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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문화 특집 기억이 머무는 집
도시에서 나고 자란 세대에게 고향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치 부메랑처럼 자신이 나고 자란 집에 다시 닻을 내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지은 다가구주택의 흔적을 고집스레 지켜가는 싱글 세대, 스러져가는 고향 집터에 새집을 지은 중년의 부부, 세 번이나 집을 고쳐 지으며 가족의 역사를 잇는 노모와 아들까지…. 현대인의 고향, 기억이 머무는 집을 찾았습니다.

1, 2 창원 무상헌의 옛 집터. 건축주 이덕미 씨와 딸 혜민 씨 남매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들어 있다. 3, 6 건축가 임형남이 어린 시절 살던 을지로 집과 골목에서. 4 신월동 주택가. 다가구주택을 짓기 전 옛 집 앞에서 찍은 최혜자 씨의 어린 시절 모습. 5 충남 당진 운산리, 1962년 지은 한옥에서 어린 박영진 씨와 어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있다. 이후 이층 양옥을 거쳐 지금의 새 집을 지었다. 7, 8 박영진 씨의 두 딸은 할머니가 손수 지은 양옥에서 나고 자랐다.
어느 날 결혼을 앞둔 젊은 예비부부가 신혼집을 설계해달라고 찾아왔습니다. 20여 년 전 고향 집 근처에 아버지가 지은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 안에 집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건물의 본디 용도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양계장 사업을 하면서 사료를 만들기 위해 지어놓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정된 예산에 맞추어 그 건물 안에 집을 지었습니다. 껍데기는 아버지가 만든 것이었고, 내용은 20년이 지난 후 자식이 이어서 채운 것입니다. 물론 예산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라면 근처에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기에 주변에서 무척 말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젊은이들은 아파트를 구입해 살다 보면 집값이야 올라가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자신 있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과연 집이란 개개인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몇 년 전 <남자의 자격>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와 함께 집을 설계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그램 내용은 자기가 살 집을 스스로 그려보는 것이었는데, 건축설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집을 지어보라고 하자니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막막했습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우선 어릴 때 살던 집을 그려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막막해하던 사람들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련한 눈으로 기억을 하나씩 꺼내며 어릴 때 지내던 공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과 같이 살던 방들과 다락과 마당 등 개인적인 기억의 공간이 하나씩 나왔습니다. 마당에 면한 마루에 앉아서 하염없이 밖을 쳐다봤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무척 숙연하기까지 했죠. 저 역시 내가 살던 집을 그려보기 시작했는데, 기억나는 대로 한 채씩 그렸더니 그동안 이사 다닌 집이 무려 다섯 채나 나타나더군요. 집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그 장소가 넓거나 좁거나, 밝았거나 어두웠거나 모두 아름다운 색으로 바뀌어 떠오릅니다. 마당과 방과 부엌 그리고 숨기 좋던 다락방을 하나씩 불러내면서 그 공간들이 나에게 준 여러 가지 따뜻함과 편안함 그리고 생각들이 생생하게 살아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어느 날 마들렌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며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듯이 말입니다.

집이란 단지 우리가 살던 여러가지 재료로 벽을 세우고 바닥을 덮고 천장을 올린 건축 재료의 조합이 아닙니다. 기억과 생각과 따스함으로 가득한 원초적 공간이며, 결국은 되돌아가야 할 것만같은 최후의 공간이죠.


저는 을지로3가 입정동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나서 열 살이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당시 그 동네 집들은 우리나라 산업을 이끄는 전자 제품이나 기계를 만드는 곳으로 재빠르게 치환되는 중이었습니다. 친구들이 하나씩 이사를 가고 우리 집도 결국 버티지 못하고 다른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집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후 우연히 을지로에 공사 자재를 사러 갔다가 영수증을 받았는데, 가게의 주소란에 익숙한 숫자가 적혀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주소가 저의 본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집은 모두 사라지고 구석구석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공업용 기름 냄새가 질펀했지만,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것이 ‘고향’의 느낌이겠지요.

그 후 그 동네에 자주 갑니다. 냉면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일부러 그 근처에 약속 장소를 잡고 조금 일찍 가서 골목을 배회하기도 합니다. 그 동네는 서울의 한복판이라 이미 재개발이 되고 높은 빌딩으로 치환됐을 법한데, 지나치게 땅값이 올라 그런 재개발이 쉽지않은 모양입니다. 부동산 거품이 동네를 지키고 있는 묘한 역설이 이곳에서는 성립됩니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습니다. 그곳이 아파트이든, 가파른 경사 위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달동네이든, 바닷바람이 거센 동네이든, 고향은 늘 따뜻하고 안온합니다. 마치 어머니 품을 그리워하듯 자신의 근거가 되는 곳을 그리워하는데, 그것은 설명하기 쉽지 않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간혹 자신이 태어난 곳에 집을 짓거나, 혹은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집을 다시 고쳐서 짓겠다고 설계를 의뢰하는 분이 있습니다. 무척 부러운 일이죠. 창원에 설계한 무상헌이라는 집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태어나서 자란 아버지, 시집가서 몇 년 지낸 어머니, 가끔 놀러 가서 할머니와 친척들과 지낸 자식들에게 이곳은 각자 다른 기억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땅이 지닌 의미와 가족의 추억, 그리고 앞으로의 변화에 대한 예측 등을 이야기하며 집을 앉히고 각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함께 소개하는 충남 당진의 주택, 신월동 다가구주택 역시 지난 기억과 앞으로 만들어갈 기억들이 쌓여 누군가의 고향이 되겠지요. 그 집에서 각자 가지고 있는 추억 위에 앞으로의 미래를 포개놓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길 기대해봅니다.


글을 쓴 임형남은 아내이자 가온건축 공동 대표인 노은주 소장과 평일에는 집을 짓고, 주말에는 집과 건축에 대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금산 주택으로 한국공간디자인대상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했으며, 콘크리트 창고를 개조한 신혼집, 존경과 행복의 집, 무상헌 등 소박하고 따뜻한 건축의 매력을 주창한다. 저서로는 <나무처럼 자라는 집> <작은 집 큰 생각> <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집, 도시를 만들고 사람을 이어주다> 등이 있다.


임형남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