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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에 로맨틱한 숨결 불어넣는다 레이스 테이프의 섬세한 매혹
세상이 핑크빛으로만 보이는 공주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레이스가 현실로 사뿐히 내려왔다. 디자이너들의 러브콜을 받고 봄부터 벚꽃처럼 활짝 피어나더니 여름까지 내내 롱런할 예정이다. 모던한 블랙 의상만이 전부였던 사람도 두 손 번쩍 들 레이스의 매력. 그러나 신중한 ‘알뜰파’나 부지런한 ‘DIY족’이라면 옷가게에서 충동 구매하기보다 각양각색의 레이스 테이프가 즐비한 동대문 종합상가를 찾아보자. 간단하게 손바느질만 해도 밋밋했던 헌옷에 로맨틱한 미풍이 스며든다.
photo01 어느새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자리잡은 ‘공주풍’, 여기에 ‘샬랄라’라는 날아갈 듯 가벼운 형용사까지 덧붙여질 경우 마치 실과 바늘처럼 따라붙는 비주얼이 있다. 배경색은 핑크빛, 곱게 세팅한 머리, 압권은 나긋나긋 산들바람에 미동하는 그녀의 옷에 만발한 꽃 같은 레이스다. 어린 시절 쓰고 남은 노트에 열심히 ‘공주님’을 그릴 때 가장 공들였던 부분도 바로 그녀의 소매와 치맛단을 한들한들 장식했던 레이스가 아니었던가! 사팔뜨기 눈이 되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 둥글고 섬세한 능선을 그려 넣은 후, 마침내 완성된 레이스를 바라봤을 때의 황홀함이란. 하지만 그 황홀에 겨워 발을 땅에 못 붙이고 다닐 때도 잠시뿐, 세상이 더 이상 로맨틱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춘기 아이의 마음에서는 물결치던 레이스의 곡선이 지워져버렸다. 머리가 한 뼘 더 굵은 척, 드레스 자락을 놓지 못하는 주변의 친구들을 비웃곤 했다. 완벽하게 무심하여 군더더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질 샌더의 화이트 셔츠라든가, 어딘가 숨겨져 있는 삐딱한 마음을 건드리는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뒤집혀진 재킷 같은 옷에만 눈길이 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유행도 유행이지만 여자들의 눈은 다시 레이스의 조형미를 찾아 되돌아올 때가 있다. 수도승을 가장한 건조한 미니멀리스트와 비정형에만 마음이 쏠리는 아방가르드 예찬론자의 전철을 밟은 후, 섬세한 마음으로 레이스의 꽃무늬를 슬슬 어루만져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소재는 물론 어떤 디자인에서도 차별받지 않는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가끔 변덕을 부릴 뿐 정작 레이스를 차별하거나 외면한 적은 없다. 오히려 숨겨뒀던 연정의 마음을 약속이나 한 듯 표출했다. 풍성한 레이스를 겹겹으로 장식한 발렌시아가의 블라우스, 클로에의 사랑스러운 전원풍 원피스, 질 스튜어트와 안나 수이의 인형 같은 베이비 돌 드레스를 누가 탐내지 않을까. Y&Kei, 문영희, 엔주반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우리 디자이너들도 레이스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갑작스럽게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은 레이스는 봄날의 벚꽃처럼 만개했고, 초여름 바람까지 관통시키며 롱런을 예고하고 있다.
레이스의 정의는 ‘구멍이 뚫린 모양의 성글게 짠 편물’이지만 따지고 들면 그 종류나 명칭도 다양하다. 보통 레이스의 역사는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베네치아 레이스’로 불리는 기퓌르Guipure 레이스가 바로 그것. 이것은 천의 바탕이 되는 그물 구멍이 없고 조각 레이스를 일일이 짜서 그것들을 이은 형태를 띠는데, 부분적으로 밀도가 달라 수작업의 묘미가 한눈에 느껴진다. 보통 베일이나 드레스의 치마 부분 등 커다란 면적을 차지하는 데 쓰였다. 또 하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것이 알랑손Alencon 레이스. 17세기부터 시작되어 로코코 시대를 풍미한 소위 ‘프렌치 레이스’로 유명하다. 기퓌르와 달리 육각형의 그물천 가장자리에 수를 놓아 ‘레이스 모양’을 만드는 니들 포인트 기법을 사용한다(손으로 만져봤을 때 한 가지 실로 죽 이어져 무늬를 이룬 것이 기퓌르, 망사 위에 도톰하게 수를 놓아 질감이 느껴지는 것을 알랑손이라고 구분하면 간편하다). 이들 외에도 기법에 따라 보더Border 레이스(가장자리 부분에만 무늬를 넣은 것), 크로셰Crochet 레이스(코바늘뜨기의 원리로 완성한 것), 토션Torchon 레이스(실을 여러 번 꼬아 수편직의 느낌으로 만드는 것)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아일랜드의 리머릭Limerick 레이스, 프랑스 북부의 샹틀리Chantilly 레이스와 발랑시엔Valenciennes 레이스, 영국의 셰틀랜드Shetland 레이스,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 레이스 등 생산지에 따른 구분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의상학과 학생도 아닌데 복식 용어까지 읊을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의 ‘감’에 맞는 레이스를 선택하면 그뿐이다. 지금은 백화점에 가든, 브랜드의 전문 매장에 가든, 동대문 패션 타운이나 홍대 앞이나 삼청동의 개성적인 살롱에 가든 수많은 레이스 아이템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모양도 느낌도 가지가지인 레이스 테이프
1 약간 도톰한 면 실로 짠 내추럴 무드의 샹틀리 레이스. 클래식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의 디테일을 가미할 때 그만일 듯. 2 새틴이나 셔닐 등 촘촘하고 부드러운 섬유를 꽃이나 리본 등의 문양으로 재단한 다음 니들 포인트로 이어 만든 레이스 테이프. 신축성이 있는 실과 섬유로 만들어서 움직임이 많은 소매나 헴라인 부분에 사용하면 좋다. 3‘스위스 임브로이더리’라 불리는 흰 실 자수를 응용한 화이트 목면 레이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같이 순수한 전원풍의 느낌을 불어넣을 수 있다. 4 색깔 있는 실로 짠 후 비즈와 스팽글을 부착해 화려한 인상을 준 레이스 테이프로 가격이 조금 높은 편. 밋밋한 의상에 강렬한 포인트를 줄 수 있다. 5 정확히 말하면 레이스는 아니지만 꽃 문양 뜨개를 연장해 계속 이어가도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길게 이어진 것을 쓰거나 문양 자체를 잘라 아플리케 디테일로 사용할 수도 있다.
 
 
photo01 하지만 마음은 끌려도 유행만 믿고 지갑을 활짝 열 마음은 추호도 없는 ‘알뜰한 당신’이나오물조물 손으로 만드는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은 ‘열혈 DIY족’이라면 동대문 종합상가로 함께 가자. 때 아닌 호황을 맞아 신이 난 도매 상점에는 수십, 수백 가지의 레이스가 진열되어 있다. 솜씨 좋은 사람이라면 넓은 면적의 망사 레이스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겠지만, 초보자라면 레이스 테이프로 입던 옷에 ‘디테일’을 가미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우선 그 디테일을 적용할 헌옷을 살펴보고 여기에 어울릴 만한 레이스 테이프를 찾는 것이 스타트. 활용 방법은 다양하다. 누구나 한두 벌 정도 갖고 있을 법한 흰색 셔츠나 블라우스의 소매 끝, 밑단, 칼라나 단추가 달린 앞섶 등에 장식하면 요즘 유행인 로맨틱한 레이스 블라우스가 완성된다. 약간 품이 넉넉한 시폰 소재 민소매 톱은 가슴 아래 부분에 개더를 잡고 레이스를 가로로 쭉 박으면 하이 웨이스트 라인의 빅토리안 스타일 의상으로 거듭날 수 있다. 염색이 빠지거나 밑단의 올이 닳은 데님 팬츠의 경우 무릎 라인 정도로 자른 뒤, 밑단을 한 번 접고 여기에 레이스를 달아보면 여성적인 크롭트 팬츠로 변신한다. 또한 레이스의 꽃이나 다마스크 문양이 큼직큼직하다면 문양 자체를 뜯어내 옷이나 가방 등에 아플리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럼 우선 레이스부터 구하러 가자. 물론 대량 거래가 가능한 ‘업계’ 사람이 아니라면 약간 눈총을 받을 수도 있고, 장사를 개시할 때쯤 가면 아예 소박을 맞을 위험도 없지 않다(실제로 몇 군데에서 1~2야드 끊어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했다).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틈을 노려 필요한 만큼만 고르는 편이 현명하다. 종류에 따라 레이스 테이프 1야드에 6백~7백 원부터 2천~3천 원(비즈 등 장식물이 달린 컬러 레이스)까지 가격의 폭이 넓다. 테이프 한 롤을 산다면 1야드당 가격은 떨어지겠지만 시험 삼아 헌옷에 장식을 넣는 정도라면 조금만, 여러 종류 사는 편이 낫다. 마음에 드는 레이스를 구입했다면 여기에 맞는(정확히 말하면 묻힐 만한) 컬러와 재질의 실을 구입하도록 한다. 꿰맸을 경우 실이 레이스의 촘촘한 조직보다 튀어서는 곤란하기 때문. 박음질하는 부분이 가려진다면 미싱을 사용해도 좋지만 블라우스의 소매나 절개선, 셔츠 아랫단이나 치마의 헴라인 정도에 다는 것이라면 손바느질만으로도 충분할 듯싶다. 레이스를 부착할 곳에 핀을 꼽아가면서 자리를 잡은 뒤 실이 잘 보이지 않게 촘촘히 박음질 또는 새발뜨기로 고정시킨 다음, 다리미로 살짝 한 번 누르듯이 다려주면 된다.
어떤가, 지극히 간단하지 않은가? 방법은 이토록 심플하니 마음먹기만 하면 금방이다. 그렇다고 안온한 침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잠옷 공주’의 마인드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옷장에서 잠자고 있는 심심한 셔츠나 스커트에 로맨틱한 숨결을 불어넣어 눈을 뜨게 만들자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잿빛이라 해도 소매 끝에서 살랑거리는 레이스의 속삭임을 들을 때만큼은 마음이 섬세해지고 스스로가 소중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과대망상증에 빠진 공주는 ‘아웃’이어도 아름다운 감각을 지닌 여자는 흔쾌히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유행의 쳇바퀴가 다시금 돌기 시작해 단물 쏙 빠진 레이스가 쇼윈도에서 썰물처럼 밀려난다 해도 여자들이 레이스를 완전히 포기할 리는 없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해도 레이스 란제리만큼은 내밀한 아름다움을 이어가지 않을까?
 
 
손바느질로 완성, 레이스 테이프 DIY
 


자투리 레이스로 간단하게 만든 브로치. 레이스를 꽃잎 모양으로 모아 고정시킨 다음 꽃술 장식 또는 비즈 등으로 중앙을 장식하고, 뒤쪽에 글루건으로 옷핀이 달린 둥근 판을 붙인다. 긴 레이스 테이프와 인조 진주 줄을 길게 이어 장식해도 멋지다.


밋밋한 단색 면 티셔츠의 네크라인에 레이스 테이프를 둘러보자. 단추가 달린 슬릿 부분까지 테이프로 자연스럽게 감쌌다.
 


아이의 하얀 실내화에 소박하지만 개성적인 포인트를 가미해봤다. 고무줄 스트랩 부분에 테이프를 두르고 여기에 잘 어울리는 갈색 단추를 달아 완성. 갈색 코튼 원피스를 입고 이 실내화를 신으면 근사한 조화를 이룰 듯싶다.


이번 시즌 유행 액세서리 중 하나가 바로 벨트. 방사형의 꽃잎 문양이 뚜렷한 토션 레이스 테이프를 장식성 뛰어난 벨트로 활용했다. 테이프 끄트머리는 같은 실로 오버로크해 마무리하고, 길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원형 버클을 중앙에 달았다.
 
 


동대문 종합상가에 가보면 커다란 꽃 모양의 레이스를 길게 테이프처럼 연결한 것도 많이 눈에 띈다. 적당한 길이로 잘라 자투리 천과 함께 토트백에 아플리케했다. 다소 칙칙해 보였던 가방이 환하게 살아난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걸쳐 입는 화가의 덧옷인 스목Smock 형태의 블라우스가 최근 많이 선보이고 있다. 요크 부분에 주름을 넣은 것이 특징인데, 이 요크 부분에 레이스를 둘러 보다 장식적이고 클래식한 느낌을 가미했다.
 


문양이 지극히 섬세한 전형적인 프렌치 레이스. 순백색 시폰 의상의 디테일로 사용하면 좋을 듯싶다. 옷에 활용해도 좋지만 로맨틱한 인테리어 소품과도 잘 어울릴 듯.


두 가지 레이스 테이프를 함께 활용해도 재미있다. 화이트 리넨 셔츠의 소맷부리에 하얀 레이스를 부착하고 그 위에 검정 레이스를 한 줄 더 넣어 악센트를 줬다
 
 
정유희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