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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 화가 이일과 이수임 부부 천천히 서둘러 찾은 행복
훌쩍 떠나온 뉴욕에서 볼펜 한 자루로 이목을 끈 이일 작가. 그의 성공 뒤에는 묵묵히 지켜보며 뒷바라지해준 아내 이수임이 있었다. 툭툭 치며 틱틱거려도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끈끈한 이일ㆍ이수임 부부는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산다.

2014년 뉴욕 API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이일 작가. 무수히 많은 선들이 검고 검은 덩어리가 되었다. 
“우리 진짜 행복해요.” “우리는 행복한 가정이에요.” “우리 아이들도 다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행복이가득한집>에 이일 작가 가정을 소개하고 싶다고 하자, 아내 이수임이 하는 말이다. 그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누가 그렇게 대놓고 말을 하나. 참, 천진난만하다. “아, 네, 잡지에 나온다고요. 좋지요.” 기분 좋아하는 이일・이수임 부부에게서 ‘꾸밈이 없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몇 년 전, 한국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였다. 누군가가 이일 작가한테 “형, 얼굴 좋아지셨네요”라고 하니까, “야~ 돈 있으면 다 이렇게 돼”라고 대답하는 그에게서 가식 없는 생짜 인간의 모습이 보여 기억하고 있었다. 볼펜 그림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유명한 작가인데, 좀 더 다듬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나무랄 수 없다. 그의 얼굴이 진심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너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남편에게 한마디 하는 아내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마음속 생각이 그대로 말로 표현된다.

2008년 빌첵 파운데이션 개관전 오프닝 리셉션. 왼쪽부터 API 이정옥 대표, 설치 작가 크리스토Christo와 지금은 고인이 된 부인 잔 클로드Jeanne-Claude, 이일 작가. 
화가 부부의 오랜 인연
그 옛날, 꿈을 안고 어렵게 뉴욕으로 날아온 한인 화가라면 모두 그들의 작품만큼이나 개성 있게(?) 가난했다. 이일 작가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가난한 화가였다. 40여 년 전의 한국과 미국을 떠올려본다. 뒤늦게 히피 바람이 분 한국의 젊은이 문화 속에서도 더욱 아방가르드한 홍익대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고, 이일 작가는 1975년에 가족과 함께 LA로 이민을 온다.

1년 뒤 다시 한국에 가서 4학년을 마치고 돌아온 곳은 LA가 아닌 뉴욕이고, 이후 거의 40년을 뉴욕에서 결혼하고 뉴욕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뉴욕에서 고생하고 뉴욕에서 성공을 한다. 대형 뮤지엄에서 대대적으로 개인전을 열고, <뉴욕 타임스>에 등장한 그의 그림을 인터넷에서 보고 화랑을 찾아오는 컬렉터가 있는, 정말로 그림이 잘 팔리는 볼펜 화가 이일. 그리니치빌리지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남아 있었고 소호 거리가 쓰레기로 뒤덮인 1970년대, 그가 아무리 꿈을 크게 꾸었던들 오늘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2007년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새너제이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작품 1백55점을 전시했다. 
“답십리라고 아세요? 이 사람 답십리 출신이에요.” 이태원에서 자랐다는 아내 이수임의 말이다. “그리고 난 동대문상고라는 학교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이 사람 동대문상고 나왔잖아요.” 홍대 회화과 동기 동창인 아내는 졸업 후 교사 생활을 하다가 몇 년 후 뉴욕에 유학 왔다. 당시만 해도 홍대 서양화과 학생들에게 유학을 가는 일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과에서 환송식을 거창하게 해주고 동창생들이 한 사람씩 성공을 기원하며 그와 악수할 때 ‘그래, 나도 유학 갈 거다’ 하며 결심했는지도 모를 이수임은 뉴욕에 와서 처음에는 이일을 찾지 않았다. 과에서 예쁜 여학생을 쫓아다닌 걸 알고 있었고 또 먼저 뉴욕에 와 있는 동창에게 기신기신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운명이 늘 그렇게 엮이듯이 두 사람은 만났고, 이수임의 유학생 비자가 끝나기 바로 전날 결혼을 한다. 뉴욕 시청에 가서 정찬승과 앤디 김 두 사람이 증인을 서고 결혼을 하는데, 얼마나 빨리 끝냈는지 사진을 찍으려고 한 번만 더 선서식을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단다. 결혼식이 끝나고, 차이나타운에 가서 아내 이수임이 모두에게 밥을 샀고, 두 사람은 그날 각자 자기가 머무는 숙소로 돌아가 잠을 잤다고 하는 이야기. 글쎄, 안데르센이 쓴 어른 동화라고 해야 할까, 오 헨리가 쓴 희극이라고 해야 할까. 그 누구 못지않게 가난한 화가 부부의 생활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2010년과 2011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초대 특별전. 무명 작가에서 세계적 미술관 초대 작가가 되기까지 화가와 화상은 역정을 함께했다.
가난을 이겨내며 살던 브루클린 생활
따로 떨어져 사는 걸 안타깝게 생각한 이일의 룸메이트 황인기가 이수임과 같이 살자고 해서 집세 6백 달러를 셋이서 2백 달러씩 내면서 함께 살았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자 그 아파트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두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 온갖 일을 하다 나중에는 옷 가게를 했다. 미술을 전공한 안목을 발휘하니 장사가 잘되었단다. 크리스마스 대목에는 가게에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었고, 이수임 말로는 돈 통을 열어볼 시간이 없어 상 아래 박스에 돈을 던져 넣었다고 한다. 그때 LA에서 시아버지가 왔다. “남편을 오나시스로 만들래, 피카소로 만들래 하시는데, 내 남편이 오나시스도 피카소도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화가가 되어야겠다 해서 가게를 팔았지요.” 시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다.

늘 밤에만 들어오는 아버지, 후에는 유람선의 요리사로 일하는 아버지 모습은 어린 이일한테는 신비로웠고 그래서 존경스러운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전쟁 혼란기에 화가가 되기를 원한 아버지의 꿈은 서울에 들이닥친 북한군에 잡혀가서 일을 했다는 이유로 박완서 소설만큼이나 가슴 저리게 깨졌다. “어릴 때 봄이면 할머니랑 같이 동네 뒷산에 가서 여기저기 호박씨를 뿌리고, 여름이 되면 나무 막대기로 덤불을 휘저으며 호박을 찾아 따 가지고 왔다” 하는 이일 작가.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스디오에는 아버지가 신던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다.

(왼쪽) 스튜디오 안 또 다른 스튜디오. 이곳에서 이일 작가는 주로 작은 드로잉과 판화 작업을 한다. (오른쪽) 스튜디오 구석에 있는 골방. 이일 작가는 다 쓴 볼펜을 버리지 않는다. 새너제이 미술관에서 전시한 다 쓴 볼펜으로 만든 조형 작품이 창가에 걸려 있다. 
몇 년 전 미술관 전시 오프닝 후 블랙 타이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양복을 입었을 때 그 구두를 신었다고 한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보니 구두굽이 다 닳아 있었다. 워낙 오래된 가죽이 바삭 삭은 것이다. 저세상 아버지가 이제는 더 이상 바랄 일이 없는 거다. 가게 판 돈으로 폐허의 거리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에 있는 낡고 허물어져가는 건물을 샀다.

한 층에서 살림을 하고 다른 한 층은 아이들 방으로 하고 옛날 식품점이던 아래층에서는 온갖 음식 찌꺼기를 치워내고 이일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지금 이곳엔 젊은 세대가 몰려들면서 멋진 레스토랑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최고급 콘도가 올라간다. 건물 팔라는 전화가 하루에도 여러 번 걸려온다는 이 빌딩에서 이일 작가는 오늘도 그림을 그린다. 예전엔 친구들이 와서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놀던 뒷마당은 집주인만큼이나 과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느다랗던 나무가 아름드리나무로 자랐으며,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다.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에 있는 이일 작가 스튜디오. 작가는 건물 한 층에 아내 이수임의 작업실을 마련해주었다.
볼펜 한 자루로 시작한 예술
몇 년 전, 이일 작가가 그린 초대형 볼펜 그림들이 퀸스 미술관 벽을 덮은 모습이 되살아난다. 피카소가 해보지 못한 볼펜으로 답십리에서 자란 동대문상고 출신답게, 개천에서 용이 치솟듯 그의 그림들이 넓은 벽을 채우고 있었다. 벽 하나를 다 차지할 만큼 거대한 그림은 벽을 따라 걸어가며 선 하나하나를 세듯이 감상했다. 그림이 끝나는 지점에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아, 놀라울 따름이다. 저 광활한 면적을 평평한 붓으로 채운 것이 아니라, 실같이 가는 선들이 얽히고설켜 깊고 깊은 바다와 한없는 우주를 이룬 것이다.

볼펜의 이미지는 가장 대중적이며 손쉽고 값싼 필기도구다. 웬만한 장소마다 잔뜩 꽂혀 있고, 여기저기서 공짜로 주니까 잃어버려도 전혀 아깝지 않아 오히려 사람하고 가장 가까운 것이 볼펜이다. 어쩌면 제일 상업적이고 흔한 물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볼펜이 이일 작가 손에서 기적처럼 변신한 것이다.

새너제이 미술관(San Jose Museum of Art) 큐레이터 조앤 노스럽Joanne Northrup은 이일 작가의 전시 카탈로그 에세이에서 그의 예술성을 오로지 먹물만으로 자신의 예술성을 평생 다듬어간 조선 문인화에 비교했다. 현대 사회의 먹물이라고 할 수 있는 볼펜 하나로 표현의 다양성과 그 깊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일 작가는 그 에세이 속에서 “내 작업에서 보이지 않는 심연과도 같은 부분을 그려낼 때에는 일상생활에서 맞딱뜨리는 근심, 걱정 그리고 고뇌와 격정 같은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깊이 묻어버린다는 생각을 합니다”라고 말한다.

맞다. 빈 화면에 볼펜 하나를 들고 재빠르게 춤추듯이 화면을 메워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모든 감정, 즉 이일 작가 자신이 쏟아져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자신이 자연이며 또 그 자연이 결국은 우주를 이루고 있어 오래 바라볼수록 삼라만상을 간직한 것이 그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 세상 여기저기에서 이일 작가 작품을 자주 만난다. 손끝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일하는 우직한 화가한테는 그만큼 우직한 화상이 있다.

주로 아파트에서 작업하는 아내 이수임은 매일 그림을 그리러 나가는 이일 작가에게 건강한 식사를 챙겨준다. 
일찍이 아시아 작가를 키워보겠다고 소호에 API(Art Projects International) 갤러리를 낸 이정옥 대표는 1990년대 초에 이미 이일 작가의 볼펜 그림에서 저력을 발견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미래를 본 것이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펼쳐나갔다.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좌우명으로 삼은 말이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천천히 서둘러라)”라고 했던가. 소호의 한구석 빌딩 2층에서 시작해 지금의 트라이베카 허드슨 강 캐스트 아이언 빌딩 1층에 갤러리로 자리 잡기까지, 이정옥 대표와 이일 작가가 함께 걸어 온 길은 매우 특별하다. ‘화가와 화상’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을 정도다.

2007년 새너제이 미술관 전시 오프닝에 참여하기 위해 떠난 날 폭설로 모든 비행기가 취소가 되었다. 이일 작가 부부와 이정옥 대표 그리고 그녀의 남편 앤드루 샌더스Andrew Sanders는 주변에서 모두 말리는 데도 마다하고 폭설을 뚫고 차를 달려 평소 네 시간 걸리는 워성턴DC에 아홉 시간 걸려 도착했다. 그리고 한 대밖에 없는 비행기로 우여곡절 끝에 새너제이로 날아가 공항에서 곧장 미술관으로 향했다는 무협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말 미쳤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전시 오프닝에 작가가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이 화가와 화상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작가의 전시가 새너제이 미술관,퀸스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라는 대형 미술관에서 열리며, 특히 미국에서 존경받는 NYU 미생물학 교수 잰 빌첵Jan Vilcek 파운데이션 전시회처럼 수준을 달리할 때마다 같이 감격하고 같이 목이 멘다. “브루클린 창고에 휴지처럼 버려질 그림들이었다”라고 이일 작가는 회상한다. 이번 여름 API 그룹전에는 이일 작가와 아내 이수임의 그림이 나란히 걸렸다. 20년을 옆에서 ‘천천히 서두르기’로 화가 이수임을 지켜본 이정옥 대표다.

일반적으로 부부가 예술가일 때 로뎅과 카미유까지 가지 않아도 결국 여성 쪽이 가련해지곤 한다. 그런데 이일・이수임 부부에게서는 그런 현상이 없다. 우선 아내 이수임이 전혀 순정 가련형이 아니다. “그때 내가 영주권이 필요하니 빨리 결혼하자니까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영주권 얻으려면 한 4만 달러는 든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는 듯 말하자,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그건 그게 아니고…” 하며 얼버무리는 남편. 부엌 창문으로 건물 사이에 살짝 드러난 허드슨 강이 보이는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부부가 툭툭 치면서 실실거린다. 빨갛게 익어 살짝 벌어진 석류처럼 함께한 시간들이 꽉 찬 부부다.

1, 2 밖은 북적대는 젊은이의 거리지만 스튜디오 뒤편에 작은 정원이 있어 조용히 쉴 수 있다. 
다시 돌아온 맨해튼
이태원 비즈니스맨의 막내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각별히 받고 자란 이수임에게는 타고난 계산 실력이 있다. 먼저 남편이 잘되는 것이 자신에게도 이익임을 안다. 남편을 볼펜 화가라 부르며 세상이 떠들 때 그녀는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 밥해 먹이는 영락없는 아낙네였다. 무엇보다 집을 먼저 장만하자고 헐값에 산 브루클린 빌딩은 지금 멀티밀리언이다. 하지만 복부인은 아니다. 동네 사람들이 버리고 간 물건 주워서 사용하면서 호시탐탐 자그마한 스케치북에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려왔다.

먹고살 만하자 남편은 건물 한 층에 아내의 작업실을 만들어주었고, 두 아이가 커서 자기들 인생을 시작하자 더 많은 시간을 그림 그리는 데 쓴다. 또 하나, 일기처럼 글도 쓴다. 그림으로 못다 하면 글로, 글이 모자라면 그림으로…. 이 나이에 소녀처럼 부푼 가슴을 펼친다. 이제 좀 더 편안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그녀는 다시 복부인이 되어 맨해튼에 새집을 장만했다. “서울 사대문 밖으로 한번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는 싼 곳을 찾아 브루클린으로 나갔다가 30년 만에 맨해튼으로 재입성한 것이 기쁘다. 그러나 할머니랑 농사를 지은 이일 작가는 좀 다르다.

각자 작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부부는 날이 갈수록 친해진다. 부부보다 애인 같은 사이다.
“에이, 이거 뭐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네. 유람선도 아니고.” 고층에서 내려다 보며 하는 말이다. 이 아파트는 그야말로 잠을 자기 위한 집 같다. 집 안에 꾸밈이 거의 없다. 침실엔 침대가, 부엌엔 식탁이, 다른 방에는 아내가 그림 그리는 테이블 하나가 있을 뿐이다. 부엌 창에 5달러에 산 헝겊으로 커튼을 만들어 단 것 외에 새집이라고 장만한 것은 없다. 전 주인이 놓고 간 그릇 세트가 있어서 그 그릇을 쓰고 있단다.

이일 작가는 손바닥만 한 클로짓 하나를 그림 그리는 방으로 개조하려고 한다. 홈 디포Home Depot에서 사 온 각목과 나무 판자들이 뭐든 뚝딱 만들어내는 이일 작가의 손길을 기다린다. 아내 이수임은 매일 브루클린으로 그림 그리러 가는 남편에게 도시락을 싸주고는 적막하게 앉아서 그림을 그린다. 이들 부부의 삶에는 돈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이상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그래서 당연히 존경받고 있었다.

아침마다 허드슨 강변을 한 시간씩 산보할 때 강가에 난 산딸기를 따서 커다란 알맹이만 아내에게 건네준다는 남편. 뭐든지 오케이하는 엄마 밑에서 자란 아들 녀석들은 잘생겼고 똑똑하고 돈도 잘 벌고 연애도 잘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곳을 향한 작가의 끝없는 여정 속에서도 부부는 가끔씩 와인 한 잔 놓고 얼굴을 마주하며 앉는다. 친구보다 더 친한 부부지간이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한가? 한마디로 ‘심플리simply, 해피 패밀리, 해피 라이프-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데 두 손 들고 동의한다.

글 노려(뉴욕 거주 저널리스트) | 사진 이마리 담당 |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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