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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31번지 골목집 즐길 수 있을 만큼만 불편한 것이 전통이다

사랑채 마루엣 안채 대청마루를 바라보는 풍경. 서까래 천장 사이에는 백회를 칠했고 주춧돌과 마루 사이의 두벌 기단은 백토, 생석회, 짚, 모래 돌 등을 섞은 강회로 마감했다. 이는 시멘트를 이용하여 마감하는 신식 한옥이 아닌 전통적인 한옥이 되고자 한 다양한 노력 중 하나다.

쪽문 옆의 화단 꾸밈마능로도 이 집이 얼마나 귀하게 관리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인동초와 벌개미취로 꽃을 보고 둥글레를 심어 흙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담을 타고 흐르는 마삭으로 이 집을 한 번 더 찬찬히 바라보게 된다. 
설계 감리 황두진(황두진건축사 사무소)
설계 담당 정재학
대지 42평
건평 18평
지붕 전통 기와
외벽 마감 사고석, 전돌, 회칠 시공 박석규 대목(예송고건축)

북촌 가회동 31번지에 자리 잡은 이 집은 대지 42평에 건평 18평의 제법 넓은 한옥이다. 그런데 40평이 조금 넘는 땅에 20평이 채 안 되는 집을 '넓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한옥은 그렇다. 60평짜리 땅에 40평으로 앉힌 한옥은 아파트 60평보다 훨씬 넓어 보인다.한옥 18평을 아파트 18평과 같은 크기로 견주는 것은 합당한 비교가 아니다. 20평짜리 한옥은 40평형대 아파트 못지않게 방과 마루 등 구색을 갖추고 있으며, 아파트는 꿈도 꾸지 못하는 마당까지 버젓하게 지니고 산다. 대체 한옥은 무슨 복이 그리 많아서 좁아도 넓게, 넓다면 드넓게 보이며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아파트가 각각의 넓은 방들을 좁은 공간에 모아놓은 것이라면 한옥은 좁은 칸들을 적당한 크기의 땅위에 앉힌 것이다. 실제로 전통 한옥의 방 한칸은 5자에서 7자 정도. 계산해보자면 한 자가 30.3cm이므로 방 하나의 길이가 1.5m에서 2m를 좀 넘는 크기. 작은 방은 눕기 조차 힘든 형편이고 큰 방이라 해도 이리저리 가구 놓을 자리를 염두에 둔다면 성인남자가 겨우 발 뻗고 누울 정도. 그래서 그런지 옛사람들이 살던 한옥에는 웬만해서는 덩치 큰 가구와 소품들이 방을 차지하는 법이 없었다. 정말 필요한, 요긴하게 사용할, 그래서 단출할 수 밖에 없는 가구들을 엄선해놓은 것이다. 사방으로 창과 문을 내어 방과 방을, 안과 밖을 하나가 되게 한 것도 넓어보이는 비결. 문 닫고 들어가면 그것이 전부인 아파트라면 10자 방도 좁을테지만 문을 열면 방이 대청마루로 확장되고 창을 열면 마당으로 방이 나앉는 한옥은 그것이 7자 방이라 해도 비좁아 보일 리 만무한 것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랑채, 이 집은 원래 있던 한옥을 틀만 그대로 둔 채 새로 짓다시피 한 것이다. 대체로 한옥은 목수의 머릿속에 그려진 틀을 기준으로 짓는데, 이 집은 상세 도면을 바탕으로 목수의 전통 기법을 더욱 디테일하게 적용해가면서 지었다. 설계는 황두진 건축사 사무소(02-725-9575)의 건축가 황두진 씨가 맡았고 시공은 예송고건축(032-674-2572)의 박석규 대목이 했다.

안채에서 사랑채를 바라본 풍경. 서울식 전통 한옥 양식인 ㄷ자로 앉혀졌다. 어느 쪽에서 바라보아도 반듯하고 곱게 지어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집주인이 언젠가 예뻐서 사놓은 현판을 사랑채에 걸어놓았다. 취죽당 聚竹堂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루 옆에 대나무를 심었다.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왼쪽에 앉혀진, 일명 문간방이다. 구들로 맥반석을 놓고 그 위에 죽석을 깔았다. 이는 채상彩箱(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다음 대올에 색색의 물을 들여 비단을 짜듯 엮은 상자) 장인 인간문화재 서한규씨(062-263-3176)가 직접 만든 것. 이 방은 사시사철 불을 떼면 맥반선 찜질방이 되므로 손님들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찾아와 제일 오래 머무는 곳이라고.

아무리 넓게 보여도 작은 한옥에는 과한 것이 없다. 한칸 한칸의 크기, 그 칸에는 꼭 필요한 살림살이만을 엄선하여 들이게 되므로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 부엌채 등이 ㄷ자로 앉혀진 이 집 역시 마찬가지. 각각의 방과 마루가 5자, 7자임에도 어느 하나 막힘 없는 모습이다. 이 집은 원래 있었던 한옥을 틀만 그대로 두고 다시 설계, 새집을 짓다시피한 것. 새로 설계하는 과정에서 방을 좀 더 크게 늘려도 좋았으련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5자, 7자를 고수했다. 이유는 한 가지. 전통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화장실과 부엌이야 신식 개량을 포기할 수 없는 곳이라 해도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들 만큼은 진짜 한옥의 모습이고 싶었던 것이다.

안채에서 바라본 마당. 나지막한 소나무가 초록빛 그림자를 만들고 장독대의 옹기들이 햇살을 받아 빛난다. 담 위에 나무 울타리를 둘러 이웃집으로부터 시선을 막아준다.


한옥의 묘미는 집안 구석구석에 디테일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안방과 사랑방의 문살을 달리하여 각각의 개성을 살렸다.


이 집의 화장실은 안채와 사랑채, 두 곳에 마련되어 있다. 사랑채 옆 화장실은 담장으로 마삭이 오르는 담길 끝에 만들었다. 안채 화장실에는 이중창을 내어 환기는 물론 뒤뜰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집주인의 전통을 그대로 재현하는 한옥을 짓기로 마음먹은 데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외국에서 유학중인 아들의 선생님이 한국 방문 후 '서울에 가니 볼 것이 없더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자연스레 한옥을 지어야겠다 결심하게 된 것. 마음먹고 짓는 거 이웃 덕에 한옥의 운치가 더해지는 북촌 가회동이 좋겠다 싶었고, 이왕 전통적으로 짓는데 제대로 지은 '한옥'의 샘플이 되고자 한옥으로는 드물게 설계도를 그린 후, 그것에 충실한 집을 대목의 손으로 지었다. 이 집이 전통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할 수 이쓴 가장 큰 단초는 창. 이 집에는 유리창이 없다. 한옥이라면 본디 문과 창으로 사방을 열어놓는 것이 미덕. 하지만 제아무리 한옥에 사는 맛이 각별하다해도 비는 피하고 바람은 막아야 할 것 아닌가. 하긴 옛날 우리네 집에도 유리창은 없었다. 집주인은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한옥 사는 값이라 여기며 살고 있다. 전동을 소망하다 전홍 살이에 실망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변의 걱정은 기우다. 


한옥 처마의 유려한 경사와 풀을 먹여 팽팽한 한지창은 그저 멋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을 방이 아닌 마당으로 그대로 낙하시키는 처마의 기울기는 가히 과학적이라 할 수 있고 행여 빗방울이 방안으로 들이치기 전에 빗물을 머금어버리는 한지의 신속한 흡수력 역시 혀를 내두르게 한다. 최근 짓는 한옥의 창은 삼창으로 안쪽부터 한지창, 모기창, 그리고 유리창이 대부분. 본디 한옥의 창 역시 삼창으로 안과 밖을 한지창으로 하고 가운데 중창을 사창紗窓(비단으로 만든 창)으로 했다. 이 집 역시 이와 같은 삼창. 사창은 모기장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날 바람도 너끈하게 막아준다.


사창은 안과 밖, 한지창의 중간 창으로 여름에 모기장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보온창의 역할도 한다. 한지창을 열어놓고 사창만 닫아놓으면 흔들리는 소나무의 실루엣과 그것을 비추는 빛의 농담을 감상할 수 있다.

어느 절에서 큰스님이 손 씻을 때 사용했다는 물확을 수돗가에 놓았다. 작지만 유려한 선을 지닌 소나무에서 떨어지는 솔잎이 물확으로 떨어지는 것이 정겹다.


물론 삼창에 사계절 무더위와 혹한을 책임지우는 것은 아니다. 황토를 바르고 그 위에 한지를 바른 벽은 열전도율이 높고 통풍이 잘되어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다, 온돌을 깔고 항토를 덮은 후 장판으로 마감한 방바닥 역시 벽 못지않게 사계절 전천후. 이 모든 것이 계절을 겨냥한 대비책은 아니었다. 전통 기법을 그대로 따르다 보니 절로 얻어진 부가가치였던 셈. 물론 전통 한옥에서 사는 것이 몸에 익숙한 아파트처럼 그리 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쯤이야 한옥이 주는 뜻밖의 선물에 비한다면 즐길 만한 불편함이라 여겨질지 모른다.

이 집의 마당이야말로 번거로움을 즐길 수 있는 한옥의 백미. 본디 한옥 마당에는 잔디가 아니라 이끼가 자라나야하므로 백토를 깔고 수시로 물을 뿌려줘야 한다. 마당의 흙, 백토 역시도 전통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옛사람들이 한옥 마당에 하얀 기운이 서린 백토가 불 없이 더웁던 마당에 조명 역할을 했고 그 빛이 창호지에 반사되어 방 안에도 그 기운을 끌어 들이도록 했다는 것.

어디 밤뿐일까, 이 집 마당은 낮에도 충분히 빛난다. 어느 절 큰스님의 손 씻는 대야였다는 돌확 수돗가 부근 촉촉해진 흙 사이에서 올라오는 더덕과 연, 이끼는 자주자주 물 세수를 하는 얼굴들인지라 언제나 말간 모습이다. 향기롭던 솔잎 하나가 그 물확으로 낙하한다. 그 잎머금은 물이 흘러 백토 위에 솔향이 번진다. 불편하면 어떤가, 그래도, 그래서 더 향기로운 곳이 한옥이다.

신식 살림 부엌을 최대한 활용할 것


이 집의 부엌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바닥을 올려 만든 마루와 함게 ㄷ자형 구조이다. 부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은 안채와 이어지고 오른쪽은 문을 내어 대문 쪽으로 나갈 수 있는, 사방으로 연결된 공간이다. 이 집에서 욕실과 더불어 유일하게 신식 구조로 만들어진 부엌답게 물론 잡다한 물건을 수납할 수 있다. 서랍을 만들 수 없는 부분은 아예 쪽마루를 열고 그 아래 깊숙이까지 살림살이를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마루 위에는 다락을 만들어 사다리로 연결, 덩치 크고 당장 소용에 닿지않은 가구와 물건들을 깔끔하게 정리정돈 할 수있다.

 

글 심의주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5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