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건축가 조병수 씨 자연은 집을 품고 집은 자연을 담는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안에서 행해지는 것들에 주목하는 건축가 조병수 씨. 그가 짓는 집에는 언제나 자연과 사람이 만나는 풍경이 담겨 있다. 비와 흙냄새, 하늘과 구름, 바람과 햇살의 소중함을 아는 그는 자연과의 소통을 화두로 건축의 기능과 미학을 함께 풀어가고 있다.


건축가 조병수 씨가 수곡리 ㅁ자 집 지붕에 올라 산과 들을 바라보며 스케치하고 있다. 수곡리 ㅁ자 집은 ㅁ자 상자로 지은 건물 안에 ㅁ자 중정과 ㅁ자 연못을 들이고 ㅁ자 하늘을 품었다. 밖에서 보면 이 집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고립의 공간이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네모난 콘크리트 상자 속에 네모난 유리 상자를 집어넣은 듯 중정으로 뚫린 창이 자연과 소통하는 길을 열어준다.

책상은 그 주인을 상상하게 한다. 책상을 장악하고 있는 서류는 직업군을 알려주고, 정리 상태는 주인의 성격을 가늠하게 하며, 책상 위 사물들은 취향과 관심사도 알려준다. 일반화할 수 없는 주장이긴 하나 사람에 관한 다양한 단서로 바라보면 책상은 흥미로운 공간이 된다. 그것이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것이라며 그 흥미는 배가된다. 건축가 조병수 씨를 만나기 위해 에둘러 책상 이야기를 먼저 꺼내보았다. 그를 향한 촉각의 안테나를 세우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책상’이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건축가 조병수 씨의 양평 작업실을 한나절 정도 빌린 적이 있었다. 마땅한 촬영장을 찾지 못해 애를 먹던 중 일면불식인 그에게 전화를 걸어 ‘뻔뻔스럽게도’ 집 좀 빌리자 했고, 마음 좋은 건축가는 흔쾌히 작업실 열쇠를 내주었다. 주인 없는 집에서 마주친 ‘주인이 자리를 비운’ 책상은 유독 책상이라는 공간에 관심이 많은 이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커다란 유선형의 멋스러운 좌식 테이블. 그 위로 펼쳐진 사물들을 들여다보며 건축가에 대한 추리를 시작했다. 스케치 뭉치와 연필 꾸러미, 알 수 없는 내용으로 끼적거린 메모, 미술 잡지와 건축 잡지, 아트 북을 포함한 몇 권의 책… 추측 가능한 풍경이다. 그러나 그가 앉았을 법한 자리에 가부좌를 틀어 앉아보니, 자연스레 오른손이 닿는 자리에 윤동주 시집이 한 권 놓여 있었다. 건축가의 책상에서 시집을 발견한 것이 무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만 오른손 자리의 시집은 그의 ‘현재형’을 말해주는 하나의 단서로 다가왔다.


1 건축가 조병수 씨.
2 질박하고 멋스러운 질감의 목물은 그가 매우 좋아하는 물건이다.



3 양평 수곡리 ㅁ자 집의 여름 풍경. 조병수 씨가 작업실로 사용하는 집으로 <행복> 2007년 7월호에 소개되기도 했다.

두 번의 계절이 바뀌고 그가 작업실 근처에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집을 짓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책상은 주인의 현재를 알려주는 바로미터라는 어설픈 탐정의 명제가 증명되는 순간, ‘그 집’을 핑계 삼아 건축가 조병수 씨를 만났다.
그의 사무실은 아파트와 근린 상가 건물로 둘러싸인 2층 건물 옥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옥상 콘크리트 바닥을 대지 삼아 지은 건물을 바라보며 이것이 건축가라면 누구나 상상 가능한 일인지, 그만의 희한한 재주인지 궁금했다. ㄷ자 모양의 건물은 가운데 중정을 품고 있었고 앞마당 삼은 데크에는 작은 화단도 있었다. 바람 좋고 볕 좋은 날이면 야외 테이블에 앉아 콧노래 부르며 일해도 좋을 것 같다. 아니다. 중정과 데크를 덮고 있는 투명한 유리 차양을 보니 봄비 내리는 오후, 창문 밖으로 한 걸음 내딛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즐기며 망중한에 빠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건축가 조병수. 건축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혹은 그 앞을 지나쳤을 법한 작품부터 나열해보자. 황인용 씨가 운영하는 헤이리 카메라타 음악실, 작가 이외수 씨의 화천 집, 사간 갤러리, <행복> 2007년 7월호에 소개한 수곡리 ㅁ자 집, 1999년 건축문화의 해를 맞아 선정한 ‘지난 1백 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7개의 주택’에 선정된 ‘일산 ㄱ자 집’…. 1백 년 역사의 건축 잡지 <아키텍처 레코드>에서 뽑은 세계의 선도적 건축가 11명 중 한 명, 창간 3년 만에 미국 건축계에 돌풍을 일으킨 월간지 <드웰>이 뽑은 세계 3인의 개성 있는 컨템퍼러리 디자이너. 1970년대 중반 광화문에 들어선 세종문화회관과 교보빌딩을 보고 ‘사람이 저렇게 큰 건물을 지을 수 있다니…. 이런 일을 하면서 살면 정말 멋지겠다!’ 감탄을 연발하던 순박했던 고등학생은 이제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견 건축가가 되어 있다.


4 서초동 사무실은 ㄷ자형으로 가운데 중정을 두고 유리로 천장을 덮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했다.
5 사무실 앞쪽으로 데크를 깔고 화단을 가꾸어 앞마당 삼았다.


그와의 첫 만남은 매우 짧았다. 다음 날 싱가포르로 출장을 떠나야 한다는 그의 전화기는 쉴 새 없이 울려댔고, 우리는 일주일 뒤 윤동주 시인과 관련 있다는 ‘그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채 헤어졌다. 일주일 뒤 찾아간 ‘그 집’은 예상과 달리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계획했던 촬영이 무산되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공사 현장을 구석구석 살피는 운동화 차림의 건축가 뒤를 따르며 드디어 시인 윤동주와 한 채의 집과 건축가 조병수, 그 인연의 고리를 풀어갈 수 있었다. 그는 이곳을 ‘땅 집’이라 불렀다. 땅 집은 곧 하늘 집이라며 그는 마당과 집이 땅속에 박혀 평평한 지붕이 곧 지표가 되는 집을 설명해주었다. 땅속에 박힌 14×17m의 콘크리트 박스 속에 지은 6평의 작은 집. 윤동주 시인에게 바치는 한 건축가의 헌정 시와 다름 아닌 땅 집은 시 낭송회 같은 작은 모임에 사용할 것이라 했다.


1 서초동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조병수 씨.

“나는 한 건축가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또한 생명체로서 이곳을 만들고 곧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 (중략) 하늘과 그 땅, 흙 마당에서 달을 보고 싶다. 파란 바람이 부는 사각 하늘 속 가을을 보고 싶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윤동주의 ‘자화상’과 ‘쉽게 쓰여진 시’와 같은 이 시대의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 그가 땅 집에 관해 적어놓은 글 중 일부다. 시인이 겪었을 시대적 압박을 현대인의 삶에 대치시키면 시인의 모습은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와 다름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인의 모습이 그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고.
새봄을 시샘하는 추위에 몸이 얼어붙은 우리는 그의 작업실(수곡리 ㅁ자 집)로 자리를 옮겼다. 따끈한 차 한잔과 감미로운 음악을 대접받으며 네모난 창 밖으로 네모난 연못과 네모난 하늘을 바라보며 비로소 그와 마주 앉았다. “나는 건물 모양을 먼저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죠. ‘여기쯤 앉아서 밥을 먹으면 좋겠구나, 아 저기쯤 해바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좋겠구나, 이쯤에 흙 마당을 두면 비 오는 날 흙냄새를 맡을 수 있겠구나’ 하고요.” 이 경험적 공간에 대한 상상은 많은 부분 어릴 적 기억에 의존한다고 한다. 어릴 적 친구네 집 툇마루에서 느꼈던 햇살의 반짝임,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와 함께 피어 오르던 흙 냄새 같은 구체적인 유년의 기억을 들려주는 모습에서 그의 섬세한 감성이 전해졌다.


2 작업실인 양평 수곡리 ㅁ자 집에서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반인 파블로 카살의 바흐 무반주 첼로 곡을 틀어주었다.
3 그는 오래된 목물과 석물, 자연석 같은 투박하지만 담백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을 좋아한다. 사진은 제주도 전통 가옥에서 나온 창고 문들이다.


그는 15년 전 사무실을 독립하고 처음으로 시도했던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연한 기회에 서울의 달동네를 가보게 되었어요. 소형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달동네는 원래 그 땅의 지형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어요. 따라서 가파른 계단이나 미로 같은 골목 등 예상치 못한 드라마틱한 장소를 만나게 되는 낭만도 있지만, 자연 지형에 순응하면서도 채광이나 환기 등 공간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건들을 찾아가는 해법에서 삶의 치열함을 엿볼 수 있었어요.” 그는 그곳에서 우리 건축이 예로부터 품고 있던 옛집의 지혜와, 마당과 골목이라는 열린 공간의 정서를 배울 수 있었다고도 했다. 공사비 절감을 최우선으로 하는 달동네 집 장수의 경제 논리가 낳은 건축에도 배움은 있었다. 최소한의 것만 지닌 단순한 공간의 담백한 힘!
“음악도 간단한 것을 좋아해요. 한 개나 두 개 정도 악기로 연주한 곡을 주로 듣지요.” 교향곡처럼 여러 악기가 섞인 음악은 듣지 않는다며 그는 무반주 첼로 곡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베토벤이 세련된 맛이 있다면 바흐는 단순함 속에서 힘이 있어 좋아요. 음식이나 그림이나, 건축도 마찬가지예요. 단순하고 담백한 것이 좋아요. 평양 냉면처럼.” 언젠가 그의 글에서 보았던 “청자의 섬세함보다는 백자의 담백함”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생각이 그리 멀리 갈 것이 뭐 있겠는가, 그와 마주한 이 네모난 공간과 파블로 카살 Pablo Casal의 연주로 전해지는 바흐의 첼로 선율이 바로 한 모습인 것을….

 
4 ‘포에트리 오브 와이어 Poetry of Wire’라는 주제로 2004년 독일에서 전시했던 오브제들. 와이어로 바람, 나무, 구름(왼쪽부터)을 표현한 것이다. 건축에서 와이어의 잠재된 가능성을 찾기 위해 시도했던 것으로 실제 전시에서는 바람, 나무, 구름을 비롯해 비, 소리 등 12가지 주제를 와이어 조형 작품으로 선보였다.

그는 요즘 빛을 주제로 설치 미술 전시를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은 다 좋지만 그중 빛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현상을 빚어낸다고. 그는 비와 흙냄새, 햇살과 바람을 이야기했듯 빛과 그림자의 굴절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장면들을 묘사해준다. ‘건축에서 95%는 세상과의 타협이며 건축가의 예술적 욕망과 창조성에 주어지는 영역은 채 5%도 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세상을 향한 불평이 아니다. 건축은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선행해야 하는 ‘만드는 것’이며, 보여지는 것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경험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담고 있는 말이다. 디자인 만능 시대, 시각적 아름다움이 지켜져야 할 다른 것들의 가치마저 침범하는 시대에 디자인 우선주의를 경계하는 건축가가 ‘만드는’ 건축에 세상이 주목하는 이유는 그 중심에 언제나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5 서초동 사무실에서 회의 탁자는 그의 책상이자 사무실이다. 이곳은 아침 햇살부터 저녁노을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큰 창을 품고 있다.

김성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