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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디자이너 김영석의 제주 라이프 추억이 익는 시간
제주 북동쪽 해변 하도리.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이 2년 전 이곳에 집을 지었다. 이름하여 르 샤토 드 마메르Le Château de ma Mère. ‘어머니와의 추억을 담은 집’이라는 뜻이다.

르 카비네 드 수브니르, ‘기억의 방’이라는 뜻으로 불리는 2층 라운지 공간. 동서양의 앤티크 가구와 르코르뷔지에의 LC4 라운지체어를 비롯한 타임리스 디자인 제품, 심인자 작가의 모자상, 유영교 작가의 모자상, 선종훈 작가에게 의뢰한 어머니의 초상화 등 공간 곳곳에 가족의 추억과 취향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이제 집이 좀 집 같아요.”
주거 공간을 취재하다 보면 이 말의 기준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새집으로 이사한 직후 막 정리를 마친 말끔한 상태를 두고 “집 같다(이제 정리가 됐다)” 고 표현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적당히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두고 “집 같다(이제 익숙하다)”고 말한다. 부암동에서 삼청동으로, 다시 평창동으로…. 잘 살던 집을 두고 3~4년마다 한 번씩 이사를 감행하는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에게 ‘집 같은 집’의 기준은 아이러니하게도 후자다. 그가 제주에 집을 짓고 꼬박 2년을 지내고서야 <행복>을 초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비비드한 오렌지 컬러의 마지스 프루스트 체어와 중국 청나라 시대의 도자가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낸다. 창밖에 걸린 오름 풍경이 가장 멋진 작품이라고.

핑크 톤으로 꾸민 어머니 방. 앤티크 가구와 한복 원단으로 만든 침구가 은은한 조화를 이룬다.

집 구조는 물론 가구와 장식 매치 모두 좌우대칭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빅토리안 시대의 손거울과 자개장으로 꾸민 라이브러리.

반백 살에 지은 고향 집
“저는 시골집이 없어요. 어릴 때부터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부러웠어요. 그런데 문득 이렇게 살아가는 곳이 언젠가는 고향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이 집은 남쪽 땅에 고향이 없는 어머니를 위해 가장 ‘남쪽 땅’에 지은 우리 가족의 고향 집이에요.” 십수 년 전부터 제주도 땅을 숱하게 알아봤지만 인연이 닿는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서울에서 하도리로 이주한 이웃을 만났고, 8년 전 무밭이던 이 땅을 소개받았다. 땅을 사고 처음 몇 년은 어머니와 함께 내려와 무·당근도 심고 잡초도 뽑으며 시간을 보냈다. 1층만 짓고 구상하기를 또 몇 년(그사이에 공주, 부여에 게스트하우스를 지었다), 1층에서 2층으로 계획을 바꾸고, 정원과 게스트하우스까지 갖춘 ‘르 샤토 드 마 메르’를 2018년 여름에 완공했다. “땅에도 기운이 있잖아요. 허허벌판만 있을 때도 자주 왔다 갔다 하며 밭도 갈고, 새참도 먹고 했죠. 자잘한 일상이 쌓이면서 집은 혼을 품게 되는데, 바로 시간의 힘이죠. 아직 2년밖에 안 됐는데 이 집에 오면 대문을 여는 순간부터 마음이 푸근해져요. 진짜 고향 집처럼요.”

올레처럼 긴 정원을 지나 마주하는 이층집은 유럽의 샤토를 연상케 한다. 지붕 구조에서 알 수 있듯 집은 정확히 좌우대칭으로 과거, 즉 시간을 거슬러온 집이라는 뉘앙스가 전해진다. 1층은 현관 앞 원형 테이블을 바라보고 왼쪽에 어머니 방이, 오른쪽에 김영석의 방이 자리한다. 어머니 방을 전체적으로 핑크 톤으로 꾸몄다면 아들 방은 서양앤티크 가구와 자개장, 그리고 한복 원단으로 만든 침구가 묵직한 무드를 전한다. 다이닝 테이블을 지나 마주하는 작은방은 라이브러리로, 옛날에 남자들이 시가를 태우던 방을 모티프로 했다. 우리 전통 가구인데 서양 미감이 느껴지는 유리 자개장과 빅토리아 시대에 사용하던 손거울 등 ‘김영석’ 특유의 믹스 매치 감성이 돋보인다. 2층 입구에는 ‘르 카비네 드 수브니르Le Cabinet de Souvenirs(기억의 방)’라고 적혀 있다. “오래된 시간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해요. 기억의 방이라는 이름처럼 가족의 역사가 깃든 추억의 물건을 들이면 돼요. 집을 짓고 서울에서 쓰던 가구를 모두 싣고 왔어요. 호랑이 가죽 러그는 부암동 집 벽에 걸어놨던 거잖아요. 옛날 잡지 기사에 나온 가구, 숍에서 쓰던 가구… 하나하나 스토리가 담겨 있죠.”

아늑한 다락방처럼 지붕의 박공 구조를 그대로 살린 2층 공간은 구획을 나누지 않고 가구, 오브제를 비롯해 미술작품까지 자연스럽게 배치해 라운지처럼 연출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공수한 앤티크 가구와 북유럽 빈티지 가구, 한국의 전통 소반과 약장, 청나라 시대의 도자가 ‘시간’이라는 공통점으로 묵직한 화음을 빚어낸다. 여기에 심인자 작가의 모자상과 유영교 작가의 모자상을 비롯해 선종훈 작가에게 의뢰해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까지 가족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공간의 백미는 가로로 낸 창. “저기 보이는 게 지미봉이에요. 2층에서는 지미봉 뒤쪽의 성산 일출봉까지 보이지요. 건너편 창에는 다랑쉬 오름이 걸려 있어요. 1층 라이브러리 바깥쪽으로는 우도가 보이고요. 울타리 개념만 바꾸면 성산 일출봉부터 다랑쉬 오름까지 다 우리 집이죠!”

현관에서 바라본 정원. 올레를 연상케 하는 긴 진입로를 중심으로 게스트하우스와 정원이 마주하는 구조로, 제주의 스카이라인을 해치지 않으며 한산한 자연 풍광과 조화를 이룬다.

제주에 내려오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꽃꽂이. 집을 비운 동안 마당에 웃자란 꽃과 식물을 살피는 시간이기도 하다.

유럽식 분수와 현무암으로 만든 석조 장식이 조화를 이루는 정원. 건물 외벽과 화강석 바닥에 낀 이끼에서 농익은 시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홈, 세러피 홈
김영석 디자이너는 한 달에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제주에 머문다. 제주 집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꽃꽂이. 마당에 자라는 꽃과 가지를 꺾어 집 안 곳곳을 장식하는데, 식물의 색과 형태, 향을 통해 살아 있는 감각을 깨우는 것은 물론 스스로를 환대하는 기분이 든다. “하귤은 지금 잘라줘야 해요. 보라색 꽃은 라일락버베나인데, 땅에 따라서 꽃 색깔이 달라져요. 란타나도 핑크색, 노란색 참 다채롭지요? 서울에서 작은 정원을 가꿀 때는 컬러 매치에 신경 썼거든요. 노란색 계열이면 그린, 화이트만 베리에이션을 한다든지, 붉은색은 피한다든지 원칙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꽃이 무슨 색이든 상관없어요. 자연의 순리니까 그 자체로 다 아름답잖아요.”

유럽식 정원 역시 대칭 구조다. 네모난 분수대를 중심으로 둥근 허브 정원과 원형 티 테이블이 양쪽에 있고, 해태를 비롯해 석조 장식도 두 개씩 짝을 이룬다. 티 테이블 뒤편으로는 한국식 야생화 정원이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는데, 강원도에서 온 해송과 멋스럽게 어우러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차를 마셔요. 마당에 심은 민트를 따뜻하게 우려 마실 때도 있고, 더울 때는 청으로 만들어뒀다 차갑게 마시기도 해요. 그리고 밤사이 무슨 일없었는지 정원을 점검하죠. 집 뒤편까지 크게 한 바퀴 돌고, 그날 정원 일의 범위를 정해요. 뒷마당 연못에 떨어진 나뭇잎을 건져내고 잡초 좀 뽑고, 가지치기도 하다 보면 일주일이 너무 짧아요. 허리 한 번 펼 새가 없는데, 일이라고 느낀 적은 없어요. 눈이 시원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니 저한테는 일이 아니라 휴식이고 충전이죠.”

입구 오른편에 낮고 길게 자리한 집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 중이다. 지난해 마당에서 어머니 생신 파티를 한 것처럼 기념일이나 스몰 웨딩 등을 위한 대관도 계획했다. 직접 디자인한 한복과 수많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해 코스튬 서비스도 제공할 예정이다. 기회가 되면 여행자를 위해 ‘기도하는 집’도 짓고 싶다. “제주 집은 세컨드 하우스가 아니에요. 서울 집은 오히려 기숙사 같은 느낌이고, 여기가 진짜 집이죠. 가구도, 정원도, 사람도… 제가 아끼는 모든 것이 있고, 문을 열면 엄마가 기다려줄 것 같은 그런 집요. 그래서 늘 어머니와 함께 내려왔다 또 함께 올라가요.”

김영석이 디자인한 한복은 전통 디자인에 충실하면서도 컬러만큼은 현대적이고 파격적이라 평가받는다. 의상 전공자도, 건축 인테리어 전공자도 아닌 그가 옷과 집을 지으며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독특한 미감을 만들어내는 비결이자 원천은 무엇일까? 시대와 장르를 넘어 오랜 시간이 깃든 가구, 작품, 기물을 ‘자연’과 함께 즐기며 ‘자연스레’ 익힌 감각 때문이리라. 건물 외벽에 낀 녹색 이끼마저 비범하게 느껴지는 집, 엄마처럼 한없이 나를 품어줄 것 같은 집, 사람도 기물도 살아 있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집. 그곳에는 시간의 힘이 짙게 배어 있다.

글 이지현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