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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귀촌 일기 2 구례 이전에 태즈메이니아가 있었다
시골에 산다고 하면 반응은 대략 다음 중 하나입니다. “좋겠다” “용기가 대단하다” “너무 빠른 거 아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확실히 좋긴 합니다. 용기?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저로서는 가장 쉽고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어쩌면 나만이 아닌 우리 시대, 우리 세대의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극히 사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잡지사에 취직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누구라도 그랬듯이 야근을 밥 먹듯 하고, 매달 휴일이라곤 고작 두어 번뿐인 가열찬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이었습니다. 그나마도 ‘일이 너무 재미있다’는 게 다행이었을까요, 불행이었을까요. 하여간 좋은 시대를 만나서 성장하는 산업과 함께 ‘패션 전문 기자’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유학을 다녀오는 등 커리어를 위한 자기 계발에도 소홀하지 않아 이른바 ‘출세’도 빨랐습니다. 일찍이 명망 있는 패션지 편집장이 되었고, 철마다 패션쇼 현장을 누비며, 국내외 행사며 화려한 파티에 초대받고, 온갖 선물과 대접을 받고, 무엇보다 멋진 사람들을 만나고, 재능 있는 사진가ㆍ기자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건 멋진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 편집장 일은 소신과 창의성, 리더십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부러워할 만한 직업이요 자리였습니다.


자연의 빛깔과 내음, 소리, 온도, 결 등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동안 얼마나 자연과 생명에서 멀어진 삶을 살았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요? 그 일이 더 이상 신나지 않았습니다. 타이틀이 올라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책’을 만드는 것뿐, 더 좋은 조직, 더 좋은 회사를 만들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또한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그 나름으로 ‘문화 사업’이던 잡지ㆍ출판계마저도 지극히 상업적이고 노골적인 거래가 오가는 공간이 되었습니다.(슬프게도 지금은 교육, 의료 부문에서마저 당연시하는 이야기가 되었지만요) 어쨌든 당시 마흔이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흔히 말하는 철이 들기는 커녕 ‘만족스럽지도 않은 삶인데 그나마도 너무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이 못마땅했습니다. ‘겨우 이거야?’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감을 하던 어느 날 새벽 퇴근길에 ‘지금, 여기서 떠날 것’을 결정했습니다. 최고의 위치에서 대안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저에게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은퇴일 수도 있는 그 결정이 저에겐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여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때도 ‘용기’라기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는 생각이 미련 없이 쥔 것들을 내려놓게 한 것 같습니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한 시간. 땀 흘리고 나누는 시간 속에서 다시 출발한 에너지와 지혜, 영감을 얻었다.

인생을 바꿔버린 여행 어쨌든 그해 겨울, 이러저러한 상실감에 빠진 저로서는 밝고 따뜻한 곳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사진 하는 후배가 호주 남쪽에 있는 섬 태즈메이니아를 추천했고, 마침 TV에서 CVA(Conservation Volunteers Australia)라는 호주의 자연보호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호주 정부가 비용의 반을, 참가자가 반을 부담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 바로 이거다 싶었죠! 몸을 한껏 쓰지 않고서는 복잡하고 뜨거운 머리의 시동을 끌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지구 반대편 남반구의 따스한 햇살과 온화한 바람, 서정적 풍경은 무척이나 생경했습니다. 전쟁터에서 곧장 전원으로 간 기분이랄까요.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느리고(변화라곤 거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과 시간 속에서 어느덧 저 역시 풍경의 일부가 되어 제 젖은 영혼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저는 말 그대로 ‘제 생애 첫 삽’을 들었습니다.

CVA는 호주 전역에 지부가 있고, 참가자들은 원하는 지역과 숙소를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은 그 숙소에서 함께 지내며, 훈련받은 리더의 인솔 아래 훼손된 자연을 복원하고 지키는 - 무성하게 뻗어나가는 잡목을 자르고, 토종 식물의 씨앗을 받고, 심고, 물주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무너진 산책로를 정비하는 등 -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커다란 통나무를 잘라도 전기톱은 주지 않았고, 목마른 묘목들에 물을 줄 때에도 연못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습니다. 저와 일본인 친구는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왜 양수기를 쓰지 않느냐, 일이 더디고 몸이 지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돌아온 답은 ‘no’였습니다. 빠를 수 있지만 초보에겐 위험한 일이며, 일을 빨리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일은 빨리, 많이 해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양동이를 들고 비탈길을 내려가 연못에서 물을 길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묘목부터 하나씩, 그것도 듬뿍듬뿍 주는 일을 오전 내내 했습니다. 힘이 빠져서 양동이에 담아오는 물은 조금씩 양이 줄었고, 중간에 비척거리며 흘리는 양도 많아졌습니다. 빨리 마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듬뿍 주던 물은 조금씩 아껴 주는 방식으로 바뀌어갈 무렵, 넓은 평원 저 멀리서 구름이 빠른 속도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비라니! 이 어이없는 상황에, 넋을 놓고 물을 나르던 양동이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구름은 거침없이 몰려와 그대로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나무들을 적시고 양동이를 들고 하늘을 보는 저도 적시면서 나아갔습니다.


자연의 빛깔과 내음, 소리, 온도, 결 등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동안 얼마나 자연과 생명에서 멀어진 삶을 살았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아! 한마디로 건방진 거였지요. 겨우 양동이에 물 좀 나르면서, 겨우 한두 달 일하면서 감히 ‘자연을 보호한다’고 생각한 것이. 일생을 바친다 한들 지구별 어느 한 귀퉁이에 이렇다 할 만한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을까요.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고 있음을,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연을 조금 덜 훼손하고, 덜 착취하는 것뿐임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땀 흘리는 노동 끝에 누리는 숲 속의 휴식은 어찌나 달콤하던지요. 싸 들고 간 오만가지 상념과 비틀린 감정들은 정말 거짓말같이 맑은 공기와 햇살과 바람에 다 녹아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일상의 불합리, 인생의 부조리함 같은 것들도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아주 사소한, 아주 시시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배낭 속에 책을 넣으며 <소로우의 일기>와 <무소유>를 챙겨 간 것은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미 읽은 책이지만 다른 환경 속에서 읽으니 구구절절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저와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로 다가왔습니다. 태즈메이니아에서 ‘자연 속에서 치유’라는 축복을 경험한 이후 ‘자연’은 제 하느님이 되었고, 시골에서 사는 것이 제 목표가 되었습니다. 숲이 있고, 밥상에 오를 채소들이 자라는 텃밭이 있고, 각종 새소리와 날씨와 철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풍경 속에서 몸을 움직이며 살리라.


밭에서, 정원에서 몸을 움직여 일하는 이웃들. 그들은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흥분된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시골로, 산으로 찾아든다.

프랜차이즈 사업이 제2막일 수는 없어! 이후 10년 가까이 도시에서 더 머물렀지만, 몸은 고될지언정 마음이 이전처럼 진정으로 괴로운일을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매일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생활을 지속하다가 막상 회사를 떠날 시점에 이르니 고민은 또다시 원점에 와있었습니다. ‘앞으로 뭘 하고 살지?’ 큰 기업, 내로라하는 전문 기업에서 잘나가던 선배와 친구들은 자신을‘탱크 엔진’에 비유했습니다. 작아도 혼자서 충분히 달리는 ‘티코(자영업자)’를 뒤늦게 부러워하면서 말이지요. 이미 임원 자리에까지 오른 그들이 갈 수 있는 곳,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창업보다는 흔말하는 프랜차이즈 운영! 퇴직금을 다 걸고,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아 시작하는 아슬아슬한 제2막. 열심히 성공적으로 1막을 마감한 이들이 펼치는 제2의 인생이라고 하기엔 어처구니없게 씁쓸하고 쓸쓸한 풍경이었습니다. 먹고사는 일을 떠나서라도, 도시에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한없이 재미없게 느껴졌습니다.

‘지금껏 24년 배웠고 24년 일했다면, 앞으로 24년은 무얼 할 것인가. 오래도록 싫증 내지 않으면서,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는 일은 없을까?’ ‘그래, 네 멋대로 살라고 하면 뭘 하고 싶은데?’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패션지 기자와 마케터로서 역할과 가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솔직히 한 개인으로서 느끼던 공허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 시즌 새로운 것에 열광하고, 채 1년이 지나기 전에 이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진부하다고 치부하고 폐기 처분하는 산업적 속성이 주는 부담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반대를 향해 달린 것 같습니다. 근원적인 것, 변치 않는 것, 부분이 아니라 전체, 수단이 아닌 목적, 소비가 아닌 생산. 그 답은 ‘자연’과 ‘자급자족의 생태적 삶’에서 찾았습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 흔히 하는 말에 “7년 중 2년은 풍년, 2년은 흉년, 3년은 풍작”이라고 하더니, 올해 구례는 대채로 풍년이다.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 그러나 삶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인 처방은 책과 여행인 것 같습니다. 주말이면 드라이브 삼아 교외로 나가던 걸음이 이때부터 시골에 터 잡고 사는 지인들에게로, 그리고 이미 귀농ㆍ귀촌한 사람들이 쓴 책에게로 향했습니다. 이때 제목만으로도 제 마음을 사로잡은 책이 바로 이병철 씨의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吾不如老農>입니다. 나중에 보니 그는 귀농이란 화두를 일찍이 우리 사회에 던진 분이더군요. 그리고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것으로, 농사를 물어온 제자에게 공자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농農’ 또는 ‘농사農事’의 여러 의미 가운데 저에게 먼저 와 닿는 생각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생명을 돌보고 가꾸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늙은 농부 老農’란 결국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는 사람, 곧 씨를 뿌릴 때와 거둘 때를 알며 하늘과 땅을 섬기고 삼가며 생명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풀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농사란 하늘의 도움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아 아는 까닭에 하늘과 땅을 공경하고 천지 만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분수를 알아 지나친 욕심을 삼가고 아끼며 자신의 행동을 근신하며 순리에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지요. _<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 중에서


한 해의 끝을 알리는 것은 떨어지는 단풍만이 아니다. 오일장에 쏟아져 나오는 단감과 대봉, 어느 집 마당에 들러도 마주치는 호박, 가지, 토란대 말리는 풍경.

이렇게 10년여에 걸친 인생 여정을 통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책이 아닌 온몸으로 저 늙은 농부들의 위대함을 느낍니다. 아직은 ‘농부 시늉’에 지나지 않는, 텃밭보다는 오일장터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엉터리 농부지만, 그래도 어머니 땅을 훼손하지 않는 생태 농업의 길을 가려는 겁 없는 농부이기도 합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저 늙은 농부의 발가락에 낀 때만큼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흉내라도 내며 인생과 자연을 배워보고자 합니다. 배추와 무는 알이 굵어지고, 봄을 위해 준비한 꽃씨와 딸기, 패랭이, 애기달맞이 모종도 작은 정원에 대충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 ‘김장’만 마치면 한 해가 다 지나가겠네요. 이른 봄 감자로 시작해 상추, 치커리, 당귀, 시금치, 아욱, 고수, 바질, 루콜라, 파슬리, 양배추, 양파, 고구마, 고추, 가지, 딸기, 토마토, 오이, 호박, 수세미, 쪽파, 총각무, 배추, 무, 갓으로 이어진 1년의 농사를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땅에 하늘에 씨에 똥에(?)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추워지는 계절, 사력을 다해 마지막 열매를 내는 작물들. 못났지만 귀하고 감사하다.

 

글을 쓴 정현선 는 패션지 <바자> 편집장, 제일모직 고문, 한섬 마케팅 이사, 중앙 M&B의 편집고문 등을 지낸, 한국 패션계의 영향력 있는 명사이다. 감각의 극점, 도시 문화의 궁극을 떠올리게 하는 이력을 가진 그가 3년 전 구례에 주말 주택을 얻어 멀티 해비테이션multi-habitation을 즐기려는가 싶더니 3개월 만에 완전히 귀촌했다. 3백 평밭을 얻어 수십 가지 작물을 기르는, 그 스스로 무모함의 극치(?)라고 말하는 이 일의 원인은 ‘오불여노농吾不如老農’의 깨달음 때문.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라는 말의 뜻처럼 농촌 생활로 얻은 깨달음을 소박한 글과 사진에 담아 매달 <행복> 독자에게 전해준다.

글과 사진 정현선 | 담당 김민정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