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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 가옥 어둑한 미로를 더듬어가는 노화가의 집
조선의 막바지, 근대의 초입에서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집은 3대가 사는 가족 가옥이자 화가로서 그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이면서 후학에게 배움을 전하던 화실, 그리고 당대 예술가들이 모여 화회畵會를 여는 살롱이었다. 화가의 비밀스러운 밀실이자 예술가들의 아름다운 사귐이 피어나는 광장이던 원서동 16번지의 복도에는 아직도 물감 냄새와 친구들과 나누던 다정한 수군거림이 낮게 흐르고 있었다.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은 시민과 함께 우리 문화 유산과 전통 마을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앞장서는 재단입니다. 역사와 문화 인물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을 <행복>이 먼저 찾아가 가만히 지켜보고, 귀 기울여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자신이 직접 지어 1918년부터 41년간 머문 집. 서양 가옥과 일본 가옥의 요소를 두루 섞어 지은 이 한옥은 개항 때 들어온 신식 재료인 유리를 많이 사용하고, 한옥에서는 드문 그림 그리는 큰 화실이 자리한 화가의 집이다.
창덕궁 후원의 서쪽이라 해서 이름 붙은 원서동苑西洞은 서울에서 드물게 고요하면서도 품위가 남아 있는 동네다. 그리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시간을 비켜서 조선의 끝자락, 그리고 근대가 시작되는 그 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는 신비함을 간직한 동네다. 궁궐 후원의 거대한 수목들이 창덕궁 담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궁녀들의 옛 빨래터가 집 뒤쪽에 남아 있는 원서동 16번지, 고희동 가옥에 들어서면 그래서인지 어떤 시간 속으로 빨려들 것 같은 두근거림이 시작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잊을 수 없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고희동은 1886년 역관 고영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홍건익 가옥의 원래 소유주이던 고영주의 동생 고영철이 바로 고희동의 아버지다. 누구보다도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에 일찍 눈뜨고 세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던 통역사, 오래된 중인 계급 집안에서 태어난 그였기에 최초의 서양 화가라는 수식어는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읽힌다. 열세 살에 자연스럽게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그가 첫 발을 디딘 곳은 한성법어학교. 그런데 언어를 배워야 할 그 학교에서 고희동은 프랑스에서 온 한 도예가가 자신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프랑스 선생의 얼굴을 그리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다. 여섯 살부터 서당에 나가 한문을 배우던 그였지만, 서양인이 그리는 ‘서양화’라는 것을 처음 보면서 언어를 떠나 그림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게 공무원 신분으로 도쿄 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고 공부를 마친 후 1918년에 자신이 짓고 산 집이다. 아름다운 궁궐의 담장과 개울, 무한하게 이어지는 궁 후원의 울창한 나무들은 분명 그의 마음을 단박에 사 로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앙고보에서 멀지 않은 동네였으니 그에게는 익숙하고 도 아름다운 곳이었을 것이다. 자그마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 넓은 마당을 지나면 한옥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서양식 현관이 나온다. 이 현관은 한옥에 서양 가옥과 일본 가옥의 요소를 묘하게 섞어서 지은 고희동의 마음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에 나오는 일본식 특유의 그늘 같은 어두움을 가득 머금은 이 현관은 마치 어떤 특정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그렇게 사람을 맞는다. 처음에는 기본 ㄱ자의 전형적인 경기 지역 한옥으로 지었는데, 이후 고희동이 직접 화실과 사랑방을 덧붙여 증축했다고 한다. 아내가 안채와 사랑채를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작은 계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막기 위해 당시로서는 신식 자재인 유리문을 복도 따라 미닫이식 덧문으로 달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구조가 복잡하지는 않지만 집을 들어서면 미로 같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이렇게 안채와 사랑채가 복도로 연결된 구조가 이 집을 좀 더 비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얀 수반에 자잘한 자갈돌을 놓고 수선화를 키웠다던 그는 사랑방 옆에 큰 화실을 마련했다. 큰 사이즈의 그림을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벗들과 화회를 하던 장소다.

안채와 사랑채가 유리문으로 된 복도로 연결된 미로 구조의 고희동 가옥.

그가 손님을 맞고 작은 사이즈의 그림을 그리던 정갈한 방.
하얀 수반에 자잘한 자갈돌을 놓고 수선화를 키웠다는 그의 방은 화실이면서 사랑방이었는데, 술과 손님을 좋아한 그였기에 사랑방에는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그림 중에는 ‘아회도雅會圖’라는 제목의 작품이 꽤 있는데 당대 예술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을 마치 그림일기처럼 남겼기 때문이다. 그 중 일기회一器會는 그가 가장 가까이 지낸 위창 오세창과 육당 최남선 등이 모이던 모임이다. 그릇 기器 자가 들어간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모임에 각자 안주를 한 그릇씩 가지고 참석한 데서 연유했다고 하니 지
금으로 말하면 포틀럭 파티 같은 것이겠다. 일기회 외에도 고희동은 자주 어울리던 서화가들과 붓을 나누어 이 집에서 합작도도 자주 그렸다. 나라의 형편도 처지도 위태롭고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고희동은 끝까지 우리의 그림과 사람을 놓지 않았다. 고희동의 인생은 언뜻 보면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하고 서양화를 그리고, 후에는 참의원을 지내면서 정치에까지 발을 들이며 풍류 삼아 그림을 그리고, 화우들과 우정을 나누는 고희동의 인생은 언뜻 보면 평온한 인생처럼 보인다. 그러나 1886년에 태어난 고희동은 그가 41년이나 머문 이 집에서 우리나라의 수난과 치욕이 압축적으로 파란만장하게 펼쳐지는 시기를 고스란히 바라보고 살았다. 조선이 접히고 대한제국이 열강의 틈새에서 쉴 새 없이 표류한 시기, 일제가 송두리째 우리를 먹어버린 암흑의 시간, 해방, 6ㆍ25전쟁, 4ㆍ19혁명까지. 한 사람, 그리고 한 집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시간이 고희동의 삶에 그리고 이 집의 미로 같은 공간에 켜켜이 새겨져 있다. 조선이라는 시간에 태어나 한학을 배우고 컸지만,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어와 일본어를 익힌 통역의 시간들, 그 언어들로 10대 후반에 이미 대한제국의 관직에 종사하지만 목탄으로 쓱쓱 그려나가는 서양 초상화에 빠져 걷게 된 서양화가로서의 시간. 무너진 조선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서화협회를 만들어 화가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지키는 방법을 가르치던 스승으로서의 시간. 흔들리는 나라의 운명을 의연히 받아들여 미술이 길을 잃지 않도록 미술 행정가라는 낯선 영역을 두려움 없이 걸어간 정치가로서의 시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내와 가족과 벗들을 사랑하고 사귀며 남긴 손바닥만 한 그림들과 기록들. 아버지가 어릴 때 지어준 춘곡春谷이라는 호처럼 영원한 봄과 푸르른 젊음을 사랑하던 노화가의 집에는 파란만장한 시간들이 그대로 녹아 지금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5길 40 관람 문의 02-2148-4165


원서동 고희동 가옥은 현재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종로구와 업무 협약을 맺고 전시와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은 시민들의 자발적 기부와 후원으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비영리법인입니다. 시민문화유산 1호 최순우 옛집, 2호 나주 도래마을 옛집, 3호 권진규 아틀리에를 보존하며 근대 문화유산의 역사적 · 문화적 가치를 찾아 알리고, 역사 인물들이 남긴 삶의 흔적을 살려내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글 김은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