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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장원실 아주 물질적인 은유
하얀 것은 합성수지요 검은 것은 철사. 얼핏 종이와 펜처럼 보이는 화가 장원실의 작업 재료다. 그는 자신이 품어온 이야기를 하나의 연작으로 완성하기까지 때로는 장인처럼, 때로는 수행자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공정을 반복한다. 철사와 합성수지로 쌓고 엮어낸 나지막한 은유의 세계. 그 시작과 끝에 ‘오래된 시詩’가 있다.

화가 장원실의 작업실에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오래된 시’ 연작이 빼곡하다. 그는 10년 가까이 외부와 단절된 채 마치 시를 쓰듯 그림을 그려왔다. 눈에 보이는 건 책이나 의자 같은 일상적 소재지만, 그 안에는 화가 자신의 오랜 기억, 깊은 사람 이야기가 담겨 있다.
경기도 양평에서도 시골길을 한동안 굽이굽이 들어가야 어느 화가의 작업실에 닿는다. 오래된 농가를 개조한 주택 겸 작업실은 이미 파르스름한 초겨울 정적에 휩싸여 있다. 군데군데 벗겨지고 녹슨 철제 난로가 공간의 역사처럼 우뚝 솟은 거실에는 그의 그림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온갖 일상 사물이 널려 있다. 책, 식물, 의자, 전구, 연필…. 그리고 그 틈에서 매일 일어나 밥을 먹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장원실. 꼭 청화자기 같은 푸른 식물 그림으로 2008년 11월호 <행복>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그는 2011년 개인전을 끝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초, 기나긴 침묵을 깨고 두툼한 작품 도록 <오래된 시>를 조심스레 세상에 내놨다. 그 한 권의 책, 시간의 더께가 앉은 ‘오래된 신작’들이 이 여정의 시작점이었다. 달라진 그림, 달라진 세계. 그는 지난 8년간 은둔자처럼 양평 깊숙이 틀어박힌 채 홀로 어떤 세계에 골몰했을까?

개인전을 연 지 8년 만입니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정확히 2011년의 개인전을 끝으로 외부 활동을 거의 안했어요. 제 작품 스타일이 좀 달라졌는데, 그걸 바꾸기까지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거든요. 느린 편이기도 하지만요. 제가 쓰는 재료는 레진(보형물 재료로 사용하는 합성수지)이에요. 레진은 여러모로 민감한 재료라서 작업 방식이 바뀌니 손에 익히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어요.

이전에도 작품 만드는 공정이 복잡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땐 가마에 구운 코발트 유약을 가루로 만들어 그림을 그렸죠. 지금의 드로잉 재료는 철사예요. 공사장에서 철근 묶을 때 쓰는 얇은 철사를 불에 한 번 구워낸 거죠. 일반 철사와 달리 무척 부드럽고 유연해져요. 그걸 캔버스 위에 붙여가며 형태를 만든 뒤 흙이나 모래를 섞어 한 겹 올리고, 레진과 흰색 안료를 개어 다시 한번 한 겹 펴 발라요. 그럼 철사가 표면 위로 살짝 솟아오르는데, 그 부분을 깎아 선의 형태를 드러낸 뒤 색을 입히고 몇 차례 코팅을 더 하죠.

유난히 재료의 물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많이 해왔네요?
저는 평면 작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요. 학교 다닐 때부터 세밀하게 무언가를 묘사하는 데도 관심이 없었고요. 처음 양평으로 온 2002년 무렵엔 흙과 종이를 개어 펼쳐서 화판으로 만들어 썼어요. 그래야만 그 위에 오브제를 심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양평의 다른 작가들과 교류하며 도예가 한 분을 알게 됐는데, 그분 공방에서 본 청화자기의 느낌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느낌을 구현할 재료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게 레진이에요.

초기엔 현실 참여적 그림에 집중하다 2000년대부터 환경 문제를 담았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사실 현실 참여적 그림을 그린 건 의도한 작업이 아니었어요. 제가 공부하던 1980년대는 한창 민주화 운동이 활발할 때라 대부분의 작가가 민중미술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러다 민주화가 되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내 미술’이란 게 없는 거예요. 그동안은 그림을 그리려 했다기보다 그걸 수단으로 뭔가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였죠. 이후 무척 오랫동안 그림에 손을 못 댔어요. 미술을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고요. 다시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은 건 결혼도 하고 아이도 태어난 뒤였어요. 부산 외곽의 향나무 농장에 딸린 작은 창고를 빌려 작업실로 사용했는데, 그 주변에 난개발이 심하더라고요. 매일 포클레인이 와서 산을 갈아엎는 광경을 보며, 환경에 관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오래된 시’, mixed media on canvas, 80.3×117cm, 2015

‘오래된 시’, mixed media on canvas, 91×91cm, 2014
결국 ‘뭔가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그림을 그린 셈이군요.
그렇네요. 부산에서 오래 살았지만, 제 고향은 경남 합천이에요. 합천엔 낙동강 지류인 황강이 흐르는데, 물도 깨끗하고 백사장도 예쁘고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그런데 오랜만에 고향을 다시 찾으니 강 위쪽에 댐을 만들었더라고요. 댐 아래 강물이 다 썩어 있었어요. 그래서 어린 시절의 기억만으로 그곳 지도를 그려봤죠. ‘오래된 시’란 제목을 짓기 전까지는 제 작품을 ‘섀도 박스’라 불렀는데 그게 그 연작의 시작점이 됐어요.

근래의 ‘오래된 시’ 연작은 주로 책을 소재로 작업했네요?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의문이 생겼어요. 과연 교육을 통해 우리가 쌓은 지식이란 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런 의문에서 출발한 작업이에요. 이번 <행복> 표지 그림인 ‘오래된 시’도 그 일환이고요. 가지런히 쌓아 올려 끈을 열십자로 묶은 책은 어쩌면 폐기 처분해야할 대상일 수도 있죠. 지식의 역할, 의미, 가치, 이런 것에 대해 점점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사실 ‘오래된 시’의 해석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이에요. 책과 함께 배치한 소품 하나하나가 의도를 품고 있긴 하지만, 그걸 보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하는 부분은 철저히 열어둬야 해요. ‘시’라는 존재가 그렇잖아요.

작업실을 보니 다른 연작도 시작한 것 같은데요?
레진 작업이 힘든 게, 계절을 심하게 타요. 우선 레진은 칠했을 때 25℃의 온도가 열두 시간 이상 유지돼야 하거든요. 근데 지금 살고 있는 양평은 1년의 절반이 겨울이에요. 아예 레진 작업을 할 수가 없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겨울에도 할 수 있는 작업을 찾다가 나온 결과물이 최근의 작업이에요. 레진과 철사 대신 지업사에 두꺼운 합지를 주문 제작해 그걸로 물성을 만들고 형태도 그리죠. 그 위엔 아크릴물감을 올리고요. 이 시리즈 작업은 겨울에만 하고, 날이 따뜻해지면 다시 레진 작업으로 돌아가려고요.

새로운 연작의 주제는 뭔가요?
그 작업 역시 ‘오래된 시’예요. 소재와 재료는 달라졌지만 결과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비슷해요. 저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부산에서 학교 다닐 때부터 그려오던 그림들도 결국은 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더라고요.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그때로 돌아온 거죠.

같은 시리즈라 하기에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이전에는 없던 강렬한 원색 때문인 듯하네요.
고민을 많이 하긴 했어요. 책을 그릴 땐 각각의 소품에 다른 색을 입혔는데, 의자를 그리고 보니까 형태 자체가 너무 사실적이더라고요. 여기에 색까지 나눠 입히면 정물 묘사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이 그림을 하나의 이미지로 볼 수 있도록 강한 원색 한 가지로 전체를 덮었어요. 그간 레진 작업을 해오며 색을 자제해 쓰느라 색에 대한 갈증이 많기도 했고요.

언제쯤 다시 세상으로 나올 예정인가요?
아직까지 ‘오래된 시’ 연작을 발표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10년 가까이 그린 그림이 모여 있으니, 한 번쯤 이걸 정리해보고 싶기도 해요. 그래서 곧 전시를 하려고요. 내년 봄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어요. 이후엔 뭘 그릴지 아직 모르겠지만, 제가 추상화를 그리는 작가는 아니니까 어쨌든 눈에 보이는 걸 그리게 되겠죠.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사람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요. 그게 제겐 시와 같아요.

시는 무수한 은유를 지닌다. 행간이 품고 상징이 키워낸 어느 정도의 모호함까지도 모두 그 시의 일부다. 바라보는 시선이 맞닿지 않아도 좋고, 어쩌면 그렇기에 더 우아한 세계. 각자의 시간을 삼키며 서로 다른 여백을 채워가는 화폭. 장원실의 시는 마침내 한 권의 시집을 이뤘다. 그 은유에 공감하든 반문하든, 화폭 너머의 세계는 오롯이 기다린 자의 몫이다.


서양화가 장원실은 부산대학교 예술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부산 형상미술의 주요 작가로 활동하며 시대 참여적 성격이 짙은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이후 환경문제와 자연으로 시선을 돌렸고, 현재 경기도 양평에 거주하며 개인적 일상, 오래된 기억에서 비롯한 상징적이고도 은유적인 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글 류현경 기자 | 사진 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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