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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게스트 김아린 대표의 크고 작은 할 말들
백미당, 일치, 설화수 플래그십, SSG푸드마켓…. 식공간부터 패션, 뷰티, 아트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핫 플레이스를 탄생시킨 주인공. 올해로 15년째 브랜드 컨설팅 회사 비마이게스트를 이끌고 있는 김아린 대표의 새로운 한남동 사옥을 방문했다.

아치형 입구 안쪽으로 김아린 대표의 집무실이 있다. 벽면에 걸린 고운 누비는 어머니 양주혜 작가의 작품.

프라마 코펜하겐Frama Copenhagen의 날카로운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 사이드 테이블과 따스한 감성이 깃든 소품 모두 김아린 대표의 취향을 잘 드러낸다.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자신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에서 이렇게 적었다. “‘공기’는 ‘생각’과 ‘할 말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런 때에는 오직 ‘작은 것들’만 말해지는 법이다. ‘큰 것들’은 말해지지 않은 채 안으로 몸을 숨긴다.” 김아린 대표의 비마이게스트 사옥 앞, 정원에 심은 라일락나무 그림자가 짧아지는 한낮의 풍경을 보며 문득 이 구절이 떠올랐다. 작업실 ‘공기’를 가득 채운 그의 ‘생각’과 ‘할말들’이 제각기 입을 열었기 때문일까. 

“제가 갖고 싶은 것을 모아보니 하나같이 1940~1960년대 미드센추리 모던 디자인으로 귀결되더군요. 저도 모르게 편안함을 느끼는 저의 심미적 토대라고 할까요.”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건축물에 사용한 색을 담은 책 <폴리크로미 아키텍처럴Polychromie Architecturale>에서 영감을 받은 벽 컬러, 피에르 잔느레Pierre Jeanneret의 빈티지 체어, 장 프루베Jean Prouve의 캐비닛까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 속에서 꽃피던 당대 디자이너들의 가구는 그 시간만큼의 역사를 품은 주택 속에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임정주 작가가 손으로 깎아 만든 스툴과 오브제.

화장실 벽면의 절반은 푸른색으로 도장해 상쾌한 기분을 전해준다.

1층 미팅룸 정면으로 아치형 입구가 나란히 보인다. 왼쪽 입구에서 2층 사무실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주방으로 활용했다.

담벼락 앞 미팅룸에는 김아린 대표가 개인적으로 수집하는 오브제가 곳곳에 놓여 있다. TV 스크린을 통해 구본창 작가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장소에 깃든 시간의 지층 
1957년에 지은 오래된 가정집 주택이었다. “사무실을 옮기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한남동 골목길을 거닐다 ‘이곳이다’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삼거리 골목에 동네 터줏대감처럼 들어앉은 건물 1층에는 이름도 정겨운 ‘고향 마트’가 있었다. “동네 사람이 모두 랜드마크처럼 여기는 곳이더라고요. 퀵 기사님이 ‘고향마트에서 우회전이요’라고 얘기하면 다 알아들었죠.” 단숨에 마음을 뺏겨 계약한 이 주택은 12년 동안 두터운 신뢰 관계를 쌓아온 이건축연구소 이성란 소장이 레노베이션을 맡았다. 워낙 서로 잘 알고 지낸 시간이 길었기에 김 대표는 자신의 취향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짐을 얼마나 수납할 수 있는지 등 현실적인 문제를 의논했어요. 사무실 구조나 마감재, 컬러에 대해서는 소장님을 믿고 거의 전적으로 맡겼죠.” 

60년 이상 된 낡은 집을 개조하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떤 부분을 어디까지 살릴지 또는 없앨지 그 균형점을 찾는 일이었다. “상공간이 아닌 작업하는 생활 공간이다 보니 ‘적당히’ 손때 묻은 느낌을 만들어야 했어요.” 이 소장은 1950년대부터 시대를 거치며 변경된 집의 요소를 조금씩 살려 여러 시간대를 한데 중첩시키고자 했다. 1950년대 쌓은 회색 벽돌과 지붕, 1970~1980년대 설치한 2층 테라스 난간, 천장과 마감재는 그대로 살렸다. 대신 벽돌 담장을 허물고 계단을 설치해 개방성을 더했다. 오랜 세월동안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지층을 발굴하듯 이 건물에는 켜켜이 쌓인 시대의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의 사옥도 사옥이지만, 김 대표는 타인의 장소에 깃든 역사를 기꺼이 존중하는 예우도 잊지 않았다. 고향마트가 건너편 건물로 이전하기 전, 김희원·이승재 작가와 함께 마트의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마트 사장님께 앨범을 선물한 것이다. “역사,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이 동네에 관한 추억 말이에요.” 김희원 작가가 마트 차양을 촬영한 사진으로 만든 기념 파라솔은 테라스를 늠름히 지킨다. 

1950년대 지은 오래된 가정집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천장과 마감재가 미드센추리 가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1층 주방에서 2층 사무실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 역시 원래 있던 것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작은 정원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라일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비마이게스트 사옥 전경. 지하에는 김아린 대표가 운영하는 프린트 아트 숍 아티초크가 있고, 1층의 절반은 앤디앤뎁 매장이다. 
그해 여름이 남긴 것 
“정말 펄펄 끓듯이 더웠어요.”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때는 작년 7월 30일, 손 없는 날로 정한 이삿날이 마침 40℃가 넘는 무자비한 폭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실외기를 달기 전이라 에어컨이 없었고, 지게차가 현장에 올라올 수 없어서 짐을 하나씩 들고 옮겨야 했다. 이 처절한 광경에 동네 이웃 주민도 응원과 지지를 보냈다. “앞집 ‘창화당’에서는 전을 부쳐 바구니에 담아 갖다주시고, 고향마트에서는 집 냉장고를 맡겨놓은 양 내내 얼음과 음료수를 사다 마셨죠.” 천재지변급 폭염 속에서도 소신껏 책임을 다한 현장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는 김아린 대표. 감동을 느낀다는 건 주는 대상과 마음의 실이 이어져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는 스스로 회사를 “조그만 구멍가게”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규모만 작을 뿐 매우 명민한 회사다. 레스토랑에 놓이는 사소한 기물 하나하나까지 다 신경 써야 하는 철두철미한 성격 탓에 1년에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 수를 정해놓으니 직원도 많이 필요하지 않다. “‘애자일agile’이라는 마케팅 용어처럼 프로젝트에 따라 조직을 긴밀하고 민첩하게 투입해 효율성을 높이는 거예요. 무엇보다 제가 주도적으로 빠르게 행동해야 하죠.”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매 순간 늘 쉬지 않고 살아 있으려고 노력해요. 삶 자체로 치열함을 보여주는 부모님(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불문학자이고 어머니는 설치 미술가다) 덕분인지도 모르죠. 두 분은 ‘놓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처럼 절대 예술에 대해 놓지 않거든요.” 사람을 향한 따스한 시선과 달리 일에 대해서는 한없이 날카롭다. 그의 공간 속에 ‘말해지지 않은 채’ 숨은 ‘큰 것들’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글 이승민 기자 | 사진 박찬우 설계 이건축연구소(02-566-5620)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