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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작가 박철 & 천연 염색가 백귀현 부부 자연의 색으로 전통을 각색하다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경기도 광주, 그곳에서도 최신형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쉽게 찾아갈 수 없는 외진 마을에 한지 작가 박철과 천연 염색가 백귀현 부부의 작업실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그들이 창조적인 노동을 하는 작업 공간인 동시에 그 결과로 얻은 귀한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이기도 하다.

1 우리나라의 고가구와 자기, 한지 작품이 단아한 조화를 이룬 거실의 한 부분. 
2 차 한 잔 따라놓고 다정히 마주 앉은 박철과 백귀현 부부.

한지로 조각하는 남편 박철
20여 년 동안 한지 작업에만 매달려온 한지 작가 박철 씨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한지 작가로 꼽힌다.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아직 한지라는 소재가 생소했던 1980년대 중반, 한지가 지닌 고유한 물성의 무한한 창조 가능성을 간파하고 독자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오일 페인팅을 주로 하던 1980년 초반에 파리로 여행을 갔어요. 루브르, 오르세유 등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충격을 받았지요. 아무래도 당시의 작업은 서양 미술을 근간으로 한 것이었으니, 도저히 그들을 앞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만의 독창적인 작업이 무엇일까 구상하기 시작했죠.” 작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고민. 그 해답은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동안 고향 근처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때 댐 건설 때문에 이주한 마을이 있었거든요. 학생들과 그 폐허가 된 마을로 가서 사람들이 버리고 간 고가구며 와당 조각, 문틀, 멍석을 가져왔어요. 그리고 그것들과 한지를 연결시킨 새로운 작업을 구상했죠.” 마을 사람들에게는 폐물, 그러나 그에게는 보물이 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재들은 작품에 한국 작가로서의 독자성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그의 한지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는 이런 독자성과 함께 독창성도 갖추었기 때문이다. 시멘트로 물건의 본을 뜬 다음 그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두드리는 과정을 반복해 입체적인 모양을 얻어내는 그의 작업은 ‘한지 부조회화’라 불린다. 즉 평면의 한지에서 입체적인 형상을 얻어내는 것인데, 이 독특한 작업 방식은 다른 한지 작가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지닌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의 작품에는 와당, 문틀, 멍석 등의 우리나라 전통 사물과 함께 바이올린이 등장한다. “와당이나 멍석은 외국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요소이지요.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해도 다른 문화권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소용없어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물을 집어넣기 시작했어요. 작품에서 바이올린은 서양적인 아름다움의 결정체, 즉 여체를 상징하는데, 이를 우리나라의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아름다움과 결합한 거죠.” 그의 작품이 지닌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독창성은 바로 천연 염색이다. 그는 4~5년 전부터 오배자, 빈낭, 정향, 도토리, 밤, 소목 등을 조색해 한지에 입히기 시작했는데, 그 무겁고 은근한 색은 신기하게도 녹슨 금속 빛과 같은 효과를 낸다. “아크릴 물감이 첫눈을 사로잡는 표면적인 색이라면 천연 염료는 두고두고 볼수록 아름다운 자연 색이죠. 천연 염색을 작업에 사용하게 된 데에는 아내의 도움이 컸어요. 아내가 천염 염색을 하고 있어서 작품에 가장 잘 맞는 자연의 색을 입힐 수 있었죠.”

3 천연 염색한 천을 보관하는 작은 방. 남편의 한지 작품과 아내의 옷, 그리고 옛날 문짝과 인두판, 바늘꽂이, 수저 집 등 그들이 수집한 옛날 규방 소품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4 거실 한쪽에 놓여 있는 커다란 옛날 떡판에 투박한 느낌의 도자기 찻주전자와 찻잔을 올려놓았다.

자연의 색으로 옷을 짓는 아내 백귀현
남편에게 그 공로를 인정받은 아내 백귀현 씨는 15년째 천연 염색을 해오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 시작한 천연 염색은 이제 그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남편 같은 존재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자연에서 색을 얻을 수 있어요. 꽃·열매·나무 등의 식물과 동물, 광물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죠. 그런데 이 천연 원료 중에서 천을 염색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20가지 정도예요. 천연 염색한 천으로 옷을 지어 입으려면 아무래도 견뢰도(빛, 비바람, 세탁, 땀, 마찰 등의 여러 가지 외적 조건에 의해 색이 변하지 않고 견디는 힘)가 좋아야 하는데, 모든 천연 염료가 다 그런 건 아니거든요.” 고운 빛깔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오래오래 보존하는 방법 역시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작품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하다. “천연 염색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서야 내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자신 있게 보일 수 있겠더군요. 천연 염색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방법은 제시할 수 있지만 수학 공식처럼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죠.”


1 이젤 위에 한지 작품을 올려놓으니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그 옆에 놓은 것은 옛날 다듬이판.
2 투명한 아크릴 박스 안에 염색하기 전의 명주 천과 컬러풀하게 천연 염색한 명주를 함께 넣어두었다.

사실 천연 염색은 고된 노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염액을 추출하기 위해 물을 끓이고 따르고 붓는 과정, 염액에 천을 담가 염색하고 매염(섬유에 물감이 잘 물들도록 하는 방법)하는 과정, 그리고 염색한 천을 건조하고 가공하는 과정까지 일일이 시간에 맞춰 몸을 바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마지막에 천에 먹일 풀을 얻기 위해서는 100일 동안 쌀뜨물을 붓고 따르는 과정을 매일 반복해야 한다. 이렇게 힘들게 얻은 천연 염색 천으로 그는 옷을 만든다. 현대적인 감각과 우리나라의 전통미가 적절히 어우러진 그의 옷은 나이 든 사람이 입으면 고상한 멋이, 젊은 사람이 입으면 단아한 맵시가 난다. 무엇보다 색이 곱고 다양하다. “재미있는 점은 같은 원료라도 염색하는 시기나 천의 상태에 따라 색이 다르게 나온다는 거예요. 같은 오배자로 물들여도 보랏빛이 도는 것, 푸른빛이 강한 것 등 느낌이 아주 다르죠. 다양한 색을 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원료를 섞어 사용하는데 남편 작품에 사용한 색도 이렇게 만든 것이에요. 천연 염색은 제 전공인데 어떤 때는 남편이 색을 더 잘 낸답니다.”

부부의 교집합, 그리고 합집합 서로 완전히 다른 작업을 하면서도 천연 염색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부부. “그 덕분에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좋은 천연 색과 염색 방법을 얻기 위해 서로 연구하고 노력하죠. 그뿐만 아니라 작품을 완성한 다음에는 가장 먼저 혹독한 평가를 해줍니다.” 그들의 또 다른 공통분모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공간에도 그대로 드러나 작업실 곳곳에는 고가구와 옛날 소품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부부의 공통된 관심과 취향으로 꾸민 작업실은 그들만큼이나 소탈하고 따뜻하다. 남편이 직접 디자인한 공간은 집처럼 거실을 중심으로 몇 개의 방과 부엌, 넓은 다용도실, 다락 등으로 구성된다. 이 중 큰 방은 아내의 옷 만드는 작업실로, 이와 연결된 다용도실은 천연 염색을 하는 작업실로, 그리고 위층에 세운 가건물은 남편의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간은 남편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사용되는 거실. 천장 높이가 3m가 넘는 거실은 온통 흰색으로, 큰 작품을 여러 개 걸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작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간접조명도 여러 개 설치했다. “작가가 개인 갤러리를 갖추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꼭 넓은 공간이 아니더라도 집 안 어딘가에 자신의 작품을 멋지게 걸어놓아야 하죠. 전시나 구매를 위해 큐레이터나 아트 딜러가 작품을 보여달라고 요청할 때 지저분한 작업실 구석에서 작품을 꺼낸다면 분명 그 가치는 훨씬 떨어져 보일 겁니다. 이는 학생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작업뿐만 아니라 홍보와 마케팅에도 능해야 한다는 현명한 조언. 맞춤 제작만 하는 아내의 경우 옷을 진열하는 전시 공간을 따로 두지 않았지만 천을 보관한 작은 방에서 손님을 맞는다. 그러니 이곳은 부부의 작업뿐만 아니라 전시와 판매까지 담당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3 옷을 만드는 작업실에서 천연 염색 천을 고르고 있는 백귀현 씨.
4 오로지 작품 전시를 위해 사용하는 넓고 높은 거실.

사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는 부부의 작품이 따로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곳곳에 자리한 한지 작품과 천연 염색 옷이 한데 어우러져 부부처럼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벌써 몇 년째 일주일에 두세 번 같이 스포츠 댄스를 배우고 있어요. 극단 ‘자유’의 예술감독인 김정옥 선생이 만드신 퇴촌의 얼굴박물관에서 몇몇 부부가 모여 선생 부부에게 춤을 배우고 있죠. 아직 실력은 좋지 않지만 그보다 부부가 취미를 함께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부부는 살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이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취향을 공유하는가에 비례하는 것 같다. 천연 염색으로 작업 세계가 맞닿아 있는 박철·백귀현 부부, 같은 공간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공유하는 그들이 서로 닮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박진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