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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이인화, 김덕호 이 여름의 기억
말간 백자, 빛의 조각,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 익숙하면서도 낯선 ‘흰’ 것의 여운을 가득 품은 공간. 백토白土의 고장 양구에서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풍요롭게 누리며 삶을 빚는 작가 부부를 만났다.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이 자리한 미석예술인촌에 집과 작업실을 짓고 백자 작업을 펼치는 이인화, 김덕호 작가.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졸업 후 동료 작가들과 일공공작업실을 운영하다 2015년 강원도 양구로 이주했다. 이인화 작가는 2018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김덕호 작가는 2020 예올이 뽑은 오늘의 젊은 공예인상을 수상했다.
지중해를 품은 휴양지 카다케스Cadaques는 스페인이 낳은 천재 화가 달리의 작품에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 카다케스 포르티가트Portlligats에 자리한 달리의 집은 초대형 달걀 오브제를 비롯해 석회 벽으로 둘러싸인 중정, 미로처럼 복잡한 계단 등 집 자체가 하나의 초현실주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닷바람에 깎인 기암절벽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른데, 이 풍경은 달리 특유의 더블 이미지라는 표현 기법을 구축하기도 했다. 비단 달리뿐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를 탄생시킨 작품 뒤에는 그것을 만든 아틀리에와 집이 있고, 예술가의 일상을 가늠할 수 있는 그 공간에는 작업에 영감을 준 수많은 모티프가 담겨 있다.

강원도 양구는 백토의 고장이다. 양구 백토는 4백여 년 전 조선 왕실 도자를 만들던 주요 재료로, 방산면 일대에 다량 매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도자를 전 공한 부부 도예가 이인화, 김덕호는 2015년 양구백자박물관 백자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부임하면서 방산면으로 이주했다. 여느 도자 작가처럼 그들 역시 양구에 오기 전까지는 가공한 모습으로 곱게 포장되어 작업실 문 앞까지 배송되는 백자토를 사용했다. 재료의 원래 모습은 책으로 읽어 이해한 것이 전부였으니 양구 백토를 처음 봤을 때의 낯섦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색의 광맥에서 채굴한 덩어리, 산처럼 쌓아놓은 도석에 수천수만 번의 손길을 더해 불순물을 걷어내고, 이를 방아로 잘게 부수어 고운 입자로 만든 뒤, 맑은 수입천 물을 섞어 백토로 가공하기까지의 조선시대 행해진 제작 방식의 무수한 시간적·기술적 층위를 알게 된 이상 작업의 어느 과정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양구 백토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귀한 재료예요. 얼마나 매장되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개발은 물론 고갈되지 않게 지켜내는 것 역시 중요하죠. 재료학을 공부한 김덕호 작가와 물성에 집중한 저는 양구 백토를 활용한 유약에 주목했어요. 유약은 도자기에서 보여줄 수 있는 고유한 매력이자 유약 자체로 특유의 장르가 완성되기도 해요. 유약을 만들려면 흙에 돌가루를 섞어 유리처럼 녹여내야 하는데, 돌가루가 흙에 잘 달라붙게 하려면 양질의 백토가 꼭 들어가야 하죠”. 태토 대신 이렇게 유약으로 쓰게 되면 적은 양으로 양구 백토의 명맥을 이을 수 있고, 폐백토를 모두 활용할 수 있어 의미가 크다. 5년간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성과를 발표한 두 사람은 양구 백토만큼이나 양구라는 지역에 매료됐다. 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은하수, 봄이 되면 하천에서 들려오는 얼음 깨지는 소리, 비 온 뒤 산자락에서 피어오르는 멋진 물안개까지 매 순간의 경험들은 작업의 또 다른 양분이 된다.

“도시에서는 순식간에 흘러가는 계절이 이곳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무엇보다 명료한 좌표가 되죠. 아직 냉기가 서리는 초봄엔 논밭을 갈고, 한낮 불덩어리 같은 여름날에는 새벽 일찍부터 잡초를 뽑아요. 추수를 앞둔 가을에는 논밭에 물을 대느라 애쓰고, 쓰리도록 추운 겨울에도 노지에서 시래기를 말리죠. 삶의 최종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리기보다 삶의 단편, 반복적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에 김덕호 작가도, 저도 감동을 받았어요. 이곳이라면 삶이 천천히 흘러가도 좋을 것 같은 기대랄까요? 양구에 집과 작업실을 짓고 사는 꿈을 꾸기 시작했죠.”

1층 세라믹 스튜디오. 물레와 석고, 유약 실험을 하는 작업실과 가마 작업실로 나뉘어 있다.

백자의 ‘투광성’을 주제로 한 이인화 작가의 기물. 조각보를 창에 걸면 조각 하나하나가 작은 창처럼 느껴지듯 그릇에 창을 내어 빛을 담는 콘셉트다. 이 ‘감정의 기억’ 시리즈는 2015 청주국제공예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15년 발표한 김덕호 작가의 ‘흔적(Vestige)’ 시리즈. 백색과 청색의 흙을 겹쳐 줄무늬 같은 문양을 만들어내는 연리 기법으로 청화 문양을 표현한다.
창이 된 그릇
첩첩산중에서 작업에 매진하다 보니 작업량도 제법 쌓여갔다. 백자연구소뿐 아니라 다양한 기관과 협업, 개인전 등을 진행하며 누군가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화이트 큐브의 사각 전시대, 인위적 조명 등 전시장은 멈춰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어요. 백자가 누군가의 삶에서 살아 존재하려면 작가인 우리가 먼저 생활인으로서 추구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득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마침 예술인촌으로 조성되는 부지가 있었고, 심사를 통해 좋은 조건에 분양받고 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설계는 우연히 백자연구소에 놀러 왔다 두 작가의 컬렉터가 된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이현호 교수가 맡았다. 이현호교수는 주거와 작업, 전시 기능이 따로 또 함께하는 공간을 위해 꺾인 구조를 제안했다. 1층은 작업이 이뤄지는 스튜디오, 2층은 주거와 전시 공간으로 구분하고, 길쭉한 집의 3분의 2 지점을 사선으로 꺾어 동선의 효율성을 꾀하되 시선은 차단하는 방식이다. 1층 스튜디오는 현관을 중심으로 왼쪽에 물레 작업을 하는 메인 작업 공간이 자리하고, 오른쪽에 석고 작업실과 가마, 재료 보관실이 있다. 2층은 꺾인 복도를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 침실과 서재·게스트룸 등 사적인 공간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 거실 겸 다이닝룸이 자리한다. 거실 겸 다이닝룸은 두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 박공 구조의 높은 천장과 사방으로 열린 창이 개방감을 극대화한다. “백자연구소 작업실은 층고가 높은 데 반해 창이 작아 채광이 부족했어요. 저는 투광성을 주제로 작업하다 보니 집을 설계할 때 창문을 최대한 크게 해달라고 요청했죠. 덕분에 낮에는 조명을 켜지 않아도 되고, 유약의 미세한 톤 차이를 볼 수 있어 좋아요.”

2층 주거 공간. 계단 뒤편으로 게스트룸, 서재&다락방, 침실이 자리한다.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자리한 리빙&다이닝룸. 생활 자기부터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서 소장한 오브제까지 백자 전시관을 방불케 한다.

집을 설계하면서 창을 최대한 크게, 많이 내달라고 요청했다. 욕실 세면볼과 가구 손잡이, 전등갓 등은 도자로 직접 제작한 것.
우연히 창가에 둔 백자 컵에 빛이 스며드는 모습이 예뻐서 투광성 작업을 시작했다는 이인화 작가는 우리 전통 조각보처럼 ‘햇빛을 담는 창’과 같은 그릇을 만든다. 기벽이 2mm 이내라야 투광성을 잘 담을 수 있는 데다 소수점 한 자리만 차이 나도 형태가 허물어지기 때문에 작업 과정이 무척 까다롭다. 먼저 완벽하게 깎은 기물을 만들어 13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소성한 다음, 기물 안쪽에만 시유하고 유리질화된 바깥 부분은 곱게 연마한다. 재벌한 기물 위에 마스킹테이프로 패턴을 만들고 석분을 섞어 매트하게 만든 유약을 표면에 뿌린 다음 마스킹테이프를 제거하고 다시 굽는다. 이렇게 하면 유약을 뿌린 부분이 어두운 그림자로 보이면서 기하학 패턴이 드러난다. 직선이 모여 만들어낸 도형은 창의 이미지요, 마음의 창을 통해 빛이 투영되고 감정이 드러난다는 은유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집 안의 작은 조각처럼 즐기는 기器 형태의 오브제 작업이 생소하지만, 해외에서는 장식용 도자를 찾는 소비자가 많아요. 백자 기물이 일상에 펼쳐졌을 때 어떤 감도를 전하는지, 전시실이 아니라 생활 공간에서 확인하고 싶었어요. 작업 공간의 작업대와 책상, 주방의 아일랜드 등 꼭 필요한 가구는 최대한 심플한 것으로 고르고 욕실 세면볼, 가구 손잡이, 전등갓 등은 직접 만들어 우리만의 색을 더했죠.”

양구 골짜기의 시원한 여름을 상상하게 하는 백자와 부채.

우리나라 나물 반찬처럼 최소 양념으로 재료의 솔직한 맛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백자의 매력. 실제 상차림에 활용하면서 어떤 그릇이 어떻게 필요한지 보완할 점을 체크한다.

집 짓기만으로도 예산이 빠듯해서 가구는 최소화했다. 스탠드 조명등처럼 세워진 스마트폰 거치대가 인상적이다.

유기묘로 가족의 연을 맺은 ‘진주’.

스튜디오와 주거 공간이 따로 또 함께하는 집은 현관에서 동선이 정확히 분리된다. 창문 같기도, 모빌 같기도 한 오브제는 김덕호 작가의 작품.

매해 장신구를 하나씩 모으는 취미가 있는 부부. 집 모양 브로치는 금속 공예가 심현석 작가의 작품으로 부부는 이 작품을 통해 그들만의 집을 꿈꾸기 시작했다. 오른쪽 브로치는 집을 완공하고 이 집의 모양대로 만들어달라고 주문한 것. 집을 설계한 건축가와 시공사 대표에게 하나씩 선물했다.

양구의 사계와 이웃들의 인심에 매료되어 천천히 사는 삶을 택한 부부. 만물이 생장해 가득 찬다는 의미의 스튜디오 소만(www.deokhoinhwa.com)에서 새롭게 채워갈 작업이 기대된다.
소만, 일상을 채우다
김덕호 작가는 연리 기법(서로 다른 색상의 점토를 겹쳐 줄무늬 같은 문양을 만드는 방법)으로 청화백자를 선보인다. 물레 위에서 백색 흙과 청색 흙이 뒤엉켜 형태를 만들어내고, 표면을 한 꺼풀 깎아(면치기) 퇴적면의 흔적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연리는 흙이 도자기가 되는 과정 자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에요. 스킬과 힘에 따라 다른 패턴의 문양이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 물레 찰 때의 세세한 습관까지 고스란히 드러나죠. 손 기술을 바탕으로 한 기본 형태와 재료 연구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다양성과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진짜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지금은 작품과 제품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편식하지 않고 다양한 작업 방식과 기술을 연마해야 할 때죠.”

그들은 ‘스튜디오 소만’이라는 이름으로 석고 작업도 선보인다. 24절기 중 만물이 생장해서 가득 차오른다는 ‘소만小滿’처럼 자신들이 만드는 도자기가 사용하는 이의 삶을 풍족하게 채워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다. 스튜디오 소만의 작업들은 캐스팅이지만 무분별하게 찍어내는 대량생산은 지양한다. 작가의 정교한 작업물을 좀 더 다양한 유통 구조에서 합리적 가격대로 선보이기 위함이다. 캐스팅은 성신여자대학교 제자이자 백자연구소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개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노선영 작가가 돕고 있다.

“갤러리를 통해 작품만 판매하다 보면 작업에 대한 세세한 피드백을 받기가 어려워요. 이런 부분은 좋고, 이런 부분은 개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좀 더 가까이에서 직접 듣고 싶어서 이 공간을 만든 것처럼 우리가 만든 백자를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이 사용해볼 수 있도록 기업 프로젝트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어요. 아모레퍼시픽 오설록 1979, 신세계 한식연구소 등에서 스튜디오 소만의 찻잔과 주전자·합·접시 등을 만날 수 있는데 사용할 때 불편한 점은 없는지, 어느 부분이 쉽게 파손되는지 직원들과 즉각적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어 도움 돼요.”

백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백자의 ‘솔직함’을 매력으로 꼽는다. 청자나 분청·옹기 모두 태토의 흙을 유약으로 가릴 수 있지만, 백자는 흠이 가려지지 않는다. 들기름으로만 맛을 낸 나물 반찬처럼 기교를 부리지 않아 재료의 솔직 담백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백자의 매력이다. 그래서 백자는 멈춰 있는 공간에서는 되레 힘을 잃고, 삶의 순간순간이 중첩되면서 기氣가 채워진다.

양구에서 살아가며 마주한 아름다운 순간들을 작업에 온전히 녹여내고, 다시금 그 사물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인화, 김덕호 작가. 칠흑 같은 방산의 겨울밤을 흑색 연리로, 꽝꽝 얼어붙은 수입천의 불투명한 백색을 백색 연리로 표현한 것처럼, 그들의 기器에는 시간과 공간의 레이어가 담겨 있다.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 시원한 계곡물을 품은 그릇이 일상에 펼쳐졌을 때 또 어떤 여운을 전할지 이 공간을 통해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글 이지현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