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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김정원∙김지애 부부 삶과 음악, 더없이 완벽한 앙상블
예술가를 만나는 일은 눈과 귀와 더불어 마음까지 즐거워지는 일이다. 이름만으로도 클래식 팬을 설레게 만드는 피아니스트 김정원ㆍ김지애 부부. 각기 역량이 뛰어난 음악가이자 인간적으로 더없이 가까운 두 사람이 일으키는 시너지는 음악이 삶과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20년간 음악의 도시 빈에 살다 2010년 귀국, 다양한 연주 활동을 펼치는 피아니스트 김지애ㆍ김정원 부부.
피아니스트의 집임을 말해주는그랜드피아노는 그 자체로 인테리어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아트월처럼 연출한 CD장은 김정원 피아니스트가 직접 디자인해 제작한 것.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저절로 휴대폰 카메라를 켠다. 비록 정지된 사진이라도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김정원ㆍ김지애 부부의 연주를 라이브로 지켜보았을 때도 그런 충동이 일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앙상블을 만들어내는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 D.940(드라마 <밀회>로 유명해진 곡!)’. 말보다 건반으로 소통하는 음악가 부부가 만들어낸 시너지는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코지 코너에는 클래식한 콘솔과 그림을 장식했다. 꽃과 향초, 촛대 등 소소한 소품을 통해 집을 보살피는 애정 어린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우주와 레고를 좋아하는 아이 취향에 맞춰 꾸민 아이 방은 어두운 회색 벽지를 바르고 별 스티커를 장식했다.

때론 남자를 위한 ‘동굴’이 필요하다! 레노베이션하면서 보물찾기처럼 발견한 맨 케이브 공간. 집을 받치고 있는 암벽을 살려 바닥 레벨을 평평하게 맞춘 ‘동굴방’은 친구들과 와인 한잔 마시는 김정원 씨의 아지트다.
21세기 슈만과 클라라를 꿈꾸며
김정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동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힌다. 예원학교 재학 중 오스트리아 유학길에 오른 그는 만 14세의 나이로 빈 국립 음악대학교에 입학하고 프랑스 파리 고등 국립 음악원 최고연주자 과정을 최우수 성적으로 마쳤다.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Vladimir Fedoseyev가 지휘하는 빈 심포니, 마이클 프랜시스Michael Francis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막심 쇼스타코비치Maxim Shostakovich가 지휘하는 체코 필하모닉 외에도 아시아, 미주 지역까지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연주자로서 영역을 확장했다. 김지애 역시 선화예고 재학 중 빈 음악대학교로 유학, 비엔나 국제 음악 페스티벌에서 한국 대표로 연주해 찬사를 받았으며 독일 쾰른을 중심으로 한 여성 피아노 앙상블 뮤제 데 피아노Muse de Piano 멤버로 독주와 실내악, 오케스트라 협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음악가 부부로서 호흡을 같이하고 그들의 삶을 함께 담은 연주를 선보이는 경우는 왕왕 찾아볼 수 있다. 바이올린의 여왕 안네 소피 무터와 안드레 프레빈, 전설적 첼리스트로 꼽히는 재클린뒤 프레와 다니엘 바렌보임이 그러했다. 하지만 같은 악기를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경쟁심보다는 공감대가 더 컸던 것 같아요. 사실 피아노를 전공한 사람 중에도 온전히 음악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요. 본인의 의지보다는 부모나 선생님 권유 등 타의에 의해 시작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지만 저는 순전히 제 의지로 피아노를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쇼팽의 소나타 2번을 듣고 감동했지만, 또래 친구들과는 그 감동을 나눌 수가 없었죠. 일찍 유학을 간 터라 늘 음악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갈망했는데, 이 친구가 음악을 정말로 좋아한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만나서 같이 피아노 치고 음악회 가고, 연주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신랄하게 토론하고…. 훌륭한 음악적 조언자이자 벗으로 내내 붙어 다니다 이렇게 평생 친구가 되었지요.”

김정원 씨와 김지애 씨가 20년간 살던 오스트리아의 빈은 제2의 고향이자 끊임없이 음악적 영감을 샘솟게 해주는 곳이었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브람스의 고향이자 하이든, 베토벤과 모차르트 등 수많은 음악가가 활동한 도시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빈은 그 자체로 ‘클래식’이다. 현대식 건물보다 수백 년 역사를 지닌 건물이 많고, 대부분 중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베토벤이 살던 집에 현재도 누군가가 거주하고 있으며, 모차르트의 단골 카페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하이든이 살던 집에 브람스가 살았고, 슈베르트가 걸었던 길을 음악가의 꿈을 키우던 부부 역시 걸었다. 시대를 초월한 레이어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영감을 얻은 부부는 2010년 귀국한 후에도 한동안 빈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빈에 대한 향수는 지금의 집을 찾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됐다.

높은 천장 덕분에 압도적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거실. 부부는 더 많은 사람이 클래식을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종종 하우스 콘서트를 연다. 위층 난간과 계단, 다이닝룸의 빅 테이블, 소파 모두 객석이 된다.

부부는 주방이 고립되지 않는 디자인을 원했다. 원래 계단실과 주방이 막혀 있는 구조였는데, 오른쪽 기둥만 남기고 털어내 침실과 주방, 계단실이 모두 트인 구조가 됐다. 식탁과 아일랜드 전면부에 고재 나무를 장식한 주방 가구는 맞춤 제작한 것.

주방에서 바라본 계단실과 복도. 복도 양쪽 벽면에 책장과 CD장을 짜 넣었다.
집, 또 하나의 객석
“20년 만에 한국에 왔더니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몰두하는 느낌이랄까요? 빈에서는 하루 종일 노천에 앉아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는데, 서울에서는 잠깐이라도 멈춰 있으면 조급해지곤 했죠. 그래서 집만큼은 사색할 수 있는 곳으로 신중하게 구하고 싶었어요.” 김지애 씨가 집을 선택할 때 원한 조건은 두 가지. 높은 천장과 맞은편 풍경을 아파트가 가로막지 않는 것이었다. 빈에서 거주하던 오래된 아파트는 작았지만 천장이 높아 답답하지 않았으며, 이웃집에 미치는 피아노의 소음도 상대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평창동 꼭대기에 자리한 계단식 복층 빌라는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조건에 부합하는 집이었다. 우선 거실과 다이닝룸은 2층 천장이 오픈된 메자닌 구조로, 통창 너머 탁 트인 풍경과 마주한다. 현관을 중심으로 다이닝룸과 거실이 일자로 길게 펼쳐지고, 현관 뒤편으로 게스트룸과 손님용 욕실이 자리한다. 주방과 계단실을 사이에 두고 거실 맞은편은 부부의 공간으로, 작은 거실과 침실을 복층으로 구성했다. 계단실을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피아노가 두 대 놓인 연습실과 동굴방이 나온다. 동굴방은 김정원 씨의 야심작! 2년전 레노베이션하면서 암반과 계단 사이에 빈 공간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암반의 일부를 깎아 작은 밀실을 만들었는데, 평소 친구들과 와인도 마시고 피아노도 치며 노는 아지트가 되었다. 부엌과 계단실 사이의 원목 CD장도 김정원 씨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것. 디지털 음원이 일반화되면서 가지고 있는 CD만 보관하는 정도로 수납하되 대신 장식 효과가 있도록 여백을 살려 디자인했다. “음악이라는 분야가 두각을 드러내고 아무리 연주가로 인정받아도 평생 연주를 보장받는 게 아니어서 늘 불안감이 있어요. 음악적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기능적으로 손가락을 굴려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기까지 준비 기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인 만큼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끊임없이 연습해야 하죠. 집에서 연습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과 비례해 집에 있는 시간이 중요해졌어요. 그래서인지 일반 남자들보다 공간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큰 것 같아요. 집을 원하는 대로 고치니 집에 있는 시간도 한결 편해지고, 자연스레 집에서 리허설도 하는 등 집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죠.”

김정원ㆍ김지애 부부는 종종 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하우스 콘서트를 연다. 콘서트를 하는 날엔 1층 다이닝룸은 물론 2층 난간과 계단이 모두 객석이 된다. 김지애 씨는 SNS로 리허설 장면과 콘서트 영상을 가감 없이 공개하는데, 높은 천고 덕에 웬만한 홀 못지않게 울림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이렇게 피아노 치고 노는 게 너무 재밌어요. 사람 만나는 것 도 좋아하고요. 보통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를 쳐달라고 하면 실례라고 생각해 머뭇거리는데, 저는 신청곡도 받아요.(웃음) 그럴 때마다 아내는 천생 무대 체질이라며 더 부추기지요. 피아노 연주를 그냥 직업으로만 한다면 얼마나 고될까요. 이렇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즐기는 덕분에 고되면서도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두 대의 피아노를 나란히 두고 실제 공연 포스터를 벽에 장식한 아래층 연습실. 천장이 낮아 소리에 집중할 수 있어 세밀한 연습이 필요할 때나 협주곡을 칠 때는 아래층 연습실을 사용한다.

세월의 관록이 느껴지는 악보집과 건반을 프린트한 쿠션. 쿠션, 매트, 스피커까지 피아노를 모티프로 한 소품을 하나 둘 씩 구입해 공간 곳곳에 매치하니 심플하면서도 재미를 주는 요소가 되었다.
“연주자로 살면서 ‘클래식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럴 때마다 아픔 하나씩 가슴에 묻고 사는 현대인에게 음악은 ‘숲’이라고 말합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 추천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점에 꼭 가보라고 하는 것처럼 나를 행복하게 하고 때론 대체할 수 없는 위로가 되어준 ‘음악’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즐기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클래식, 브런치 즐기듯 쉽게!
김정원 피아니스트는 2003년 실내악 대중화를 위해 실력과 매력을 갖춘 해외파 젊은 연주자들을 모아 MIK 앙상블(바이올린 김수빈, 비올라 김상진, 첼로 송영훈)을 결성하며 한국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는 ‘김정원과 친구들’ 이라는 이름으로 김동률과 하림 등 대중 가수와 협업하며 <호로비츠를 위하여>라는 음악영화에도 특별 출연하는 등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로 인해 장르를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피아니스트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것은 정통 클래식에 대한 열정이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매해 한두 차례 독주회를 열고, 곧 음반까지 발매하는 <슈베르트 피아노소나타 전곡 연주>의 대장정이 이를 증명한다. “슈베르트는 스무 곡이 넘는 피아노소나타를 작곡하면서 형식이나 구성에 구애받지 않았어요. 음식에 비유하자면 갖은양념으로 기교를 부린 요리가 아니라 재료 하나를 푹 삶아서 내놓은 것 같은 요리랄까요? 연주자로서 제 사명을 일깨워주고 제가 살아 있는 음악가라는 걸 느끼게 해줬지요.”

오롯이 쉼을 테마로 담백하게 꾸민 침실. 작은 거실과 침실이 반복층 구조로 되어 다양한 공간감을 즐길 수 있다.

작은 거실과 메인 거실 너머의 테라스는 부부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서 마치 산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EMI),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쇼팽 24개 연습곡 등 그간 다양한 독주ㆍ협주곡ㆍ실내악 음반을 발매한 김정원 피아니스트. 연습실 벽에 장식한 레이블을 통해 MIK 앙상블, 김정원과 친구들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엿볼 수 있다.
올해는 롯데콘서트홀의 ‘김정원의 음악 신보’ 시리즈를 시작으로 6월은 모스크바 독주회, 7~8월은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9~10월은 전국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김정원의 음악 신보’는 11월 8일까지 5회 공연이 진행되며, 테너 김세일과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연, 클라라 주미 강, 비올리스트 이한나, 첼리스트 심준호, 피아니스트 스스무 아오야기 등이 독주, 실내악, 듀오 형식으로 협연한다. 모두 오전 11시 30분 공연이라는 점이 특징인데, 브런치 즐기듯 클래식을 들으며 힐링하라는 의미다. 네이버 라이브로 진행하는 ‘김정원의 V 살롱 콘서트’도 같은 맥락. 대중화를 위해 문턱을 낮춘 온ㆍ오프라인 공연이라 생각하면 된다. 슈만은 자신의 음악 신보를 통해 슈베르트 트리오 1번의 초판본을 소개하며 “얼핏 듣기만 해도 세상의 번잡함과 고뇌는 씻은 듯 사라지고 온 세계는 다시 산뜻해지고 밝아질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클래식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이자, 지금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 이유다. 빈의 골목에서 슈베르트의 흔적을 보며 위로받곤 하던 열네 살 소년과 그의 벗은 이제 인생 3악장을 열며 관객에게 그 위로를 돌려주려 한다. 마음을 적시며 스며드는 위로의 선율, 슈베르트 즉흥곡 G플랫 장조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