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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싱글 라이프 영원한 마음의 터전


우리 집 역사를 소개합니다

어디에 있나요? 서울 신월동에 있어요.
누가 살아요? 건축주 최혜자 씨가 혼자 살아요.
집의 이력이 궁금해요. 1979년 대가족이 모여 살던 첫 다가구주택, 1992년 지금의 집을 지어 최혜자 씨 가족 다섯 식구가 살았어요. 2003년 이후 최혜자 씨 부모님은 귀촌하시고, 3남매가 독립한 후 1층 집에 살고 있던 이모 이인숙 씨가 집을 맡아주셨습니다. 작년 겨울, 근린생활시설을 겸한 주택으로 레노베이션을 시작해 올 3월에 완공했어요.
새 집을 소개합니다. 아버지가 두 번째로 지은 집의 외관을 그대로 유지했어요. 해양 생물을 다루는 가게와 카페가 생길 예정인데요, 앞으로 이 모퉁이가 사람이 모여드는 재미있는 곳이 됐으면 합니다.


1979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결혼한 저희 아버지를 포함한 4형제와 함께 살아갈 터를 이곳 신월동에 잡으셨어요. 아버지는 세 살 된 저를 데리고 첫 번째 집을 지으셨고요. 함께 살던 삼촌들은 첫째 조카인 저를 무척 귀여워했습니다. 집 앞마당에 서면 눈 오는 겨울날 썰매를 만들어 끌어주던 삼촌들 모습이 문득 생각나곤 합니다. 맏며느리이던 어머니는 마음의 품이 넉넉한 분이었습니다. 열 명이 넘는 시댁 식구를 챙기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내색하는 법 없이 늘 무언가를 나누며 살아오셨지요. 어머니는 종종 가스 오븐에 소시지 빵, 단팥빵을 50-60개씩 구워 삼촌과 이모는 물론, 근처에 살고 있던 이웃까지 불러 함께 나눠 먹곤 했습니다. 주택가 중에서도 모퉁이에 위치한 우리 집은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학교 앞을 지나가는 친구들에게 우리 집이라고 자랑하던 기억도 미소 짓게 합니다. 1992년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보일러가 터지는 바람에 집을 새로 지어야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직접 시공사를 부르고 이웃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건물을 지었습니다. 뻐꾸기 집처럼 귀여운 박공지붕과 삼촌 배처럼 둥글게 튀어나온 베란다가 예쁜 다가구주택이었지요. 박공지붕 아래 옥탑방에는 여러 생각에 잠겨 보낸 사춘기 시절도 남아 있네요. 저와 동생들이 성인이 되자, 부모님은 할아버지와 함께 경기도 안성으로 귀촌하셨습니다. 해외로 취업한 동생들은 떠나고 혼자 남은 저는 신월동 이웃이자, 이 집에서 함께 살기도 했던 이모에게 집을 맡기고 회사 근처로 옮겼습니다. 아파트 생활은 난생처음이었는데요, 주택 생활에 익숙하던 저는 그저 깨끗한 사무실에 들어가는 듯한 인위적인 기분만 들었지요.

그때 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잠을 자는 곳’이 ‘사는 곳’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아버지가 튼튼하게 지어놓으신 집과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 나눔의 즐거움. 부모님이 물려주신 건 집이 아닌, 집이 지닌 진정한 가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신월동으로 돌아와 이 집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40년 동안 부대끼며 살던 가족이 떠난 집을 저의 가치관과 취향에 맞춰 다시 고쳤습니다. 지금은 혼자 살기 위한 집이 되었지만요. 대가족을 품어본 이 집은 그때의 다정한 온기를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담장도 허물고 근린생활시설을 더해 카페가 들어올 예정이에요. 다양한 동네 사람이 이 모퉁이에서 소소한 추억을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먼 훗날에는 제가 직접 베이커리를 여는 꿈도 꾸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이 집은 신월동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모르던 분도 말을 걸어오고 구경하러 오기도 하죠. 변화가 거의 없는 동네거든요. 이 터는 유난히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많습니다. 40년 전쯤 뿌리내리고, 아이를 낳아서 결혼까지 시킨 사람들이 지요. 집이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라면 건물을 부수고 아파트나 상가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섰겠지요. 이 동네를 지키는 분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정겨운 풍경 또한 없었을 겁니다. 저 역시 이곳에 오래 살고 싶어요. 신월동에 뿌리내린 넉넉한 마음이 저를 이 터전에 머물게 하는가 봅니다. _ 최혜자(41세, 건축주)

옛날 집

혼자 사는 집이라 튀어나온 벽(오른쪽)은 최대한 뒤로 밀어내고 불필요한 문을 없애 개방적인 공간으로 바꿨다.

건축주와 그의 아버지가 모아온 LP판. 그가 물려받은 집은 단순한 재산의 가치를 넘어선다.

새로 가구를 사지 않고 원래 쓰던 6인용 원목 테이블과 책장을 그대로 사용한다.

제과제빵사로서 제2의 직업을 준비하는 건축주의 주방.
오래된 빨간 벽돌 빌라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신월동. 하늘 위로는 비행기가 수시로 지나간다. 덕분에 이 동네에서 자란 아이들은 하늘을 나는 꿈을 자주 꾸고, 높은 아파트가 생긴다는 이유로 이사를 다닌 적도 없다. 이 동네에서 대가족과 함께 살아온 최혜자 씨가 다가구주택을 싱글 라이프에 맞춰 개조했다.

레노베이션을 결심한 계기가 무엇인가요?
(최혜자_ 건축주) 가족이 모여 살던 다가구주택이던 이 집을 제가 지키게 되었어요. 언젠가는 베이커리를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근린생활시설을 갖추고 싶었지요. 친구가 집을 새로 지었다고 해서 놀러 갔다가 한은지 소장님을 추천받았어요. 디테일까지 섬세하게 신경 쓴 부분이 마음에 들었죠.
(한은지_ 건축가) 처음에 건축주가 의뢰했을 때는, 반지하부터 1층, 2층 세 개의 층이었고 총 다섯 가구가 있었어요. 저는 이 건물(대지 면적 54.03평, 건축 면적 32.28평)을 통째로 레노베이션하는 줄 알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죠. 그런데 웬걸, 반지하와 1층에 이미 살고 계신 할머니들이 계속 살도록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지하층과 1층의 두 세대는 그대로 두고 나머지를 근린생활시설로 바꿨어요. 2층은 건축주의 주거 공간(29.5 평)이고요.

레노베이션하기 직전에는 이모님이 이 집에 사셨다고요.
(최혜자) 3남매가 독립하면서 덩그러니 남은 이 집을 이모 가족이 살면서 관리해주셨어요. 이모가 우리 가족과 함께 살기도 했으니까 이 집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시거든요. 제가 신월동으로 돌아오고, 레노베이션을 하고 싶다는 결심이 선 뒤에 이모에게 양해를 구했죠. 어린 시절부터 살던 집이니까 이곳에서 다시 살고 싶다고. 이모가 바로 ‘오케이’ 하셨어요.
(이인숙_ 건축주의 이모) 어차피 한 동네에서 계속 같이 살아왔으니까요. 노후엔 지금 언니 부부가 살고 있는 안성으로 가서 함께 보낼 생각을 하기 때문에 크게 상관하지 않았어요.

집이 동네 분위기와 잘 어울려요. 외관은 얼마나 바뀌었나요?
(최혜자) 사실 외관은 많이 바꾸지 않았어요. 붉은 벽돌이 주는 안락함도 있고요. 저희 다섯 식구는 물론 이모네 식구 모두의 추억이 배어 있으니까요. 소장님이 원래 흰색이던 박공지붕과 둥근 베란다를 푸른빛이 도는 짙은 회색으로 칠해주셨어요. 생각하지 못한 디테일인데 막상 칠하고 나니 독특한 집 형태가 더욱 돋보여서 좋더라고요.
(한은지) 이 벽돌에 대한 기억이 워낙 좋으시고, 외관이 생각보다 굉장히 괜찮았어요. 건축주의 아버님께서 직접 지으신 집이라 그런지 튼튼하기도 했고요. 대신 벽돌집은 단열에 취약해요. 당시 단열재는 무척 작기 때문에 지금의 단열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안 좋은 상태죠. 벽돌을 노출하면서도 단열을 보완하기 위해 안쪽으로 보강 공사를 했어요. 현관도 동그랗게 철판을 붙여 새로 만들었고요.

시공 전 사진을 보니 담장이 있던데, 담장을 허문 이유는 근린생활시설 때문인가요?
(한은지) 1층에 거주하는 분에게는 담장이 사생활을 가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상가가 입점하면 노출이 불가피하죠. 근린생활시설일 때와 주거 목적의 주택일 때 담장의 존재감이 달라요. 특히 이 동네에서 이 집이 항상 이 자리에 있었잖아요. 원래는 담으로 싸여 있어서 얼굴이 가려져 있던 거예요. 담장을 다 거두고 계단과 캐노피를 달고, 페인트를 칠해서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거죠. ‘나 원래 이렇게 예뻤어!’라는 느낌이 들도록요. 이 동네에서 모델이 서 있는 것보다 귀엽게 얼굴을 딱 내미는 모습이 훨씬 친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인숙) 담장을 허무니까 동네가 환해졌다고 할까요? 동네 간의 소통도 더 좋아졌어요. 이웃들이 항상 와서 말을 걸어요. 그리고 여기가 1차 도로잖아요. 길이 좁으니까 차가 지나가면 벽에 붙어 있어야 하거든요. 담장을 없애니까 그럴 필요 없이 편하게 걸어 다녀요. 작은 공간이지만 이웃과 땅을 나눠쓰는 거죠.

옥상은 서서울호수공원의 녹음과 함께 장독대가 있는 타일 집을 이웃하고 있어 정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친구, 가족과 함께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바닥에 덱을 깔고 싱크대도 설치했다.
2층은 주거 공간이에요. 레노베이션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요?
(최혜자) 저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이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바꾸고 싶었어요. 빵을 굽는 취미가 있어 주방을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요청했어요.
(한은지) 건축주가 주방에서 많은 일을 하시니까 넓게 쓸 수 있도록 2.1평짜리 방 하나를 없앴어요. 그 공간에 주방 도구와 식자재를 숨겨둘 팬트리를 만들고, 냉장고를 두었지요. 이런 여유 공간이 생기니까 주방을 더 넓고 깔끔하게 쓸 수 있어요.

다섯 식구가 살던 공간에서 싱글 하우스로 변했어요. 혼자 사는 사람을 위한 특별한 디테일이 있다면요?
(최혜자) 설계 첫 단계부터 문을 다 없애달라고 요청했어요. 저는 일반적으로 공간을 만드는 구조가 거실에 텔레비전을 두는 것과 문이라고 생각해요. 이왕 내 집을 고치는 거고, 혼자 살 거니까 문을 다 없애고 싶었어요. 해외에 살고 있는 남동생이 3개월에 한 번씩 이 집에 와서 자는데, 이렇게 배려를 안 하냐고 투덜대긴 하지만 저는 만족해요.

이모님이 지켜본 레노베이션 과정은 어땠나요?
(이인숙) 처음엔 어머, 이게 제대로 되는 거야? 집을 다 부수니까 괜히 불안했지요. 게다가 혜자는 부모님 걱정하실까 봐 말을 안 했거든요. 저는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공사하는 과정을 지켜봤죠. 그런데 나중에 완성된 모습을 보는데 기가 막히더라고요!
(한은지) 아마 끝날 때까지 불안하셨을 거예요. 12월 중순에 시작해서 3월에 끝났으니까. 유난히 추운 시기여서 영하 13℃ 넘어갔을 때부터는 공사를 못 한 적도 있고. 수도가 얼고 난방이 터질까 봐 불안했어요. 게다가 건축주는 이모님 댁에 얹혀살며 출퇴근해야 하는 처지였으니 많이 불편하셨을 거예요. 참, 가족애가 끈끈하다고 느낀 것이 시공 기간 동안 이모님이 매일같이 오셔서 저희 챙겨주시고, 전기 공사 일하시는 셋째 삼촌은 마무리 전기 증설 작업도 해주셨죠. 처음 삼촌 왔을 때 혜자 씨가 “삼촌, 저 사고쳤어요~”라고 하더라고요.

부모님은 변한 공간을 보고 놀라지 않으셨나요?
(최혜자) 부모님과 삼촌들 모시고 첫 공개를 했어요. 처음엔 놀라셨지만, 기뻐하셨지요. 옛집에 비해 구조도 세련되었다고 느끼시고, 근린생활시설 만든 것도 부모님께서 하고 싶었지만 못하신 것이니까 더 좋아하셨어요. 삼촌들은 자랑스러워하셨고요. 또 저희 어머니는 여기서 살림을 하셨잖아요. 주방과 화장실을 잇는 뒤편의 좁고 긴 베란다를 버려두곤 하셨는데, 반으로 잘라서 하나는 세탁 공간으로 쓰고, 다른 하나는 오븐을 둬서 빵을 굽는 공간으로 쓰니까 공간 효율성 면에서 엄마가 재미있어하셨어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거라면서요.

글 이세진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 설계 건축사사무소 하이(02-741-1279, www.instagram.com/hy_architects)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