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김상주·배은영 부부. 현관 문을 열어 놓으니 작은 정원에 핀 애기동백 향이 거실 안으로 은은하게 퍼진다.
침실로 쓰는 방과 거실 사이 자투리 공간에는 작은 홈 오피스 공간을 마련했다.
광고 아트 디렉터 김상주와 카피라이터 배은영 부부가 효자동으로 이사를 왔다. 살 집을 정할 시점, 부부는 삶을 효율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야근이 많다 보니 집에선 휴식해요. 때론 친구들과, 때론 부부끼리 술 한잔하고요. 큰 거실과 주방이 필수이고, 방은 잠잘 수 있으 면 되겠더군요.” 그래서 작은 집을 택했다. 1920년대에 지은 10평대 한옥이었다. 워낙 낡은 집이라 레노베이션이 필수였다. 이들이 떠올린 건 서촌을 배경지 삼아 ‘서촌차고’ ‘한권의 서점’ 등 작은 상점과 ‘누와’ ‘일독일박’처럼 색다른 경험을 주는 숙박 공간을 만들어온 지랩Z-LAB. “평소 지랩이 만든 공간들을 좋아했어요. 본연의 낡은 것을 지키면서도 현대의 삶을 담아내는 것이 저희 취향과 잘 맞거든요.” 지랩의 노경록 대표도 같은 생각이었다. 첫 미팅 후, 기쁜 마음으로 이 프로젝트를 맡기로 했다.
게으를 라懶, 운치 운韻, 땅 지地 를 써 ‘효자라운지’라 이름 지은 이 집의 입구에는 이렇게 부부가 함께 만든 로고를 담은 팻말을 붙였다.
공간에 개방감과 연결성을 주는 작은 창이 침실로 쓰는 방과 주방을 잇는다.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집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한참 들어간 조용한 효자동 골목에 자리한 집에 다다랐다. 문처럼 보이는 곳이 두 군데였다. 새로 낸 듯 멀끔한 철문이 하나, 외벽 끄트머리에 붙은 낡은 초인종이 있는 곳이 하나. 저 낡은 초인종은 왜 붙어 있을까? “본래 마당과 대문이 있던 곳에 벽을 새로 세웠어요. 초인종은 그대로 두었지요.” 집의 역사를 존중하는 부부 나름의 방식이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니 작은 오솔길처럼 세로로 길게 난 자그마한 마당 끝에 애기동백이 서 있었다. 나무로 짠 문을 드르륵 열면 간결한 집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반듯한 서까래 아래 소파 베드와 수납장, 슬라이딩 도어로 구분한 작은 방이 있다. 부엌 천장에 난 창으로 빛이 들어왔다. “곁에 높은 건물이 있어 채광이 좋지않은 집이에요. 그걸 보완하기 위해 천장에 창을 냈지요. 집의 정면을 정원 방향으로 바꾸면서 채광은 더 좋아졌어요.” 노경록 대표가 설명했다.
정원에 서서 나무 덧창을 열면 이런 광경이 펼쳐진다. 부부는 왼쪽 방에서 토퍼를 깔고 잠을 자는데, 이때는 슬라이딩 도어로 방을 구분해 안락함을 더한다.
애기동백이 있는 현관 앞 작은 정원.
지랩은 부부의 바람에 따라 작은 욕실에 욕조를 넣었다. 마당쪽으로 작은 창을 내 부부는 목욕하는 동안 창밖을 볼 수 있다.
부부 삶에 맞게 고친 집이지만, 집을 위해 부부가 변한 부분도 있다. “소파와 침대, 책장을 버렸어요. 옷도 많이 버렸고요. 이러다 아내가 저까지 정리해버리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짐을 많이 줄였죠.” 김상주 씨의 말이다. 그런 아쉬움을 보상받을 만큼의 즐거움이 있기에 두 사람은 이곳에서 살 수 있다고 했다. 집에 대한 부부의 애정이 남다른데, 그래서인지 이 집에는 이름이 있다. 카피라이터인 아내 배은영 씨가 지은 이름에, 광고 아트 디렉터인 남편 김상주씨가 로고를 만들어 집 앞에 붙여두었다. 게으를 라懶, 운치 운韻, 땅 지地 를 쓴 효자라운지. “말 그대로 효자동에 게으르게 퍼져 술도 마시고, 편하게 놀 수 있는 공간으로 집을 만들고 싶었어요. 작은 집이다 보니 치밀하게 쓰기 위한 방법을 많이 고민했는데, 결국은 편하고 즐거울 수 있는 공간에서 살고자 연구한 셈이지요.”
정면에 보이는 장의 가운데 문을 열면 큰 TV가 들어 있다. 직업상 TV가 꼭 필요하지만, 이 집의 중심에 TV가 있길 바라지 않았던 부부의 의견을 수용한 것.
부부 침실로 쓰는 왼쪽 방은 단순하지만 조밀하게 설계했다. 토퍼를 깔았을 때의 높이에 맞춰 콘센트와 작은 무드 조명을 단 것.
외벽 한편에는 예전에 대문이 있던 흔적이 새 벽돌로 남았다. 때로 음식 배달을 시키면 배달원이 그대로 남겨둔 낡은 초인종을 누르는 해프닝도 생긴다.
시공자인 그리즈 변한별 대표가 부부에게 선물한 앨범.
군더더기를 뺀 자리에 더한 취향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코르뷔지에는 그의 저서 <작은 집>에서 삶의 효율성에 대해 “정밀하고 조직적으로 배열해야 가치를 얻는다”고 했다. 이 집 역시 같은 맥락에서 기능에 집중했다. “작은 집은 공간을 복합적으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주거 공간이면서 세탁실인 동시에 다이닝룸인 이 집의 주방처럼요.” 집을 마무리한 후, 부부는 지랩 구성원에게 카피라이트를 선물했다. ‘우리 한번 해봅시다’ ‘이 우체통 어때요?’ ‘이건 그냥 둘까요?’ 등. 시공자도 현장 공사 중 찍은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어 부부에게 선물했다. 맨앞 장에는 마르셀 뒤샹의 말을 적었다. “예술에서 게으름을 찬미하며 실천한 것을 뽐내자!” 부부는 최근 재택근무를 하며 집을 즐기는 시간을 보냈다. 매일 아침 눈을 떠 천장의 서까래를 올려다보며 잠시 편안한 안정감을 갖게 된다고. “저희에겐 집이 곧 영감이에요. 매일을 기분 좋게 사는 것이 저희에겐 중요한 일이지요.” 효자라운지는 그렇게 수지 타산도 효율적 공간 활용도 아닌, 진정한 집의 의미로 모두에게 남았다.
- 아름다운 한옥 광고쟁이 부부의 효자懶韻地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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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집은 낭비할 틈이 없다. 꼼꼼한 수납으로 짐을 효율적으로 정리 정돈하고, 사는 이의 취향을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반영해야 한다. 작은 한옥을 고쳐 삶에 꼭 맞는 집을 만든 이 부부처럼.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