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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성곽길 한옥 단순하게 살으리랏다
성곽길을 따라 저마다 사연을 품은 낮은 구옥들이 줄지어 있다. 그중 새로 지은 것 같은 정갈한 한옥 한 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흔에 비로소 독립 생활을 시작한 집주인 김계숙 여사는 이 집에서 인생의 참맛을 알아가고 있다.

서재 창문 밖으로 성곽 앞 골목이 펼쳐진다. 집주인은 책상 앞에 앉아 성곽길을 산책하는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을 즐긴다. 벽에 건 작품은 학고재 갤러리에서 구입한 준초이 작가의 사진. 
낙산공원에서 동대문성곽공원까지 이어진 좁은 내리막길에 작은 한옥 세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중 어느 대학교수의 작업실과 주변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 사이에 자리한 조그마한 한옥은 유난히 관리가 잘되어 있다. 대문 앞 돌담에는 누군가 정성스럽게 가꾼 소담한 화단이 있고, 길게 뻗은 골목은 쓰레기 하나 없이 말끔하다. 이 길을 지나치는 누구든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집 안을 훔 쳐보고 싶을 만큼 예쁜 한옥이다. 이 집에는 대체 누가 살고 있을까.


일흔에 시작한 독립 생활
이곳에 머문 지 이제 1년 정도 되어간다는 집주인 김계숙 여사는 아담한 한옥을 아기자기하게 가꾸며 살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성북동에서 아들 내외, 두 손녀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과 성곽길을 산책하다가 한적한 골목 옆 낡은 한옥을 보고 ‘이렇게 조용한 동네에 살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근처 부동산에 들렀는데, 신기하게도 우연히 본 그 낡은 한옥이 매물로 나와 있었다고 한다. 가벼운 생각에 왔다가 마음이 동한 그는 바로 다음 날 다시 부동산에 가서 서둘러 계약을 했다. 그렇게 그는 이 집과 인연을 맺었다. 그길로 북촌한옥마을 근처에 사는 대목장을 찾아갔다.

1 거실에 있는 붙박이 수납장. 미술에 조예가 깊은 그는 고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정말 다양한 장르의 미술책을 소장하고 있다. 2 낙산공원 아래 성곽서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정갈한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한때 가회동 일대 한옥을 재건축하고 공간 사옥 안의 한옥을 지은 김길성 대목장에게 집을 맡기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완전히 이 집으로 이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작은 집 한 채를 두고 짬짬이 들러 친구를 초대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1년 정도 공사를 지켜보니 어느새 애정이 생겼다. 사실 이 집은 거의 새로 지은 것이나 다름없다. 처음 봤을 때는 비닐로 여기저기 덮여 있었고 거의 쓰러질 것 같은 형색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 집을 보고 구입할 결심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집을 다시 손보는 데 예상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지만, 투자한 만큼 만족스러운 집이 탄생했다. 집이 완성되자 그는 성북동 집에서 가구를 하나 둘씩 가져왔다. 세간을 갖추니 이곳에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 가족에게 성북동 집을 아예 내주고 이 동네 주민이 되었다.

사실 노년 생활을 혼자 보내기에 한옥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냉난방 문제나 불필요한 동선 등 풀어야 할 문제가 많은데, 거실과 툇마루 사이에 단열과 방음 기능이 좋은 창호를 설치해 에너지 손실을 막았고, 집 앞 골목에서 들리는 소음도 줄였다. 또 욕실을 바로 침실 옆에 배치했고 아파트에서 쓰는 입식 주방을 그대로 옮겨와 일반 주택과 크게 다른 점은 없다. 오히려 마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ㄷ’ 자 구조 덕분에 주방과 거실, 툇마루를 몇 걸음이면 이동할 수 있어 동선이 효율적이다. 넉넉하지 않은 수납공간도 거실 한쪽 벽에 붙박이장으로 해결했다. 이쯤 되면 한옥에 살면서 포기한 것보다 얻은 것이 많은 셈이다.

1 원래는 다도를 즐길 목적으로 만든 공간. 실제로는 집에 놀러온 외손자의 놀이터다. 
2 거실에 커브TV와 사운드바를 설치해 영화를 즐긴다. 

한옥에 스며든 예술
그는 무엇보다 집의 위치가 마음에 들었다. 동대문 종합시장이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가까이 있고, 조금만 더 걸으면 광장시장에도 갈 수 있다. 주변에 피트니스센터나 영화관 같은 문화 시설이 있어 더욱 좋다는 그. 성북동도 좋은 동네지만 여가 시간을 활발하게 즐길 수 있는 이곳이 지금 자신의 생활 패턴에 더 맞는다고 한다. 그는 일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을 진정 즐기게 되었다. 김계숙 여사는 미술 잡지에서 인터뷰할 정도로 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컬렉터이다. 처음으로 구입한 그림이 김구림 작가의 ‘나무’ 시리즈 여섯 점이었고 이후 하나 둘씩 구입해 모으다 보니 어느새 컬렉터라는 호칭이 붙었다.

현재 아들 가족이 살고 있는 성북동 집은 거의 갤러리나 다름없다. 그는 소장품 중에서 이 한옥에 어울릴만한 것들을 골라 가져왔다. 서양화도 걸어보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이 집에는 좀 더 차분하고 서정적 작품이 잘 어울렸다. 서재에 건 준초이 작가의 사진 작품은 그렇게 고르고 고른 것이다. 인사동 고도사에서 구입한 평상이나 해주대반 같은 고가 구들도 이 집에 와서야 제자리를 찾았다.

3, 4 주방 왼쪽에 있는 침실. 인사동에서 구입한 고가구가 이 한옥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침실 한편 서랍장 안에 놓은 작은 그림은 김원숙 작가 작품. 
아들은 신사동에 있는 술집 ‘개미집’을 운영하고, 딸은 삼청동 ‘복정식당’의 사장이다. 그는 아들딸이 요식업에 뛰어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인테리어부터 음악까지 멋지게 골라 즐겁게 사는 자식들이 대견하기만 하다. 그건 아마도 예술을 일상에서 몸소 즐긴 부모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터. 그는 수십 년간 작품을 보러 갤러리에 다니고 문화센터에서 강좌도 들으며 바지런히 살았다. 작품을 보는 눈도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닌 시간이 쌓여 얻은 것이다.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그는 지금도 짬짬이 화랑가를 돌아다니곤 한다. 매일 아침마다 신문의 문화면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좋은 전시가 있으면 놓치지 않고 보러 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문화센터에서 배운 다양한 취미가 있어 집 안 구석구석에 물감이나 캔버스 같은 그림 도구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한옥은 음향 시설도 남다르다. 영화와 음악을 좋아해 텔레비전 아래 사운드바를 설치하고 주방 천장에도 스피커를 달았다.

5 아파트에서 쓰는 입식 주방을 그대로 가져와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을 없앴다. 
6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ㄷ’ 자 툇마루를 만들어 동선을 줄였다.

요즘엔 사진 찍는 사람이 대단해 보인다는 그는 매일 예쁜 것만 보고 찍는 사진가가 참 부럽다. 대문 앞 잘 가꾼 꽃과 앞마당에 조성한 작은 정원은 이런 감성에서 시작한 것이다. 적절한 공간에 적절한 작품이 걸려 있고, 주인조차 용도를 알 수 없는 소품들이 원래 그곳에 자리한 듯 자연스레 놓인 집. 방 크기나 집 안 장식 모두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마당 넓은 큰 집에서 방 두 칸짜리 작은 한옥으로 이사를 오면 많이 불편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는 작은 집이 좋다는 걸 깨달았다. 쓸데없는 짐이 생기지 않고 생각도 단순해졌다. 그럴수록 이 집에 대한 애착은 커져만 간다.

그는 집 안 마당은 물론 대문 밖 골목을 매일 아침 청소한다. 잠깐 관리를 소홀히 하면 쉬이 어질러지는 게 한옥인데, 멀리서도 유독 이 집이 눈에 띈 것은 그렇게 정성스레 가꾸고 돌보았기 때문이리라. 오늘도 그는 툇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대문 앞 화단에 물을 줄 것이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지만, 이 집은 이런 평범한 하루가 행복이고 즐거움이라는 걸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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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민정 기자 | 사진 이우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