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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더께를 느끼는 곳 공주 원도심 골목을 걷다
“오래 묵은 시간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 집, 백 년쯤 뒤에 다시 찾아와도 반갑게 맞아줄 것 같은 집, 세상 사람들 너무 알까 겁난다.” 충남 공주가 좋아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문 나태주 시인이 찻집 루치아의 뜰을 아끼는 마음을 담아 지은 시 ‘루치아의 뜰’이다. 나 역시 루치아의 뜰과 제민천을 따라 이어지는 나지막한 동네 길을 걸으니 시인처럼 시심詩心이 피어올랐다.


루치아의 뜰이 좋아 골목을 가꾸고, 골목을 가꾸다 보니 공주 원도심 살리기 프로젝트까지 앞장서게 되었다는 석미경ㆍ박인규 부부. 세종시가 옆에 들어서면서 공주의 인구가 많이 줄었지만 공주는 근대 문화유산이 넘쳐나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장이니 이러한 곳을 더 아끼고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문화 골목 만들기 프로젝트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제는 ‘루치아 골목’으로 통하는 이곳을 살리고자 부부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모여 2013년 가을 골목길재생협의회를 만들었다. 중부대학교 허강 교수가 기꺼이 재능 기부를 해 ‘잠자리가 놀던 골목’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이 떠난 골목에 벽화도 그리고, 게릴라 정원 콘셉트의 파이프 정원도 꾸몄다. 루치아의 뜰이 도시 재생, 골목 살리기 운동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루치아 골목 옆으로 난 제민천도 공주시가 중앙정부에서 예산을 지원받아 공사를 해 작년 12월에 깨끗하게 재정비를 마쳤다. 그 덕분에 최근 제민천을 중심으로 풀꽃문학관, 목공예 공방, 게스트 하우스 등 하나 둘 재미있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 석미경씨를 따라 루치아 골목과 동네를 천천히 산책했다.

1 낡은 파란 철문만큼 꽤 나이를 먹은 루치아의 뜰. 2년 전 가온건축 임형남・노은주 소장이 그대로의 모습을 잘 살려 고친 덕에 지금은 공주의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2 공주 원도심과 골목 살리기 프로젝트에 앞장선 석미경 루치아 씨와 박인규 요한 씨 부부.

차와 행복이 노니는 이곳, 루치아의 뜰
2년 전 오픈한 차 문화 공간 ‘루치아의 뜰’은 <행복>과 인연이 깊다. 공주 구도심에 자리한 쓰러져가는 한옥을 구입한 석미경 루치아 씨가 <행복>의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주는, 작은 집이 좋다’ 특집 기사를 통해 가온건축 임형남ㆍ노은주 소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동네도 인생도 바뀌었다는 석미경ㆍ박인규 부부는 임형남ㆍ노은주 소장을 만난 것이 복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처음부터 카페를 차리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아내가 15년 이상 차와 차 문화를 공부했는데, 차 문화를 즐기는 사람은 자기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로망이더라고요.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 좋아하는 차를 즐기는 공간. 아내에게 그런 놀이터를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놀이터가 지금은 뜻하지 않게 일터가 되고, 그러다 보니 자신 역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며 남편 박인규씨는 루치아의 뜰이 아주 의미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옥 전면부에 창을 내어 안쪽 주방에서 일하면서도 루치아 골목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부부가 처음 이 한옥을 구입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집이 엉망인 것은 고사하더라도, 지리적으로도 썩 훌륭하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한옥이 있는 동네는 백제시대부터 이어져온 공주의 원도심으로, 충청 감영과 도청 등이 있던 자리라 공무원을 위한 여관만이 뺑 둘러서 있었다. “이 골목이 호서극장 뒷골목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옛날에는 근처에 있는 공주교대 1학년 학생들이 돈 뺏기는 장소였다고 해요. 골목이고 제민천이고 쓰레기가 말도 못 하게 많았지요. 제 지인은 공주에 40년을 살았는데도 이전에는 이 길로 다닌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해요. 사실 이 골목이 대로변으로 통하는 지름길인데, 그만큼 어둡고 위험했던 거죠.” 그런데도 석미경 씨는 단번에 이 집을 골랐다.

뜰이 있는 집을 원한 그는 골목도 험하고 담도 무너진 이 집을 보면서도 막연히 ‘고쳐 살아야지’라고만 생각했다. 건축가 세 명에게 퇴짜를 맞고 임형남ㆍ노은주 소장을 만나고서야 고쳐 살기가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한옥 바로 옆에 붙은 담벼락 덕에 아담한 미니 정원이 생겼다. 
루치아의 뜰, 그리고 두 번째 도약
도착하자마자 루치아의 뜰에서 가장 인기가 좋다는 마르코폴로 홍차를 내주는 석미경 씨에게 “많이들 오시지요?” 하고 물으니 “좋은 분들이 오신다”는 애정 어린 대답이 돌아왔다. “33㎡(약 10평) 남짓한 이 집에 좋은 기운이 있나 봐요. 누구든 오시면 다들 좋아하시거든요. 지금 차를 마시는 이 거실이 처음에는 방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천장도 낮은 데다 서까래도 굵지 않고 마감도 서툴고…. 하지만 그게 또 멋이잖아요. 50년 전 가족을 위해 아버지가 3년 넘게 공들이며 마음으로 지은 집이었대요. 그러다 보니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그 마음을 느끼는지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해요.”

이곳에서 사용하는 테이블과 의자, 다구 모두 석미경 씨가 집에서 직접 사용하던 것들. 한옥처럼 주인의 애정 어린 손때가 묻어 한결 따뜻한 느낌이다. 
집이 좁아질 것을 염려해 단열은 포기했는데도 흙집인 터라 여름에는 통풍이 잘되고 겨울에는 제법 따뜻하다고 했다. “특히 여자분이 오시면 꼭 부엌에 한번씩은 들어가보세요. 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둡고 습했는데, 통창을 냈더니 부엌에 서서 저 앞 골목길이 훤히 내다보여요. 제가 머무는 공간을 제일 좋은 곳으로 골랐거든요.” 석미경 씨가 일하는 부엌과 거실 사이에 있던 벽장을 헐어냈더니 한층 시원한 느낌이 든단다. 부엌 위에 자리한 방은 이전 주인이 창고로 쓰던 곳인데, 계단을 내 다락으로 연출했더니 머리를 부딪쳐가면서도 사람들이 서로 앉으려는 공간이 되었다. “저와 남편이 얼마나 애정을 갖고 가꿨는지 말도 못 해요. 집에서 사계절이 다 보이는데, 겨울이면 겨울이라 좋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아요. 심지어 밤이 되면 조명등 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까지 일품이지요.” 이 집의 본래 모습 그대로가 좋았던 석미경 씨는 일부러 금이 많이 가고 낡은 담벼락도 허물지 않고 살려두었다.

1 바닥에서 떼어낸 마루로 책꽂이를 만들었다. 본래 한옥에 있던 것이라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쓰지 않은 주인의 마음씨가 돋보인다. 
2 <행복>에서 작은 집 에 대해 다룬 기사를 통해 가온건축 임형남・노은주 소장을 만나게 되었다. 

1 예전에 살던 집주인 할머니가 솔 담뱃갑으로 짠 발 매트는 한옥의 옛 모습을 추억하기 위해 일부러 살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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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으로 막혀 있던 벽을 헐고 2층 공간과 계단을 만들었다. 부엌과 닿는 벽도 오픈해 주방에서도 언제든 손님과 눈을 마주칠 수 있도록 했다. 

담벼락을 따라 루치아의 뜰 뒤쪽으로 가면 남편 박인규 씨의 두 번째 인생이 펼쳐진다. 대학 강단에 서다 퇴직한 그는 유명 쇼콜라티에를 찾아다니며 초콜릿의 달콤함에 빠졌다. “담벼락 옆으로 작은 정원이 있지요? 저와 아내는 그 길을 비밀의 정원이라고 불러요. 비밀의 정원을 지나 뒤뜰에 있던 기역 자 형태의 작은 집을 구입해 초콜릿 공방 ‘초코 루치아’를 꾸몄습니다. 부러 전통 한옥인 루치아의 뜰과는 다르게 모던한 느낌을 냈지요. 이쪽은 좌식으로 반대쪽은 입식으로 믹스 매치했어요.” 얼마 전 오픈한 초코 루치아에서 남편 박인규씨는 자신이 직접 만든 초콜릿과 오랑제트, 초콜릿 음료 등을 선보였다. 소규모 클래스를 열 수 있는 공방도 한쪽 코너에 마련했다.

한옥을 모던한 스타일로 개조한 초콜릿 공방 초코 루치아는 남편 박인규 씨가 제2의 도약을 꿈꾸는 공간이다. 
여관 미소장과 대명장을 리모델링해 만든 ‘정중동’ 게스트 하우스. 맞닿아 있는 담이 옛 호서극장 뒷담이다. 기념비처럼 그려낸 <공산성의 혈투> 포스터가 오래된 뒷골목에 운치를 더한다. 
공주 구도심 재생의 밑거름이 되다
공주 구도심 살리기 프로젝트가 진행된 것은 명실상부 ‘루치아의 뜰’의 공이 크다. 작년 5월에는 예전에 직물 공장의 여직공 관사로 사용하던 빈집을 빌려 동네 골목길을 촬영한 사진전을 열었는데, 어찌나 반응이 좋았던지 3일 동안 전국에서 1천2백 명이나 다녀갔다. 우아한 갤러리가 아닌, 오랫동안 비어 있어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공간이었지만, 도시 재생과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사진 동호회 회원도 여럿이 방문했다. 사진전을 열었다는 여직공 관사를 지나자 큰 건물 두 채가 보였다.

옛 시청이자 공주 읍사무소이던 건물의 안쪽을 리모델링해 지금은 공주를 홍보하는 영상 기록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붉은 벽돌 건물과 함께 어우러지는 정원 또한 볼거리다. 
골목 살리기 프로젝트 때 손으로 그린 일명 ‘루치아 골목 지도’.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이 올해 3월에 오픈한 게스트 하우스 ‘정중동’이다. 미소장과 대명장이라는 여관 두 채를 구입해 리모델링한 것. 본디 이 동네가 충청남도 도청과 감영이 있던 자리인지라 공무원을 위한 여관이 아주 많았는데, 이제는 쓸모를 다하여 대부분이 비어 있는 상태다. 김영석 디자이너는 모던한 디자인의 게스트 하우스 외에도 길 건너에 있는 면적 5백20평의 양조장을 백제 복식 연구소와 작업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사실 정중동 게스트 하우스가 자리한 골목은 호서극장의 뒷문과 이어지는 곳이다. “작년 사진전을 할 때에 의미 있는 상징물을 남기고 싶어 이제는 빈 공간인 호서극장 뒷담에 그림을 그렸어요. 공주를 소재로 한 <공산성의 혈투>라는 영화가 있는데, 일부러 극장 간판 그림만 30년 넘게 그려온 분에게 부탁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석미경 씨는 최근 공주 공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관광하기 위해 방문한다고 했다.

제민천을 따라 이어지는 공주 구도심 골목길 풍경. 
작년 겨울 깨끗하게 새 단장을 해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중심이자 든든한 지원군이 된 공주 제민천. 
루치아 골목을 빠져나와 제민천을 건너면 우리나라 명장 1호 유석근 장인의 공방을 만날 수 있다. ‘지산공방’을 운영하는 그는 40년 가까이 나무를 깎아 온 목공예 장인으로, 느티나무 소반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봄에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그에게 이유를 물으니 “지산공방이 자리한 이 일대부터 공산성 오거리까지 문화 예술인의 거리로 만들려고 합니다. 공주에 사는 많은 작가와 예술인에게 이야기해두었는데,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려고 왔습니다” 라며 공주에 대한 애정과 포부를 드러냈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통나무 전신주가 골목 어귀에 자리하고 있다. 
한편 지산공방에서 10분 정도 더 걷다 보면 대전지방검찰청 공주 지부를 지나 얕은 언덕 위에 아름다운 적산 가옥이 눈에 띈다. 작년 10월에 개관한 이곳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라는 시 ‘풀꽃’으로 유명한 시인 나태주의 ‘공주풀꽃문학관’이다. 이곳은 1930년대에 일본 순사가 살던 집으로, 적산 가옥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복도와 뒤뜰이 특히나 아름답다. 나태주 시인은 ‘루치아의 뜰’이라는 제목의 시도 지을 정도로 루치아의 뜰과 공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석미경 씨가 공주풀꽃문학관을 소개하기에 앞서 “루치아의 뜰과 MOU를 맺었다”고 농담을 던졌을 정도다. 공주풀 꽃문학관에서 루치아의 뜰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눈에 띄는 붉은 벽돌 건물은 ‘공주역사영상관’이다.

1 목공예 명장 유석근 장인이 운영하는 지산공방.
2 활발했던 옛 풍경을 짐작하게 하는 
공주 구도심 거리 풍경. 

원래 옛 시청이자 공주 읍사무소였던 이 건물의 안쪽을 리모델링해 현재는 공주를 홍보하는 영상 기록관으로 사용한다. “공주는 문화 유적이 참 많은 동네예요.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제일감리교회도 있고, 중동성당, 대통사지 등등 볼거리와 알 거리가 많지요. 그래서 문화 유적 여행지로 많이 알려졌는데, 최근에는 구도심에 관심을 갖고 투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어요.” 석미경 씨는 지금처럼 골목과 동네, 도시가 모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내일은 근처에 있는 대학교 학생들이 루치아의 뜰과 이 동네 지도를 일본어로 제작해준다고 해 또다시 골목길 투어에 나설 예정이다. 루치아의 뜰 덕분에 한결 바빠졌지만, 그의 마음은 한층 따뜻하다.

1930년대에 일본 순사가 살던 적산 가옥을 고쳐 지은 나태주 시인의 공주풀꽃문학관. 그의 시를 담은 액자를 복도 곳곳에 전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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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지연 기자 | 사진 민희기 | 일러스트 심혜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