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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만드는 박영숙의 흰빛 축제
‘경주 불국사 꼬마’가 걸어온 30년의 시간은 가히 거룩하다. 그의 미감을 단숨에 알아차린 이우환 선생의 절대적 신뢰에 힘을 얻어 평생 도자기에 바친 그의 삶은 조선 도공의 혼을 닮았다. 그가 ‘최순우 옛집’에서 백자 기증전 <흰 빛의 세계, 박영숙 백자>를 연다.


최순우 옛집에 박영숙의 백자가 들어가던 날
도자기는 하면 할수록 할 맛이 난다고, 사람이 찾아와도 귀찮고 시간이 아까워 만남도 거절해왔다고 했다. 그렇게 통 인터뷰도 마다하던 박영숙 도예가가 본인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건 최순우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다. 그는 2014년 4월 최순우 옛집 중수기 현판 제막식에 참석했을 때 백자가 공간을 빛내주면 좋겠다 생각했고, 때마침 혜곡최순우기념관 김홍남 관장의 제안으로 기증전을 열게 된 것. 불국사를 앞마당 삼아 놀이하 듯 골동을 모으던 시절, 최순우 선생이 “토기만 하지 말고 목가구와 백자를 한번 찾아보라”며 그를 백자의 세계로 처음 이끌어주었으니 이런 운명도 없다. 디자인하우스 이영혜 대표가 전시 도록 제작에 발 벗고 나섰고, 최순우 옛집에서 작품 촬영을 했다. “촬영하는 날 어찌나 나오기가 싫은지…. 생각해보면 참 이게 보통 인연이 아니구나, 내가 돌아가신 선생의 혼魂에게 심판을 받는구나. ‘제가 여기까지 했습니다, 선생님 봐주십시오.’ 정말 그런 마음이었어요.” 이번 전시만을 위해 준비한 작품도 있다. “마지막 작품은 정말 색이 잘 나왔어요. 그렇게 나오기가 쉽지 않지. 내 작품이 선생님 댁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완벽한 도자기를 만들어라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이른바 ‘선생님’들을 따라다니며 골동을 모았다. 불국사 앞에서 기념품 판매점을 하고, 호텔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삼촌 덕분에 옛날 물건이 지천이었다. 서울에서 부러 ‘불국사 꼬마’를 찾아오는 일이 있을 만큼 소녀는 물건 보는 눈이 남달랐다. 황수영, 진홍섭, 조자룡, 최순우 선생이 고려당 케이크니, 금강제화 구두를 들고 찾아와 “네 마음에 드는 것을 모아놔라” 하고 지령을 내리곤 했다. 스물한살에 불국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인사동에서 도자기 매장을 운영하는 남편을 따라 상경해 살았다. 도예가의 길을 걸은 건 당시 만난 이우환 선생 때문이었다. 이우환 선생은 박영숙이 주물럭주물럭 재미로 만든 도자기의 비례를 보고 단번에 타고난 감각을 알아봤고, 그를 도예가의 길로 이끌었다.

(위부터) 순백자 양각주름문병(13×3.5×9.5cm), 순백자 편호(17.8×3.5×7.5cm), 순백자 양각주름문 원형합(10.4×15.7×10.2cm).
시작은 생활 자기였다. “실패, 실패, 실패 끝에 살려내는 거지. 찻주전자는 절수가 되고 물이 흐르지 않고 똑떨어지고, 뚜껑이 흔들리지 않아 완벽하게 딱 맞아떨어지게 만드는 게 상당히 어려워요. 만들어놓으면 부피가 15~20% 정도 줄거든. 과학을, 수학을 머리가 아니고 손에서 익히는 거지요. 그래서 생활자기를 터득하지 않고 작품을 만들면 인정하기가 어려운 거야.” 무게와 쓰임새, 비례와 사용자의 편의를 고려해 형태가 완벽해야 하는 생활 자기는 그의 사명이자, 이우환 선생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그는 이우환 선생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더욱 혹사하며 도자기를 굽고 또 구웠다.

청화백자 원형합(7.4× 6.3cm), 순백자 무릎 연적(8.8×9.2cm), 청화백자 사각합 (4.2×6.1×6.1cm), 백자청화진사철채문 사각합(4.3×6.2× 6.2cm), 청화백자 진사문 사각합(7.4×6.1×6.1cm). 박영숙 작가는 완벽한 실용미를 추구하는 생활 자기야말로 도자기 제작의 기본이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기술에 현대적 감각을 더하다
박영숙 작가는 요즘 분청과 백자 작업을 번갈아 한다. 분청 작업은 종일 매달려야 하는 노동의 산물이다. 그는 흙이 수분을 머금고 있을 때 같은 마음, 한 호흡으로 단숨에 칠한다. 때론 사랑하는 애인을 만지듯, 때론 아이를 달래듯 순식간에 그린다. 그러면 어느새 새가 되고 물고기가 되고 손주가 되고 꽃이 된다. 이것을 “흙먼지를 모아 빚어서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박영숙. 그의 도자 예술에 대해 쓴
혜곡최순우기념관 김홍남 관장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박영숙의 도자 예술은 조선 도공들이 도달한 정점에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출발한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혼은 이어받되 되돌아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의 소명이다. 다음 바통을 이어받을 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내 생명 다할 때까지 갈 때까지 가보자는 것이 그의 기백이고 각오다. 따라서 그의 도자는 조선시대 분청과 백자를 답습하거나 전승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이 안았던 시대의 한계를 현대의 도예가로서 터득하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것이다.”

소헌 정양모 선생의 글씨가 담긴 청화백자 큰 접시(지름 36.2cm). 
박영숙은 자신의 백자를 스스로 평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기술에 지금 이 시대의 노하우를 더해 만들어내는 것이 내 백자입니다. 도자기를 1330℃로 구워야 한다면, 처음부터 1330℃까지 온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며칠 동안 불을 넣어서 뜸을 들여요. 밥 뜸 들이듯이. 중국 자기는 정말 큰 것이 많아요. 전통 중국 건축이 양식, 스케일 같은 게 달라 그래야 했겠지만…. 난 우리도 그만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 우리 생활 공간이 넓어지고 커진 것에 맞추어서 달항아리도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옛날 것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지. 옛날 것은 옛날 시대에 필요했고, 나는 지금 이 시대의 백자를 원했으니까. 할 수 있는 만큼 크고 순백색이 나오게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어요.”

한옥 안으로 은은하게 비쳐드는 빛과 참 잘 어울리는 순백자 대병(36.2×7×13cm)과 순백자 제기( 11.7×33cm). 
해인사 ‘경주 보살’과 성철 스님
최순우, 이우환 선생과 함께 그의 도자기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성철 스님이다. ‘불국사 꼬마’ 이야기에 50년도 더 된 옛일이라며 손사래 치더니 성철 스님과의 인연을 언급할 때는 새 신발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목소리가 높아진다. “갓 서른 무렵에 갔을걸. 3천 배를 하려면 선수도 여섯 시간 걸려요. 한 시간에 5백 배 밖에 못해. 5일 용맹정진이라 해서 1백8배 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통 못 있겠더라고. 애기 낳는 것보다 덜 아프니까 참으라 하는데, 아이를 하루에 하나씩 낳으면 낳았지 못하겠다고 뛰쳐나와 이를 닦았어요, 내가. 2백 명이 같이 자고 공양하는 것도 사람 사는 꼴이 아니고.” 그렇게 뛰쳐나와 마주한 사람이 성철 스님이었다. “뭐 할 일이 없다고, 집에 가서 일이나 하지”라고 투덜대는 박영숙에게 토종꿀을 주며 살살 달랬다. “나중에 큰일이 닥치면 지금 다리 아픈 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뭐 먹고 싶나?”

최순우 선생의 흑백사진과 박영숙 도자(지름 30.5cm). 도자 위에 이우환 선생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
해인사에서 ‘경주 보살’이라고 하면 다 알 만큼 성철 스님과 사이가 좋았다. 성철 스님은 박영숙의 아이 같은 천진함을, 거짓 없는 당당함을, 스스로 제 길에 대해 골몰하는 그 깊이를 좋아했다. 백련암에서 3천 배를 올리던 날, 육신이 고되어 포기하려는 마음을 붙들어준 분이 성철 스님이었다. “니는 여기서 1등 하지 말고, 전 세계에 나가서 1등을 해라. 내가 도와줄게.” 도자기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해인사를 찾아가 밤낮으로 기도했다. 그렇게 3천 배를 해온 세월이 20년. 성철 스님이 입적할 때 현대적 미감이 돋보이는 부도전을 제안한 이도 박영숙이었다. 돌아가신 이후에도 스님은 그의 꿈에 나타나서 “너 왜 그렇게 헤매고 있니. 니 고향에 함 가봐라” 하고 해결책을 툭툭 던지고 사라진다. 그리운 듯 옛 생각에 잠기곤 하는 그는 여전히 집에 부처님과 성철 스님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기도한다. “제가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게 저를 도와주십시오.”

(위부터) 순백자 무지병( 12×2.7×8cm), 순백자 사각합(8.2×10.2×9.3cm), 순백자 양각주름문 형합(12.3×12.5×8.8cm), 순백자 필통(15.9×13.7×13.4cm).
도자기 만드는 건 부부가 사는 것과 같다
“이 달항아리 가운데 선이 있지요? 위아래 그릇을 두 개 만들어 엎어 붙인 거예요. 흙이 타닥타닥 마를 때 붙여야 하는데 그게 참 고돼. 안 붙고 터져요. 아주 예민하거든. 깨지고 또 깨지고. 그걸 이래저래 해봐도 안 되니까 거울처럼 반들반들하게 문지르면서 붙이는데, 꼭 3천 배 하는 것과 같아. 공들이는 게….” 비례가 조금만 맞지 않아도 불에 주저앉아버린다. 어느 방향이라도 똑같이 줄어드는 법이 없다. 유약의 두께가, 손길 한 번이 머리카락 한 올만큼 달라져도 작품이 달라진단다.

순백자 입호(33.5×14.5×15.3cm)와 순백자 대호(51.7×26×50.5cm). 백자가 놓인 마당에는 최순우 선생이 생전에 직접 심고 가꾼 수련, 산사나무, 대나무 등이 남아 있다. 
“불이 기분 좋은 날이 있어요. 바람 안 불고, 날씨가 좋고, 그 과정이 다 맞아떨어져야 해요. 부부가 좋아서만 살지 않잖아요. 재판관 앞에서 다시 한 번 용서하고 보듬고 함 살아보자고 맹세하는 것과 똑같은 거야. 서로를 껴안아주며 살아나는 거야. 나는 50% 권리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자연과 불이 같이 도와줘요.”

순백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동을 쏟았을까. 아기 낳는 심정으로 기도하고 빚고 삼키고 울며 주무르고 매만지며 뜨겁게 걸어온 덕에 눈이 망가지는 줄도 몰랐다. 실명 위기에까지 놓였지만, 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 중이라니 이내 가슴을 쓸어내린다. ‘덕종어보德宗御寶(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요절한 아버지를 기려 1471년 제작한 도장)’를 기증한 이의 외손자인 프랭크 베일리는 “훌륭한 도자기 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에는 어디에든 그 문화를 잇는 씨가 남아 있을 것이다.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그 민족이 가진 재능이 이어질 것이고, 조선시대 백자는 박영숙의 작품에서 살아났다”고 말했다. 박영숙은 그런 도예가다. 도자기를 향한 그의 집념이 조선시대와 이 시대를 이어주리라 믿는다.

최순우 선생의 정갈한 목가구 위에 놓인 순백자 양각부조 거치형 대발(12.2×18.5×9.7cm). 벽에는 이우환 선생의 그림이 그려진 도자(지름 33cm)가 걸려 있다.
도예가 박영숙은...
1979년 박영숙 도자기 스튜디오 설립, 1983년 뉴욕 한국 갤러리에서 백자전을 열었다. 1986년 제11회 한국 전통 공예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했고, 1991년 도쿄 우에다 갤러리에서 <한국 예술전>과 타이베이에서 개인전을 열며 ‘달항아리’ 붐을 일으켰다.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내한 당시 박영숙 아틀리에를 방문해 큰 주목을 끌었고, 2002년 뉴욕에 ‘갤러리 박Gallery Park’을 개관해 백자, 분청사기 전시를 열었다. 2005년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 <백자달항아리>전, 2006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 박물관 전시, 2007년 영국 대영박물관 특별전, 2008년 미국 시애틀 박물관 전시 등 수많은 전시를 열었다. 2012년 시드니 비엔날레에 달항아리가 초청을 받았으며,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전,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청화, 푸른빛에 물들다> 전시에 출품했다. 영국 대영박물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미국 휴스턴 미술관, 하버드 대학교 박물관, 시애틀 박물관,필라델피아 박물관 등 전 세계 박물관과 미술관 15곳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최순우 옛집 기금 마련을 위한 기증 전시 <흰 빛의 세계, 박영숙 백자>
기간 5월 26일~7월 25일(화~토요일, 오전 10시~오후 4시)
문화 강좌 6월 17일 오후 4시, ‘흰 빛의 세계, 우리 문화 속 백자’ 장남원(이화여대 교수) 6월 27일 오후 3시, ‘우리 시대 최고의 백자와 아트 컬렉션’ 박혜경(에이트인스티튜트 대표)
장소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15길 9 최순우 옛집
주최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주관 혜곡최순우기념관, 아시아뮤지엄연구소
후원 박영숙요, 디자인하우스, 서울시
문화 강좌와 사전 신청 문의 02-3675-3401~2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김동오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