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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 오도독! 고소한 토종 호두
경상북도 김천, 충청북도 영동, 전라북도 무주가 만나는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삼도봉三道峰. 예로부터 이 일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호두 생산지다. 삼도봉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김천 해인리에 사는 김현인 농부는 1백 년이 넘도록 집 앞을 지킨 호두나무에서 씨앗을 얻어 지금의 호두 농장을 일궜다. 귀한 토종 호두 한 알이 주는 고소함을 어디에 비할 수 있으랴.

외래종 호두는 럭비공처럼 길쭉하게 생긴 반면, 토종 호두는 동글동글하며 과피가 딱딱하고, 고소한 맛이 강하다.
호두나무 사랑 걸렸네
어두컴컴한 밤, 소년은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밭으로 향했다. 낮에 봐둔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굵은 호두야 많이 떨어져라, 떨어져라’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저도 모르게 들어간 힘으로 작대기를 마구 내리쳤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 속 소년은 좋아하는 소녀에게 줄 것이 없어 호두를 몰래 훔친다. 흔히 호두 하면 겉이 딱딱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갈색 알맹이를 떠올릴 터. 그런데 소년이 내리친 힘에 못이겨 땅으로 후두두 떨어진 호두는 필시 녹색 열매였을 것이다. 청피라 불리는 녹색 외과피에 둘러싸인 호두는 제철 9월이 되면 밤송이처럼 툭툭 터지면서 내과피인 갈색 호두알이 나온다. 6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호두 농사를 짓는 김현인 농부의 어린 시절도 이 녹색 열매와 함께였다. “비나 태풍이 오면 나무 아래 호두가 수북이 떨어져 있었는데,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였어요. 덜 여문 청피를 돌에 갈아 나온 호두알로 구슬치기하며 놀았죠. 손에 호두물이 한번 배면 오랫동안 빠지지 않아 가을 내내 손이 새카맸다니까요.” 동네에 호두 나무가 가득했다던 그의 말처럼 김천에서 생산한 호두는 맛과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천안과 무주를 제치고 국내 호두 생산량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김현인 농부의 아버지 김대인 씨는 50년 전, 해인2구에서 아랫동네인 해인1구로 옮겨 제법 둥치가 큰 호두나무 아래에 터를 잡았다. 본격적으로 호두 농사를 시작하면서 이 호두나무의 씨를 받아 묘목을 키웠다. 현재 호두나무의 나이가 1백 살이 넘고, 밭에 심은 그의 자손만 약 5백30그루에 달한다.


동글동글한 것이 참으로 고소하네
우리 조상은 정월 대보름 아침이면 호두와 땅콩, 밤 등 견과류 깨기로 하루를 시작했다. 부럼을 깨물면 한 해동안 부스럼이 나지 않는 것은 물론, “딱” 하는 소리에 잡귀가 물러간다고 믿었다. 한데 호두나무의 원산지는 지금의 이란 지역인 페르시아다. 호두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4세기 말경으로 추정한다. 고려 충렬왕 16년 사신 류청신이 원나라에서 귀국하며 호두나무 묘목을 가져와 천안 광덕사에 심었다는 것이 전래설의 기원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의 박영기 박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호두나무는 페르시아 호두나무와 한반도에서 자생하던 가래나무가 자연적으로 교잡한 호두나무로, 크게 호두나무종과 가래나무종 두 종으로 분류한다”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호두나무종에 속하는 지역종(김천, 무주, 천안 등 대표적 호두 재배지에서 자란 재래종 호두)의 형질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 그 까닭은 호두를 실생묘(종자를 직접 뿌려 기른 묘목묘)로 재배하는 데 있다. 대개 과수는 접목묘(서로 다른 두 나무의 일부를 잘라 연결해 하나의 개체로 만드는 재배 기술)를 사용하는데, 나무 자체가 복제되어 수목의 유전형질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호두나무는 일반 나무에 비해 접목이 잘되지 않는 수종이라 주로 실생묘로 재배한다. 부모가 운동신경이 뛰어나다고 해서 자식이 운동을 잘한다는 보장이 없듯이 호두나무도 마찬가지다. 박영기 박사는 수목의 유전력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지만, 완전히 유전되지 않기 때문에 우수한 묘목이 생산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형질을 예측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결국 같은 수종을 심더라도 재배지의 환경에 따라 형질이 제각기 다른 재래종 호두가 생겨나는 것이다. 김천 호두가 둥그스름하고 너부죽하게 생겼다면, 광덕 호두는 동글동글하며 겉이 매끈하다. 무풍 호두는 끝이 뾰족하며 움푹 파인 부분이 많고, 문경 호두는 쇠호두라는 별명답게 내과피가 매우 딱딱하다. 반면 가래나무종에 속하는 가래는 호두에 비해 크기가 작고 단단하며 검다. 봉합선이 네 개라 귀한 취급을 받는 귀족호두는 가래의 변종으로 식용보다 손 지압용으로 널리 사용한다.

토종 호두는 호두나무종과 가래나무종으로 분류한다. (왼쪽부터) 김천 호두, 광덕 호두, 무풍 호두, 문경 호두가 호두나무종에 속하고, 가래와 귀족호두는 가래나무종에 속한다.

쌀 위에 호두를 올려 세 번 찌고 말리는 법제 과정을 거치면 호두 속 떫은 맛과 불순물이 빠진다.


녹색 청피가 3분의 2 정도 벌어지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갈색 호두 알맹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입말한식가 하미현은 김현인 농부와 호두를 선별해 갈색 껍질인 내과피를 까는 작업을 함께 했다.

“호두나무는 너무 추우면 내한성이 약해서 재배가 안되고, 너무 따뜻하면 탄저병이 생깁니다. 연평균 기온이 12℃인 지역에서 잘 자라는데, 김천은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아 호두나무가 잘 자라지요. 봄에 나무를 심고 소의 분뇨와 톱밥, 부엽토 등을 넣고 발효시켜 만든 퇴비도 밭에 뿌립니다. 수확은 5년생 묘목부터 가능합니다. 열매는 5월에 맺고, 수확은 9월 초에 시작하지요. 청피가 3분의 2 정도 벌어졌을 때 장대로 털어요.” 수확한 청피는 3~5일 정도 숙성 과정을 거친다. 푸석해진 청피를 기계에 넣고 호두알만 골라낸 뒤 깨끗하게 세척해 바람 잘 부는 곳에 두어 말린다. 저울에 달아 선별해 등급을 매기는데, 1~2g에 따라 속이 차고 빈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가 없다고. 산할아버지 농장의 호두는 2017 대한민국 과일 산업대전의 대표 과일 선발 대회 호두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세 번 찌고 말려 완성한 호두 기름
<동의보감>에 호두는 폐의 기운을 모으며 천신을 다스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관지가 약한 사람에게 호두 기름은 명약이었다. 김현인 농부는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던 호두 기름을 2년 전부터 알음알음 판매했다. 호두 기름을 만들기 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법제法製 과정. “호두의 속껍질은 떫은맛이 강합니다. 약용으로 사용할 때는 반드시 쌀밥으로 법제해 떫은맛과 독성을 제거해야 하지요. 가마솥에 쌀을 담고 그 위에 호두 알맹이가 담긴 면포를 올려 30분 동안 팔팔 끓인 뒤 불을 약하게 줄여 두 시간 정도 쪄요. 그 후 건조기에서 여덟 시간 정도 말리지요.” 이 과정을 세 번 반복하면 호두 알맹이 속 불순물이 말끔히 제거되는데, 이것을 짜면 맑고 투명한 호두 기름이 나온다. 김현인 농부는 어릴 적 기침이 나면 호두 기름을 먹었고, 어머니는 호두 기름에 나물을 무쳐 밥상에 올렸다. 향이 강하지 않아 나물 본연의 풍미를 돋우는 역할까지 했다고. 최근 그는 토종 호두가 외래종에 밀려 값이 떨어지 고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옛날에는 청솔모를 쫓아다니기 바빴어요. 반나절이면 호두나무 한 그루가 다 털리곤 했거든요. 호두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열심히 나르고 또 날랐을까요. 제가 먹고 자랐던 맛, 그 고소한 맛을 알아주는 분들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입말한식가 하미현이 전하는 토종 호두 맛
김천 호두 호두 특유의 떫은맛이 적고, 단맛과 고소함이 만들어내는 균형감이 좋다. 살짝 구워 먹거나 곶감을 곁들여 먹으면 맛있다.
광덕 호두 겉껍질 색과 호두 속살이 밝은 편. 단맛, 고소한 맛, 떫은맛 등 어느 것 하나 특별히 드러나지 않고 식감이 부드럽다.
무풍 호두 과육과 기름기가 풍부하며, 고소한 풍미가 매우 좋다. 잘 으깨어 호두 시럽이나 소스, 기름 등으로 활용하면 좋다.
문경 호두 알맹이가 작고 껍질이 두껍다. 떫은 첫맛과 달리 뒷맛이 우유처럼 고소하다. 페스토나 스프레드, 베이커리용으로 추천한다.
인제 가래 예부터 기름으로 짜서 부스럼을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해왔다. 특유의 향미와 식감이 독특하며 기름기가 많다.


기획과 취재를 함께 한 입말한식가 하미현은 사라져 가는 토종 식재료와 이를 재배하는 농부를 발굴하고, 입말로 전해지는 음식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내림 음식의 원형을 ‘과거의 맛’으로 재현하고 , 현대에 맞는 레시피를 개발해 ‘지금의 맛’으로 풀어낸다.




글 김혜민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취재 협조 산할아버지농장(054-437-2464) | 참고 논문 ‘우리나라 호두나무의 특성과 활용’(박영기, 국립산림과학원 특용자원연구과)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