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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동 265㎡ 아파트 간결하게 다시 시작하는 삶
집주인은 지난해 환갑을 맞았다. 일생의 절반이 넘은 세월을 흘려보내니 새삼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는 신변용품과 수많은 책.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물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게 아닐까. 60년이란 세월을 떠나보내며 추억을 정리한 그는 이제 인생의 두 번째 막을 열었다. 새 옷을 입은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현관을 지나 들어가면 양쪽으로 보이는 거실과 주방. 천장을 높여서 답답함을 없애고 손잡이가 없는 긴 수납장을 설치해 깔끔하게 정돈했다. 
열 개의 천간天干과 열두 개의 지지地支를 일컬는 간지干支. 예순한 살을 맞이하는 환갑은 태어난 간지가 다시 돌아온 해의 생 일이다. 육십 간지를 한 바퀴 돌아 환갑이 되면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한 번쯤 자신이 지나온 길을 곱씹어본다. 그간의 세월은 세간을 간소하게 정리하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이 집에서 일생의 6분의 1을 보낸 집주인도 지난해 환갑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오랜 세월 가구와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일을 하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너무 많은 물건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 둘씩 정리하고 집을 재 정돈하기로 했다. 이 집에 산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대대적 공사를 감행한 것이다.

집주인이 취미 생활을 즐기는 공간. 두 아들이 쓰던 방을 합쳐 하나의 큰 방으로 만들었다.
편안한 노후를 위한 개조
집주인은 이왕 큰 공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이 집에 살면서 느낀 불편한 사항을 말끔히 해결하기로 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완공한 지 10년 넘은 아파트의 노후한 환기 시스템. 집 전체에 공기가 순환하지 않아서 한번 요리를 하면 음식 냄새가 잘 빠져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30층이 훌쩍 넘는 초고층 아파트의 특성상 겨우 반쯤 열리는 폐쇄형 창문으로만 바깥바람을 들일 수 있어 통풍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환기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 총 석 달의 공사 기간 동안 2주를 벽과 천장을 철거하는 데 쏟았다.

거실 천장을 뜯고 2400m까지 천고를 높여 시각적으로 답답함을 해소했으며, 모든 방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공기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집 안 곳곳을 순환하도록 했다. 공사를 책임지고 진행한 까사미아 씨랩의 정희현 디자이너는 이번 작업이 리모델링보다는 신축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여러 제반 시설과 환기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공조(실내 공기를 외부 공기와 교환해주는 장치) 배관 작업이 가장 어려웠다고. 환기나 누수 외에도 낮은 수압이나 방음 등 오래된 집에서 나타나는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기초 공사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1 집주인은 요즘 손자가 놀다가 두고 간 레고 블록으로 조명등을 만든다. 
2 2m짜리 둥근 좌식 테이블에 다리를 길게 달아 재활용했다. 최대 열 명이 앉을 수 있어 손님이 왔을 때 유용하다. 테이블 옆에 건 액자는 황선태 작가의 작품. 
3 부부가 아침저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다이닝 공간. 기존에 사용하던 책상을 다이닝 테이블로 리폼했다.

또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 집이 지나치게 채광이 좋다는 점이다. 거실 창문이 거의 동쪽을 향해 있고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집 안에 햇빛이 과도하게 들어왔다. 물론 창이 커서 좋은 점도 있지만, 커튼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햇빛 때문에 불편한 점도 많았다. 눈부심도 문제거니와 실내 온도가 쉽게 달아올랐다. 정희현 디자이너는 해결책으로 루버셔터를 떠올렸다. 커튼은 거추장스럽고 롤스크린은 힘들여 올리고 내려야 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루버셔터는 집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양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고, 일반 창처럼 여닫는 기능까지 갖추어 부부도 만족해한다. 이렇게 부부가 노후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도록 기능적 부분에 세세하게 신경을 썼다.

떠난 자리를 채우는 평범한 일상
집주인에게는 서른을 훌쩍 넘긴 두 아들이 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큰아들은 어느새 귀여운 손자를 안겨주었고, 작은아들은 얼마 전 독립을 선언했다. 이렇게 자식이 가정을 꾸리거나 완전히 분가를 하면 부모는 집 안에 자신만의 쉼터를 만든다. 자식이 떠나간 빈 공간을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 이야기로 채워가는 것. 이 집주인도 마찬가지였다. 방 네 개에 거실과 주방을 갖춘 전형적 4인 가족을 위한 주거 환경에서 이제 둘만을 위한 집으로 새롭게 정비해야 했다. 가장 먼저 두 아들이 떠나간 자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고민이었다.

1 집주인의 가족 사랑을 집 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부부의 옛날 사진부터 두 아들과 손자의 사진들이 가득 놓여 있다. 
2 본래 서재로 쓰던 공간을 침실로 바꿔 사용한다. 거실, 서재, 침실 등 큰 창이 있는 모든 공간에 루버셔터를 설치했다. 
3 1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현관의 대리석 바닥. 벽과 천장을 뜯어 집 전체를 고쳤지만, 이곳만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다행히 이 아파트가 내벽을 철거할 수 있는 철골 기둥 구조였기 때문에 내부 구조를 변경하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부부는 아들들이 쓰던 두 방의 벽을 허물고 넓은 방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옷과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바로 옆에 드레스룸도 만들었다. 방이 넓어진 만큼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졌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때로는 글을 쓰고 소소한 취미 생활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요즘 집주인은 손자가 가지고 놀다 두고 간 레고 블록으로 조명등을 장식하는 일에 열심이다.

책상 한구석에 앉아 조몰락조몰락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 이렇게 노후 생활을 즐기고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놀이터 같은 공간이 생겼다는 점에서 집주인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레노베이션이었다. 수십 년 동안 가구와 생활용품을 다루는 일을 해온 집주인이지만 집을 공사하면서 가구를 완전히 새로 바꾸지는 않았다. 환갑이라는 시기에 찾아온 마음의 변화 때문일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대부분 쓰던 가구를 적절히 배치하거나 마감재 또는 색을 바꾸는 식으로 리폼해서 재활용했다.

4 두 아들 방을 터서 만든 큰 방에 있는 욕실. 오른쪽에 보이는 선반은 기존에 쓰던 3m 길이의 선반을 고쳐서 활용한 것. 집주인은 가구를 새로 사는 것보다 쓰던 가구를 재활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5 다이닝 공간에 있는 수납장에는 자주 쓰는 그릇만 남겨놓았다. 
6 침실에 붙어 있는 큰 욕실. 욕조와 샤워 부스 자리를 옮겨 공사하기 전보다 한층 넓어졌다. 

원래 책상처럼 사용하던 사각 테이블을 상판만 흰색으로 도장해 지금은 주방에서 식탁으로 사용한다. 이곳에서 부부는 아침 저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텔레비전을 보며 대화하거나 식사를 하는 등 평범한 일상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뤄진다. 거실에 있는 지름 2m짜리 원형 오크 테이블은 본래 낮은 좌식 테이블이었는데, 브러시로 상판의 나뭇결을 살린 후 회색 도장을 하고 다리를 길게 달았다. 넓은 거실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테이블은 지인이나 손님을 맞을 때 아주 유용하다.

두 아들이 집을 떠나고 부부만 남은 공간에는 이제 온전히 그들만의 추억이 채워졌다. 오래된 가구를 꺼내 새롭게 바꾸고 취미처럼 수집해온 작품을 진열할 공간도 마련했다. 그러면서도 기억에서 사라진 물건들, 의미 없이 쌓인 살림살이, 여행 기념품과 선물 등등 꼭 지니고 싶은 물건이 아니라면 미련 없이 버렸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집주인은 우선순위를 정해 과감하게 정리했다.

7 거실에는 집주인이 그동안 소장한 예술 작품을 전시해두었다. 소파 옆에 건 작품은 네덜란드 작가 킴 보스케의 사진. 8 부부의 침실. 가구와 패브릭 모두 장식이 없고 중성적 톤으로 맞춰 디자인했다. 
 이 집에서 바뀌지 않은 부분은 오직 현관의 대리석 바닥뿐이다. 부부가 바깥일을 하느라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드나드는 현관은 그들이 밟아온 삶의 자취를 의미할 터. 손때 묻은 물건을 버리면서 몇 번이고 생각하며 붙잡았을 그 심정이 느껴진다. 이제 정리를 끝낸 집주인은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며칠 후 있을 친구의 생일 선물을 포장하며 다시 기분 좋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머지않아 또다시 수많은 물건으로 둘러싸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그는 간결하고 가뿐하게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다.

디자인과 시공 까사미아 씨랩(1566-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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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민정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