을려진 가구, 지난밤 한잔 마시고 남은 위스키 한 병, 벽에 미처 걸어놓지 못한 채 바닥에 기대어놓은 작품. 꾸밈없으나 꾸민 것보다 더 멋스럽다. 이민주 대표가 경험한 기억, 그리고 분주한 일상의 흔적이 묻어나는 집이다.

핀 율의 뉘하운 다이닝 테이블은 양쪽 면을 펼치면 최대 10인까지도 앉을 수 있다. 이전에 사무용 책상으로 쓰던 것을 이사하면서 다이닝 테이블로 용도를 바꿨다.

플렉스폼 데이베드 앞에는 사이드 테이블용으로 단정한 나무 소반을 두었다.

거실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통로 벽면에는 책장을 놓아 공간 활용도를 높였다. 벽에 기대어놓은 작품은 피트 헤인 에이크의 거울을 닫아놓은 것. 앨릭스 카츠의 작품에서 PK9으로 연결되는 옅은 미색 톤이 기막히게 조화롭다.
집에는 그림이 먼저다
한강 전경이 속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거실. 한강 뷰를 목적으로 설계한 아파트의 의도와는 달리 이 집의 인상을 결정하는 것은 거실 벽면을 넓게 차지하는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길버트&조지Gilbert&George의 작품이다. “제가 갤러리에서 일했을 때부터 가장 소장하고 싶던 작가의 작품이에요. 보통 강렬한 이미지나 대형 사이즈의 작품을 집에 걸기 꺼리는데, 저는 오히려 이렇게 큰 작품을 걸어보시라고 추천해요. 공간에 확장성이 더해져 더 넓고 세련되어 보이거든요. ”

이민주 대표가 집에 작품과 가구를 배치할 때 가장 우선하는 것은 그림이다. 그다음이 가구와 조명, 마지막이 TV. 아파트살이는 TV 자리부터 잡고 보는 줄 알았건만 순서가 정반대였다. “저는 가장 먼저 그림부터 큰 벽에 자리를 잡고 소파를 배치해요. 창문 정면에 소파를 놓은 건 전망 때문이라기보다 거실과 분리되는 복도를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물론 TV를 시청하기 원하는 가족들과 타협도 필요했다. 해답은 거실 코너에 사선으로 두는 것. “제가 좋아하는 그린 컬러의 USM 장 위에 올려두었어요. 어쨌거나 TV에 벽을 내줄 수는 없었죠.(웃음)” TV는 전용선이 있는 곳에 꼭 설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니 과연 전형적인 아파트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적재적소에 믹스 매치한 작품과 가구는 따로 떼어 봐도, 함께 놓고 봐도 감탄을 자아낸다. 길버트&조지 작품을 기준으로 오른쪽엔 네덜란드 디자이너 피트 헤인 에이크 Piet Hein Eek의 모던한 알루미늄 캐비닛과 현대미술 작가 에르빈 부름Erwin Wurm의 오이 조각품이 나란히 있고, 왼쪽에는 미국 화가 앨릭스 카츠Alex Katz의 작품과 그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로 꼽는 포울 키에르홀름Poul Kjaerholm의 PK9 의자가 그 아래에 놓여 있다. 그중에서도 PK9은 각별하다. “정말 오랫동안 사고 싶던 의자를 갖게 되어 제일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좌판이 내추럴 레더라서 때가 많이 탔지만 말이에요.”

주방의 선반장은 찰스&레이 임스의 디자인이다. 자주 꺼내 보는 책과 가족사진을 진열하고, 보이지 않는 수납장에는 즐겨 마시는 위스키를 보관한다.

선반장 위에 기대어놓은 작은 사이즈의 작품과 인센스 홀더가 귀엽다.

거실에서 바라본 주방 전경. 알바 알토의 A810 플로어 조명등은 조명 두 개를 개별적으로 켜고 꺼서 조도를 조절할 수 있다.

제니 홀저의 드로잉과 앨릭스 카츠의 조각품, 원혜경 작가의 유리 오브제가 한 앵글 안에 담겼다.

가구는 오래 쓰는 디자인이 먼저다
보통 가구를 살 때 오염을 염려해 피하는 소재가 내추럴 레더다. 하지만 그의 집에는 내추럴 레더로 만든 의자가 유난히 많다.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는 자신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죽에는 사용한 흔적이 잘 묻어나기에 좋아한다. 이게 가죽의 가장 큰 매력이자 단점이다. 거실에 배치한 스웨덴 브랜드 셸레모Källemo의 암체어, 그리고 주방에 있는 핀 율의 48 체어 역시 좌판을 내추럴 레더로 택했다. “처음에는 48 체어를 두고서도 쉽게 오염될까 봐 6개월간 식탁에서 밥을 안 먹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가죽이 태닝되었겠다 싶어 사용했는데 바로 난리가 나더군요.(웃음) 이제는 아이가 뭐를 묻히더라도 이게 세월의 흔적이고, 가족의 추억이겠거니 하고 위로를 삼아요.”

조바심 내며 쓸 바에야 조금 더러워지더라도 마음껏 쓰겠노라는 여유로운 배포가 느껴진다. 그는 새 보금자리로 이사한다고 해서 거창하게 인테리어 공사를 하거나 쓰던 가구를 교체하지 않았다. 집 안을 채우는 작품과 가구는 그가 십수 년 전부터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모으고 신혼 때 마련한 것이 대부분이다. “어떤 디자이너가 젊은 사람들에게 디자인 가구를 추천해줄 때 이런 말을 했어요. ‘마음에 드는 의자가 없으면 그냥 사고 싶은 의자가 생길 때까지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면 된다’고. 그 말처럼 하나씩 천천히 모아온 것이 이렇게 되었네요.”

나무 격자 프레임의 문으로 이어지는 주방 공간은 더욱 아늑한 분위기다. 핀 율의 뉘하운Nyhavn 테이블이 중앙에 자리하고, 리딩 체어와 48 체어, 그리고 일본 작가 오타니 워크숍의 작품이 맞이한다. “작년 코로나19가 발생하기 바로 직전에 다녀온 대만 아트 페어에서 구입한 작품이에요. 언젠가 벽에 걸어놓고 싶은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우연히 만나게 된 거죠. 마지막으로 간 해외 페어였기에 더 기억에 많이 남네요.” 그가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바로 주방이다. “저는 삼시 세끼 요리를 해요. 지난 1년간 아이들이 집에 있었잖아요.” 하루에 한 끼를 차리는 삶과 세끼를 준비하는 삶은 완전히 달랐다. 주방에 자주 머무르며 요리를 하다 보니 오히려 더 깨끗해지더란다. 그에게는 수고롭지만 그 덕분인지 가족과의 생생한 추억이 구석구석 새겨진다. 마치 내추럴 레더에 생긴 자국처럼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집. “가족 구성원 누구나 내 집이라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시간의 멋 을 머금은 집에는 행복이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쿠션, 카펫 등으로 컬러감이 화사한 침실. 이민주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 포울 키에르홀름의 PK 소파와 조명 디자이너 파보 티넬의 플로어 조명등이 자리한다.

에이후스에서 구입한 피트 헤인 에이크의 모던한 철제 선반장. 선반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어 잔이나 그릇 길이에 맞게 수납할 수 있다.
갤러리스트는 관심이 먼저다
중문학을 전공한 이민주 대표는 일찍이 아트의 매력에 눈떴고, 졸업과 동시에 갤러리에서 경력을 쌓았다. “조금 이를 수는 있지만, 내가 직접 갤러리를 열어야 40대에는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2016년에 갤러리ERD를 열었습니다.” ERD는 Exhibition Art Design의 약자다. 아트와 디자인 전시. 이보다 명쾌한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순수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고 있는 흐름을 반영해 순수 미술과 디자인 사이의 허물없는 전시를 펼친다. 하우스 오브 핀율은 의도치 않게 일이 커진 경우다. “핀 율 가구가 작품과 워낙 잘 어울려서 처음에는 갤러리에 놓을 핀 율 가구를 알아보는 것에서 시작했어요. 마침 바로 옆 건물에 자리가 났고, 작품과 어우러지는 하우스 오브 핀율 쇼룸을 마련할 수 있었지요.”

그런가 하면 지난해에는 부산 해운대에 ERD 부산점을 열었다. “부산점은 온전히 대림맨션이라는 공간 하나만 보고 결정했어요.” 1970년대 지은 오래된 맨션 건물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당시 주거 형태나 사용한 자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건물에 매력을 느꼈다. “건물의 낡은 외관과 상반된 화이트 큐브 공간이 만나면 굉장히 반전이 있겠다 생각했어요. 예상과는 달리 뻔하지 않은 갤러리를 만났을 때의 극적 효과랄까요.” 서울과 부산 갤러리에서는 동시에 같은 작가의 전시를 하기도, 다른 전시를 펼치기도 한다. 실생활과 동떨어진 예술이 아닌 일상과 맞닿은 예술에 대한 관심. 이민주 대표는 앞으로 ‘은거필품隱居必品’을 주제로 전시를 차례로 기획하고 있다. 존재감을 숨기고 ‘은거’하지만, 없으면 불편한 ‘필품’을 ‘은거필품’이라 명명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작가들에게 구해보는 것.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코트 랙. 외투나 가방을 걸어두는 코트 랙은 그 필요성에 비해 제품이 다양하지 않은 집기 중 하나다. “집에 손님을 초대하면 소파가 옷 무덤이 되곤 하잖아요. 집에 꼭 필요한데, 마땅한 걸 찾을 수 없어 직접 디자이너들에게 의뢰하고 이를 전시해보고자 했지요.” 김기석, 쉘위댄스, 원투차차차, 이상민, Our Labour × 임지수 디자이너까지 총 다섯 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은거필품: 코트-랙>전은 오는 3월 4일부터 4월 30일까지 이태원 갤러리ERD에서 열릴 예정이다.

김영진 작가의 전시가 한창인 이태원 갤러리ERD에서 만난 이민주 대표.


다양한 핀 율 가구를 직접 볼 수 있는 하우스 오브 핀율 내부와 외관.


작년 해운대 대림맨션에 오픈한 갤러리ERD의 내부와 외관의 상반된 분위기가 흥미롭다. 김참새 작가의 지난 전시 현장이다.
언젠가는 핀란드 조명 디자이너 파보 티넬Paavo Tynell의 조명등 전시를 꼭 열어보고 싶다. “5년 전쯤 핀란드를 방문했을 때 모더니즘에 대한 전시를 보았어요. 이 나라의 모더니즘의 시작과 끝에는 알바 알토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존재감을 보인 동시대 조명 디자이너인 파보 티넬이 눈에 띄었지요.” 모빌처럼 잔잔하게 흔들리는 파보 티넬의 우아한 샹들리에를 보며 한눈에 반했다. 옥션부터 벼룩시장까지 수소문해서 구하려고 했지만, 유럽과 미국의 부호 컬렉터들이 싹 쓸어갔을 정도로 찾기가 어려웠고, 설사 찾았다고 해도 상상 이상의 고가였다. “결국 샹들리에는 구입하지 못했지만, 대신 빈티지 플로어 조명등을 사서 침실에 두었어요.” 그 어느 때보다 눈을 반짝이며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이민주 대표. 그에게 힘들어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를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계속할 수밖에 없는 끌림이 있어요. 내 삶에 예술이 빠져 버리면 의미도 즐거움도 사라질 것 같아요. 쉽게 말해 작품이 하나도 없는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아마 정말 견디기 힘들 거예요.” 그에게 예술이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즐거움, 그 자체다.


오픈 갤러리
이태원 갤러리ERD에서 이민주 대표와 큐레이터가 직접 <은거필품: 코트-랙> 전시 도슨트를 진행하고 티타임을 즐깁니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43쪽을 참고하세요.

일시 3월 24일(수) 오후 2시
장소 이태원 갤러리ERD
참가비 2만 원(정기 구독자 1만 원)
인원 8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 또는 전화(02-2262-7222)로 신청하세요.

글 이승민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