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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전통 정원의 특징 [가드닝 1] 꽃과 나무를 심어 자연과 관계를 맺다
미니멀 시대에 조상들의 지혜로 아로새겨진 전통 조경 정신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조경을 할 때 인위적으로 장식하거나 변형하는 일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 환경과 조건을 받아들였다. 있는 그대로를 수용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하니 자연과 환경에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조경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돌이 있으면 돌 위에 정자를 짓고, 물이 고이는 곳이 있으면 물 범람을 방지하기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 창덕궁 후원,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 강진 다산초당 등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원이나 주택 가운데 빼어난 조경미를 자랑하는 곳은 모두 자연 환경과 조건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인위성을 최소화한 미니멀한 조경을 보여준다. 자연을 빌려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 나무 한 그루에도 의미를 부여해 자세를 바로했던 전통 조경 정신을 찾아 나섰다. 격랑의 세월 속에서도 아취雅趣를 잃지 않은 전통 정원과 선조들의 조경 정신을 담고 있는 현대 공간을 살펴보고, 더불어 전통 조경의 뜻을 빌린 화초 데커레이션 아이디어 아홉 가지를 제안한다.


강릉 선교장 활래정.

한국식 전통 조경의 핵심은 자연에 순응하는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공간과 주변 환경을 조화롭게 꾸미는 데 있다. 다만 선조들이 지은 많은 건물이 유실되고 자료 또한 전해지는 것이 드물어 그 마음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을 따름이다. 창덕궁, 옥호정, 소쇄원, 서석지, 다산초당, 운조루, 운림산방 등 남아 있는 공간을 바탕으로 한 연구를 통해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고작이다. 남아 있는 공간들도 터전마다, 사는 사람마다, 공간의 특성마다 다 다르게 꾸며져 있다.

우리 민족은 자연을 정말 사랑해서 자기 마음대로 훼손하지 않으려 했다. 자연과 관계 맺기를 좋아했다. 사계절 기후가 뚜렷한 자연 환경과 산과 강이 울퉁불퉁하게 굽이치며 바다로 이어지는 천혜의 조건을 가진 덕분이다. 따라서 선조들이 집을 짓던 시절에는 어디에 집을 지어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국이 되는, 국토 전체가 명당인 곳이었다. 수려한 금수강산이 있기 때문에 집을 짓고 일정한 형식에 따라 조경을 할 필요도 없었다. 집을 자연 안에 잘 배치하면 그 자체로 훌륭한 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경관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차경借景 기법이 발달했다. 좋은 터를 잡아 집을 짓고 멀리 있는 풍경을 최대한 집 안으로 끌어오는 차경 기법을 통해 ‘관계 설정’의 철학을 살펴볼 수 있다. 차경 기법은 자신을 열어 외적인 존재를 받아들이는선조들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우리 전통 조경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뚜렷한 사계가 있고, 맑고 깨끗한 바다가 육지와 경계를 맞대고 있으며, 계곡 물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식수로 이용되었고, 산야에 자라는 식물은 그대로 약초가 되었다. 이 천혜의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은 자연의 리듬을 말없이 느끼고 수용하면서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란 으레 아름다운 것이고, 자연은 인간의 생활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은연중에 지니고 살아왔다.”<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허균, 이갑철/다른세상)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독자적 조경 문화가 본격적으로 생성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에서 받아들인 조원造園 기법과 자체적으로 고안해낸 기법을 결합해 독자적인 조원 문화를 형성했다고 한다. 조경의 역사가 가장 먼저 시작된 백제는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는데, 이는 땅이 습해 사람들이 산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궁 안에 산을 쌓고 못을 파는 것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조경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며 자연 숭배·음양오행·풍수·도가·유가 사상이 결합된 독자적인 조경 문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어진다. 우리 조경의 인위적인 부분을 최소화하는 점은 ‘진짜 같은 거대한 인공’을 만든 중국이나 ‘작위성이 강한’ 일본의 정원과 가장 차별되는 부분이다.

옛사람들은 터를 고를 때, 건강하고 물이 흐르고 바람이 잘 통하면서 햇볕이 잘 들어 생태적으로 건강한 곳을 우선시했다. 명당을 찾으면 자만하지 않았다. 하늘이 숨겨 놓았다가 자신에게 선물한 것이라며 감사히 여겼다. 풍수적으로 부족한 점은 산이나 못을 만들고 숲을 만들어 이를 보완했다. 그러나 사치스럽지는 않았다. 정원을 만든 것은 남에게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였으므로, 서민은 서민대로 양반은 양반대로 임금은 임금대로 자신의 여유가 닿는 한에서 소박하고 절제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 상태를 바탕으로 정원을 꾸몄다.


1 진도 향교. 2 경북 안동의 지례예술촌.  3 순천의 어느 민가.


집을 지을 때에는 배수를 가장 중시했다. 여름에 내리는 집중호우를 대비해 물이 잘 빠지게 했다. 물이 빠지지 않으면 집이 축축해지기 때문이다. 물이 잘 빠지게 하기 위해 물이 모이는 곳에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각지다)의 우주관을 담은 못을 조성했다.

마당은 화강암을 잘게 간 마사토를 잘 다져서 반듯하게 만들었다. 마당은 장식적인 요소가 아니라 생활을 하기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 혼례식이나 탈춤 공연, 타작 등 집안의 대소사나 농사일과 관련된 행사가 있을 때 마당은 행사장으로 변신했다. 아름다운 장식으로 치장한 중국이나 소리 많이 나는 자갈이나 식물로 채웠던 일본과 달리 마당을 흙으로 만든 이유는 달빛의 반사 효과를 위해서다. 깜깜한 밤, 달빛이 마당으로 내려앉았다가 반사되어 방문 창호지를 투과해 방 안으로 스며들게 해서 간접 조명으로 사용했다.

집 안에서도 공간을 나누었다. 사랑채, 안채, 별채, 행랑채가 있었고 여기에 속하는 마당이 각각 별도로 존재했다.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 등 사람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하는 유교적 질서에 따라 분화된 공간들은 담과 담 사이의 문, 건물채로 구분하고 각 공간마다 바깥마당, 행랑마당, 사랑마당, 안마당, 별당마당, 후원 등을 조성했다. 그러나 절대 기준은 아니었다. 각자의 경제적 사정에 맞추어 정원을 꾸몄던 까닭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은 후원이나 동산을 만들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연못 대신 작은 물확을 마당에 두고 물에 비친 하늘을 감상했다.

꽃과 나무의 경우 주변 경관을 집 안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집 안에는 많은 것을 심고 가꾸지 않아도 되었다. 집 안을 가리기 위해 담을 나지막하게 쌓고 화분에 꽃나무를 몇 그루 심는 정도였다.

담은 야트막하게 쌓았다. 서양의 집들이나 지금의 단독주택들처럼 높지 않았다. 담이 낮으면 집이 밝고 통풍이 잘돼 집을 보송보송하게 관리할 수 있었다. 또한 야트막한 담은 집의 안과 밖이 서로 침투하고 스며들어 경계가 사라지게 하는 기능했다. 뒤로는 산으로 연결되고, 대문을 열면 마을길을 따라 집들이 연결되기 때문에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정원의 경계인지를 알기 어려웠다. 경계가 있지만 문을 열면 경계가 사라지면서 마을 공동체의 일부로 귀속되었던 것이다.

꼭 찾아봐야 할 전통식 정원 7
성락원城樂苑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을 의친왕이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성북동에 있다. 도심에 남아 있는 별서(선비들이 모여 중사를 논의하며 풍류도 즐겼던 문화공간) 가운데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으며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정문으로 들어가 길을 따라 좀 올라가면 골짜기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흘러내리는 두 개울물이 합수되는 지점이 나온다. 이 곳에 있는 다리를 건너 동산을 오르면 정원이 나온다. 암반 수림이 폭포와 잘 어우러진다. 별서 가운데 가장 근대적인 곳이다.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2-22 소재.

석파정石坡亭 대원군이 살았던 별장으로 전통적인 산수 정원에 인공미를 더한 정원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원래는 조선 철종과 고종 때의 중신 김흥근의 별서였다. 훼손된 편이지만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대한 암석과 수백 년 된 소나무 등 볼거리가 많다.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316-1 소재.

소쇄원瀟灑圓 정원 문화의 압권을 보여주는 곳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별서 정원. 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인다는 조경 기본에서 가장 확대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계류溪流를 따라 조성되어 있는데 인공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자연의 순리를 따르려 한 주인 양산보(1503~1557)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인공적인 손길이 가더라도 자연의 흐름에 따라 정원을 꾸미려 했던 주인의 겸허의 마음이 느껴진다. 양산보는 후손들에게 “남에게 팔거나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이곳을 아꼈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재.

부용동芙蓉洞 정원 ‘어부사시사’의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살았던 별서 정원. 규모가 매우 크고 화려하다. 조선시대 전통적 조경의 뛰어난 기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동양적인 자연관과 성리학적 우주관을 살펴볼 수 있다. ‘낭음계’(명랑하게 소리 높여 시가를 읊는 계곡), ‘취적’(낚시기를 하는 참뜻은 물고기를 잡는 데 있다), ‘무민당’(외물에 집착하지 않아 근심걱정이 없는 경지)이라는 이름처럼 성리학의 세계와 유교적 인생관, 풍류 사상, 신선 사상 등 그가 유유자적 생활하며 추구했던 내면세계를 살필 수 있다.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용동 소재.

다산초당茶山草堂 우리나라 전통 정원 문화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18년 동안 유배살이를 했던 다산 정약용(1762~1386)이 연못을 파고 골짜기의 물을 끌어들여 폭포를 만들어놓았다. 남해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산 중턱에 정자를 세우는 등 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하고자 했던 그의 소박한 아취가 잘 드러난다. 우리나라 전통 조경 양식을 최소한으로 적용했으며, 건물의 경우 원형이 훼손되어 최근 복원한 것이지만 정원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자신의 유배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그의 정신이 느껴진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소재.

선교장 정원의 활래정活來亭 현재는 거의 볼 수 없는 개인 주택의 전통 정원이 남아 있는 곳이다. 원래는 99칸의 웅장한 주택이었으나 많이 훼손되었다. 네모난 연못 속에 네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정자의 이름이 활래정. 그 모습이 마치 정자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 소재.

창덕궁 후원 우리나라의 왕실 정원 가운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언덕과 골짜기 등 자연 그대로의 지형과 나무숲을 기반으로, 원형을 훼손하지 않도록 적당한 공간에 연못을 파고 정자, 누각을 세웠다. 과거시험을 치르는 장소였던 부용지 구역, 연경당 구역, 옥류천 구역으로 나뉘는데 자연의 흐름에 따라 못을 파고 정자를 세운 지혜가 담겨 있다. 물이 고이는 곳에 못을 파고, 자연 굴곡을 살려 뜰을 꾸몄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71 소재.


김선래, 손영선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